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86)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26%
  • 리뷰 총점8 43%
  • 리뷰 총점6 27%
  • 리뷰 총점4 3%
  • 리뷰 총점2 1%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6.0
  • 40대 7.0
  • 50대 8.0

포토/동영상 (1)

리뷰 총점 종이책
하루키의 높아져가는 문학적 위상, 그리고 나의 실망
"하루키의 높아져가는 문학적 위상, 그리고 나의 실망" 내용보기
하루키와 같은 인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운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나위 정도의 중견 밴드가 신보를 발표할 때면, 이번 음반은 또 어떤 음악으로 돌아왔을까, 하고 기대하다 못해 (경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는 못 베기기 마련이다. 나에게 하루키는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다(그래서 가끔은 하루키가 한국인이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하루키의 높아져가는 문학적 위상, 그리고 나의 실망" 내용보기
하루키와 같은 인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운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나위 정도의 중견 밴드가 신보를 발표할 때면, 이번 음반은 또 어떤 음악으로 돌아왔을까, 하고 기대하다 못해 (경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는 못 베기기 마련이다. 나에게 하루키는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다(그래서 가끔은 하루키가 한국인이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좋아하던 예술가의 신작이 언제나 기대를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들의 창조물 역시 변해간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간에. 일단 본작에서 특이하게 다가오는 것 중 한 가지는 ‘우리’로 지칭되는 전지적 ‘카메라 시점’의 사용이다. 이런 시점은 작법상 상당히 색다른 시도이며, ‘알파빌’의 기계적인 이미지와 맞물리며 효과적으로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개인적 차원에 머물렀던 하루키가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던 쿨(cool)한 내러티브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전작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반응(실패라고까지는 부르지 않겠다)을 의식했는지, 본작 [어둠의 저편]에서 차용되고 있는 이미지들은 비교적 명확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제를 요약하자면, 인간에게서 밤을 빼앗아가버린 현대 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 정도로 명쾌히 풀어쓸 수 있을 정도이다(여기에 프로이트적 해석을 끌어다붙이는 건 평론가의 재량이지만, 개인적으로 책에 실린 권택영 교수의 해설은 납득하기가 조금 어렵다). 탁월한 문제의식에 비해, 대안적 메시지는 (여전히) 다소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정말로 ‘기억’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하루키 상?), 전반적으로 일관성과 유기성을 갖추고 있으며, 흠잡을데 없는 한 편의 근사한 소설이라 평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하루키 팬들이여, 만족하는가? 하루키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후로,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변모해가고 있다. 아쉽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그로 인해 그의 문학적 위상이 향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하루키는 좀더 ‘재미없는’ 소설을 쓰고 있다. 500년쯤,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어둠의 저편]을 고전의 반열에 끼워줄런지도 모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아쉬움, 실망감, 나아가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하루키와 동시대 속에서 그의 작품들과 더불어 살아온 나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05-6-15) 덧1: 본서의 역자는 문학사상사 편집고문이라는 임홍빈 씨로 되어 있는데, 약력을 보니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56년에 기자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연세가 6~70세라는 얘기인데, 과연 이 분 혼자서 본서를 번역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바이다. 출판업체의 사정이야 일개 소비자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데뷔 25주년 기념작이라는 거창한 카피와 함께, 도무지 하루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 분의 고리타분한 후기를 읽고 있노라면, 의심은 더더욱 깊어진다. 덧2: 이것 하나만은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여전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jazz들은 하나같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이다. 특히 국내 모 유통사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벌인바 있는 커티스 풀러의 [Blues-ette]는, 정말로 명반이다. 그리고 문학사상사는 매우 친절하게도, 책 속에 등장한 뮤지션들에 대한 소개를 책 말미에 부록처럼 싣고 있다.
r****a 2005.06.16. 신고 공감 59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카프카이후,,,
"카프카이후,,," 내용보기
솔직히 카프카보다 발전된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은 안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재밌지도않고요 하룻밤동안 일어나는 일들,,,, 카프카에서 가장 재밌던 부분이 고양이와 대화하는 노인이 등장하는 짝수장의 이야기였는데,, 그런분위기는 아니고 비교적 정적이고 대화가 많은 홀수장의 분위기와 비슷하네요 사건중심보다는 대화중심인것같은데 하루키씨도 그다지 무게있게 쓴 것
"카프카이후,,," 내용보기
솔직히 카프카보다 발전된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은 안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재밌지도않고요 하룻밤동안 일어나는 일들,,,, 카프카에서 가장 재밌던 부분이 고양이와 대화하는 노인이 등장하는 짝수장의 이야기였는데,, 그런분위기는 아니고 비교적 정적이고 대화가 많은 홀수장의 분위기와 비슷하네요 사건중심보다는 대화중심인것같은데 하루키씨도 그다지 무게있게 쓴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새로운 형식을 시험삼아 쉽게쉽게 쓴거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와도 같은 시점이나 하룻밤이라는 제한된시간속에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실험적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재미'나 '감동'을 느낄수는 없군요 하루키팬이라면 재밌게 읽으시겠지만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재밌게 읽힐것같지는 않네요,,,

