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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 사제(司祭)의 몸
이영주 시집 『108번째 사내』(문학동네, 2005)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발원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세상은 “사막의 가시”(「그녀들」)로 수북하게 덮여 있고, “이 이상한 땅에서는 모두 얼굴이 없”(「이 땅에서는 모두 얼굴이 없다」)으며, 또한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날아가 버린 머리통을 매일매일 찾으러 다”(「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닌다. 인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새는 백과사전 속에 갇혀 있고(「여기, 공룡을 보아요」) 나무는 목이 잘려 있다(「집앞의 나무를 잘라낸 사내」). 모래언덕 밖에 없는 세상에서 익명의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사물들과 섞인 채 살고 있다. 실재는 사라지고 실재의 그림자가 실재처럼 세상을 부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거리를 떠다니던 아버지”는 “벽에 박힌 / 검은 재 같은 아버지의 뼈”(「어떤 통증」)로 남아 있고, “놀이터에 눈알을 묻어두고”(「재미있는 놀이」) 응급실로 향한 아이(의 눈알)은 그제야 자유를 누린다. “오래전에 죽은 초승달”(「어떤 통증」)은 소녀의 등을 숙주로 삼고 번식하여 “달이 먹어치운, 소녀들이 흘리고 간 검은 뼈들이 밤이면 하늘에 빽빽”(「소녀와 달」)하다. 익숙한 대상으로 그려지는 그로테스크한 세상의 이미지는 평범한 일상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 말(言語)의 망령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헤집고 들어와 사람들의 익숙한 일상을 혼란에 빠뜨린다. “출구 없는, 섬 같은,”(「이 땅에서는 모두 얼굴이 없다」) 이 세상을 익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영주의 시는 냉혹한 사제(司祭)의 주문으로, “어둠 속을 떠다니는 발 없는 영혼들”(「고궁에서 본 뱀」)의 한 맺힌 주문으로 다가온다.
시적 화자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하늘에 오르려다 웅덩이에 빠진 니 할미”(「겨울밤, 눈발」)가 있고, “아직도 거꾸로 처박혀 머리 풀고 우는 내 어미”(같은 시)가 있다. “척추가 휘어가는 아버지”(「아버지의 작업」)도 있다. 시적 화자는 “주인 없는 말들이 어슬렁거리다 / 벽에 이빨을 박는 딱딱한 방,”(「내 방에 사는 말」)에서 끊임없이 웅얼거린다. 기억이 있되,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기억이 화자의 내면을 지배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화자의 현재적 삶으로 등치된다. <시인의 말>을 참조하자면, 그것은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얼룩”(시집 124쪽)과 같은 기억이다. 죽음과 대면하는 최초의 기억이라 할 수 있는 이 기억이 파편화된 이미지들로 분열하여 이영주 시의 몸을 살찌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죽음에 대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그 죽음의 이면을 엿본 자의 행복한 기억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죽음의 순간을 경험한 자가 빠지는 환상은 죽음의 이미지로 넘쳐나지만, 죽음의 이면을 엿본 자가 빠지는 환상은 죽음의 외부로 뻗어나간다. 시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사제(司祭)로서의 화자의 이미지는 이러한 죽음의 두 가지 양상과 무관할 수 없다. 이를테면, “조금씩 노인을 빨아들이는 나무”는 “푸르게 피어난 노인의 얼굴”(「그 건물 뒤로 가 본 적이 있다」)의 얼굴로 환생한다. “까맣게 썩은 잎들이 촘촘히 매달린 라일락 한 그루”(같은 시)는 노인을 빨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꽃피운다. 죽어가는 사물이 죽어가는 존재를 만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상황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시인의 통절한 비판일 수 있다. 막 태어난 아이들이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새로운 날개를 꾸역꾸역 씹어 먹”(「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어야 하는 세상은, 썩은 잎을 줄줄이 달고 있는 라일락 한 그루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노인의 형상과 얼마나 다른가.
‘빨아들이는’ 행위의 주체가 시적 화자(주체)가 아니라 시적 대상(타자)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소년이 상한 새를 끌어안고 천천히 / 썩어가는 나무 속으로 들어”(「소년과 나무」)가고, “낙타는 내 몸의 물을 힘껏 빨아들인다”(「낙타의 무덤」). 주체는 타자의 내부로 들어감으로써, 정확히 말하면 타자가 주체의 몸을 빨아들임으로써 죽음의 세상은 생명들의 세상으로 전환된다. 전환의 핵심에 주체의 ‘목숨을 건 도약’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생명들의 세상을 향한 시인의 열정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구현되는 현실이 이영주의 시적 현실을 구성하면서도, 그 밑바탕에 생명에 대한 꿈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인이 사제로서의 역할을 꾸준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사제는 자신의 몸을 신에게 내놓음으로써 세상의 사물(생명)들과 신을 연결한다. 신에 ‘들려 있는’ 사제의 형상은 썩어가는 사물들의 세상에서 ‘생명(신)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형상과 다를 수 없다.
