| 말에 새겨진 의미는 언어를 뛰어넘어 현상을 반영하며, 문화로 형성되어, 역사에 새겨진다. 구조화된 의식으로 결정지어지는 것들은 이미 그 시작부터 운명적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들 속에도 자리잡고 있는데, 가령 여성에게 ‘도시적인 이미지가 풍기시네요’라고 하면 그것은 칭찬이 된다. 세련되고, 문화적 풍요로움을 달고 살며, 인텔리겐챠 또는 전문직 여성일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촌스럽네요’라고 하면 바로 짱돌이 날라 올 것이다. 촌스러움. 그것은 투박함, 인공미가 전혀 없는 비문명성이 흠뻑 젖어 있는 대표적인 단어 아닌가. 촌스러움에서 자연스러움의 의미를 철저히 떼어놓은 것은 도시인이고 문명인인 것을 보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그들에게 분명히 존재한다. 시골과 도시, 야만과 문명의 관계는 언뜻 보아도 친밀함을 넘어서 태생적으로 같은 원류임을 느낄 수 있다. 배다른 형제, 그 둘의 출생의 비밀,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침 드라마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퇴폐적 진실의 가닥이 미궁에 빠질 것인가, 명명백백 밝혀져 낯부끄러움을 알게 해 줄 것인가. 흥미진진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역사의 투명한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교과서로 삼아도 좋을 만큼 체계적이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훌륭하다. 이 책은 ‘시골과 도시’처럼 단항적이고 계급적 경계를 갖는 ‘야만과 문명(Savages and Civilization)’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어서, 한 눈에 문명 비평서임을 알아 볼 수가 있다. 너무나 일반적인 제목, 그렇다고 다른 책들과 비슷한 얘기를 반복할까? 문명비평서의 일반적인 주장들은 획일화 된 국제 사회의 브레이크 없는 전진과 확대를 경계한다. 공존의 가치를 지워버리고, 파괴적이고 무한한 욕망의 증가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 책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촌스러움과 도시적 이미지의 상충은 갈등의 불평등 구조를 형성하고 파괴적인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화, 현대화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고 산업화의 동력으로 바꾸는 데에 일임을 한다. 이촌향도, 과밀화 된 도시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미개한 환경, ‘촌스러운’ 고장을 잠식하고 대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결핍은 안정된 공급을 요구하고, 파괴는 새로운 파괴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Civilization 도시) 속의 야만(Savage 숲)에 대한 현대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부활을 의미한다. 모양만 바꾸면서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문화는 왔다가 사라지지만 도시들은 거의 그 상태대로 지속된다. 정복자가 새로 나타날 때마다 외관을 바꾸고 때로는 이름까지도 바꾸지만…’ 198p. 그러나 이 책이 이와 같은 범주에 있다 하더라도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는 법. 버드아이 앵글로, 마치 창조주가 된 것처럼 인류의 역사를 유유히 훑는다. 마치 우유의 발효과정을 살피듯(치즈가 될 것이냐, 부패 할 것이냐), 시간의 흐름과 문화의 변형, 기술, 인간, 산업의 영향과 결과를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미래’의 거울을 꺼내 놓는다. 그리고 야만이라고 불리던 인간, 문화가 얼마나 문명적이었는가, 그것이 현재의 인류에 끼친 영향력을 직접 곳곳을 다니면서 전해준다. 사하라, 남북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 원주민,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 등 그들의 문화를 직접 느끼면서 역사의 진실을 찾는 과정은 시간의 여행자, 역사의 증언자로 나타나 책의 무게를 더한다. 지적 유희가 좋은 책이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것을 같이 보는 것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쿠르지가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듯이, 나 또한 문명처럼 작용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은 점점 더 사전적 의미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엔 문명이란 야만을 교묘하게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자백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이미 문명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야만은 문명 내부에 자리잡았다. 문명은 야만을 만들고 북돋아 준다. 도시의 중심부는 새로운 변방지대가 되었다.’ 문명은 한 가지 편의를 알려 줄 때마다 백 가지의 악을 감춘다. – 허먼 멜빌 커다란 변화는 커다란 희생을 동반한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는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다는 말이다. 농업은 야만이라는 것을 생산해 내었고, 기술은 자연을 오염시켰으며, 대서양의 항로가 열리면서 노예무역이 번창했고, 아시아로 가는 뱃길은 제국주의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핵에너지는 대량살상 무기가 되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지구의 구속력을 더욱 높여 가고 있다. ‘인간은 먹을거리를 놓고 개와 독수리들과 경쟁한다. 잘사는 곳에서만 그러한 맹금을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양의 음식을 내다 버릴 여유가 있는 것이다. 가난한 지역에서는 넝마주이들이 새들을 죽여버린다.’ 284p 요즘 갑자기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인기 없는 과학자들의 체세포, 유전자 복제, 조작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복제는 창조도 아니고, 번영도 아니다. 치명적인 자기 파괴로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존엄성을 잃은 존재, 역동적인 생명을 잃은 가치에서는 영혼은 없다. 문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잉카 문명의 유적은 우리가 앞으로 보여줄 문명의 잔해일 수도 있다. 그것은 과거이자 미래의 모습이다. 