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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귀순'이 알려졌을 때 사실 환호했던 층은 그닥 뚜렷하지 않았다. 진보 진영이야 그 낭패감에 대해 두말하면 잔소리일 테고, 보수층이라 해도 김영삼 정권에 대해 깊은 염증을 느낄 대로 느끼고 있던 때라 이 엄청난 사건, 한반도에서의 오랜 체제 경쟁이 실질적, 상징적으로 공히 한 막을 완전히 내리는 충격알람에 대해 매스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그 이상의 호응(긍정이든 부정이든)을 절대 내비치지 않았다. 전자의 대표적 예라면 순수 양심(...)세력, 학구적 좌파이신 모 선생님의 강단에서의 발언 "그 자는 배신자 아냐?" 같은 것이 기억에 남고, 후자의 예라면 자칭 정통 보수 김종필씨의 "황은 귀순영웅이 아닌, 전범에 준해 처리해야 한다(뉘른베르크 법정 같은 거라도 개정해야 한단 소리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김)."등이 기념품처럼 크로니클에 남아 전할 명언 아닌 명언이겠다.
배신자란 예컨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결정적 전국에 결국 동군편으로 돌아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라든가, 임꺽정이를 관군에 판 서림이라든가. 혹은 명과 청 양 황조를 순차로 다 배반한 오삼계 등이 대표적인데, 나름 처세와 요령의 달인들이었으나 유취만년이란 성어에 값하게 민초의 입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더러운 캐릭터들이다. 황은 여하간 지난 반 세기간 저쪽 체제의 architect이자 foundimg fathers의 한 사람이었다. 家子도 아닌 家父長의 가출은 출가의 변이 그래서 더 뚜렷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점잖게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 보내야 할 경우도 생긴다. 댁의 전향은 일관성이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그 수용은 우리로서도 불가... 뭐 이런 태도는 우리 체제의 품위 유지를 위해 필요할 때도 있다. 황은 사실 지난 시절 자신의 전비에 대한 통회가 있었어야 했으나 형식에 불과했고, 그 과정에 크게 의혹이 일 만한 죽음에 대해서도 꼭 우리가 냄비여서가 아니라 어쩌면 어느 정도 당연한 의도에서 그냥 망각의 옵션이 취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당대건 후세이건 민중은 배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좌파 중 저열한 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지만, 정통 보수라면 그런 믿음을 합리화할 수단이 상대적으로 더 부족하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솔제니친, 사하로프 등은 냉전 시기의 영웅이고 스타였다. 냉전은 자본의 좋은 광고판이자 boom-upper였으며, 냉전의 총아들은 이들을 거리의 샌드위치맨으로 활용하였다. 인류 절멸을 담보로 한 대판 싸움에서 소소한(...) 갈등은 미봉되어야만 햇으며, 전통과 종교, 무지몽매의 사회구조까지 그 압력으로 가세했던 권위주의 체제는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총체적 붕괴를 중동에서 맞는 셈이다. 냉전 이후는 문명 충돌이라고 말한 샘 헌팅턴(이 어용나팔수도 이젠 고인이 되었다)은 완전히 틀렸음이 입증된 셈이며, 훤한 대낮에 한밤의 시야로 살아야 했던 민초들은 이제서야 고작 태양광을 두려움 없이 섭취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들에게 냉전은 지금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끝난 셈이다.
