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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로 불리는 이현우가 쓴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세계문학’이란 용어가 낯설지 않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보려고 하는 자에게 보인다던가? 그래서 로쟈에 힘입어서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기 시작했으니, 출발은 좋았다. 아니 출발부터 좋았다. 게다가 ‘한겨레신문’도 일조를 하였으니, 최재봉 기자가 ‘세계문학’이란 제목의 칼럼으로 이 책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미처 되지 못한 부분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주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며 읽었다. 최재봉 기자의 글은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로 완벽하다 할 수 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다음을 참조하시라)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3599.html <[유레카] 세계문학 / 최재봉> 그 칼럼은 신문의 제한된 지면으로 인한 한계가 있지만,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데 가치가 있다.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독자인 우리에게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안경으로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지만, 이 책을 통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 ‘세계문학’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야기의 진행을 돕기 위하여 먼저 ‘세계문학’이라는 말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이란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각각 이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서평가 로쟈(이현우)의 구분이 맘에 든다. 그는 세계문학을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한 바 있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의미, 즉 ‘해외문학’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서의 세계 명작 혹은 고전을 뜻하는 세계문학,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 ‘세계문학’,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문학, 즉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문학이 있다. (12쪽,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279 ~280 쪽)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책들이 어떻게 우리 앞에 왔는가에 대한 흥미있는 분석은 이현우의 책 268~277쪽을 참고하시라. 그래서, 우리가 <세계문학전집> 차원이 아닌 ‘세계문학’이란 개념을 접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괴테, 마르크스가 각각 말한 바가 있고, 더 나아가서 파스칼 카자노바의 이론을 통하여 점점 더 깊숙한 논의를 들어볼 수 있다. 최재봉의 정리를 빌려 말하자면, <특히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1999)이라는 책에서 ‘세계문학 공간’과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 같은 개념을 통해 불평등과 경쟁을 기반으로 삼는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괴테가 생각한 세계문학이 여러 민족문학들 사이의 평화적 교류와 소통, 연대라는 순진한 이상에 가까웠다면 카자노바 쪽이 한층 냉정한 현실에 가까운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자노바 역시 유럽과 비유럽 사이에 불평등한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가령 비문자적 구술 문학과 같은 ‘다른 형태’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제시한 ‘민족 알레고리’ 개념은 시사적이다. 현대 서양문학이 낡은 형식이라며 폄하하는 알레고리가 제3세계 문학에서 개인의 이야기와 집단 경험을 아우르는 공통된 미적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제임슨의 관찰이다.> 그 정도로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를 끝낸다면, 이제 2부 4장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이란 글과, 3부 5장 <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이란 글을 빠트리지 말고 꼭, 읽어볼 일이다. 보편적-평범한-인 독자들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라는 문학이론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문학의 현실적인 모습에 관심이 갈 것이기 때문에, 세계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하다. 세계문학이 평범한 독자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예가 바로 위에 언급한 두 글이다. 2부 4장, 조영일(동덕여대 강사)이 쓴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취급하여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해 놓고 있다. 여태까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왠지 자신의 수준이 떨어져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금기’(301쪽)가 있었는데, ‘일단 국내에서의 지속적인 인기와 국외에서의 높은 평가 때문’(303쪽)에 재평가받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더하여 만일 하루키가 노벨상이라도 타게 된다면? 조영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21세기는 하루키의 세기가 될 것 같다.” 이글의 요점인즉, 하루키에 대해서 그간 과소평가해 왔다는 것이다. 즉, 하루키가 단순히 서브컬처적 요소(292쪽)를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비평가이자 미국문학 전문가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308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세계문학으로서의 하루키를 논하며, 우리 문학의 편향성을 나무라고 있는 점이 이글의 좋은(?) 점이다. 또한 3부 5장, 김경연의 <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뜨겁게’ 읽어낸 글이다. ‘뜨겁게’라는 말은 가슴 벅차게 감격하며 읽었다는 말이다. 강경애의 소설 <소금>을 전에 접한 적이 있었지만, 김경연이 말하는 바와 같은 기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 글은 세계문학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의 아픈 곳과 여성의 질곡사를 폭로하는 글이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메뚜기>, 문금분의 시 <지문에 대하여>와 송신도의 기록, 그리고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허련순의 <누가 나비를 보았을까>, 강영숙의 <리나> 등, 그냥 지나쳤던 그들의 기록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이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글에서 주목했던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작가의 정체성이나 소재의 동일성이 아니라 이산 여성들의 편력을 추적하며 그들의 열망과 저항을 읽어내는 공감의 공동성에 지지된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이산 여성들을 단지 희생자로 연민하고 그들의 수난을 기록하는 서사가 아니라, 가부장적 근대 체제의 야만을 증언하는 서사이며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공모하려는 서사이다.> (501쪽)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게 세계문학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이론보다도, 실제적으로 인생을 기록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기능으로서의 세계문학! 그래서, 나에게 누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려보라 한다면, 유수한 분들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같이 하려는 문학작품’이 '세계문학'이라고 말이다.
