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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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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학기 동안 미학은 확실히 철학의 영역임을 확인했다. 진중권의 미학도 재미있지만 철저하게 철학에 기반을 두고 풀어내는 박정자의 미학도 탄탄하고 탁월하다. 게다가 흥미로워하는 철학자들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가 그림을 바탕으로 풀어낸 철학 이야기들을 해설하고 있으니 책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자의 "마이클잭슨에서 데리다까지"를 읽은 후 그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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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학기 동안 미학은 확실히 철학의 영역임을 확인했다. 진중권의 미학도 재미있지만 철저하게 철학에 기반을 두고 풀어내는 박정자의 미학도 탄탄하고 탁월하다. 게다가 흥미로워하는 철학자들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가 그림을 바탕으로 풀어낸 철학 이야기들을 해설하고 있으니 책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자의 "마이클잭슨에서 데리다까지"를 읽은 후 그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사르트르가 참여문학을 쓰다가 후기에 순수문학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이 심상치 않게 읽혔다.

 

박정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미 서문에 다 풀어낸 것 같아보인다. 물론 철학자가 쓴 어려운 원문을 읽고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미디어와 이미지의 시대에 딱딱한 글만 가지고 철학을 이해하기는 참 어렵다. 심지어 고의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어려운 문체로 풀어내는 철학자들이 있으니 자기 혼자만 알고 함께 나누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마저 든다. 목적이야 어찌됐건 현대 여러 철학자들은 그림을 빌려와 철학을 풀어낸다. 그들의 여러 저작을 읽는 것보다 그림 한 편 풀어낸 글을 읽는 것이 그의 철학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 고마웠다.

 

특히 이번 학기에 기억과 상상, 무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책을 통해 여러 도움을 얻었다. 예술은 무화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 사르트르, 예술 창작은 눈멂과 기억을 통한 것임을 이야기한 데리다 그들의 미학을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하이데거의 세계와 대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역시 좋아하는 화가인 고흐의 '구두 그림'들을 통해 읽을 수 있었고, 특히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론은 더욱 철저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도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고 싶어졌다.

 

원래 좋아하는 구조주의자 푸코의 글들을 이번 여름에는 정말 마음 먹고 꼭 읽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일단 박정자의 또 다른 책 "시선은 권력이다"도 구입해두었는데 읽기 기다려진다. 내가 그의 사회사상적 입장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만 그의 저작이 더욱 재미있게 읽힐 것 같아 아쉽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0.06.18. 신고 공감 1 댓글 6
리뷰 총점 eBook
그림으로 쉽게 풀어준 철학 이야기.
"그림으로 쉽게 풀어준 철학 이야기." 내용보기
그림(회화)과 철학의 만남. 회화의 언어로 철학을 말한 철학자들이 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말한 반 고흐의 <구두>, 사르트르가 <상상적인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에서 예로든 마티스 의 <붉은색의 조화>,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예로든 세잔느의 <생뜨 빅투아르 산>,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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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회화)과 철학의 만남. 회화의 언어로 철학을 말한 철학자들이 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말한 반 고흐의 <구두>, 사르트르가 <상상적인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에서 예로든 마티스 의 <붉은색의 조화>,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예로든 세잔느의 <생뜨 빅투아르 산>,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예로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밖에 데리다의 <그림 안의 진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까지……. 

이들은 회화를 말하며 '미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물이란 무엇인가' 등의 어렵고 까다로운 철학적 주제들을 쉽고 친근한 해석과 은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몇몇 있었다. 

먼저, <시녀들>을 소개하며 나오는 "그림 안의 재현은 일람표 안의 표상"과 불어표기가 같다는 사실. 

이는 <말과 사물>을 공부하면서도 놓쳤던 부분인데……. 그렇게 보니 푸코가 말한 고전주의의 '재현의 에피스테메'와 해석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흥미로웠다. 

또 데리다가 말한 "그리는 작업은 결국 현전과 부재 사이의 끊임없는 직조"라는 내용에도 수긍이 갔다. 하이데거가 예시로든 반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는 익히 보아왔던 내용이었지만 하이데거를 향한 샤피로와 데리다의 논쟁 등은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접하기도 했다.