인류는 너무나 빠른 속도를 내었다. 사상누각! 쌓은 순간 만큼, 무너지는 것도 순간이다. 문명의 허기는 자일리톨을 먹으려는 충치의 끊임없는 흡수와 배설의 반복처럼 그칠 줄 모르는 탐욕만을 보여줄 뿐이다. ‘자연에서는 진정한 경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경계를 만들고, 만들고 나면 더욱 커다란 노력을 들여 그 경계를 실체화하고 보호한다. 이러한 경계는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 민족, 인종, 민족성 등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뒷받침하고자 하는 것이다’ 401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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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필자는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류의 시초부터 지금의 문명에 이르
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문명을 선택했고 생존해 왔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딱딱한 이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나라의 예를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문명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알려주기에 보다 쉽게 다가가고 읽을 수 있다. 또한 비교적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 하였기에 여타의 책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단점이 있다면 비교적 결말부분이 단순하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아마 독자의 판단에
맡긴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기전 나는 야만에 대해 조금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읽은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야만과 문명은 결국 둘 다 우리가 생존의 과정에서 택한 각각의 방식이라는 생각. 물론 너무나 거대해진 지금의 문명은 분명 우리가 잘못된 생존 과정으로
택한 것임이 점점 드러나고 있지만..그렇다해도 야만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낭만적
시각또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제목이 다소 자극적인 부분이 있지만 결국 필자는
문명과 야만이 어떻게 공존해 왔으며 과거를 통해 앞으로의 미래상도 어떻게 전개될지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문명은 한 가지의 편의를 알려 줄 때마다 백 가지의 악을 감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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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로서의 진단은 해박함을 넘어 insight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는 인간은 탐욕의 덩어리요, 일상의 事에서 벗어나지 못한 허둥되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싶지만 먼곳에서 지금까지 여기까지 다가온 인간을 본 저자의 모습은 고난과 지난의 연속이었읍을 갈파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가 가르쳐주는 인간이란 connecting하는 인간이다 유라시아와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가 소통된 것이다 앞으로도 소통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갚진 가치가 될것이다
1.수렵채집시대의 인간: 호주의 원주민을 통해서 다양한 먹거리(150종)의 향유자가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우리인간은 단순한 식단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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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류의 변화와 교훈:free lunch가 없는 인간의 모습 ![]()
3.인간 진보의 원동력:소통(갈등)속의 변화 ![]()
4.결론 한편의 드라마같은 역저이다 인간의 모습을 과거에서 미래로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역시 우린 소통과 갈등속에서 역사를 창조한 것처럼 우리에게 미래도 이런 방식이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결국 문명도 동일한 코드로 소통으로 정의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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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또 묻는 말이지만 '문명은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좀 서둘러 결론부터 말한다면, '문명은 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니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그것은 선이었다 해도 이제부터는 선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악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명은 선의 자리를 내 놓고 악의 자리로 이동하였다는 말인가. 아니 그 보다 먼저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야만’과 ‘문명’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열에 아홉은, 아니 백에 아흔 아홉은 야만이라는 단어보다는 문명이라는 단어에 손을 들어줄 테다. 그것은 문명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야만은 어떤가? 누군가에게 ‘야만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난을 담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처럼 문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야만을 적대시한다. 사실 이제껏 교육되어진 가치관도 그러하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같이 인류가 진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은 문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죽하면 4대 문명이 생기면서 인류가 야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이가 있겠는가. 