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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학부제 시행으로 과반이냐 반방이냐 정체성이 모호했던 그 공간에서 새내기를 기다리던 선배들. 그들은 우리에게 커리라는 걸 던져주며 노동, 여성을 이야기했다. 단체 술자리에서는 전화카드 한 장, 바위처럼, 처음처럼, 불나비, 청계천 8가 등을 불렀다. 학번이 조금 높은 선배가 광야에서를 불렀던 기억도 난다. 4월에는 419 달리기를, 5월에는 메이데이를 함께하자고 종용했다. 여름 농활은 없었다. 농활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적 상황을 예방할 수 있는 조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참석할 수 없다며, 여성주의 쪽에서 일찌감치 보이콧을 선언한 상태였다. 운동권의 끝물이었다고는 해도 당시에도 여성주의와 민족주의, 노동 등 다양한 노선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사정이 이랬으니, 운동권이 아닌 대학생도 있다는 사실을 안 건 입학하고 나서 꽤나 시간이 지나서였다. 수적으로는 다수였던 그들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학생회를 잡고 있었던 건 운동권이었으니.
2003년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고 꽤나 오랫동안 생각한 듯하다. 아니, 굳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고나 할까. 내가 2003년에 만난 대학 풍경은 저랬으니, 다른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추측해버렸다. 그런데 최근에 비슷한 시기에 대학 새내기였던 사람들끼리 그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더랬다. 2003년 내가 있었던 반의 분위기를 공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인문대 반이었는데도 그랫다. 그제서야 느꼈다. 아, 나는 쉽사리 접할 수 없는 운동권의 끝물을 지나온 거구나...
원래부터 철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나는 운동권 선배들에 그리 흥미가 없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똑한 사람이 좋았던 나였던지라 집회 가고 술 마시느라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던 운동권 선배들에게는 끌리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엄청나게 똑똑한 선배가 노동, 여성을 이야기했다면 열심히 집회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과방에 편하게 드나들 수 없었고, 그렇다고 사교력이 좋지도 않았던 터라 운동권이 아닌 선후배 친구와도 그리 잘 어울리지 못했다. 1학년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그냥 흘려보냈고, 2학년에는 철학 대신 종교학이라는 흥미로운 학문을 알아가며 도서관에서 책과 놀았다. 전공을 종교학으로 정한 뒤 입대. 복학하며 다시 찾은 대학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운동권이 점령했던 2003년의 과방 분위기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운동에 매진해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노동과 여성 대신 스펙과 취업이 자리잡은 대학의 풍경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소설가 최영미의 장편소설 『청동정원』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아니 네가 왜, 라는 의문이 스스로 들지만. 그냥 그렇다고 쳐 두자.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무려 2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저자에게만이 아니라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에게 이 시기는 한두 가지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복잡한 기억이다. 1987년 체제를 이뤄냈다는 성취감도 있겠지만, 5ㆍ18을 비롯한 여러 국가 폭력을 견뎌내며 느꼈을 비애도 크다. 무엇보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며 혁명을 꿈꿨던 투사들이 차례차례 변절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게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수 밖에 없었다. 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복잡한 감정을 어떤 식으로 형상화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겠지.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포기했을 법도 하다. 그냥 안 써도 됐을 텐데 소설가가 굳이 쓴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 최영미 소설가를 인터뷰 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1980년대 학생들이 투쟁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답은 간단했다. "군부독재 계속했겠죠. 아프리카나 남미 국가처럼 말이죠."
연이어 물어봤다. "다른 조직이 아니라 왜 대학생들이 그렇게 치열했을까요." 역시 답은 명쾌했다. "군부 다음으로 조직화하기 쉬운 게 대학생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한국만이 아니다. 1960년대 일본의 전공투나, 68혁명이라 불린 유럽의 사회 변혁 운동 중심에도 대학생이 있었다. 어쩌면 당시 대학생은 만하임이 말했던 '자유부동'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생이 흔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졸업만으로 취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불안이라는 미래를 담보를 짊어져야 하는 요즘 대학생에 비해서는 투쟁에 매진하기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청동정원』을 보면 1980년대 대학생은 그 어떤 시대의 대학생보다도 애석한 존재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긴 세대라고 할까. 뭐, 대학생에게는 청춘과 낭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철저히 근대 초기에나 만들어진 개념이긴 하다만.
