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는 신문 사설을 통해 55주년을 맞는 광복절에 남북화해와 협력분위기에 묻혀, 진정 과거를 청산하고자하는 기억조차 잊고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지금까지 한번도 과거를 청산하기위한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노력이 없어왔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온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발전을 위해 굴욕적으로 시급히 맺어야했던 한일 수교회담은 일본에게 돈몇푼에 면죄부를 준 격이 되고 말았다. 사할린 동포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신대 할머니들의 눈물어린 삶의 역정을 목도하면서, 혹은 중고등학교라면 언제라도 한번쯤 들러보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스산하고 처참한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보면서도 정작 우리들 조차도 우리민족이 격어야했던 35년의 고통은 모두 잊어가고 있다. 때때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교과서문제, 독도문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될 때만이 일본과의 과거사문제를 잠시 입에 담아볼뿐이다. "No라고 말할줄 아는 일본"의 저자이자 됴쿄현의 지사인 이시하라가 공공연히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고 민족주의적 발언을 하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정치인들이나 정부관리들은 동방예의지국의 선비들 같이 예의바르게도 묵묵부답하고 있다. 문화적 교류와 협력이 가능해진 지금, 우리세대에게 일본은 과거의 아픔과 고통을 주었던 침략국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왜 아직도 우리는 일본의 사죄를 물어야 한는가? 왜 5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은 사죄하지 않는 것일까? 90년대 중반쯤 일본에관한 논쟁이 한창일때가 있었다. 일본은 없다느니, 일본은 있다느니하는 류의 서적들이 몰려들면서 일본에대한 알기노력이 있어왔지만, 이내 논쟁은 일본의 성풍속이나 특이한 사업에관한 관심으로 변질되었다. 문화적인 논의가 중요하지 않는 것이지만, 일본의 과거사문제에대한 충분한 논의는 없이 그냥 지나가는 유행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최근,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다룬, 그것도 일본인이 저자인 위의 책이 출판되었다. 일본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우익이라거나, 정치의식이 부족한 세대라는 두가지 편견이 있었는데, 일본인 스스로가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에대한 솔직한 논의는 참으로 흥미있고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그는 위에서 제기한 두가지 질문에 모두 충실하고 솔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먼저 일본은 왜 "예스"라고 말하지 않는가의 질문에 대해 그는 전후 일본의 역사와 전후세대의 무관심을 꼽는다. 전쟁에서 패한 국가가 세계 국가들로부터 어떻게 취급받으며,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성장을 성취하는가 하는 것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문제일텐데, 다카하시는 일본의 경우를 특별하게 설명한다. 일본은 패전후 미국만에의한 위임통치를 경험하게된다. 이는 4개국에의해 분활 통치된 독일과는 다른 것으로서, 미국은 이후 한국전쟁과 소련과의 대치라는 냉전에 임하면서 지나치게 빨리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것이다. 천황의 경우 일본인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법적인 처벌은 일본에서의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키게 될 것이므로 미미하게 처분되고 말았다. 1960년대의 발전기는 전쟁에대한 기억을 망각케했고, 70년대 들어서서 일정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정치인들은 패전의 "자기비하적 역사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의식을 부르짓기 시작했다. 다카하시는 전후세대의 과거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그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불러올 위험성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과거를 왜곡하는 문제만큼 전후세대가 자신의(일본의) 과거사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다. 그러나, 50년이 넘는 자민당의 독재아닌 독재속에 근본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정치적인 담론화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정치체제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얼마전 독일에서는 2차대전 중 징용되었던 사람들에게 보상하기위해 100억 마르크를 모금할 것이며, 작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소설가는 민간차원에서도 모금할 계획이라고한다. 이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수없이 많은 정신대할머니들과 사할린 동포들을 잊기전에 정부와 세계는 무언가를 해야한다. 스스로의 문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는 일본인이 말하는 사죄를 주의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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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5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비판하고 일본 측의 공식적인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이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 의해서 채택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일본계 미국인이자 상원의원인 대니얼 이노우에는 반대성명에 나섰고, 결의안이 통과되기 전에는 일본 내의 교수, 국회의원, 학자, 언론인 등 다른 보수주의자들이 함께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 이번 달로 예정되어 있던 전체회의 상정도 지연되고 있는 실정인데 일본 측의 로비가 그 이유가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본 측 입장에 대해 분노하고 비난하지만 어떤 논리로 일본 사람들이 전후의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일본의 보수주의자들과 소위 자유주의사관 등 일본 내에서도 다양한 전후 책임 논의들에 대해 소개하고 비판하면서 ‘일본인’인 저자의 논리를 잘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일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전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지 까지도 잘 고찰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책임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전후 책임을 논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응답의 가능성으로서 타자의 호소에 대한 반응이다. 