이런 문제의 근원을 찾아 야만과 문명이 충돌하는 지점을 찾아 헤매는 잭 웨더포드의 안내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지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잣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문명이 지향해야 할 구세주이고 야만은 배척해야 할 것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인지를 밝히면서 이분법적 판단에 종지부에 막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추위를 피해 동굴 속에 몸을 피하고 동물 울음소리에도 몸을 떨어야 했던 까마득한 과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인류는 참으로 약한 존재였다. 자연은 물론이고 다른 ‘종’을 상대할 특별한 힘도 없었다. 먹을 것도 자연 상태에서 힘겹게 얻어야만 했다.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가 ‘도시’에서 유래됐고 야만(savage)이라는 단어가 ‘숲’을 나타내는 라틴어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는 ‘야만’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인류는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도시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세우기 시작한다. 또한 무기가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축을 이용해 농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문명의 시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문명’과 ‘야만’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세계의 오지와 도시 등을 답사하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문명의 본질과 장래를 사색하는 인류학자의 보고서다. 미국 매컬래스터 대학 인류학과 교수 잭 웨더포드. 그는 낙관적으로 보든 비관적으로 보든 “우리는 지금 인류역사의 커다란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고 진단한다. 현재로서는 1만년 전에 농업이 개발되고 마을과 도시가 생겨나면서 시작된 ‘문명’이 다른 모든 생활방식을 제치고 승리자로 떠오른 것 같다. 그러나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된 듯이 보이는 바로 이 순간,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된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 폴리네시아에는 무서운 전사들과 식인풍습까지 있었지만, 오늘날 그런 사람들과 풍습은 현대적인 세계의 대도시 안에 자리잡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파리, 뉴욕, 로마, 시카고, 프랑크푸르트, 몬트리올 같은 대도시를 들여다 보라. 밤의 워싱턴시는 폭력 단체·범죄다· 창녀·마약 밀매꾼·포주, 그래교 그들의 손님과 의뢰인들 차지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는 미국 수도내의 길거리에서 본 것과 같은 야만과 폭력과 범죄와 잔인함을 목격하지 못했다.” 남미의 우사마신타 강은 맥시코와 콰테말라를 가르는 경계다. 이 우사마신타 강을 따라 전개되는 라칸돈 숲은 우리의 발길을 쉽게 허용치 않는 열대 우림이지만, 이 정글의 숲을 헤치고 나간다면 현대문명에 결코 뒤지지 않은 찬란한 고대의 마야문명나 상면 할 수 있으니 혹여 우리의 모험이 천신만고의 괴로움을 겪었다 한들 그만한 값을 치르고도 남을 만 한 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행운에 감격함은 물론이다. 다만 이 약스칠란의 고대문명 앞에서 우리는 이 문명의 주인과 우리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신, 우리는 이 위대한 고대문명 앞에서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고 탄식하는 잭 웨더포드라는 한 늙은 여행객을 만나 보고자 하자. 사실 그는 야만을 찾아 전 지구촌을 헤매는 모험가지만, 기실 그는 모험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지구촌을 살아가고 있는 인류의 미래를 야만과 문명이라는 상반된 가치의 현장을 찾아 그 경계의 안팎을 오가며 그 야만과 문명이 맺고 있는 어떤 법칙적 관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류학자로서의 엄숙한 임무를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모험에 나서는 인류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 마야인이 돌에 새겨 놓은 문자와 그 기록과 놀라운 수준의 역법과 천문학 등 오늘의 문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할 고대의 마야문명이 이룩한 찬란함을 이 정글 속에 고스란히 남겨 놓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주인공들에 대해서 탄식하지만, 정작 그의 탄식이 지목하고 있는 것은 사라진 고대의 마야문명도 아니고 마야인도 아니며 아주 딴판 다른 지점에 이끌리고 있음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기술과 과학이 인간의 역사를 주도했고, 그래서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지구는 인간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대상은 살아졌다. 이제 인간의 기술과 과학 그 문명은 더 이상 나가서는 안 된다. 인간의 역사는 이제 대상을 잃고 그 대상이 살아진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는 인간 자체가 대상이 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제는 문명을 역사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자연에 되돌려 줘와 할 때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 잭 웨더포드는 야만과 문명이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의 역사가 반환점을 돌아 인간의 본질과 자연 그리고 지구와 우주의 본질로 회귀해야 함을 잊고 하는 말이다. 