최근에 S대를 방문해 도서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신 적이 있다. 내 앞에 앉아 빵 봉지를 뜯는 남학생은 한참 어려 보였다. 1학년인지 2학년인지 가늠되지도 않았다. 저렇게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민주주의를 외치고 혁명을 논했는지. 젊디젊은 우리의 어깨가 왜 '독재타도'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무거운 시대의 짊을 짊어졌는지...... 군부의 총칼에 맞서 돌멩이를 들고 싸우던, 겁 없는 젊음이 역사를 바꾸었다. (160쪽)
이념의 홍수가 지나가고 우리는 돈벌이에 내몰렸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변변한 능력도 경력도 없는 우리는 서른 살의 문턱에서 걸음마를 배워야 했다. (240쪽)
취미를 묻는 질문이 부르주아틱하다고 해서 금기였던 1980년대. 문학소녀, 개인주의자였던 애린에게는 이념과 혁명이 점령한 1980년대 대학은 지금 대학생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 테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 그들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투쟁을 했는지까지는 아니지만, 어두운 시대에 살아가는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공감이 갈 듯하다.
좋은 문학이 갖춰야 할 조건이, 등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타자들을 한 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라면. 『청동정원』은 굉장히 좋은 문학이다. 좋은 문학이 갖춰야 할 또다른 조건이, 서정성과 시대성을 함께 겸비하는 것이라면. 『청동정원』은 역시나 좋은 문학이다. 시인답게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1980년대라는 시대적 특수성과 함께 최영미만의 아름다운 문장이 이 작품의 가치를 더한다. 그래서! 1980년대 대학생이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꼭 읽어보면 좋을 작품이다.
올해 읽은 한국소설 중에 추천하라고 한다면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소설이다. 두 번째는 『투명인간』.
* 덧. S대를 다녔거나 출판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고유명사가 많다. 자하연을 자무연으로, 문학과지성사를 문학과지식사로, 이런 식으로 바꾼 게 재밌다. (나만 재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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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동기들과 만나면 그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내가 정상적(?)으로 대학에 갔다면 91학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가는 방식(?)으로 대학을 가지 않았기에 94학번이 되었다. 누구보다 힘들게 대학에 입학했고,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에 한눈 팔 수 없었다. 내가 입학 했을 당시, 우리 학교에서도 데모를 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신입생들에게 같이 데모하기를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수업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으므로... 여대생이 누려야 할 미팅이나, 가슴 설레는 선배들과의 시간.. 그 시간에 난 등록금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 나는 생각했다. 선배들과 함께 데모대 앞에 서야 맞는 인생인지, 아님 지금 현재 내 주머니 사정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 나는 현실을 택했지만, 그 현실을 택한 배경에는 나름의 사정도 있었다. 당시 아르바이트 하던 곳의 사장과 부인은 대학 때 치열하게 데모를 했던 운동권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을 노동 운동으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어느 사장들보다 인색했고, 돈에 민감했다. 돈에 관해서는 관대하지 않았고, 치열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한때는 이 나라의 민주화에,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 하지만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의 처우에는 지나치도록 인색했던 사장님.. 그리고 강남 아파트나 8학군에 누구보다 목숨 걸었던 사람.. 사장님을 잘못 만났다고 치부하기엔... 이후에 만난 운동권 사장님들의 행동이 별반 다르지 않아 실망했다면 내 마음을 알까 모교를 찾은 작가 이애린. 그녀는 젊음의 열기가 가득한 교정을 둘러보며 자신의 대학 시절을 떠올린다. 명문대에 다니는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군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며 대학에 입학했지만 착한 딸, 착한 학생이라는 딱지를 떼게 된다. 여자다운 원피스나 치마에서 청바지를 즐겨 입고, 시위대에 섞여 한강을 건너기도 한다. 80년 봄 대통령 사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교정은 살벌해진다. 예쁜 옷과 맛난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애린에게 대학은 낭만으로 가득차야 했다. 하지만 연애, 사랑을 하기에 세상은 시끄럽기만 하다. 그런 현장을 보고도 무시했던 애린이지만 운동권 선배 언니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주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론적 지식은 없는, 그녀는 백치미로 통했고 독재 정권에 저항할 생각은 있지만 앞설 용기는 없는 경계인으로 대학 생활을 해 나간다. 그러 던 중 만난 운동권 학생 동혁. 그를 만나 동거를 하고 결혼을 하지만 생활은 순탄치 않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동혁은... 실제 가정에서는 아내 애린에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 결국 애린은 그와 이혼을 하게 되고 선배의 권유로 ‘자본’을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돈도 받지 않고 하게 되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데모를 하지 않는 학생을 개념 없는 사람으로 무시하고, 생각 없는 사람이라 치부했던 선배들이 있었다. 한 잔의 술을 기울이고 이념에 대해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하던 선배. 가끔 생각한다. 