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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행성의 주인으로 자처하고, 이 행성이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욕망과 탐욕은 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멸종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있으며, 인간들
자신마저도 파국을 향해 질주케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과학이라는 외줄에 매달려 자신들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으리란 환상에 사로잡혀 위기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행성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인간 욕망의
결정체인 탐욕은 그 끝을 모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가축이라 부르는 동물들, 인간의 울타리 속에 들어와 있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이. 동물들에게도 동물권이 있다는 관점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의 삶과 그 실상을
통해, 자신이 만든 울타리에 갇혀 허우적대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 보고서이다. 나는 동물애호가도 아니고, 또한 육식에 반대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동물원에 갇혀있는 동물들을 보거나, 또는 반려동물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다. 그들의 본성이 억눌린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 혹은 인간욕망의 희생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설마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생각하여
좋아하고 사랑해준다고, 그 동물들도 행복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인간은 진화되어 세상에 나온 이래,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취에 의존했다. 경작을 시작한 시기가 대략 1만년 내외로 볼 때, 인간이 수렵채취에서 자연에 울타리를 치고 경작문명으로
들어선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의 역사에서 볼 때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다. 경작과 함께 인간의
영양은 불균형해졌다. 채취해서 먹는 식물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경작하여
저장해서 먹을 수 있는 작물은 몇 개로 제한되었고, 그나마 일시적으로 남아도는 식량을 다음 추수 때까지
균등하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일 게다. 또한 수렵시절 맛보았던 육식에 대한 욕구는 동물들을 길들여 가축화에
나서게 하였다. 사실 경작은 사냥할 동물이 줄어든 데 따른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통설이라고 한다. 그렇게 인간이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은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도 개부터 시작하여 낙타에
이르기까지 오직 14종이 전부이다.
가축화는 지역의 농경문화와 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여러 종류의 가축을 적은 수로 사육하는 자급자족 농촌이나, 몇
안 되는 종류의 가축을 많은 수로 방목하는 목장에서도 가축들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주인의 관리를 받으며, 때로는 짐을 나르고, 또 농사일까지 거들었다. 이런 가축화는 동물들의 처지에서 보면, 타고난 야성대로 자연에서
억압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울타리 안에서 사람이 정한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신세를 망치게
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후 인간은 가축을 용도에 맞는 새로운 품종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집요할 정도로 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가축들,
소, 돼지, 양, 닭 들은 순하기 짝이 없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한 개체는 선택하고, 사나운 개체는 배제하는 식의 육종을 거듭한
결과 인간의 마음에는 들지만, 원래 자연에는 없던 개체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개체들이 번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했고, 또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육종된 가축들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가축사육이 전문화되고, 대형화 되어야 수지타산이 맞게 되었다. 여기에 냉동기술의 발달과
도로망의 확충은 축산과 고기공급이 산업화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거대한 축산산업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동물들의 망친 신세는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로지
고기가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의류나 장신구를 얻기 위해,
나아가 실험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다양한 동물이 사육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축산산업에 편입된 소, 돼지, 닭의 사육환경과 문제점을 살펴본다. 그리고 개와고양이로 대표되는 반려동물들의 삶과 현실을, 이어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동물들, 즉 인간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물원의 동물들과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실험을 위해 희생되는 실험실의 동물들의 실태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호사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는지, 또 그러한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 소는 반추동물로
되새김질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산업축산에서는 송아지의 덩치를 빨리 키우기 위해서 성장호르몬이
함유된 옥수수사료를 먹여야만 하고, 또한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지방에 많아야 하기 때문에 운동량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소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되새김질도
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질병으로 고통 속에서 살다가 도살된다.
- 소와 마찬가지로
돼지도 오로지 살을 빨리 찌우는 데만 목적이 맞추어져 있다. 산업축산은 그러한 돼지들이 서로 꼬리를
물며 서열을 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꼬리를 자른다. 이른바 꼬리 잃은
돼지들이다.
- 닭들 역시 서로
쪼는 행동으로 서열을 정하고, 서열이 정해지면 평화롭게 지낸다. 가까이
있는 닭들은 서열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부리를 쪼아댄다. 산업축산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병아리 때
부리를 뭉툭하게 자른다. 이렇게 하여 부리 잘린 닭이 만들어진다.
- 산업축산에서 가축들의
수명은 턱없이 짧아졌다. 용도별로 구별해 가장 경제적인 순간까지만 사육하도록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하긴 태어난 것 조차도 인간의 의도에 따라 태어났거늘 죽음이야 말해 무엇 하랴마는..
- 소 살코기 1킬로그램을 얻기 위해 필요한 옥수수사료는 16킬로그램, 돼지는 9킬로그램, 그리고
닭은 4킬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들 옥수수를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화석연료의 양은 얼마나 될는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옥수수가 인간의 식량으로 사용된다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 삶을 연명할 수 있는지..
- 오로지 품에 끌어안기
위해서 입양하고 키운다는 동물들, 이들은 애완동물을 넘어 반려동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본성을 억압당한 채 인간의 감정에 따라 길러지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장난감이 아닐는지..
- 동물원이 동물의
본성에 어울리는 자연을 재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 동물원의 동물들은 이미 인간이
보살피지 않으면 개체수 유지도 어려울 만큼 유전자 다양성이 협소해졌고, 본성이 억압되어, 설사 야생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는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이 빚어낸 결과..
- 인간의 질병을 퇴치하는
신약을 개발한다는 명분아래 자행되는 동물실험, 그러나 동물실험 결과를 임상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경우는
많아야 10퍼센트 미만이고, 그나마도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는
사전에 예측할 수가 없다.