마저 그의 글을 읽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가 요청하는 다른 세계의 실현은 이제 전적으로 우리 몫으로 넘어왔는지 모른다.> (502쪽) 그런데 왠일인지, 나는 그의 말, ‘넘어왔는지 모른다’는 말이 ‘넘어 왔다’로 읽혔다. 그렇게 나는 이 책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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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출판사 현암사의 서평 지원 이벤트로 읽은 책입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세계문학전집을 통하여 작품들을 접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다양한 출판사를 통하여 세계문학이 추가적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기의 작품들은 한번쯤 들어봄직한 고전이라든지 유럽이나 미국의 문학 작품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은 현재까기 꾸준히 추가가 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3세계 작가들의 작품들도 꾸준히 소개가 되고 있다. 조금씩 변화해가는 세계문학의 형태를 이러한 출판사의 신간 발행을 통하여 인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는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인 세이초의 작품을 즐겨 읽는 편인데,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모래그릇>이 모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실려서 발표가 되었을 때, 더욱더 세계문학에 대한 궁금증이 쌓여갔다. 세계문학의 기준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질문으로 시작된 나의 궁금증은 결국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책으로 연결이 되고 만 것이다.
단순한 의문을 통하여 이 책의 첫장을 보는 순간 만만치 않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구성을 살표보면 <1부. 세계문학의 유럽중심주의를 넘어>, <2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3부. 아시아문학과 세계문학>으로 나뉘어 있으며, 해당 파트에 논문의 형태로 글들이 실려 있다. 글을 실은 사람들도 대다수 문학과 출신의 교수들이어서 그저 단순히 세계문학의 기준이 무엇이길래 출판사별로 소개되는 작품이 다를까라는 궁금증으로 이 책을 접한 나로서는 전문서적처럼 느껴진다. 이공계 출신으로서 그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내가 읽기에는 결코 평이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우선 3부로 나뉘어 있는 책의 특징을 큰 틀로 생각하여 그러한 틀에 맞게 읽어가면서 조금씩이나마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차근차근 접근해보기로 하였다.
세계문학의 개념은 단순하게 단어만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오래전 서구 중심의 사회에서 세계란 결국 자신들이 속한 유럽 내지는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이 생각하던 세계문학과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문학의 개념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세계문학의 개념의 효시를 괴테와 마르크스로 꼽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1827년 괴테의 "세계문학의 시대가 목전에 와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발언과 1848년 마르크스의 "민족적 일방성과 편협성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수많은 민족 및 지역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일어난다"라고 <공산당 선언>에서 밝힌 견해가 바로 세계문학의 정의에 근접한 것처럼 보여진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들의 발언은 어쩌면 당연하고 보편적인 내용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유럽 중심주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들의 주장은 생소한 개념으로서 '세계문학 = 유럽'이라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의견처럼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1800년대 제기되었다는 점과 이들의 의견이 있은 이후에도 본격적인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립의 흐름이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코 모레티와 파스칼 카자노바의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는 눈여겨볼만하다. 그동안 유럽 내지는 미국 중심주의의 문학 체제에서 주변부 국가의 문학의 존재를 세계문학에 편입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카자노바는 중심국과 주변국의 교류, 소통, 연대의 가능성을 언급하여 세계문학의 범위를 유럽에서 그 주위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서 중심국과 주변국의 단어를 사용한 것을 살펴본다면 결국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불평등한 위계를 당연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을 유럽(특히 그는 프랑스를)으로 설정을 하고, 우리나라와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이 그러한 자오선에 다가가기 위하는 과정을 교류 내지는 3세계 국가의 문학적 발전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해보인다.