[인상깊은구절]
없음
YES마니아 : 로얄 t******n 2005.06.12. 신고 공감 26 댓글 7
리뷰 총점 종이책
삶의 연료이자 상처인 어둠 속의 기억들...
"삶의 연료이자 상처인 어둠 속의 기억들..." 내용보기
"때때로 나는 내 그림자하고 경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끝까지 도망칠 수가 없어. 자기 그림자를 뿌리칠 수 없는 것처럼."(233쪽)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
"삶의 연료이자 상처인 어둠 속의 기억들..." 내용보기
"때때로 나는 내 그림자하고 경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끝까지 도망칠 수가 없어. 자기 그림자를 뿌리칠 수 없는 것처럼."(233쪽)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 그저 연료일 뿐이지."(235쪽) 사람들의 감성이란 때로 섬뜩할 정도로 비슷한 작동시스템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신작 『어둠의 저편』(문학사상)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된 단순한 사실이다. 책을 읽으며 드문드문 밑줄을 쳐두었던 문장들이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감상노트'(권택영 교수)와 벌써 이곳저곳에 올라와 있는 '부지런한 리뷰'들에서 고스란히 인용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한편 반갑고 한편 씁쓸하다. 무릇 소설이란 보다 다양하게 읽히고, 보다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할 상징덩어리가 아니던가. 하물며 하루끼의 소설은... 뭔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 듯한 위의 두 인용문들은 뜻밖에도 소설의 주인공이나 주요 등장인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아니다. 이제 막 삶과 사랑의 의미를 모색하기 시작한 주인공 마리와 다카하시가 그런 말들을 쏟아냈을 리는 물론 없다. 그렇다고 굳이 인생의 실패자로 묘사한 러브호텔 종업원 '고오로기'(귀뚜라미)의 입을 빌릴 이유가 있었을까.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바로 하루끼 소설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슬쩍 지나치는 인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소설의 주제를 던져놓고, 주인공들은 그 화두에 이끌려 시종 고뇌하고, 숨차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다 찼다 싶은데도 여전히 결말은 오리무중이고... 마리와 에리는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자매다. 언니 에리는 대단한 미인이지만 동생 마리는 미모보다는 머리가 좋은 편이다. 둘은 특히 어둠 속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언니 에리는 그저 잠의 세계에 빠져 있을 뿐이다. 반면 동생 마리에게 어둠은 곧 삶의 의미를 모색하기 좋은 경험의 장이자 호기심의 천국이다. 그러나 종래 그러한 '일상적 어둠'은 마리와 에리가 서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던 '절대적 어둠'을 부각하기 위한 '보색'의 어둠일 뿐이다. 일상의 어둠 너머에 있는 절대적 어둠, 즉 생의 시원으로서의 어둠이 존재했던 것이다. 소설의 주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에리와 마리는 생의 시원始原, 즉 한 자궁을 통해 세상에 나온 근원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분법적 단순 관념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에서 서로의 일체감을 상실한 채 방황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마리는 하룻밤 일상의 어둠 속에서 배회하며 이러저러한 삶의 군상들과 만나고 엉뚱한 사건을 목격하고, 특히 호기심 충만한 눈으로 마리 자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음악과 법을 공부하는 청년 다카하시와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시원의 어둠'(고배 대지진 당시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의 절대적 어둠 속에서 일체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그것은 곧 언니 에리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마음의 벽이 곧 일체감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서두의 인용문들은 스스로 해답을 내놓게 된다. 인생은 과거의 기억을 연료로 삼지만 때때로 기억은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즉 기억은 삶의 연료이자 치유해야 할 상처이기도 한 셈이다. 에리와 마리는 상처이자 연료로서의 기억을 망각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질감을 결핍감으로 고민해 왔다. 그러나 마리가 어린 시절 고베 대지진 당시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꼈던 일체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자매는 관계복원 혹은 애정회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무릇 현실은, 특히 현대의 도시인의 삶은 인간들의 무수한 기억의 실핏줄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낸 혈관들의 관계망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수한 혈관이, 흠잡을 데 없이 미끈한 몸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피를 순환시키고, 쉬지 않고 묵은 세포를 새 세포로 갈아넣고 있는 도시의 한복판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망각과 충전을 되풀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y****y 2005.06.18. 신고 공감 7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일반인의 이해도를 넘어서는 난해한 내용...
"일반인의 이해도를 넘어서는 난해한 내용..." 내용보기
좋아하는 작가를 대라고 하면 주저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말하곤 한다. 초기에 나온 책들을 보면 물론 전반적인 분위기와 추구하는 바가 그리 다르지는 않겠지만 이해도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범국가, 범국민 등의 말에 쓰이는 "범"이라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최근들어 나오고 있는 여러 작품들을 보면 내
"일반인의 이해도를 넘어서는 난해한 내용..." 내용보기
좋아하는 작가를 대라고 하면 주저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말하곤 한다. 초기에 나온 책들을 보면 물론 전반적인 분위기와 추구하는 바가 그리 다르지는 않겠지만 이해도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범국가, 범국민 등의 말에 쓰이는 "범"이라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최근들어 나오고 있는 여러 작품들을 보면 내가 점점 이해력이나 상상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작가만의 독특한 상상력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무슨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지 전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두번 세번 읽지만 여전한 것 같다. 어느정도 작가의 인지도가 정착이 되면 어떤 책을 발표해도 서로 칭찬을 하려고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에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앞뒤의 평론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의 내용에 반박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깊게 들었다. 평론이 이책을 주제로 만든 또다른 소설처럼 느껴졌다. 공부를 잘하는 평범한 모습의 동생과 얼굴이 예뻐서 모델을 하는 언니. 그런데 언니는 계속 무엇인가에 갖혀 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동생이 고민하는 여러가지 현실에서의 문제점, 가족과 타인들이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 그로부터 얻어지는 여러가지 고민들. 모두 어느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나의 형제들로부터 그런 고민들을 수도 없이 해왔다. 물론 결론은 우리는 형제라는 것이다. 항상 모든이의 기대를 받는 언니의 입장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이 꾸며진 이야기라지만 언니의 묘사부분은 어떤 각도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좀 망설여진다. 이해가 안되니까. 그저 내용에서 등장하는 학교동창인 남자로부터 묘사된 부분에서 언니의 심정을 추정해볼 뿐이다. 책 홍보를 보고 바로 구입하고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재미로 읽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좋은 책이라고 소개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r*****1 2005.07.10. 신고 공감 5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빛의 저편에는 어둠이 있다
"빛의 저편에는 어둠이 있다" 내용보기
오후 11시 56분부터 다음날 오전 6시 52분까지 채 일곱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소재로 중편을 약간 넘기는 소설이 하나 만들어졌다.  기승전결을 따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인지라 이 소설은 무엇하나 시원스레 해결되는 느낌 없이 이야기가 종료된다. 다만 내일의 해가 다시 떠오를 뿐이다.   '빛의 저편에 어둠이 있듯이 어둠의 저편에는 빛이 있다.' 하루키가 하고자 하는 이
"빛의 저편에는 어둠이 있다" 내용보기

