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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얼마나 절박한 제목인지... 그래서일까, 와닿는 깊이가 꽤 컸다. 게다가 저자는 실제로 안온한 인생을 살아오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사고사와 동생의 자살로 인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 숨 막히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하면서 그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인문학, 철학이라고 한다. 그런 처절한 아픈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의 고민들이 정말 얼마나 절박했었는지가 책을 읽으며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떻게 생을 살아가야하는지, 학교에서는 배운 적이 없다고들 말한다. 사실 철학이라는 과목이 어쩌면 인생의 해법을 알려주는 과목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국영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능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저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던. 그래서 안타깝다. 어떤 철학자가 어떤 이론과 사상을 가졌는지 단순히 암기식으로 훑고 지나간 것이 전부였던 과목 철학. 그러나 그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심오한 의미와 인생의 지침을 담고 있는지... 나이가 들고서야 더욱 절감하는 깨달음.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저자를 잡아준 책들, 그는 특히 니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나 역시 얼마전 <초인수업>을 통해 많이 공감했던 철학자인지라 반가웠다. 인생을 자연스럽게 잘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내면을 강하게 길러내야 한다.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도 행복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성찰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주체적인 나로 살기 위해서, 인생의 구렁텅이에서 그래도 살아낼 힘을 얻어내기 위해서 요즘 인문학이 굉장히 강조되고 있다. 나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복잡하고 치열한 삶 속에 위안을 구하는 법, 이 책을 통해 그런 방법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먼저 나는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저서 인용구를 보면서 나의 지식의 얕음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누군가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지침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은 먼저 그를 잘 알아야 할지언데... 철학을 제대로 구해보고 싶다. 그래서 나를 보다 강건하게 키워내고 싶다.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해서, 참된 나를 찾기 위해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워준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인문 멘토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또 삶을 긍정하는 방법에 대해 더욱 고민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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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상당히 모순된 느낌을 주는 제목이다. ‘숨 막혀 죽겠거든’이라는 부분은 고통의 극한, 즉 죽기직전의 절박함이 엿보이는 반면 ‘철학하라’는 부분에서는 삶과 어느 정도 떨어져 추상적인 사변(思辨) 혹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나누는 관념의 유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숨 막혀 죽을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한가롭게 철학적 사유를 하는 것보다 어떤 초월적인 것에 의지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철학을 하라고 말했을까? 이는 저자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저자는 운명의 그 날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결혼해 딸아이를 키우며 단란하게 살던 안정된 삶1)”을 누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묘를 다녀오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 여파로 1년 후 동생이 자살하자, 그의 삶은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는 그 때,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A.D. 17)가 말한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 날을 기다려 보아야 아느니 죽어서 장례 지낸 뒤가 아니면 어떤 이라도 행복하다고 큰 소리 치지 못한다.2)”는 문구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만약 저자가 니체였다면, “삶이 고통에 처했을 때 체념하지 말고 그 고통이 ‘한 번 더’ 내 삶에 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힘의 의지로 극복하겠다3)”고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저자가 선택한 것은 극복이 아니라 도피였다. 세상에서 도망쳐 축사(畜舍)로 기어들어 갔던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철학을 붙잡다. 비록 축사(畜舍)로 도피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나는 소똥 냄새를 벗 삼아 2년 반을 축사에 딸린 방에서 인문학 책을 읽었다.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의 창구는 아내였다.4)”라는 술회(述懷)에서 알 수 있듯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이었다. 하지만 그 2보 전진은 또 다른 죽음 - 물난리로 인한 익사(溺死) – 을 계기로 가능했다. 그가 축사(畜舍)에 머무르고 있을 때,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려, 축사에도 물이 밀려 들어왔다. 순식간에 물이 턱 밑까지 차올라 이제 죽었다 하고 체념하는 순간 물이 더 이상 차오르지 않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다. 이것이 그가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된 외면적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마침 그 무렵 그가 읽고 있었던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비롯한 인문학은 그 내면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내적/외적 원인에 의해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숙명론에 빠져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자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흔히 벼랑 끝에 몰리면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기대어 스스로 실존함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삶이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었지 않을까? 철학, 삶의 길잡이 “이런저런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마냥 행복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에 생채기 하나쯤은 보듬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이 상처에 대어 좌절하다가 왜소하게 삶을 마감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여 고양된 삶을 살기도 한다.5)”는 저자의 언급이 없어도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예고 없는 곤경을 수없이 맞이하며 버텨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곤경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해치거나[自暴] 스스로 버리는[自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늘 무엇인가에 기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삶의 길잡이이다. 