저자가 다양한 철학적 개념을 쉽고 친절하게 풀어쓰려고 의도한 책이기에 더 이상의 요약이 불필요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옮겨 적자니 리뷰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사르트르나 하이데거의 일부내용의 이의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저 새롭게 읽고 배웠던 입장이므로 특별한 감상을 덧붙여 쓰기도 벅찬 것 같다.

n***********7 2017.02.0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빈센트의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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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구두 한켤레, 특히 군대에서 지긋지긋하게 신던 군화같이 생긴 것이. 어째서 화폭 안에 옮겨지면 그럴싸해 보일까?   작가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미학관을 통해 그 것이 왜 우리 눈에 현실보다 아름답게 보이는지 설명한다.   당신에게 지긋지긋하게 "오빠, 내 어디가 예뻐? 오빠, 나한테 왜 반했어?"를 물어보는 당신의 여자친구에게 그럴듯한 답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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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구두 한켤레, 특히 군대에서 지긋지긋하게 신던 군화같이 생긴 것이.

어째서 화폭 안에 옮겨지면 그럴싸해 보일까?

 

작가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미학관을 통해

그 것이 왜 우리 눈에 현실보다 아름답게 보이는지 설명한다.

 

당신에게 지긋지긋하게 "오빠, 내 어디가 예뻐? 오빠, 나한테 왜 반했어?"를

물어보는 당신의 여자친구에게 그럴듯한 답변을 하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볼 것.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만 글을 썼다'는 우주대천재 샤르트르가 그 대답을 알려줄테니..

m*****3 2012.07.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그림으로 철학읽기
"■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그림으로 철학읽기" 내용보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박정자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교수의 책.  그림(회화)과 철학의 만남. 회화의 언어로 철학을 말한 철학자들이 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말한 반 고흐의 <구두>, 사르트르가 <상상적인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에서 예로든 마티스 의 <붉은색의 조화>, 메를로-퐁티가 <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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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박정자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교수의 책.
 
그림(회화)과 철학의 만남. 회화의 언어로 철학을 말한 철학자들이 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말한 반 고흐의 <구두>, 사르트르가 <상상적인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에서 예로든 마티스 의 <붉은색의 조화>,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예로든 세잔느의 <생뜨 빅투아르 산>,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예로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밖에 데리다의 <그림 안의 진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까지……. 
 이들은 회화를 말하며 '미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물이란 무엇인가' 등의 어렵고 까다로운 철학적 주제들을 쉽고 친근한 해석과 은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몇몇 있었다. 먼저, <시녀들>을 소개하며 나오는 "그림 안의 재현은 일람표 안의 표상"과 불어표기가 같다는 사실. 이는 <말과 사물>을 공부하면서도 놓쳤던 부분인데……. 그렇게 보니 푸코가 말한 고전주의의 '재현의 에피스테메'와 해석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흥미로웠다. 또 데리다가 말한 "그리는 작업은 결국 현전과 부재 사이의 끊임없는 직조"라는 내용에도 수긍이 갔다. 하이데거가 예시로든 반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는 익히 보아왔던 내용이었지만 하이데거를 향한 샤피로와 데리다의 논쟁 등은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접하기도 했다.
 저자가 다양한 철학적 개념을 쉽고 친절하게 풀어쓰려고 의도한 책이기에 더 이상의 요약이 불필요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옮겨 적자니 리뷰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사르트르나 하이데거의 일부내용의 이의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저 새롭게 읽고 배웠던 입장이므로 특별한 감상을 덧붙여 쓰기도 벅찬 것 같다. 전반적인 책 내용의 소개와 요약을 중심으로 하고 약간의 개인적 감상을 덧붙이며 서평을 끝맺으려고 한다.
 