오후 11시 56분부터 다음날 오전 6시 52분까지 채 일곱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소재로 중편을 약간 넘기는 소설이 하나 만들어졌다.  기승전결을 따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인지라 이 소설은 무엇하나 시원스레 해결되는 느낌 없이 이야기가 종료된다. 다만 내일의 해가 다시 떠오를 뿐이다.

 

'빛의 저편에 어둠이 있듯이 어둠의 저편에는 빛이 있다.' 하루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런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읽는 내내 종종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동안 세상은 또다른 모습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간다. 낮과 밤의 생명력은 마치 동전의 앞뒤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이나 서로 다르고 마주할 수 없으며 또 상호 타협이 불가한 무언가이다.

 

 지난 토요일 오전에 다소 피곤할 일이 있었음에도 타의에 의해 밤 10시 넘어 집에서 꽤 먼 거리인 논현역 근처에 갔었다. 자정을 넘도록 현란한 모습을 보이는 간판 들 사이의 어느 커피숍에서 난 꽤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24시간 운영하는 그 커피숍에는 우리들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남들 눈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서로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대는 연인들, 혼자 잡지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자, 아직 채 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에 초겨울에나 어울릴 듯한 얇은 털모자를 쓴 헬스 트레이너 만큼이나 몸이 좋은 사내, 노트북을 켜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머리가 아주 조금 벗겨진 중년의 남자 등.. 별로 대화에 집중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들을 관찰하면서 왠지 신선하고 생경한 느낌을 즐겼다. 2시 경 커피숍을 나왔을 때 낮과는 다른 이국적 정취와 세상의 생명력에 괜한 설레임을 느끼며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나와는 다소 무관한 정경과 밤의 기운이 내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는 느낌에 자주 이런 일탈도 필요한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나의 정서적 경험이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염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일들이 모두 반드시 시작과 결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게다. 시작은 있되 끝이 없을수도, 방금 끝이 났지만 그 시작을 짐작키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일상만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건 아니다.  '낮보다 아름다운 밤'은 결론이 없는 시작도, 시작이 없는 끝도, 그리고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작은 '일탈'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한다.

