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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교수님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1. 명분있는 대담성이다. 창세기를 ''고대근동의 창조설화''와 바빌론판 창세기 ''에누마엘리쉬''와 연결시켰다. 단순히 신변잡기용으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산발적으로 깔려있는 타당성있는 신학적 근거를 토대로 연결했다.(읽어보라), 저자의 대담성은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저자의 학식에 기반을 둔 영성깊은 상상력에 그 대담성의 명분을 본다. 2. 문학적 해석 우리는 지금것 문자적 해석에 길들여져 있었다.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어 영상으로 보는 성서를 통해서 시각적 감흥을 느껴보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적 해석은 지금 것 도외시 되어왔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번역한다는 작업자체가 신학이라는 살얼음판을 걷는 매우 섬세하고 위험한 작업이었으리라. 저자는 과감하게 문학적 번역을 실시한다. 특히,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장면은 다 아는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콧등을 시큼하게 만들었다. 3. 지적 희생 저자가 담아내고자 했던 내용을 절제하지 못했다면 아마 이 책의 분량은 600쪽을 훨씬 넘어버렸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문맥 그대로의 완성도를 위해서 잘라버린 흐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저 땅 깊은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파서 보여줄 수 있지만, 하나의 완성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우물을 새롭게 파기 시작한다. 이것은 지면의 한계에 따르는 지적 희생이다. 어떤 우물은 얕게, 어떤 우물은 깊게, 저자의 고도의 정신배양능력에서 나오는 시기 적절한 깊이의 절제는 책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인상깊은구절] 자신을 에서라고 소개하며 나타난 아들에게 "누구냐?"고 묻는다는 것은 에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예감의 피력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야곱의 목소리를 가진 이 아들을 두고 수 차례나 "네가 정녕 에서냐?"라고 묻던 이삭은 마침내 장자에게 돌아갈 축복을 야곱게에 부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