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욕과 음탕함의 표본인 아버지 표도르,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맏아들 드미트리, 허무주의적인 무신론자인 둘째 아들 이반, 순수하며 사랑과 동정심이 깊은 셋째 아들 알료사. 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를 통하여, 신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사색을 장대한 규모로 집대성한 걸작. (이 부분은 책 표지 앞부분에서 발췌한 것이다.)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로만 보자면 못된 아비의 3형제 중에 첫째가 부친 살해혐의로 체포되고 재판과 그 과정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중간 중간 들어있는 조시마 장로에 대한 기록이나 이반과 알료사의 대화중에 나타나는 대심문관에 대한 이야기, 악마와 이반의 대화는 대문호의 깊은 사색이 담겨있으면 읽기에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 책을 다시 읽지 않더라고 이 부분은 두고 두고 다시 펼쳐 보게 될듯하다. 읽으면서 이런 인간들이 이런 인간들이 존재할까? 러시아 사람들은 참 히스테릭하군. 왜 저리 복잡하게 살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만 남의 일같이 느껴지던 그런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란 인간에 대한 냉소구나 싶어지면 나 자신이 한없이 비참하고 불쌍하게 여겨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서서히 바늘을 가슴팍에다 하나씩 하나씩 꼽고 있는 듯 한 아픔을 느낀다. 작가는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그래 너도 이런 인간이야. 니가 아무리 부정해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걸 인정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 볼거냐? 이런 질문을 해대는듯하다. 음... 고해성사를 하자면 감히 나는 내 아버지를 표도르라고 말한다. 사실 내 아버지뿐 만이 아니라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은 이런 콩가루 집안의 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는 나랑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별 문제가 없을 터이고 저열한 표도르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에 대해 잠시 상념에 잠긴다. 하는 짓은 표도르와 다를 바 없으나 자신은 지체 높은 양반가문인냥 온갖 감언이설로 자신을 정당화 시키는 부류와 겸허히 자신의 저열함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의 피를 두려워하면 고귀한 삶을 추구하고자하는 사람. 각각 다른 부류의 인간 같지만 내 속에선 항상 이런 부류의 인간이 같이 숨쉬고 있다. 내 나이 서른하고도 두해를 넘겼다. 이제는 선택이란 걸 할 때가 된 나이지. 어쩌면 한참 늦었는지도 모른다. 선택이란 한 가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다른 것을 버리는 것 이여야 한다. 그만큼 선택은 신중해야하며 확고한 것 이여야 한다. 나의 짧은 머리에서 나온 세 가지 부류의 인간유형 난 어떤 삶을 택해야 할 것인가. 첫 번째 부류의 인간은 내 주위에 흔히 볼 수 있고 나또한 이런 짓거리를 많이 해왔기에 그 장단점을 알고 있다. 그런 삶 속에서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내 속에서는 엄청난 죄책감과 불안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 불안감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목을 조여 오며 삶을 갉아 먹는다. 물론 이런 짓거리를 하는 타인은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부류의 인간. 참으로 속편하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되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이런 생활을 시작하다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내 속에서 이건 뭔가 아닌데 해는 회의가 든다. 그냥 그렇게 인정하면서 사는 삶이 진정 사는 건가? 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이건 내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회의는 아니다. 마음 한 곳 어딘가에서 이건 뭔가가 빠져있는 삶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남은 것은 하나다. 고귀한 삶... 적절한 단어가 아닐지는 몰라도 이런 뉘양스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이런 삶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과연 내 마음이 버텨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게 가장 맘 편한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쓸데 없는 잡설로 지면을 낭비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인간에 대한 냉소... 하지만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작가가 진정 이야기 하고자 하는 부분은 인간에 대한 문제의 제기가 아니라 해결책의 제시니까. 아마도 과거의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았다면 내 머릿속에 남는 이 책의 내용은 희망 없는 인간과 별 설득력 없는 사랑에 대한 설파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서서히 내 속에 만들어가고 있는 변화는 세상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다. 이런 생각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시마 장로와 알료사로 대변되는 세상에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는 나의 변화에 충분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