" 특히 모레티와 카자노바의 세계문학론에서 공히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문학이 세계적 인정과 명성, 그리고 세계적 지위를 어느 정도 확보한 문학 텍스트일 뿐, 앞서 괴테와 마르크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족문학의 특수성과 편협성을 뛰어넘어 민족문학들이상호 문화적 대화를 통해 확보해가는 보편적 이념과 휴머니즘적 기획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 p. 62 - 위와 같이 책에서는 비록 세계문학의 범위를 확장시키긴 하였어도 모레티와 카자노바의 세계문학의 중심이 유럽의 중심이라는 의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모레티의 세계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서구적 형식과 로컬적 제재 간의 타협'이라는 테제를 보기만해도 그들이 가진 유럽 중심주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을 넘어서기 위하여 <1부. 세계문학의 유럽중심주의를 넘어>로 기획이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에 비교문학의 권위자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은 유럽 중심주의의 편협함을 일깨우기 위하여 소개가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중국의 루쉰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유럽에서 3세계로 분류하는 국가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루쉰의 <광인일기>, <아Q정전>과 같은 작품에서 유럽인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와 집단 경험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은 유럽 중심주의의 형식주의를 극복하고 있는 3세계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즉, 프레드릭 제임슨은 비유럽적인 요소라고 해서 배격되거나, 폄하되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계문학이란 무엇일까? 이 책이 여러 학자들의 논문으로 구성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 세계문학에 대한 정의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있기에 세계문학에 대한 확실한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먼저 논의된 유럽 중심주의의 세계문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것들을 보완하는 설명으로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문학이라는 범위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세계'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면 그 중심이 어느 한곳으로 정의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기에 이 책에서 소개된 글도 기존의 유럽 중심에 대한 비판과 함께 3세계 국가 문학이 세계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현재 세계문학속의 한국 문학의 현실과 더불어 비유럽국가들이 처한 문학적인 상황이 논의가 된다.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의 소설 작가 하루키에 대한 논쟁이다. 갑자기 한국 문학의 현실을 이야기하는데 왜 하루키가 언급되는 것일까? 최근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언급되고 있으며, 발표하는 소설마다 우리나라는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에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는 하루키. 이미 그는 세계적인 문학 작가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럼 이러한 하루키가 우리 한국 문학의 현실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우리나라에 처음 하루키의 작품들이 소개가 되었을 때,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성공을 하였으나, 실상 우리 문학의 권위자들은 하루키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 가볍다, 몰역사적이다, 키치적이다, 소비 지향적이다, 도시적이다,서브컬처로 도배되어 있다 등등"와 같이 책의 표현대로 하루키는 우리나라 작가나 비평가 사이에서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1Q84> 이후부터 그러한 시선이 확 바뀌면서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쓰기 성향도 하루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닮아가고 있으며, 비평가의 평도 그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개인적으로도 공감을 하고 있던 부분이다. 사실 나도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로 소개된 작품부터 최근에 나온 작품들의 평을 들여다본다면 그의 작품에 환호하는 대중들이 있는 반면 한국의 비평가는 초기 부정적 시각에서 현재에는 그에 대하여 찬양의 발언이 나오고 있음을 보아왔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오는 것일까? 하루키는 이미 세계문학에 당당히 편입될 수 있는 세계적인 작가의 위상을 갖추었기 때문은 아닐까? 현재 한국 문학의 현실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설명한 글중 다음의 내용을 보면 하루키의 성공과 더불어 다소 암울해보이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 볼 수있다. "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현재 한국문학 공간에 들어와 있는 다른 나라 문학,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미권 문학의 일급 작품들과 비교하면 한국문학의 현재적 수준은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예컨대 한국문학에 대거 소개된 현대 미국문학의 거장들인 토머스핀천, 코매 맥카시, 필립 로스, 돈 드릴로 등에 견줄 만한 한국 소설의 거장은 누가 있는가. 한나라 문학의 수준은 양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나라 문학이 도달한 최고 수준의 작가와 작품으로 가늠된다.(중략)" - p. 241 -
이전에 하루키와 비교되는 것을 마치 통속적인 대중작가라는 뉘앙스를 받는 것 같아서 꺼림칙해하던 작가가 오늘날에는 앞서서 하루키의 작품을 추천하거나, 하루키와 연관된 책들을 써내는 현상을 보면 세계문학속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문학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우리나라의 말이 번역이 되었을 때, 제대로 그 분위기를 전달하지 못하고, 우리의 소재가 영미권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초래한 것일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자위를 하고 있는 상황을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는 좀더 논리적으로 현재 한국문학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꼭 읽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 책의 글들은 분명 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100% 절대적인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취사선택을 통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좀더 이 책을 세분화 하면 1부와 2,3부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편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부를 쉽게 나의 호기심과 매칭시킨다면 세계문학전집에서 초기에는 교리처럼 유럽 출신의 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시켰느냐하는 점이었으며, 2, 3부는 최근 세계문학으로 편입되는 작품들이 아시아, 남미와 같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였기에 이러한 개인적인 의문을 계속 떠올리면서 이 책을 읽으면 다소 생소하고, 전문적인 내용의 글을 읽더라도 흐름을 놓치지 않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해마다 우리는 노벨문학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작가가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도 해마다 꾸준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노벨문학상에 목을 메는 현실이 이 책을 읽고 나니 카자노바가 설정한 문학의 그리니치에 다가가이 위한 것은 아닐까? 또는 한나라의 문학 수준은 결국 최고 작가의 수준으로 평가가 된다는 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문학의 정의에서부터 확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세계문학 속의 한국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세계문학이라는 틀을 확장을 시켰지만, 정작 그 틀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더욱 비극적인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고, 과연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우리나라 문학계의 반응도 궁금해진다. 