그 선배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역사를 새롭고 공부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앞장서서 데모대를 지휘하고 선봉에 서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일까? 앞서 나서지는 않지만 내 생활을 하며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국민들. 그들이 맞는 것일까? 맞고 틀리고를 떠나 나서지 않는다고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것. 앞장서서 데모하는 선배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몇 사람들은 겉멋에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는 건 알게 된다. 자신만 제대로 정신이 박힌 듯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거부감을 느낀 건 나만 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기분이 나빴을까? 주인공 애린이라는 사람. 솔직히 너무 싫었다. 겉멋이 잔뜩 든 상태에서 데모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곱게 자란 여대생 티를 잔뜩 내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돈이 없어 고민한 적 없고,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고, 화장품을 사용하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데모라니... 정말 사회를 변화 시키고 싶었던 사람까지 욕을 먹게 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물론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에 멋을 부리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었을 여대생의 마음. 하지만 사회는 그걸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야 진정 지식인다운 여대생이라고... 이론이 아니라 가슴으로 사회주의에 접근한 이들에게 소련의 몰락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 (258)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는 모두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조절한다는 것인데 인간의 이기심을 과소평가했지. 인간의 본성에 반한 거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 사회주의가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했다면,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 없는 욕망도 만들어 내지 (301) 나는 이념에 대해 잘 모른다. 이념을 생각하기 이전에 지금 현재를 내가 살아야했으므로. 등록금을 마련하고 졸업하는 것이 나에게는 목표였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게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운동했던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가면 마찬가지가 되는 현실... 나름 기대를 하며 읽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거슬리는 부분도 있어서 좀... 민감한 부분이 있어. 리뷰쓰기가 쉽지 않았던 책. 아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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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원> - 최영미
이쁘고 똑똑하고 도도하기로 소문났던, 잘난 줄만 알았던 내 친구 최영미가 이리 순둥이, 허당인 줄 이 소설을 읽어보고서야 알았다. 같은 80년대 시대를 통과해 온 사람으로서, 처절하게 부서지고, 망가지고, 다시 시작하고, 지금 평온한 척 살고 있지만 우리 나이 또래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누구나 지울 수 없는 '흉터와 무뉘'를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의 대담, 솔직한 필체로- 영미의 특색이자 한계이기도 하지만 - 뜨겁게 그려내고 있다. 이대나 갔으면 딱 좋았을 여자가 - 이대 나온 여자들에게 맞아 죽을 소리지만 - 불행하게도 공부를 좀 더 잘해서 서울대로 들어온 게 그녀의 잘못이었다. 게다가 정의를 동경하다니...ㅂㅂㅌㅇ 욕망해서는 안될 것을 욕망해버린 죄 값은 처절했다. 그 똑똑했던 - 한 줄만 알았던 - 영미가 백치미 소리까지 들어가며, 운동권 주위를 배회하다 끝내 다 망가져 버리는 주변인의 인생을 작가의 표현대로 변비걸린 여자가 힘겹게 배출한 푸르딩딩한 배설물처럼 그려냈다. 시원하냐 영미야? "하고픈 말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렵니다" 고 했지? "내 몸에서 아직 80년대가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너, 이제 좀 자유롭기 바란다. 수고했다. 원고비 받았으니 술 사라 !!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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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사람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특히 힘없는 사람의 기록은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온 그 뜨거운 시절이 있었어도 그 속에서 힘없이 고통 받고 힘들어 하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모든 사람의 머리에서 잊혀 진다. 그래서 사람을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 힘은 때론 젊은 시절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80년대 뜨거운 열정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은 뜨거운 피가 흐르던 시절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비난 할 수 없다. 그들의 뜨거운 피가 만들어 놓은 지금의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청동정원’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의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과 그 주변의 기록이다. 아니 소설이다. 너무 리얼하게 느껴져서 생생한 기억과의 일치감 때문에 소설 같지 않은 기록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힘을 뺏은 사람 그 힘을 머리로 맨 몸으로 막아내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날부터 6.29 선언이 일어나는 날까지 비참하게 억눌렸던 인권 혹은 사상들에 대한 우리의 현실과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익숙한 말들이 많이 나와서 반갑기도 하고 좀 서글퍼지기도 했다. 