 

 

p***i 2009.09.07. 신고 공감 5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어둠이 끝나기 전에
"어둠이 끝나기 전에" 내용보기
한 사람의 의식의 세계, 말하자면 생각의 영역인 그곳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의 영역과 중첩되거나 공유될 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겠군요.  고성능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곳은 결국 '촬영 불가'의 견고한 딱지를 붙인 채 굳게 잠겨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어둠이 끝나기 전에" 내용보기

한 사람의 의식의 세계, 말하자면 생각의 영역인 그곳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의 영역과 중첩되거나 공유될 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겠군요.  고성능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곳은 결국 '촬영 불가'의 견고한 딱지를 붙인 채 굳게 잠겨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나는 오늘 의식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 두 곳 모두를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둘러 메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예컨대 <어둠의 저편>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어둠의 저편>을 소재로 말입니다.  핼리캠을 타고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의식의 총합은 현실에서의 거대 도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서 바라볼 때, 개개인의 영역은 너무도 희미하고 작은 것이기에 부분으로서의 개인적 영역은 눈에 띄지도,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듯한......"     (p.231)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56분입니다.  마리는 지금 도시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건은 '마리'의 언니 '에리'의 동창이며, 한때 언니와 함께 더블 데이트를 하기도 했던 '다카하시'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때마침 아버지는 교도소에 복역하는 바람에 고아 아닌 고아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다카하시'는 우연히 만난 '마리'가 그저 반갑기만 합니다.  '다카하시'는 지금 트럼본 연습을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다카하시'는 음대생이 아닌 법률을 공부하는 법학도이지만 트럼본의 매력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악기에 빠져 지내는 중입니다.

 

그 시각 언니 '에리'는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에리'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행위만 하면서 두 달째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에리'의 방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에리'만의 생각의 영역, 그 무의식의 세계가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리'보다 두 살 위인 언니 '에리'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외모와 약한 체질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에리'는 잡지 모델로 활동하며 TV에도 출연하였죠.

 

"하지만 에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고,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처럼 돼버렸으니까.  마리의 말을 빌리면, 어엿한 백설공주가 되려고 애써 노력해 왔던 거지.  확실히 남들이 잘한다 하고 떠받들어 주었다고 해도, 그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기라는 개성을 확립해 나갈 수가 없었을 테니까."    (p.179)

 

'다카하시'의 말입니다.  '에리'에 대한 '다카하시'의 분석인 셈이죠.  때로는 가까이 있는 가족보다 멀리 있는 타인이 그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마리'는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인 '카오루'를 만나게 됩니다.  '다카하시'는 이미 지하 연습실로 떠난 뒤였죠.  '알파빌'에서는 그날 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중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다카하시'가 '카오루'에게  '마리'를 소개한 것입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에 빠져있습니다.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어느 순간 '에리'는 침대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은 어떤 풍경도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에리'는 그 공간에서 잠이 깹니다.  그러나 이곳, 즉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는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외침만 보일 뿐이죠.

 

'마리'는 중국인 매춘부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알파빌'에는 '카오루'와 같이 일하는 '고오로기'가 있습니다.  귀뚜라미라는 뜻의 그녀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회사원이었던 '고오로기'는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러브호텔이라는 익명의 공간을 전전하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죠.  '마리'에게 고마움을 느낀 '카오루'는 스카이락'에서 음료를 대접합니다.  중국인 매춘부를 때리고 옷과 소지품을 탈취한 범인은 평범한 회사원인 사리가와입니다.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언니 '에리'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다카하시'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마리'가 있는 '스카이락'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공원으로 이동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마리'는 다시 '알파빌'로 자리를 옮겨 '고오로기'와 대화를 합니다.  '고오로기'로부터 들었던 인상깊은 말이 있군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아,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235)

 

연습을 마친 '다카하시'는 '마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향합니다.  이제 어둠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데이트 요청을 하는 '다카하시'에게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긴 편지를 쓰겠노라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언니 '에리'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꼭 안아주고 위로해주던 어린 시절의 언니 '에리'는 '마리'의 의식에서도 이미 멀어진 상태라는 걸 자각합니다.  '마리'는 언니의 침대에 같이 누워 눈물로 호소합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오전 6시 52분입니다.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작인 <어둠의 저편>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과는 다소 이질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점도 그렇고, 카메라의 영상이 바뀌는 것과 같은 화면 전환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 의식의 단절과 개개인의 고독을 무미건조한 문체로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카하시'와 '마리'의 만남을 통하여 개별적 인간의 의식의 공유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어둠이 다 끝나기 전에 말입니다. 