사내의 꼬리가 사라진다 골목 끝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이 여관 4층에는 가느다란 빗금이 그어져 있다. 어딘가로 사라진 꼬리를 찾느라 길게 늘어난 사내의 팔 어지러운 모래를 헤치며 빗금에 가 닿는다 창문 속 잘게 찢어진 살을 만지며 전율하는 사내 네 몸을 몇 번이나 넘어야 찾을 수 있니 초원으로 가는 마지막 부장품 난 집으로 가야 해 울먹이는 사내의 팔이 씀벅씀벅한 모래 무덤들을 헤집는다 창문처럼 납작해진 여자가 등을 돌리고 쿨럭거린다 4층은 너무 높아요 이곳을 거쳐간 사내들의 꼬리는 모두 녹아버렸어요 그들은 모두 집을 잃고 이 방으로 숨어 들어요 모두 이곳에 번뇌를 두고 사라져요 빗금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떠서 방안을 들여다 본다 108번째 사내는 창문 속으로 손을 넣는다 골목을 떠돌던 바람이 여자의 길게 휜 척추를 쓸어내며 전생을 부른다 먼곳에서 사막의 회오리가 서서히 여관으로 몰려온다 사내의 모래 눈물이 낡은 벽을 타고 3층으로, 2층으로, 천천히 떨어진다 창문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퍼진다 사내의 마지막 꼬리가 빗금을 긋는다 네 등을 넘을 거야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사내가 여자의 뜨거운 척추를 남겨둔다 108번째 사내 - 「108번째 사내」 전문
사내와 여자가 있다. 사내는 초원으로, 집으로 가기 위해 “빗금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을 지나가야 한다. 여자의 얼굴에는 그를 스쳐 지나간 사내들의 표시로서 빗금이 그어져 있다. 여기까지 보면 남성의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의 형상을 그린 듯싶지만, 「108번째 사내」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틀을 넘어 사제로서의 여성의 형상을 보여준다. 왜 사제인가? 108번째 사내는 “창문 속 잘게 찢어진 살을 만지며 전율하”면서도 “창문 속으로 손을 넣는다”. 창문 속으로 손을 넣는 사내의 행동이 펼쳐짐으로써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변하는 세상이 사내의 “비릿한 피냄새”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108번째의 빗금으로 남을 사내의 형상은, 죽음으로써 “여자의 뜨거운 척추” 속으로 스며드는 사내의 삶을 대변한다. 108번째 사내는 여자에게는 108번째의 번뇌이겠지만, 동시에 사제로서의 여자를 통해 전생의 어느 장소로 이동하는 주체의 형상이기도 하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넘쳐나는 이 시가, 역설적으로 생명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의 몸은, 아니 여성으로서의 사제의 몸은 사내에게 “초원으로 가는 마지막 부장품”일 수 있다. 여자를 넘어야만 사내는 초원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사내가 넘어야 하는 여성의 몸은 일종의 경계이고, 따라서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사내가 죽음의 상황과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초원(집)을 향한 욕망은 죽음을 부르고, 죽음은 여자의 몸이라는 경계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여자의 몸을 넘을 수 없고,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초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결국 죽음을 통해 사내와 여자는 하나가 된다(되어야 한다). 사내는 여자의 몸을 넘어야 하되, 여자의 몸과 더불어 넘어야 초원으로 갈 수 있다. 사제로서의 여자의 몸이 지닌 매력은 이곳에 있을 것인데, 시인 이영주의 시선에 미치는 사물들의 형상은 이러한 사제로서의 여성성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있는 셈이다. |
| "(상략) 세상은 둥근 회색 구멍일 뿐 모든 길은 엄마 코끼리의 항문으로 뚫려 있다 아프리카 밀림의 뿌리들은 항문에서 뻗어나와 긴 코를 휘감으며 자라났다 어느 날 조련사들이 검은 채찍으로 등짝을 내려쳤을 때 어린 코끼리들은 자신의 코에서 쏟아져나온 무성한 뿌리를 보았다 숲에서 밀려날 때마다 하늘의 맨발 같은 뿌리들이 창백하게 말라갔다 세상은 둥근 회색 구멍일 뿐 어린 코끼리들은 구멍의 흐릿한 빛을 따라 걸었다 (하략)" -- <뚱뚱한 코끼리가=""> 중에서 그에게 세상은 "둥근 회색 구멍일 뿐"이며, 집은 "무덤"일 뿐이다. 그가 사는 세상은 이상한 세상이다. 이 "이상한 땅에서는 모두 얼굴이 없다". "출구"도 없다. 출구인지 알고 들어간 구멍(혹은 항문)은 카타콤이거나 사생아가 굴러다니는 골목이다. "사람들은 모퉁이에서 어둠을 거래"하고,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학교에 안간 아이들이 세상의 카타콤에서 "부서진 다리로 해골을 툭툭 차"며 논다. "기호"와 바코드 속에서 혹은 지하방에서, 어둠 속에서 "사내들의 꼬리는 모두 녹아버렸"다. 거기에는 "잘린 혓바닥"이 굴러다니고, "푸른 눈을 목에 건" 그가 자신의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있다. 그는 뿌리가 잘린 채 이 이상한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의 유령 같은 여행은 악마성으로 가득차 있으며, 정신착란적 판타지 속에서 현실은 피가 튀고 목이 잘리고 부서지고 꺼꾸러진다. 모든 사건과 행위는 우발적이며, 사랑은 건조하고, 범죄의 잠재성을 숨긴 채 자학하고 타락한다. 그 속에서 건져올린 이미지는 괴기스럽다. 컬트 무비나 스플래터 무비처럼 폭력적이며, 헝크러져 있다. 몽상의 카타콤에서 자학하는 풍경들. 하늘 높이 치솟아오른 문명의 높이에서 추락하는 표현들. 거침없는 속도의 끝에서 바퀴에 짓이겨진 파편들. 그는 그렇게 이 세상의 악마성을 드러냄으로써 자학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당방위는 선과 악의 혼돈 속에서 때때로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하긴 어떤 가능함도 가능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옳은 방법조차 옳지 못한 이 세상에서, 그의 삐딱한 눈이 그의 눈밖의 짓뭉개진 세상을 짓뭉개버린다 한들, 그것을 이미지의 폭력으로 몰아부칠 수는 없다. 애당초 그의 사변은 서사에 있지 않고, 그의 독백은 고백에 있지 않다. 뚱뚱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