당시 운동권의 실상은 그렇게 멋모르는 신입생 하나 꼬득여서 선동가로 만들지는 않았다. 혹 그런 모습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부였을 것이고, NL, PL이니 하는 것도 일부에 한하였던 것 같다. 시위도중 최루탄에 맞아서, 고문에 의한 죽음이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한 다는 것에 분개한 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또 성고문이 경찰서에서 자행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역시 있었던 것 같다. 인권이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이들로 인해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비쳐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사실 당시 시위에 참가 했지만 여기에 나오는 사상서나 마르크스 뭐 이런 것은 잘 몰랐다. 87년에는 참 많은 시위가 있었던 것 같다. 대학생 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소설은 몇 가지의 문제점을 던져 주고 있다. 먼저 처음 만난 운동가 선배에게 폭력을 당하는 여자 주인공의 상황, 두 번째는 운동권 학생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 즉 시위 전력으로 감방에 다녀와서 변호사가 되는 것에 대한 묘한 의문, 세 번째로 그렇게 자신들이 저항 했던 세력 밑에서 일하게 되는 상황, 이 상황은 자신의 상황을 빗대서 이야기한다. 군사정권의 아들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페미니즘 요소와, 현실과 이상에 대한 질문, 그리고 정말 생계를 위한 조직에 굴하는 모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문제점에 대한 답을 찾기 보다는 어떤 것이 더 자신을 덜 괴롭히는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소설의 나는 소설 작가로 그 탈출구를 찾듯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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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대가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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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처음 최영미 시인이란 사람을 알았을때 나는 너무 어렸다...[서른,잔치는 끝났다]는 내게 너무나 회의적인 삶을 주었다...그때 처음으로 청춘도 무언지 모르던 시절이었기에 시대의 아픔이나 작가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그래서 서른이 되기전에 죽을꺼란 생각을 해야했다...서른 이란나이가 내게 너무 멀었고 또 초라해보였었다...그러나 지금 그 나이를 훌쩍지나고 보니 작가의 글이 왜 그러했는지 가슴이 시려워왔었다...아주 예전의 작가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질문이 소설을 쓸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작가의 대답이 생생하게 기억된다."소설을 쓰려고 여러번 시도해 보았지만 자꾸만 수기를 쓰고 있다.그래서 소설을 아직 쓰지 못하고 있다"였다...그리고 오랫시간이 흘러 이렇게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처음은 나를 추억에 젖게 만들었다...살아온 시대가 물론 다르지만 고등학교시절 나도 전혜린의 수필들"그리고 아무말하지 않았다"와"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를 탐독했었고 루이제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빠졌었다...그래서 그 시절의 생각에 젖곤 했다. 시간이 지나 "생의 한가운데"는 두고두고 또 읽곤했다.읽을때 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다른 느낌이었다.역시 번역을 전혜린이 한것이기도 해서 그녀의 감성이 묻어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격동의 80년대를 살았던 주인공 이애린은 또다른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때 나는 최루탄 냄새만을 기억하는데 그저 돌아다닐수 없었고 백화점갔다가 대비한다고 한동안 밖에 나가지도 못한 기억만이 남는다.80년대초에 대학을 졸업한 고모가 데모에 갔다가 삼촌에의해 끌려온 기억이 나기는 할뿐이다.그때의 실상은 훗날의 전해들어오는 이야기뿐이다.우리시대에도 학생회에 가입된 이들이 데모를 한것도 사실이지만 그쪽 세계에 한번도 관심을 기울인적이 없었다.다만 누구누구가 한총련이라더란 이야기만 할뿐이었다.심지어 지금은 그 이름도 기억하지못하고 있다... 이애린은 세계는 내게 하나의 아픔이었다...동혁과의 만남부터 삶,그리고 이별까지...그렇게 자부하는 지성의 삶,시대의 아픔을 다른사람들 앞에서 선봉하고 또 다른이들에게 알리고 리더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이면이 그토록 협오하던 독재자와 별만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보면서 정말이지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그런 사람이 지금은 또 다른 권력의 앞에 서있으리란 생각에 더욱 씁쓸했다...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각성하라는 것인지... 이애린의 홀로서기가 본인은 힘들었겠고 타협이 필요 했을지언정 드디어 멋져보였다...오히려 서른에 잔치를 끝낸 작가가 오십이 넘어 비로소 평안해지고 또다른 파티를 하는듯하다... 이 소설을 읽을때 오페라 나비부인을 들었었다...왜 듣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들으면서 무슨 내용의 장면인지 몰랐다.문득 왜 오페라는 번역하지않고 노래를 부를까?유명한 뮤지컬도 전부 우리말로 번역해서 부르는데 하며 의문이 생겼다. 권위주의 때문인가? 작가는 여전히 아름답다.아주 예전의 모습이랑 별만 변함이 없다.소설은 26년만에 완성한 모습은 더욱 평화로워 보인 탓일까? 그때의 청춘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것처럼... 세월이 지나 소설속 인물들이 모두 변하고 세상살이로 각자의 삶으로 모두 다른인물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애린이 지금 가장 멋져진것 처럼... 소설<청동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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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엄마가 좋아하는 시집이었다. 서른은 이미 끝난지 오랜 시간이었을텐데, 엄마에게 서른은 어떤 나이였길래...혹은 서른의 의미를 나이 그대로의 30살이 아닌 서른 이후의 삶까지 포괄적인 의미로 다가온 것인지....모르겠지만 중년의 여성에게 그녀의 시집은 자작자작 젖어드는 가을비마냥 구슬프면서도 가슴에 박히는 그 무엇이되었나보다.