s*****l 2014.05.11. 신고 공감 4 댓글 3
리뷰 총점 종이책
아아~~하루키,하루키여~~
"아아~~하루키,하루키여~~" 내용보기
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 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탓에. 조금은 불안한 맘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전작처럼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즉슨 전작보다. 많이 나아졌다든가.. 다시 이전의 하루키로 돌아왔다든가는 하는 의미가 아니라, 전작의 실망이 조금은 쿠션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작 처럼 대책없이 이야기를 벌이다 어이없이 결말을 맺어버리는 우를 범하
"아아~~하루키,하루키여~~" 내용보기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 <해변의 카프카>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탓에. 조금은 불안한 맘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전작처럼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즉슨 전작보다. 많이 나아졌다든가.. 다시 이전의 하루키로 돌아왔다든가는 하는 의미가 아니라, 전작의 실망이 조금은 쿠션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작 <해변의 카프카>처럼 대책없이 이야기를 벌이다 어이없이 결말을 맺어버리는 우를 범하진 않았지만... 분명 그는 자신의 명성과 독자들의 기대에서 자유로와 지지 못했다..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이전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깊지만 가벼운..일상적이면서도 신선한 장치와 이야기들이 존재하지 않는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해변의 카프카>를 출간하면서 난리 법석을 떨었던 출판업자는 이번에도.. 하루키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답게 그의 다른 어떤 작품 보다도 인간의 삶과 사회의 실존적 의미와 그 가치를 깊이 있게 그려내었다고 선전을 하지만..이 작품을 읽고 그 평론에 동의 할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시간이 더 지나서 하루키의 대표작을 꼽으라 할때.. 출판사들이 난리 법석을 떨었던 하루키의 후기작들이 선정될까하면 절대 그렇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하루키를 참으로 좋아하는 독자로서 그에대한 욕심을 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이제 더이상 그에대해 기대하지 않기로...(이것은 배신이나 무관심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그것이 그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다. 그리고..한때 수 많은 독자들을 잠못들게 하고, 청춘들의 문화코드가 되었던 그의 생생한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그가 어줍잖은 이야기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이것은 투정이나 불만이 아니라..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정말 눈물나는 바램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이제 좀 휴식하기를 바란다.. 젊은날..야구장에서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조금은 황당한 그 열정이 다시 되돌아 오기까지..아니면 그의 나이에 걸맞는 한차원 높은 삶에 대한 열의가 다가오기 까지..조금(혹은 많이)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왕년처럼(혹은 왕년을 능가하는) 생생한 이야기와 반짝이는 문장을 들고 돌아오는날에 나는 두손 벌려 그를 맞으리...