여기서 그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정답 없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의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웃사촌의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삶과 죽음이 모두 생존에 속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은 서로 의지하여 하나가상대의 조건이 되어 인생의 모든 현상에 양 극단을 이룬다는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관한 견해도 내겐 어떤 위안도 되지 못했다6)” 하지만, “쇼펜하우어도 나처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나는 마음이 평온해져 왔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7)”고 고백했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쨌든 살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 혹은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인가 ’ 등과 같은 정답 없는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그때 내가 영혼 없는 인형이 아니라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질문에 대한 어떤 형태의 답이든 내놓아야 한다. 아무 목적 없이 시간을 낭비하다가 무의미하게 죽어버리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다. 그러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더라도 나의 삶을 남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의 삶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에 언급된 이야기도 소화시켜 나 다운 ‘나’를 만들어 가고 싶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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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인생을 살면서 나는... 숨 막혀 죽겠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대학 4년 동안 등록금 때문에 맘 편한 적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겠다고 생각해 본적 없었고, 이후 대학 졸업 때 IMF가 터져 취직으로 생각이 많았을 때. 그때도 뭐... 죽겠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란 사람은 긍정적인 편이라..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활과 달리 누군가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태어나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고 죽어가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 죽음이겠지만 갑작스런 사고사나 자살은.. 정신적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이 책의 작가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온다. 아버지의 사고사와 동생의 자살.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의 예상치 않았던 죽음.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작가는 모든 생활을 접고 은둔하기에 이른다. 아마 사랑하는 그들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겠지. 그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작가에게 한 줄기 빛이 된 것은 바로 철학이다. 인문학 책을 읽으며 가장 기본이 되는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읽어나간다.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들. 철학가나 사상가라 칭하는 사람들에게도 삶과 죽음은 어려웠으니까. 그 본질을 찾아가는 시간이 작가에겐 빛이 되기에 이른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게 자연사가 되든 사고가가 되었든. 그리고 누구에게나 삶 앞에 곤경은 찾아오고, 그 앞에 절망하지만 나에게만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작가는 철학에서 찾았다. 키르케고르와 니체 등.. ‘너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80) 진정한 앎이란 영혼(나)를 탐구하는 것이다. (113) ’나를 찾는 것의 완결은 내 생각에서 일어나는 모든 집착을 끊어내는 무아의 경지일 것이다. 그런데 범속한 내가 이 경지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란 화두는 내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고 끈질기게 늘어져야 할 근원적 물음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찾고 있다. (133) 이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게 되는 건 나처럼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끊임없이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내 안에서 수많은 물음들이 들려온다. 그중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든 물음이 바로 ‘나’란 누구인가였다. 나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나란 사람에게 행복은 무엇이고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그 끊임없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쉽지 않아 때론 질문에 귀를 닫게 되지만 그 질문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위안이 된다. 나에게만 찾아온 불행 앞에 화가 나고 억울한 경우도 많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일까 하는... 아마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운명이라면 극복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들에게만 그런 불행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앞 세대 사람들도, 미래의 누군가에게도 불행은 찾아갈 테니까. 결국 그 불행을 누군가는 극복하게 되고 누군가는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극복과 굴복의 차이는 결국 그 열쇠를 누가 찾아 나아가느냐 아닐까? 작가는 그 방법을 철학에서 찾았지만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르겠다. 철학만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철학은 우리 앞에 살다간 철학자들의 생생한 증언 같은 말일 것이다. 인문학은 삶이 어떤 것이고,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안내자와 같을 것이다. 지금 현재 숨 막혀 죽겠다고 생각된다면... 인문학 책을 찾아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너무 어렵다면 이런 책을 찾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어려움의 상황이 모두에게 동일하진 않겠지만 심리적 갈등은 비슷할지 모르니까. 우리 앞에 살다간 그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한줄기 빛이 비추지 않을까? 놓을 것과 잡을 것을 알아가라고... 작가가 말한 책들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작가와 다른 뭔가를 느낄 수도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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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학문이라고 이름붙여진 범주의 지식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완전히 정립된 이론을 체계적으로 하나의 교과서에 때려 넣은 것을 그대로 주입적으로 학창시절에 만나는 방법과 인생을 통해 기회가 생기거나 필요에 의해 찾게 되는 방법이다. 철학을 만나는 방법은 주로 전자였다. 철학을 교과서적으로 만나는 방법은 우리가 이제껏 철학이 진저리쳐지는 추상 어휘와 그게 그거같은 정신적 활동을 각기 다른 용어와 학설과 학파라는 이름 하에 묶어두고, 그걸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읽는 일이었다. 철학을 인생에서 만나는 방법은 어떤 인생의 전환점이나 자기 성찰의 목적이 필요한 시기에 위기를 다루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을 찾고 나를 찾는 방법이다.
저자는 아버지의 사고로 인한 죽음과 연이은 동생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고통을 받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시골의 축사로 들어가 철학에 매달리면서 공부하고 깨달은 내용을 책으로 냈다. 시대와 사조 혹은 철학자로 묶이지 않고 물 흐르듯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사상을 철학자와 철학자 사이를 유영하며 강의하듯 철학을 전달한다.
책의 형식은 이 앞전에 읽은 김탁환의 <읽어가겠다>와 비슷하다. 인상깊은 철학자의 저서를 자신의 생각과 함께 버무렸다. BC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의 인생론과 몽테뉴의 수상록이 곳곳에 인용되면서 철학적 사고의 흐름이 이어진다. 부제를 붙인다면 홍정이 읽어주는 몽테뉴의 수상록 이라고 붙여도 무방할 듯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의 사상 곳곳에 몽테뉴의 해석과 철학이 따라다닌다. 책의 전체로 볼 때 반은 여러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인용한 인용문이고 반 정도는 그들의 철학 개념에 대한 해석이 에세이 혹은 강의록 형식의 글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에서도 몽테뉴의 수상록이 가장 많고, 세네카의 인생론이 두번째로 많다.
