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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마누엘 칸트" 내용보기
'역시 책세상문고!!'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명쾌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칸트의 글이 이렇게 재미있었다니, 도덕교육 공부하는 동안 그의 글은 비판들처럼 딱딱하고 어려운 글밖에 없는줄 알았는데 칸트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와 숭고에 관심이 있고, 예술교육을 도덕, 철학교육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논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마누엘 칸트" 내용보기

'역시 책세상문고!!'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명쾌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칸트의 글이 이렇게 재미있었다니, 도덕교육 공부하는 동안 그의 글은 비판들처럼 딱딱하고 어려운 글밖에 없는줄 알았는데 칸트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와 숭고에 관심이 있고, 예술교육을 도덕, 철학교육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논문을 준비하며 "판단력비판"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태가 되는 이 책을 읽으니 칸트가 무슨 생각으로 "판단력비판"을 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철학사조의 이름에 따라 입장을 부여하기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고자한 측면이 있었고(이성과 감정의 종합) 이는 칸트의 미학에서도 나타난다고 보게 되었다. 인간을 구성하는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지성, "실천이성비판"의 에서의 욕구와 이성의 다리가 되는 것이 "판단력비판"의 주관적 보편성을 갖는 취미판단이기 때문이다. 자연세계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그 질서에 맞게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을 도덕적 실천이라고 본다면 그 다리가 되는 반성적 판단력이 중요하리라는 생각이다.

마음의 전체 능력

인식능력

선험적 원리

적용대상

인식능력

지성

합법칙성

자연

쾌·불쾌의 감정

판단력

합목적성

기예

욕구능력

이성

궁극목적

자유

(백종현 역, "판단력비판", p.187)

 

관념론자로 분류되는 칸트는 이 책을 경험론적인 방법으로 쓰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봤을 때 칸트는 철저한 근대인이었다. 아마 이 "고찰"이 그의 비판 시리즈만큼은 인기가 없었던 이유는 성별과 민족에 대한 그의 근대인적 시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멀리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가 글로 배웠던 사례들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남성과 여성에게, 민족적 성향에 그런 경향성이 없지 않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 읽어내려갔다. 누군가는 화를 낼지도 모르는 내용이지만 딱딱해보였던 칸트라는 철학자가 타인에 대해 마음 속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었구나 싶어서 재미있었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경험론적 방법'으로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도덕과 교육학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정의'와 '배려'일 것 같다. 길리건과 나딩스는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을 위한 도덕교육이 '정의윤리'를 중심으로 한 남성 중심의 도덕교육이었다며 '배려윤리'를 중심으로 한 도덕교육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미에 대한 성차를 다룬 부분을 읽으면서 '정의윤리'와 '배려윤리'가 생각났다. 칸트가 말했던 아름다움에 대해 갖는 남성과 여성의 경향성 차이가 정의윤리와 배려윤리로 나타나지 않나 싶어졌다. 

 

 <<고찰>>에서 칸트는 주관의 심리 상태(1장), 인간 일반의 특성(2장), 인간의 성별 차이(3장), 그리고 사회의 총체적 집합체인 민족의 특징들(4장)에 대해 다룬다. (p.125 번역자 이재준의 해제 중)

그는 인간이 쾌불쾌와 관련된 취미판단의 근거가 되는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1장에서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2장에서는 히포크라테스의 4대기질설을 가져와 그 두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3장에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의 경향성과 숭고함을 추구하는 남성의 경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에서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해 각 민족이 가진 경향성을 풀어간다. 아마도 우울질이었고 남성이고 독일인이었던 칸트가 어떤 자세로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해 쓰고 있는지에 집중해서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역자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번역이 매우 깔끔한 느낌은 아니지만 읽는데 큰 지장은 없는 것 같다. 짧지 않은 해제 '미학 이전의 미학, 칸트의 <<고찰>>'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미학을 공부했다는 역자의 친절한 해제 덕분에 경험론에 토대를 둔 다른 철학자들의 미학이 궁금해졌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1.02.23. 신고 공감 2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칸트의 미학, 무엇이 아름답고 숭고한가
"칸트의 미학, 무엇이 아름답고 숭고한가" 내용보기
칸트의 미학. 솔직히 말해 이 책은 지금 시절에 맞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나의 견해에 대해, 미학이라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그것의 주관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으로 본다면, 정확한 판단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혹하게 하는 것에 대한 가치와 미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말아 달라는
"칸트의 미학, 무엇이 아름답고 숭고한가" 내용보기

 칸트의 미학. 솔직히 말해 이 책은 지금 시절에 맞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나의 견해에 대해, 미학이라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그것의 주관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으로 본다면, 정확한 판단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혹하게 하는 것에 대한 가치와 미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다.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지성과 감성에 대한 무게에 차별을 두고 싶은 게 아니라, 그의 미학이 현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칸트는 숭고함이란 감동시키는 것을 말하며, 아름다움이란 매료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숭고한 성질은 존경을 환기시키고, 아름다운 성질은 사랑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더불어 '인간 본성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보편적인 근거로서 그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허나 그 감정이 절대적이며, 보편성이 아니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감이 든다. 어째서 성별(性別)에 따라, 민족에 따라, 인종에 따라 그것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화가 났던 여성의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은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것을 가장할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더욱 지적이며, 더욱 숭고하다는 것을 전제로 이러한 감정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 유럽 각국의 민족적 특성을 통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알아 본 것 역시 의아하다. 어느 정도 각 민족의 특성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을 테지만, 갈수록 세계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것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뒤떨어질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764년이다. 칸트가 그 시대의 '심오한 지성'이었다고는 하나, 또 이러한 심미적인 감정이 이론과 일상의 내용에서 유리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것을 변명의 여지로 남길 수 있을까. 물론 18세기에는 칸트뿐 아니라 많은 이론가 사이에서 유행했던 이런 미학체계는 시대적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입각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로서는 그들이 미숙한 경험의 한계점에 부딪힌 것으로 밖에 여길 수가 없다.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정언명령이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자유의지가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하던 칸트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게다가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선의지가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인간 감정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또한 자연적으로 본성에 내재해 있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대상이 더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이성과 감성의 종합을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

 

 칸트는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내리는 미적 정의, 즉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은 칸트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고, 그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숭고한가 지적인가를 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발언을 남발하며, 또한 여성이 지적이려 시도하는 것이 몹시 추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분노까지 할 정도였다.

 

 미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그것에 발맞춰 나가는 사회 속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는 전제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칸트는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그는 미학에 관한 자신의 주관적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 분류화, 일반화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젊은 칸트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더불어 그 또한 18세기의 사람으로써 당시 미학 이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내 스스로의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론은 물론 대개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축적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와 더불어 비판은 그 이론의 비논리를 짚어 가며 발전하는데 앞장선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의 근원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칸트 미학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자위하련다.

m*******y 2007.10.19.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