[인상깊은구절]
"지금까지 꽤 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했지만, 생각해 보면 말이야. 그건 결국은 두려웠기 때문이었어. 누군가에게 안겨 있지 않으면 두려웠거든. 누군가가 나를 원했을 때 분명하게 거절하지 못했지. 그뿐이야. 그런 식으로 섹스를 해봐야, 좋은 일 같은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살아갈 의미 같은 것들이 조금씩 닳아가며 줄어들 뿐이지."
b*****d 2005.07.02. 신고 공감 3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관계의 어둠을 대하는 자세
"관계의 어둠을 대하는 자세" 내용보기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것은 93년경 ‘일각수의 꿈’을 통해서다. 원제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상의 끝’이라는 다소 긴 제목인데, 감히 무라카미 일생의 역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루키 고유만의 특색 있는 글로 가득찬 소설이다. 특유의 쿨한 느낌의 글과 기발한 상상력은 나를 단숨에 하루키 팬으로 변화시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필두로 해서 ‘댄스댄스
"관계의 어둠을 대하는 자세" 내용보기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것은 93년경 ‘일각수의 꿈’을 통해서다. 원제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상의 끝’이라는 다소 긴 제목인데, 감히 무라카미 일생의 역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루키 고유만의 특색 있는 글로 가득찬 소설이다. 특유의 쿨한 느낌의 글과 기발한 상상력은 나를 단숨에 하루키 팬으로 변화시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필두로 해서 ‘댄스댄스댄스’까지 이어지는 일명 양 시리즈 또한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국내에는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루키 자신이 이 책은 독자들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밝혔던 것처럼, 하루키가 어느새 자신만의 글쓰기에서 벗어나 수많은 독자들을 고려해야 될 만큼 인기도가 상승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책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더불어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반감시키는 책이기도 하였다. 이후 하루키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이후 발간되는 수필집, 단편 소설 등은 이제 더 이상 구입 일순위의 책이 아니었다. 아마도 양 시리즈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작가 데뷔 25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되었다는 After Dark도 내게 약간 망설임을 주었지만, 잠시 흟어본 줄거리는 내게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하였다. After Dark라는 원제가 한국어판에서는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어둠의 저기 멀리 있는 ‘저편’은 아니고 ‘어둠이 내린 후’ 혹은 ‘어둠 속’ 정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품어본다. 일본에서도 딱히 일어 번역 없이 카타카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 after dark로 의도한 의미가 어떤 단어와 부합될지는 모르겠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어둠이 절정에 이른 12시경부터 새벽이 올때까지 어둠 속에서의 여러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집에서 계속 잠들어 있는 언니를 필해 어둠속으로 나온 마리, 이런 마리가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일은 현실을 크게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밤이 아니었다면 일어나거나, 들을 수 없었거나, 느낄 수 없었던 것이며 마리는 이러한 현실을 하룻밤새에 어느 정도 겪게 된다. 쿨하게 외부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하지 않고도 혼자서 꿋꿋할 수 있는 마리는 중국인 창녀, 모텔의 직원들, 다카하시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 맞추어 살아갈 수 밖에 없어서 지쳐 이제는 끊없는 수면 속으로 빠져버린 언니 마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나간다.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듯이 에리는 작품 내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만 여러 공간을 넘나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루키 특유의 기발한 상상은 더 이상 없다. ‘쥐의 소설에는 섹스 얘기와 사람이 죽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놔두어도 사람은 섹스를 하고 죽기 때문에, 당연한 일을 적을 필요는 없다던 쥐의 소설에 넘치던 상상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는 현실과의 개연성이 아주 농후한 상상이라고 보아 주면 될 것 같다. 양 시리즈에서 꽤 쿨하지만 누구보다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주인공은 마리에게 애정을 마리와 에리의 화해를 도와주러 이 소설에서 드디어 다카하시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보다 애정이 깊어진 시선으로 마리에게 접근한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특히 불이 발견되기 전에 미명의 인류들은 해가 떨어지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신체 조건, 후각 등을 가진 맹수들을 피해 나무위나 동굴 속에서 서로 꼭 끌어않은채 어둠에 적응한 눈을 치켜뜬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모른다. 밤은 편안한 휴식시간이 아니라, 견뎌내어야만 하는 두려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기억들이 인류의 유전자속에 남아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의 발견으로 안전한 밤의 수면이 보장되고 또한 문명이 발전하면서 밤은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갔지만 밤을 새서 컴퓨터 업무를 봐야 하는 등장 인물이나, 창녀들, 모텔 직원들처럼, 어둠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탈감에 불특정 대상에게 모진 폭행을 가한 시라가와는 새벽이 오는 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며, 복수를 꿈꾸는 조직은 엉뚱한 곳에 대고 주절거리기만 한다. 어렸을 적 마리와 에리가 정지해버린 어두운 엘리베이터 내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있었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의지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들 스스로의 어둠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카하시나 에리는 능동적으로 어둠 속에 뛰어들어 어둠을 대면하고 이겨내는 입장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에 던져셔 어둠을 견뎌내어야만 하는 입장이다. 끝없는 수면에 빠져 있는 에리의 경우 시간적인 어둠의 의미는 중요치 않다. 그녀의 경우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삶 자체가 어둠이었으며 그 어둠을 밝혀줄 수 있는 가족과 마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 어둠을 피하기 위해 수면 속에 빠져든다. 이제 마리가 와서 그 어둠을 걷어내어주면 에리 또한 어둠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본 하루키의 책이다. 예전 좋아하던 작품들에서 느껴지던 가깝지만 나와 타인과의 경계는 확실하게 구분되던 쿨한 주인공들은 이제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하루키 자신이 그만큼 연륜이 쌓여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된 것일까? 전형적인 하루키 스타일의 등장인물로 보이는 마리는 다카하시와 중국인 창녀, 모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만의 쿨한 세계에서 벗어나 교류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하루키와의 교류의 문을 나도 열어본다. 갖가지 은유나 비유, 혹은 고급스러운 표현들을 가져다 칭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루키는 하루키면 된다. 하지만 예전의 하루키는 아닌 것 같다. 10여년 전 처음 만났던 하루키는 이제 내개 조금 색다르고 원숙한 모습으로 새로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나도 닫아두었던 문을 다시 열고 귀기울이려 한다.
b******e 2005.06.29.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하루키의 긴 단편.
"하루키의 긴 단편." 내용보기
짧다. 독자들의 근력에 부담을 덜어주려는 출판사의 배려-해리포터(문학수첩)의 불타는 독자사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맍-로 두 권으로 분리되어 나온 카프카의 한 권 보다 더 짧다는 느낌을 준다. 흔히 하루키 장편을 잘라내서 이제 고작 두 편이지만 카프카 이전과 이후로 분리해 두는데,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솔직히 내겐 카프카부터가 훨씬 읽기 수월해진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루키의 긴 단편." 내용보기
짧다. 독자들의 근력에 부담을 덜어주려는 출판사의 배려-해리포터(문학수첩)의 불타는 독자사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맍-로 두 권으로 분리되어 나온 카프카의 한 권 보다 더 짧다는 느낌을 준다. 흔히 하루키 장편을 잘라내서 이제 고작 두 편이지만 카프카 이전과 이후로 분리해 두는데,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솔직히 내겐 카프카부터가 훨씬 읽기 수월해진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내 지적 수준을 넘어서는 심오한 사상에 함몰되었다기 보다는, 반쯤 비치는 호수 속을 빙빙 맴도는 물고기를 보는 '추상'에서 투명한 수족관을 들여다보는 '현실'로 조금 들어선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생략하겠다. 뭐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고, 그렇게 평범한 것도 아니니까. 난 하루키의 단편을 좋아한다. 단편은 장편에 비해 훨씬 단단하고 조밀하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순간의 심상에 의존하는 그의 글쓰기가 내게 항상 불만이었다. 사건은 항상 의문과 공허함을 남긴 채 끝을 맺는다. 그가 원하는 것처럼 다시 읽으면 항상 새롭게 느껴진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모양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아마도 단편을 늘여쓰는 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래떡을 늘이면 얇아지고 기포가 생기는 것처럼 그는 그 빈자리를 그만의 독특함으로 채웠을게다. 어둠의 저편은 긴 단편의 느낌이다. 끝이 날 때까지 밀도를 유지한다. 읽는 맛도 좋고 깔끔한 느낌이 든다. 작가가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가 약간 시시해 보일수도 있지만 어차피 거창한건 다 시시한거 아닌가? 카프카 이후로 장편에서 느껴지는 이런 밀도를 끌고 나가면서 앞으로 이렇게만 써 준다면 눈에 거슬리는 해설들이 들어있다고 해도 다섯 권으로 분리되지 않는 한 구매해 주겠다.