벨라스케스(Velázquez, 1599~1660), 시녀들, 1656~1657년경, 캔버스에 유채, 318×276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미셀 푸코 <말과 사물>의 대중적 인기에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분석한 1장이 큰 공을 차지한다. 푸코는 "한 시대는 그 문화를 형성하는 심층적 윤곽인 역사적 선험성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언명하며 이를 에피스테메(épistémè)로 불렀다. 에피스테메는 한시대의 인식과 이론의 출발점이고, 앎이 형성되는 공간적 질서이며, 역사적 선험성이자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에게 경험적 질서를 제공해주는 문화적인 기본코드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semblance)이었다. 말도 사물을 지시하는 도구가아니라 사물 그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이런 말과 사물의 유사성은 고전주의시대(17세기 후반~18세기까지)에 들어와 붕괴되었다. 언어는 사물을 재현하는 투명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앎은 더 이상 유사성을 추정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동일성과 차이에 기반을 둔 분류와 분석을 추구하게 된다. 말은 생각을 재현했고, 그림은 사물을 재현했다.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 모든 존재들이 있고, 인간은 그 존재들을 언어적 기호나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재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재현의 에피스테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분류학(taxinomie)이다. 분류학은 복잡한 표상 - 불어의 représentation은 재현과 표상으로 동시에 해석된다. 튤립을 그린 그림은 '재현' 튤립이라는 말은 '표상'이라고 쓸 수 있다. - 들을 하나의 기호체계 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 다시 말하면 사물의 표상들을 동일성과 차이의 일람표(tableau)안에 순서대로 위치시키는 것이다. 식물을 종에 따라 분류한 린네나 뷔퐁의 박물학, 백과사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학문은 일람표 작성이었고, 앎의 중심은 일람표였던 것이다.
 인간도 이 일람표 속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은 동물의 일람표 안에 정확하게 배치되었고, 인간이라 해서 별다른 특권이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한 종으로 수렴될 뿐 각기 고유의 인생을 가진 유한한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자리는 없었다. 학문이 곧 일람표이고, 모든 의미는 일람표 안에 있지만 정작 그 일람표를 작성하는 사람의 자리는 인식의 장 안에 어디에도 없었다. 고전주의 시대 인식론에서 인간은 이렇게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일람표와 그림은 불어에서 똑같이 타블로(tableau)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또는 그려진 그림이 재현이라면, 일람표 속의 식물의 이름들은 모두 그 식물의 표상이다. 재현이건 표상이건 역시 불어로는 똑같은 représentation이다. 그러므로 '그림 안의 재현은'은 '일람표 안의 표상'과 같은 말이 된다.
 "고전주의적 사유 안에서 그를 위해 재현이 존재하는 그 사람, 재현 안에서 이미지 혹은 거울 속의 영상으로만 자신을 재현하는 그 사람, 그림안의 복잡하게 얽힌 끈들을 얽어매 정리하는 그 사람은 그림 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라고 푸코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의 인간의 부재를 말했던 것이다.


 

Joseph-Benoit Suvee, Butades or the Origin of Drawing, 1791. Groeninge Museum, Bruges
 
데리다는 <디뷰타트 혹은 그림의 기원>을 예를 든다. 그는 드로잉이 지각보다는 기억에 더 의존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림의 기원은 '눈 멂'이라고 한다. 그림자의 선을 따라 연인의 그림을 그릴 때 디뷰타드는 자기 연인을 볼 수 없다. 화가는 종이 위에 선을 긋는 그 순간에 모델에 눈이 멀어있다. 또 선을 긋다가 모델을 바라보는 순간 화가는 더 이상 종이 위의 선을 보지 않는다. 여기서 데리다는 그려진 사물과 그것을 표현하는 선들 사이의 이질성이 심연과도 같다고 한다. 재현된 사물과 재현 사이의 관계는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의 이질성을 지닌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가시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은 둘 다 선(trait)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트레(trait)는 명사적의미로 선, 줄, 표현, 말을 의미하고 동시에 선을 긋는 행위인 그림과 글쓰기라는 동사적 행위에도 쓰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현전과 부재의 끊임없는 직조의 과정이듯이 글쓰기도 언어적의 있음과 없음 사이의 끊임없는 교직이다.
 
메를로-퐁티 우리가 주관적 범주인 과학적 개념에 따라 "가시적인 것"으로 자연을 재단하는 동안 세계의 원초적 본질인 '보이지 않는 것'을 망각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원초적 본질, 즉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 화가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존재 개시' 속에서 존재자의 드러남을 말할 때 하이데거가 썼던 리히퉁(Lichtung, éclaircie)과도 비슷하다.
 
사르트르는 예술작품을 표면의 물질적 오브제(objet matériel)와 내면의 상상의 오브제(objet imagê)가 정확히 두 겹을 이루며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상상의 오브제는 곧 미학적 오브제(objet esthétique)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림을 볼 때 먼저 액자 속의 그림이 그저 나무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한다. 현실의 일부인 이 그림의 물질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현실의 부정은 바로 무(無)이다. 우리는 이렇게 그림의 물질성을 넘어서 그 뒤에 나타나는 어떤 상상과 비현실의 세계를 감지하고 감동을 느낀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 안에 물질적인 것(존재)과 상상적인 것(비존재)이 혼합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볼 때 작품의 물질성을 넘어 상상적 오브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때 예술(비현실, 비존재, 상상적 오브제, 미학적 오브제)로 마주하기 위한 통로가 되는 예술작품의 물질성을 사르트르는 아날로공(analogon)이라고 부른다.
 결국,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무(無)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다른 사물들처럼 단순한 즉자가 아니다. 즉자기 때문에 그 속에 존재(être)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적인 시선을 던져줄 수 있는 무(néant)를 포함한 (특수한) 사물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한 켤레의 구두, 1885