경작은 인간에게 최초로 편견과 잉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식물을 선별하고 동물을 분류하여 가축화 하면서 마을이 정착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갈등과 편견이 뿌리 내렸다. 편견은 분업을 낳았고, 체계적인 분업은 차별로 이어졌다. 분업은 계급을 낳았고, 계급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 그리고 인간 탐욕의 역사가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동물의 상황과 무관하지가 않은 지금, 우리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이 최초로 자연을 훼손하기 시작한 지 9500년이 흘렀다고 한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간이 자연을 소비를
위한 재료로 취급하며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로 생태계를 교란한지 500년이 지났다. 이제는 탐욕이 도를 넘어 핵과 같은 파괴적 에너지의 사용으로 후손의 생명까지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생태계를 교란한지 450년만의 상황이다. 생태계 내 생물들의 멸종이 시작되자 다급해진 탐욕은 자연의 유전자를 교란하기 시작하고 있다. 핵을 사용한지 50년만의 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우리의 삶의 궤적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었고, 이제 그 울타리 안에 갇혀 버렸다. 탐욕으로 만든 울타리는 결국 스스로를 옥죄는 감옥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인간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동물들이 들려주는 애증의 역사에 귀를 기울이자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기를 맞은 인간동물원의 새로운 정언명령을 준비해야 하며, 그 정언명령은 복잡하지 않다고 한다. ‘물려받은 땅에서 자연의 이웃과 지속 가능하게 살아가는 어제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울타리 안과 밖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몸이 건강할 때, 비로소 인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저자의 말이 그저 어느 동물애호가, 혹은 생태학자의 외침이 아닌 절박한 삶의 외침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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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만날 약속을 할 때 먹자고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치맥’이 아닌가 싶다. 고소한 치킨을 안주로 하여 시원하게 맥주 한잔을 마시자는 말이다. 내가 술을 배우고 한참 마실 때만 하더라도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대세였다. 지금도 물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부 술꾼들이 즐길 뿐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치킨에 맥주 한잔을 먹는다. 치맥은 우리나라 성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겨 먹는 기호품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과 축구를 한다든지 하는 큰 운동경기가 있으면 더욱 확산된다. 그리하여 치킨집 오토바이가 아무리 곡예운전을 하며 배달을 빨리 해도 전화통을 계속 울려대는 주문을 맞추지 못할 정도이다. 바야흐로 치킨과 맥주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우리 입맛이 확실히 바뀌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치킨에 맥주 한잔으로 바뀌는 동안 닭은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닭은 새벽을 열어젖히는 동물이었다. 낮에는 마당에서 새끼들을 몰고 다니며 지렁이를 찾아 먹거나 채소밭에 들어가 벌레를 잡아먹었다. 저녁 무렵 닭장에 들어가 둥지에 손을 넣으면 따뜻한 달걀을 만질 수 있었다. 손님이 오거나 집안에 큰일이라도 있을라치면 아버지가 닭 목을 비틀고 어머니가 손을 봐 밥상에 올렸다. 우리가 잡아먹었던 닭은 출처가 분명하고 형태도 여전히 닭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르고 형태도 닭이 아닌 치킨을 먹고 있다. 출처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고 형태도 먹기 쉽게 되어 편리하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치킨은 예전의 닭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치킨은) 울타리 안에서 자라던 전통 닭과 비교해 성장 속도가 두 배나 빠르고 덩치도 두 배 이상 커지므로 오래 사육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늦어도 7주면 도축한다. 7주면 대가리에 볏이 막 나온 아직 병아리에 불과하지만, 그때까지 생명이 이어지는 튀김용 닭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삼계탕 뚝배기로 들어갈 운명의 병아리는 불과 28일 만에 도축된다. 더도 덜도 말고 꼭 28일이 지나야 우리나나 삼계탕 식당들이 사용하는 표준 뚝배기에 쏙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중복 28일 전에 부화기에서 막 나온 병아리들이 우리나라 군인들의 수 이상 양계장에 일제히 들어갔을 테고, 다시 그 전, 적어도 3주 전에 그 병아리 수 이상의 유정란이 한꺼번에 부화기로 들어갔을 것이다. (142-143쪽) 치킨뿐이 아니다. 우리가 먹는 소고기, 돼지고기, 개고기가 모두 이전의 소고기, 돼지고기, 개고기가 아니다. 이전의 소, 돼지, 닭은 자기의 소임을 맡고 일하다 때가 되면 고기가 되었다. 그 전에는 자신의 본성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가축은 사람의 먹을거리로만 철저히 길러진다. 산업축산에 의해 고기를 생산하는 효율적인 기계로 통제되는 것이다. 비단 가축뿐이랴. 반려동물의 경계는 열대지방의 개구리와 도룡뇽에까지 미치고, 공연장에서는 곰과 호랑이와 사자와 말과 원숭이 같은 동물들이 재롱과 묘기를 보여주며, 실험실에서는 생쥐가 사람 질병을 안고 태어나고, 동물원의 온갖 동물들은 울타리에 갇혀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동물이 사람의 탐욕에 복속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생태 문제를 고집스럽게 붙잡고 우직하게 대안을 찾아 헤매는 선생은 동물과 사람을 다르게 보지 않는다. 자신의 탐욕 때문에 동물을 희생시키고 있지만 사람의 처지 또한 울타리에 갇힌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동물은 사람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사람은 자본과 권력이 쳐놓은 울타리에 갇혀, 서로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동물에게도 우리 사람에게도 내일의 희망이 없다. 파국을 피할 도리는 없어 보인다. 다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자연이 사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후손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오늘과 같은 탐욕을 반성하고 자연 앞에 제발 좀 겸손해지자고 선생은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다. 그 길만이, 오직 그 길만이, 파국의 속도를 그나마 늦출 수 있는 길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