라이오넬 리치의 유명한 주제가 때문에라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 자신들 청춘 팬던트의 한 세공품으로 고이 간직하려 할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일개 프로파간다물로 격하 매도를 시도하고 있는 건 아니다(80년대 학번들은 유독 이 영화를 쌍쌍으로-그들에겐 이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린다- 극장에 많이들 보러갔다). 하지만 예를 들어 '데블스 애드버킷' 따위에서 보듯 테일러 헥포드는 보수의 가치를 참 유치하게, 그것도 요령부득으로 길게 떠드는 걸 좋아하는 범작의 연출자에 불과한 이라서, 이 화제작에도 역시 그 이름값에 걸맞은 높은 점수는 줄 수 없다. '사관과 신사' 역시 마찬가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현재의 성숙한 눈으로 들여다보면 루이스 고셋 주니어의 개화려한 연기 신공과, 제니퍼 원스-조 카커 듀엣의 Up where we belong(아무리 들어도 명곡이다) 말고는 건질 것이 없는, 원색적 징고이즘에 시대착오적 남존여비 사상까지 깃든, 썩은 유물에 불과하다.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고 노래한 구창모가 너무 좋았던 세대들은 이 영화 역시 제 추억의 한 소절로 기억하겠지만, 지금은 비슷한 또래 전영록 슬하의, 어머니를 많이 닮은 그 딸이 커서 아이돌로 데뷔할 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자신들의 추억이 얼마나 골동품에 가까워졌는지 새삼 놀랄 만도 하며, 그 정도 경각은 가져야 시대에 심각히 뒤처지는 우는 면하지 않겠냐는 진짜 사족을 덧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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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는 밤에 긋는 선처럼 은밀하고 구차스럽다. 어두울 때, 뒤에서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남을 욕하는 행위 만큼이나 비밀스러운 그것, 자유를 꿈꾸고 예술을 혁명하는 일. 일련의 것들 중 단연 돋보이는 '비상'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나를 떠미는 간곡함이다. 왜 떠밀려가는지, 어째서 빠져드는지 몰랐더니 막이 내리고 나서야 생각한다. 이 영화, 퍽 자유로운 시대(여러가지 의미에서 아닐지도 모르지만)를 살았던 내게도 꽤 설득력을 갖는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백야]는 바로 그 예술과 자유의 선을 밟고 선 발레리노와 탭댄서의 간절한 갈망을 담는다. 물론 자유에 대해서. 갖지 못한 것을 열망하는 건 당연지사,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인지하는 건 일정이상의 수준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미 가진 것을 반납하려는 자 있던가. 때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 시베리아 상공을 날던 여객기는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세계적인 발레리노 니콜라이를 태운 채 소련에 불시착한다. 목숨보다 중요했던 여권찢기. 니콜라이에게 소련은 다시 가서는 안되고 가고 싶지도 않은 땅이다. 의식 잃은 그는 깨어나자마자 소련 차이코 대령에게 고향에서의 무대공연을 강요 당한다. 이 장소는 떠나야 하고 떠나고 싶은, 비상할 수 없는 곳이자 고인 물일 뿐인데 벗어났다 싶은 순간 운명처럼 다시 찾아들게 된 것이다. 니콜라이는 당국의 감시차 비슷한 처지의 흑인 탭댄서 레이몬드와 그의 소련인 아내 다라에게 맡겨진다. 온갖 발톱을 세우며 거부하던 니콜라이에게 레이몬드의 이야기는 그의 춤보다 화려하고, 억압된 현실보다 암울해서 설득력을 가진다. 흑인의 고충과 월남전에 항의하다 탈영한 것까지 온통 들쑥날쑥 얼룩진 삶이다. 도망치고 탈출하고 실패하고 대가를 치른다. 니콜라이가 레이몬드를 이해하는 순간, 이겨내기 위해 온 힘을 합해야 하는 동지가 된다. 눈물 젖은 우정은 이후로도 쭈욱 가슴을 울린다. 그들이 추는 춤만큼 이상적인 가치는 더이상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처럼.