 

반 고흐가 그린 구두는 단순한 구두 한 켤레이기도 하다. 이는 철저하게 유용성의 측면을 지닌 도구로서의 사물인식이다. 한편으로 이 구두 한 켤레의 그림을 보며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닳아빠진 구두 내부의 어둠 속에서부터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구두 안에는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한없이 멀고 한없이 단조로운 밭고랑을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그녀의 강인한 발걸음이 응축되어 있다. 가죽위에는 흙의 축축함과 비옥함이 누워 있다. 구두창 밑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들판 길의 고독이 납작하게 눌려져 있다. 구두 안에서는 대지의 말없는 부름, 익어가는 곡식의 조용한 선물, 바람 부는 텅 빈 밭의 황량함이 보여주는 알 수 없는 자기-거부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이 제품에는 빵의 확실성에 대한 불평 없는 걱정, 또 한 번의 곤궁을 이겨냈다는 말없는 기쁨, 임박한 출산 앞에서의 불안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떨림이 스며들어 있다. 이 제품은 대지에 속해 있고, 농부 아내의 세계 속에서 보호받고 있다." - page 130

 이렇게 듣고나니 구두 한 켤레의 그림은 단순히 도구로서의 구두를 재현한 그림을 넘어서 구두라는 존재자의 존재진실 - 농부의 아내의 세계 속에 속한 존재자 그리고, 도구적 유용성을 제외하고 스스로 자기 충만한 존재자로서의 - 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예술작품이란  한마디로 표현하면 "존재(진실)를 드러내주는 통로"이다. 존재자들의 진실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이다. 예술은 스스로 작동을 시작하는 진실이다. 
 사물은 순수한 사물, 제품, 예술작품 으로 나뉜다. 순수한 사물은 화강암 덩어리에서 볼수 있듯이 질료가 형식을 결정한다. 또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벗어나 자기-충족적이다. 제품은 질료와 형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질료로 형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유용성의 의도에 따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형식을 취한다. 예술작품은 제품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유용성에서 벗어나있다. 즉, 사물처럼 순수하게 자기 충족적이다.
 하이데거가 반 고흐의 '구두'를 볼 때 그 작품은 한 켤레의 농부의 구두의 존재적 진실은 무엇인지(구두라는 제품-도구-를 넘어) 그에게 폭로해 주었다. 구두라는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 드러냄 안에서 솟아 오른 것이다. 이렇게 존재자 너머로 무언가 다른 것이 발생할 때, 존재자 한가운데 열린 공간이 발생하며 그 존재자의 진실을 드러낸다. 이렇게 진실을 들러내는 과정을 존재-폭로라고 하며,  존재자가 존재를 드러내는 바로 그 순간을 존재 개시(Lichtung des Seins, éclaircie de l'Etre)라고 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영화읽기'가 나온다.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 원제는 <화가의 계약>(The Draughtsman's Contract) - 을 주제로 다룬다. 피터 그리너웨이가 감독한 이 영화는 기호학과 구조주의를 충실히 계승한다. 저자는 그레마스의 서사기호학에 대입하고 영화의 프레임과 파레르곤을 데리다식으로 해체하면서 설명해나간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가시성과 드로잉의 눈멂 즉, 가시성은 오로지 눈멂(비가시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모든 예술적 창조행위에 해당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화면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 감독은 눈멀어 있고, 관객인 우리는 그것을 의식도 못한 채 눈멂을 강요당하고 있다. 상식과 다르게 예술의 중심부에는 진실을 꿰뚫는 날카로운 시선이 아니라 눈멂 혹은 맹점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예술은 예술이 아닌 모든 것을 은폐함(비존재화)으로서 혹은 예술 안으로 들여옴으로서 가시성을 창조한다 ― 혹은 진실을 폭로한다. 

 

회화와 철학의 접점의 다양한 개념들을 알기 쉬운 예로 설명한 이 책을 읽다보면 대다수 독자들은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책중에서 새롭기도 했고 인상 깊었던 부분은 데리다의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의 예시에서 언급되는 "현전과 부재의 끊임없는 직조" 라는 말이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끊임없는 교직." 그것이 텍스트(언어)와 그림(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 개시와 더불어 가장 기억에 남는다.

 

 

 

g****a 2011.02.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