이렇게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최영미 시인이 [청동정원]이라는 소설을 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내용이 사뭇 가볍지 않아 두번 놀라고 말았다. 많은 작법서에서 '첫문장에서부터 사로잡아라'라고 하고 있지만 실상 그 첫문장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지만 [청동정원]의 그 시작은 시어도 아니면서 시각적 공감각화를 완성해내면서 독자를 사로잡는다.
p7 4월에 이미 우리는 5월의 냄새를 맡았다
라니. 계절의 변화는 눈으로 제일 먼저 확인된다. 그런데 냄새를 맡았다니...5월의 냄새는 대체 어떤 향이라는 것일까. 카페보다 다방, 찻집의 간판이 더 흔했다는 1980년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군사정권과 자본가들 그리고 체제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이 살았던 시대를 함께 하지 않아 100%공감하긴 어렵다. 하지만 518 1주기를 맞이해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도서관에서 사람이 떨어졌다는 페이지를 눈으로 읽는 순간 그 모습들이 영화필름처럼 눈 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현실이었을 그 시절이 내겐 책 속의 한 장면이 되어 펼쳐졌다.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른 것 같지 않은데, 시대는 이처럼 많이 변해 버렸다.
시대가 암울해서였을까. 동혁의 학대를 참아내며 청첩장 돌렸으니까 결혼해야한다는 아버지의 대답에 반기를 들지 못해 애린은 결혼해야만했고 이혼했다. 지금 시대의 여성들이 들으면 코웃음치겠지만 소설 속 애린은 '집안의 치욕'으로 불리며 '데모했고 감방 갔다왔고 거지같은 놈과 결혼했다가 실컷 두드려맞고 이혼당한 여자'가 되어야했다. 가족 속에서조차.
p258 무엇이 지금 끝난 것인가?
정말 무엇이 끝난 것일까. 시대가? 사상이? 결혼이? 여성의 핍박받는 삶이? 타인의 시선이? 정말 무엇이 끝나기는 한 것일까. [청동정원]은 그냥 읽고마는 소설이 아니었다. 시인이 던진 화두는 가슴에 깊이 패여 생채기를 냈고 그 생채기 속에 삶이라는 빗물을 채워넣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왠인일지 그랬다. 그래서 나는 [청동정원]을 쉽게 손에서 놓질 못했다. 마지막 장에서 또 첫장으로 되돌아가는 되돌이표가 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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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정원. 설명을 보기 전과 후에 느낌이 다른 제목이다. 뜬금 없기도 했던 제목이 낭만이 있어야 하는(정원) 교정에 시위가 있으면 줄지어 나타나던, 그리고 가끔은 미리부터 교정에 진을 치고 있던 전경들의 모습(청동)을 상징한다고 들으니 80년대 초반의 대학교 모습을 잘 형상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와 동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으로 격동의 시기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정말 치열한 시기, 조금만 잘못해도 또는 잘못한게 없어도 경찰서에 끌려갔던 위험한 시기, 그러면서 엄청난 사회적 변혁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리고 직접 운동에 투신하지 않은 많은 학생들도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유 없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나에게 그 시기의 기억과 잔상을 다시 생각나게 만들어 주면서 아련한 추억들을 생각나도록 해주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다양한 자세로 그 시기를 살았고 지금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열심히 저항하고 그 결과로 명예를 얻은 사람도 있고, 잘 풀리지 않은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현재의 삶의 모습은 과거의 자세나 활동에서 결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후 각자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의해서 정해졌을 것이며, 그 부분은 소설에서 따라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 내용들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청동정원은 감수성이 크고 예쁘고 우아하게 살고 싶었던(결국 80년대 대학 교정과는 맞지 않았던) 그리고 순진했던 여주인공 애린이 한국 사회의 시대상황을 알게되면서 (반은 자기가 만들고 반은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격는 삶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전개된다. 운동권도 아니고 방관자도 아닌 주변인(그렇지만 운동원에 가까운)의 삶이 한국 사회 속에서 펼쳐지는 지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사실적인 서술에 비중을 많이 두면서 소설적인 면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기는 하지만 쉽지 않는 주제, 많은 내용, 격동의 한국 사회 그리고 열심히 살았던 개인의 삶과 사랑을 잘 버무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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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원을 읽으며 나의 80년대를 생각하게 된다. 