전후 50년, 새로이 전쟁에 대한 책임 문제가 붉어져 나오는 시점에서 전후 세대의 일본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임은 비단 죄책감뿐만이 아닌 국제적인 호소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이런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은 자유의지에 속하며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일본인은 전쟁을 경험 유무를 떠나서 일본의 정치적 주권자이므로 일본인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갖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제적인 호소에 응답함으로써 다른 국가와의 신뢰관계를 다시 쌓고 평화를 향하는 긍정적인 행위인 것이다. 전쟁의 기억은 망령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망령이 과거로부터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기억 또한 망령처럼 다시 돌아와 일본에게 어떤 응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응답의 기대는 처벌의 형태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이런 처벌이 꼭 복수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책임자 처벌의 요구에는 이미 어떤 용서가 명확한 형태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사관과 패전후론 크게 둘을 예로 들면서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을 비판한다. 현재 자유주의 사관의 부정론은 난징 대학살과 종군 위안부 문제 등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을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식민지 사람들을 일본인들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려고 했다고 주장하고 수많은 증언들을 일본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모함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균열을 메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신과 적의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피해자의 고발을 받아들이고 역사의식에 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패전후론은 전후 일본이 인격분열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분열된 인격을 하나로 통합해야 국제사회로의 사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분열된 인격을 통합하기 위해 쇼와 천황이 황군 병사 중심으로 한 자국의 사망자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만을 지고 퇴위했어야 하고 국민이 똑같은 황군 병사를 중심으로 한 자국의 사망자만을 우선 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패전후론에 대해서 아시아의 타자와의 관계를 근거로 비판하고 있다. 그는 건전한 내셔널리즘이 아닌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쟁 피해자들이 다시 등장한 전후 50년 ‘증언의 시대’에서 일본이 여러 역사 수정주의관의 철저한 조작 시도를 비판하고, 일본이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해 아시아 세계에 진정한 평화와 신뢰관계를 구축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곧잘 독일과 일본의 전후 책임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비교한다. 일본이 독일에 비해 여전히 전후 책임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것인데, 이런 차이를 저자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들어 잘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책을 읽으면서 일본이 독일보다 문제점에 많다는 생각보다는 유태인 단체에 비해 내가 얼마나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데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는 호지오카 노부가츠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일본 국가의 정신적 해체를 기도하는 국제적 반일세력의 모략이라고 말했던 것을 비판하고 희화화하는 동시에 거기서 힌트를 얻어 전쟁 전후 책임을 도피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시스템의 해체를 도모하는 국제 세력의 네트워크의 형성을 제시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산발적인 비판보다는 좀 더 종군 위안부를 비롯해서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국제 심포지엄 등의 활동을 통해 국제적,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협력체제의 시스템을 만들어 일본에게 국가책임을 물을 것을 시사하고 있다. |
|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일본인의 전후책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책이다. 왜 전후책임을 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사실 정치와 관련된 것들에 큰 관심도 없었고, 따라서 그것과 관련된 지식이 별로 없었기에 일본에 대해선 막연한 반감 정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린 일본인만을 탓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는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이다. 전쟁의 경우에도 전쟁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증언을 함에 있어서...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응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내게 강하게 와 닿은 이유는 그동안 난 내 동포가 부르짖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피해고발에 그저 덤덤하게 지나쳐 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 사실들은 내 삶과 절실한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먼저 그 피해자들의 증언에 귀를 귀울이고, 그들이 입은 피해가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정확히 알기 전에는, 일본에 대한 비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떤 잘못이 저질러 지는 현장을 지나면서도, 그것을 말리지 않고 지나친 사람이 그 잘못에 대해, 일종의 공범으로서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주위에도 강한 반일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의 그 감정의 옳고 그름을 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지만 이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격한 감정에 휘말리기에 앞서, 정말 사건의 전모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자신의 그 비판을 좀더 설득력 있는 근거로 뒷받침할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이 책은 그 첫걸음을 떼 놓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소설책 마냥 쉽고 재밌기만 한 책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