[인상깊은구절]
왼손이, 오른손보다 조금 먼저 깨어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_-)-
YES마니아 : 로얄 s******t 2005.06.2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어둠의 저편
"어둠의 저편" 내용보기
난 남들이 다 좋다고 떠들고 치켜세우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을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침을 튀기며 칭찬을 하는 '상실의 시대'도 이게 뭐가 재미나고 감동적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니 시대에 뒤쳐진 사림이거나 감수성이나 감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한참 차이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점점 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
"어둠의 저편" 내용보기

난 남들이 다 좋다고 떠들고 치켜세우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을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침을 튀기며 칭찬을 하는 '상실의 시대'도 이게 뭐가 재미나고 감동적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니 시대에 뒤쳐진 사림이거나 감수성이나 감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한참 차이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점점 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던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남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어서 인기가 있을지 궁금하게 된다.

 

어쨌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력은 비단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와 아시아권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국내 작가들의 대부분은 직간접적으로 하루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보다 더 커질 것 같다. 하루키에 대한 나의 개인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어차피 대세는 대세니까.

아마도 자본주의가 지속되고 근대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라는 공간이 계속적으로 확장되어진다면 하루키의 영향력도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 더욱 커질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은 도시라는 공간을 빼놓고는 얘기할 것이 없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하루키를 읽을 바에는 차라리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는 것이 더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하루키와 알트먼 감독 덕분에 카버를 알게 되었고 유일하게 하루키에게 고마운건 카버를 알게 해주고 캐츠비를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고독이나 방황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나 느끼는 감수성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삶의 고독과 건조함을 느끼려면 차라리 카버의 단편들이 더 고독과 건조함은 제대로 느끼게 만들어 주리라 생각한다.

 

어쨌던 쓰잘데기 없는 소리는 이정도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

그의 데뷔 25주년이라는 간판을 내세운 작품인 '어둠의 저편'은 홍보물이나 평론가의 평가가 조이스의 '율리시스'네 추천의 글에서 보여주는 니체나 프로이트 등으로 해석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내용은... 그냥 웃자고 하는 내용이니 무시해도 좋을 것 같다.

 

제목만 보면 콘라드의 '어둠의 핵심'이 생각하는데... 하루키가 콘라드일리도 없고(그럴 능력도 안되고), 나름 책 제목하나는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번 작품은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고,

차가운 도시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어느날을 배경으로 하룻밤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토스토예프스키나 조이스를 인용하는 평론가의 글을 완전 무시하고 아무생각없이 작품을 읽으면 단지 마리와 에리 다카하시와 회사원이라는 네명의 주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리를 제외하고는 부차적인 인물들이다.

하루키는 나름대로 유기적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는 그다지 그런 능력은 떨어지는 것 같다.

일인칭 주인공을 내세웠던 '상실의 시대'가 더 좋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둠의 저편'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다'라는 생각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영화 시나리오를 만들 생각인지 소설을 쓸 생각인지 애매하게 된다. 그게 그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 더 많을 수 있겠지만... 평론가 정성일의 말대로 요즘 소설가들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번역가와 평론가는 그의 이런 글이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라는 권위를 버리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낸 획기적인 글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웃자고 하는 얘기치고는 너무 진지해서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예전 작품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주된 감수성이 도시에서의 고독이라는 주제라는 것을 놓고 보자면 하루키의 작품은 이전과 별다르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그는 고독하고 내성적인 주인공들이 주된 등장인물이고,

여전하게 그의 음악적 취향을 전면에 내세운다(이게 무슨 권위를 버렸다는 것인지...),

그리고... 상투적이고 제대로 결론나지 않는 결론을 낸다.

좋게 말하면 열린 결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벌리기만 벌리지 정리하지는 못하는 전형적인 용두사미를 보여주는 작가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판단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다.

 

작품의 시작은 나름 멋들어지게 시작한다.

도시에 대한 하루키의 시각은 냉정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통찰력이 있다.

그리고... 이후의 진행은 평범하다.

 

마리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인간군상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는 별다르게 목적을 이뤄내지 못하는 것 같다. 만나는 인물들은 다양하고 각자의 사연이 있기는 하지만 카오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얘기해주지 못한다. 다만 마리가 그들의 수많은 사연들을 알아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책을 읽는 독자들이 알아서 마리처럼 심정적으로 이해하라고 말해준다. 미안하데... 이건 '인간극장'이 아니다.