책의 제목처럼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 있는 우리의 현실을 이 책을 통하여 인식한 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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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세계시장에 대한 확대도 있겠지만, 출판시장에서 모두가 앞 다투어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세계문학 전집 시장을 보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성공으로 인해, 다른 출판사들도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하는 형국이다. 세계문학 전집의 대표주자로 민음사가 있지만, 그 뒤로 문학동네, 열린책들, 을유문화사, 웅진(펭귄클래식), 문예출판사, 시공사, 창비, 대산세계문학총서 등, 내가 아는 출판사를 제외하고도 수십 종에 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학전집을 왜 이렇게 출판시장에서 서로 출간하려고 하는지에 생각해보니, 우선 작가에 대한 인세가 들지 않고, 좋은 번역자만 있으면, 출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말소되기 때문에, 출판사 재량으로 책을 번역해서 출간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많은 출판사들이, 국내외의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알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출간하는데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이 외국어 능력이 출중하면,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라는 사이트에서 영문 원본을 구해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 않기에, 좋은 번역본을 보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이 책은 3부작으로 되어있다. 세계문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1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주제의 2부, 아시아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문학론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은 괴테인데, 그러한 세계문학론을 발전시킨 내용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우선 1부에서는 세계문학이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19세기~20세기에만 해도, 세계라는 지역이 사실, 서구유럽과 미국에 한정되어 있던 것 같다. 제국주의적 패권다툼과 식민지 개척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식민지였고, 세계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서구유렵과 미국밖에 없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난민이란, 국민의 권리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 난민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식민지 국가에서, 세계문학적 헤게모니를 장악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양에 대한 동양에 잘못된 인식, 오리엔탈리즘적인 인식을 깨부수기엔 아직 부족한 것일까? 세계문학전집이라고 만든 출간작품들 중에 한국문학작품이 안 들어간 출판사들이 많다.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에 넣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문학전집의 개념을 외국문학전집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 한국문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1부에서 제시하는 문제점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구 유럽의 문학의 기득권은, 남미 문학, 아시아 문학, 아프리카 문학의 발전으로 인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에서도, 세계문학의 가치를 인정하게 해준 작가를 루쉰으로 꼽는다. 유럽에서 루쉰의 책들이 번역되고 읽히게 되자, 유럽중심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를 버리자고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현재, 노벨문학상도 서구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남미 지역 등에서 나오고 있으니, 세계문학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2부에서 제시하는 문제점은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많이 든다. 한국문학이 더욱 더 발전하려면, 외국에서도 읽어야 하는데, 한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한국작품이 외국문학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스타 작가들의 선전이 보이긴 하나, 무라카미 하루키, 파울로 코엘료, 알랭 드 보통 등, 한국에서 잘나가는 작가들이 책을 출간하면, 여지없이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시장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한국 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님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의 2부에서 보면,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이라는 주제의 글이 나온다. 이 주제에서 보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작가들이 하루키를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기존의 한국의 작가들이 하루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아서, 신인 작가들조차 하루키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적 문학세계를 비판하기에는, 하루키가 이루어낸 것이 너무 많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상인, 카프카상, 예루살렘상을 수상했고, 작품을 내면, 세계문학시장의 대부분을 휩쓴다.
로쟈 이현우님은 세계문학을 네 가지 범주로 정의했다. 나 역시도 이 범주가 어느정도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의미, 즉 ‘해외 문학’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서의 세계명작 혹은 고전을 뜻하는 세계문학,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 ‘세계문학’,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문학, 즉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문학이다. 하루키가 인정받은 부분은 셋째와 넷째의 범주라고 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이르고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문학적 가치를 세계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여 인정받았다. 이런데도 단순히 하루키를 비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한국문학이 발전하려면,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독자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한국문학이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3부에서 나오는 동아시아와 세계문학에 대해서는 식민지 국가의 비참함을 들어낸다. 서발턴이라 불리는 여성들의 비참한 참상과 식민지배 시절에 받았던 고통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문학이란 작품을 읽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에도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3부에 나오는 제3세계 페미니즘과 서발턴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변영주 감독이 만든 나눔의집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나온다. 이 영화는 강제 종군위안부에 대한 실상과 할머니들이 평생 고통받아온 역사에 대해 그린다. 이 영화를 만든 변영주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3부에서 세계문학의 의의는 전 지구적 공동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세계문학의 자본주의적 시장 확대뿐만 아니라 인류애의 가치도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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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기존의 세계문학은 유럽 중심적 근대성과 서양의 제국주의 시각을 은근히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각성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문학 행위를 ‘세계적’인 것으로, 우리 문학을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평가한다. 어떻게 보면 어느 국가나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적용되는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