그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제껏 그래왔듯이 야만과 문명을 나눠 선택한 뒤에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목전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이나 외계 문명이 폐허가 된 이 땅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자 경고이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문명이 움직여야 같이 산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폐허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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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엄청난 내공의 집약체가 아닐수 없다. 총 20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만일 하나의 장을 쓰려고 한다면 여러 권의 책과 참고문헌을 철저히 독파한 후에야 가능할 듯 하다. 그만큼 ''문명''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여러 실제의 예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통찰로 ''야만''과 ''문명''과의 관계에 관해 접근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문명''이라는 모습과 ''야만''이라는 모습의 인류생활방식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것보다 우월하다기보다 그저 다른 모습이며,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결국 함께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내공이 더 쌓여서 역사와 문화에 대해 지식이 쌓인 후에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또다른 새로운 느낌을 받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때까지 이 책을 잘 모셔둘 생각이다. 다만 한가지,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써, 진화론에 바탕을 둔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공감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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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워더포드 著, 권루시안 譯, 이론과실천, 원제 : Savages and Civilzation )”를 읽었습니다.
저자인 잭 워더포드 (Jack McIver Weatherford, 1946~)는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주로 연구하는 인류학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저서가 꽤 있는데 특히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이종인 譯, 책과함께, 원제 :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 Queens)”,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정영목 譯, 사계절, 원제 :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이종인 譯, 책과함께, 원제 : Genghis Khan and the Quest for God: How the World's Greatest Conqueror Gave Us Religious Freedom )”, “돈의 역사와 비밀 그 은밀한 유혹 (전지현 譯, 청양, 원제 : The History of Money)”와 같은 책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명 (Civilization)’은 전 세계에 걸친 문화적 다양성을 말살하고 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문명’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티베트의 ‘죽은 자의 벌판’부터 멕시코의 라칸돈 정글까지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명이 닿지 않는 곳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그와 대비적인 문명의 모습 역시 독자들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저자는 문명으로 상징되는 도시가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는 가속되고 있으나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고 문명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끝나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시대 자체가 극단적으로 집중 현상이 필요하던 시대가 끝나갔고 새로운 형태의 통신, 수송, 제조 수단이 나타나면서 전통적인 형태와 기능의 도시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도시와 문명은 점차 공룡이 되어가고 있으며 전쟁, 역병 등에 상시 노출되어 있어 문명의 위기가 도래한다고도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20세기초 인플루엔자나 20세기말의 에이즈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많은 역병을 겪었지만 이는 강도가 낮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앞으로 다가올 유행병은 더욱 강해지며 문명 자체에 큰 위기를 안겨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1994년에 출간된 책임을 감안하면 저자가 놀라울 정도의 혜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비록 문명이 이러한 역병, 전쟁, 환경 문제로 몰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는 문명의 몰락으로 가는 과정의 일 부분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인류 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담긴 모든 지식을 모아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야만과 문명. 문학 작품이나 영상 매체를 통해서도 이미 많이 다루어 졌 듯이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두 단어입니다. 저자는 이 두 개념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호 보완적으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아니 오히려, 인류의 생존에는 문명과 야만의 절대적 공존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야만과문명누가살아남을것인가, #잭웨더포드, #권루시안, #이론과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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