마하일 바르시니코프가 발레리노 니콜라이 역을 맡았다. 실제 발레리노이자 예술인으로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예술인의 고뇌와 갈망, 국적 선택 의 딜레마, 천재적 춤 등을 보여준다. 연기와 비(非)연기의 경계에서 바로 다음 작품으로 [지젤]이 있다. 1948년 소비에트 공화국(현 라트비아 공화국)으로 신장이 170센티에 불과하지만 작은 체구라는 사실을 숨길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다. 무용이나 춤은 팔다리가 길고 키가 커야 더 멋질거란 선입견이 있었나 보다. 라트비아는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발트해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13세기 이후부터 줄곧 외세의 지배를 받다가 1918년 독립하였다. 그러나 곧 독일 및 소련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고 1991년에야 다시 독립했다. 러시아 북서부에 위치하며, 수도는 리가(이)다. 소련, 러시아 영화 속의 망명 예술인 캐릭터가 실제 삶이기도 하며, 오늘날 광고 속에 차용된 의자 등받이를 밟고 올라섰다가 착지하는 유명한 장면이 바로 이 영화 속에 나온다. 사랑과 우정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믿음이 가능하고, 믿음이 자유를 겨냥하게 하며, 자유에의 쟁취가 곧 예술의 경지가 되는 일련의 가치들이 향하는 곳은 궁극적으로 행복이다. 누가 누구의 자유를, 행복을 저지할 수 있는가. 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 영화 [백야]의 힘은 자유를 위해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가, 그 용기가 어디까지인가를 넘어 비로소 자유와 예술을 쟁취하는 자들의 꿈을 황홀하게 담아낸다. 현역 댄서였던 두 남자배우의 찬란한 춤과 화면 사이로 전해져오는 간절한 열기 그리고 냉전의 시베리아를 우리는 대립이 아니라 하나로 기억한다. 니콜라이와 레이몬드의 불가능해보였던 간절함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이제 그만 그들을 보내줘도 될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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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너무나 화제가 되었던 CF가 있었다. 지금은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모델 출신의 '이종원'이 인상적으로 데뷔했던 광고였다. 그 광고에서 '이종원'은 텅빈
건물 안에서 의자를 하나 놓고 강렬한 춤을 펼친다. 그리고 마지막의 의자를 이용한
퍼포먼스는 이후에도 다양하게 모습을 바꿔서 만날 수 있는 명장면이 되었다. 그 CF
의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이 영화 '백야'였다.
1985년은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간이었다. 심지어는 그 직전의 두 번의 올림픽은 각
각 미국과 당시의 소련에서 개최되었고, 냉전의 양쪽 진영에 있던 나라들이 올림픽의
참가를 각각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그 시기는 냉전이라는 말처럼 실제로 벌
이는 전쟁보다 더 긴 시간을 더 차갑게 서로를 향해서 공격을 주고 받는, 그리고 그 상
황에서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양 극단의 한쪽으로 몰아 통제하는 그런 시기였다. 그 상
황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이 '백야'였다. 그것도 그 주인공을 소련을 탈출한 유명
한 무용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는 것에서 '백야'는 당시의 냉전의 영향에서 자유롭
기가 어려운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백야'에서 보여지는 소련의 모습은 너무나도 삭막하다. 물론 주인공인
'니콜라이'가 처음 일종의 강금상태를 경험하는 지역이기에 완전히 사람이 없는 지역
을 보여준 것이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스크바에
서의 상황도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소련이 얼마나 통제된 사회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 영화는 하지만 그러한 부분들은 결국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으로 충
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좋은 선택이기도 하다. 그리
고 그러한 부분들을 냉전의 결과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출신의 흑인 탭댄서 '레이몬드'와 그의 소련인 아내인
'다나'의 모습에서 그러한 부분들이 상쇄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인종차별로 미국을 탈출한 흑인인 '레이몬드'의 모습과 그가 자라면서 경
험한 미국의 모습이 '니콜라이'가 탈출한 소련의 모습과 겹치면서 냉전의 시대를 살아
간 두 예술가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선택한 탈출은 단순
한 그 상황에서의 탈출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그리고 냉전의 이념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게 이 영화는 냉전 시대의 논리에서 탈출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모든 서로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춤'을 도구로 해결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니콜라이'와 '레이몬드'의 갈등
도, 그리고 '니콜라이'와 그의 옛애인인 '가리나'와의 갈등도 결국 '춤'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결국 머리로 하는 이념 논쟁보다 예술의 힘이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한 것
인지를 이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통해서 영화 '백야'는 보여준다. |
| 라이오넬 리치의 '세이유 세이미'는 10년전 라디오에서 왠만한 인기곡의 방송횟수를 훌쩍 넘기던 때가 있었다. 그 음악이 이 영화의 끝에 나왔다는 멘트도 꼭 소개되면서 말이다. 망명을 원하는 주인공과, 탭댄서 흑인친구의 영화속 모습은 감동과 함께 우리에게 생소한 발레라는 춤을 영화내내 한껏 보여주기도 했다. 명화는 봐줄 필요가 있다. 명화는 세월이 지나도 그 색이 바래지 않는다. 이런 저렴한 가격에 이런 좋은 영화를 집에서 아무때고나 보고 즐길수 있는 시대에 감사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