 

중국인 소녀의 경우도 그녀의 지금까지의 삶과 앞으로의 삶을 서글프게 말해주고 있지만 잠시 등장하고 사라지는 캐릭터로 주어질 뿐이다. 고오기의 경우도 그녀의 삶과 처지가 그녀가 말하는 대사와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궤적을 말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무직 여성으로 살아가다가 한순간에 혼란스런 삶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이후에 마리에게 삶에 대해서 말해주며 다양한 예를 들다가 '칸트'를 말하는 부분은 조금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칸트'라는 단어를 한번 쓴 것 같고 되게 따지고 든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는 25년이나 글을 썼던 사람이고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데 나처럼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도 고졸의 사무직 여성의 삶을 생각하면(학력을 비하하거나 그런걸 읽을 수 있기나 하겠어? 식으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를 말하기 보다는 보다 다른 방식으로 대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부분은 '어둠의 저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는 아쉬움이고 이런 나의 생각이 하루키도 갖고 있었다면 보다 신경써서 다듬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과 그녀의 말이 충돌이 되고 있기 때문에 고오기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무너지게 된다.

 

이전 장면에서 조그마한 바에서 카오루와의 대화는 순전히 본인의 전형적인 음악 취향과 분위기 취향을 반영하는 장면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LP와 CD 재즈와 영미의 팝 / 록음악에 대한 본인의 취향은 전혀 변할 것 같지도 않고 그의 글의 주된 소재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배경이 일본이라고 해도 음악은 항상 60~70년대 미국 영국의 팝 / 록음악 위주로 만들어지고 캐릭터들을 그런 음악들을 말한다. 그는 일본인이고 일본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았지만 일본의 특이성 덕분에(2차대전 패전과 함께 미국 주둔과 함께 유입된 미국 문화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와 같은 세대의 작가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고 주된 정서를 만들어준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설정이 국제적인 명성을 갖게 만들어주기도 했던 것 같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음악과 재즈를 도시의 고독함과 연결하는 것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이니까. 전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을 모두 다르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하니까...

 

여기서 회사원의 존재는 무엇일까?

도시의 고독함과 건조함에 대해서 말해주지만... 나름 성공적이기도 하면서도 작품에서 뭘하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리의 언니인 에리에 가서는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인가? 거의 진공상태의 존재로 다뤄지게 된다. 카프카마냥 다른 공간에 이동했다가 다시 이쪽 공간으로 온다는 것은 뭘 말하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 말미에 적힌 평론가의 글이 나름 설명을 해주고 있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워낙 하루키에 관심이 없으니 이렇게 혹평하는 것이겠지만.

 

하루키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군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작품활동을 더욱 정진해 나가겠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의 글은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기에는 그의 글은 너무 표면적이다. 마치 브라운관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듯이 말이다.

 

그의 캐릭터들은 항상 그렇듯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민이나 표현을 말로써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들이 표현하려는 것은 말로써가 아니라 다른 장치들을 통해서 표현한다. 60~70년대의 음악들이나 러브호텔이나 사무실이라는 공간, 밤에서 새벽으로 향하는 차가운 공기 등등등 그들은 여전히 표현하기 힘들다가 그냥 지쳐버린다. 그리고... 아마도 하루키는 앞으로도 제대로 표현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는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너무 완성해버려서 그러한 글쓰기를 벗어나 글을 쓰려는 것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도시의 고독이나 회색빛 건조함에 대해서 그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지만 그걸 알려고 그의 책을 읽으려 한다면 시간낭비일 것 같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그건 읽지 않아도 느낄 일이 수도 없이 생길테니까.

 

나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하루키는 최악의 작가인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선물을 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역시나 하루키는 좋지 않은 선물인 것 같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몇일동안 읽지 않고 딸랑 이틀에 걸쳐서 읽었으니 시간낭비는 적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결론도 없고,

아무런 교훈도 없다.

그냥 단순히 고독하다는 것이고,

누군가 이해해 줄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도시라는 공간을 떠날 생각도,

아니면 그 공간을 전복시키려는 생각도 없다.

지극히 우울하고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기를 바랄뿐이다.

 

이런 감정은 젊은 시절 SMITHS 와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감정이면 그럴때도 있어야지 젊음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중년의 아저씨가 아직도 그때처럼 제대로 설명도 못하면서 질질짜면 밥맛으로 보인다.

 

데뷔 50주년이면 조금 나아지려나 모르겠다.

 

 

참고 : 지극히 하루키를 싫어하는 사람이 쓴 글이다. 하루키 팬이라면 하나 하나 거론하며 반론할 수 있겠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정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는 식으로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한동안 소설책만 잔뜩 읽었는데... 이제 뭘 읽을까나~

y*******o 2007.08.25. 신고 공감 2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