그녀와는 다른 청춘을 보냈지만 "돌아오면 우린 모두 개인이였다"가 가슴에 와닿는다. 책속의 주인공이 작가 자신일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에겐 지나고 나면 별게 아닌게 되는게 많지만 최영미 작가에겐 그게 아닌가 보다. 책의 마지막에 작가의 독백에도 있지만, 우리는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우면서 80년대가 잊혀졌다. 하지만 작가는 혼자 살아서 아직도 80년대속에서 살고 있는걸까? 아니면 80년대속에서 살고 있기때문에 아직도 혼자인걸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가져다준 신선한 충격이 너무 강해서일까? 그 이후로 작가의 작품들은 첫 작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서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청동 정원"에서 끝나는것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던 허구이던 영화로 만들어지면 극적이 요소를 더해 아주 흥미있게 재탄생할거란 예감이 든다. 내가 그녀의 시중 가장 사랑하는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선운사에서"이다. "선운사에서" 보여준 그녀의 아주 여성스런 감성이 "청동정원"에도 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젠 작가가 80년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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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기 불편한 시절에 대해 애써 덮어두고 나름대로 반듯하게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50대들에게 다시한번 자화상을 면면이 살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 책이었다. 자녀들과 80년대를 말하기 어려웠던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최영미는 자신의 아픔을 견디며 여전히 힘있게 선봉에 서 있다. 그녀에게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깨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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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서 지난 날을 돌아보았을 때, 그때 그 상황에서 내가 왜 그렇게 했던가에 대한 회한을 느낄 때가 생긴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그때 이후로 지금과는 달라진 삶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후회로 종종 자신을 못나게 여길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잘못한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이 든다. 내가 잘못 선택했거나 잘못 결정한 것은 아니었으리라는 것. 잘못된 것은 원하지 않은 결과였고,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으며, 내가 능력이 부족했든지 판단력이 모자랐던 것이었을 뿐, 그때 내가 그랬던 것은 그 상황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 얻어낸 결과였을 것이라는 것.
이 소설은 작가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꽤나 아픔을 느끼게 한다. 동참했거나 동참하지 않았거나 깊이 반성했거나 회피했거나 80년대의 청춘을 부끄럽게 떠올리게 한다. 자유로울 수 없는 추억이면서 속박이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고 되새기고 싶어도 곡해된다. 내 청춘도, 내 기억도, 비록 나무라는 사람 아무도 보이지 않아도, 홀로 아프고 홀로 부끄럽고 홀로 서글프다. 그 시대는 정녕 잔인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것을 보면.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감했다. 별로 와 닿지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동시대를 건너올 줄 알았다. 나는 내 비겁함을 인정했고 보호했으며 부끄럽다고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그러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래서 비겁했어도 잘 넘어 왔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살면 되는 거지' 하면서 평범의 가치를 일부러 강조했는데, 이제서야 이 책을 만나 이렇게 남들 모르게 찔리면서 서글퍼 해야 하다니.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소설의 내용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치 여부량과는 관계 없이 가엽다. 그때 그 80학번들의 안팎 상처가 애달프다. 얼마나 아팠으면 무너졌으며 얼마나 아팠으면 배신했을까. 그들 또한 나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선택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거부했으리라. 참 마음에도 들지 않는 세상이라며,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이라면서, 원망하고 자책하고 변명하면서.
꽤 오래 붙잡고 있었던 소설이다. 다른 소설과 달리 이 소설을 읽는 데 들인 시간으로 내 청춘을 위로한다. 지우거나 바꾸고 싶었던 모든 순간들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