니체, 샤르트르, 쇼펜하우어, 몽테뉴 등의 고전 저서들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지만, 오히려 그 철학자 개인들을 일생동안 지배했던 사상들이 집약된 직접적인 저서에서 선택된 문장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해석하는 홍정 자신의 글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아마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하게 이해한 부분은 1/10 혹은 1/5 정도나 될까. 얼마 전에 읽은 열린책방의 <철학한입 더>도 철학의 입문서도 마치 부페식당처럼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풀어서 열거했지만, 그 때에도 어렵게 느껴져서 철학이란 놈이 워낙 나에게는 어렵구나 싶었는데, 이 책을 통해 직접적인 저서를 일부 엿보니,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철학자 개인의 일생을 관통하는 사상을 몇줄로 요약한 교과서적 해석이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점에서 곳곳에서 인용하한 문장들을 통해 원철학자의 사상을 홍정의 해설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 모든 책을 다 읽어볼 수도 없고, 아니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볼 수가 없는데 이런 기회로 조금조금씩 맛보기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냥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김탁환 작가는 <읽어가겠다>에서 평론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쓰는 평보다 훨씬 쉽게 작품들을 설명한다. 평론가들은 이론에 갇혀 본질을 제대로 못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같이 전방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지식을 독자가 따라잡는데 헉헉거리기 마련이다. 작가 홍정 이 분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철학서를 읽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정작 본인은 숨막혀서 철학을 했다지만, 숨이 안막히는 일반 독자가 철학을 이 책으로 대하니 숨이 막혀올 듯하다.
에를 들어 자기 탐구의 부분이 그렇다. 전반부에서, 그리고 후반부에서 자기성찰 및 자기 탐구에 대한 시공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으로 탐색은 이해라는 선을 넘어서면 철학이란 누에고치처럼 자기만의 집을 짓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자폐증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하라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정확하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는 과학에 대한 편협된 생각은 아마도 과학 철학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게 나의 인내력을 파괴시킨다.
이렇게 전혀 무슨 뜻인지 숨막히게 하는 문장들은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철학자로서 자신이 발견한 사고를 글자로 옮겨놓는 것에 더 치중한 듯한 모습으로 비친다. 많이 중략했지만 대략 위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를 어떤 독자가 제대로 이해할지 의문이다.
몇 달 사이에 읽는 책마다 몽테뉴가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어서 궁금했었는데, 이 책에서 몽테뉴의 사상의 일부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수상록은 각 파트별로 엄청나게 두꺼운 것 같고(인용된 페이지 중 900쪽 근처에 있는 것을 보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저서를 남긴 것 같다) 그의 문장은 물론 저자가 좋은 부분만 골라서 인용했겠지만, 마치 요즘으로 치자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는 듯 매우 유려하면서도 공감이 많이 되고 쉽다. 이 책을 통한 몽테뉴와의 만남, 세네카, 니체, 쇼펜하우어, 소크라테스를 보다 훨씬 가까이서 인용문과 설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으며 철학이라는 놈이 나랑 친하기는 어려워도, 그렇게 으르렁 거리면서 적대적으로 굴 필요는 없는 놈이란 걸 알게 해줬다고나 할까. 철학아 가끔 보자~
파블 리뷰 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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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상실감에
빠질 때가 있다. 그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일 수도 있고, 또는
인생에서 의도치 않은 환경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러한 상실감에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렇지만 위안이라는 것이 누가 위로의 말을 해준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저자처럼 인문학 책을 읽는다고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상실감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만 한다. 그 싸움을 이기기 위해 철학 책을
읽던지, 주위사람들의 위로를 받던지, 아니면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리던지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고난으로 생각한다. 남들에게 닥친 역경은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 닥친 것은 삶을 뒤흔들 만큼 심각한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첫사랑의 열병처럼 대부분의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물론 그런 역경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뒤에 생각해 보면 특별히 한 것도 없이 시간만 흘렀을 뿐인데도 상실감을, 역경을 치유하고 절망에서 빠져 나온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절망을
안고 살아온 시기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전주로 나왔다. 집은 도청소재지였던 전주에서 불과 100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하루에 전주에서 몇 번 오가는 버스밖에는 교통수단이 전혀 없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공무원을 관두고 친구분과 함께 사업을 시작하였다. 택시 몇 대와 미니버스 - 당시에는 마이크로 버스라고 불렀다 - 한대를 구입하여 읍내에서
주위 면소재지들을 운행하는 사업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어린 나에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에 정확히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업을 시작하고 한 일,이년 지난 것으로 기억된다. 택시는 운행을 하는 시간보다 세워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그나마 근근이 운행되던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그 다음은..?
소위 빚잔치라는 것을 하고 난 후 아버지는
거의 폐인이 되었다. 그 때 나이 마흔이 채 안되었을 때인데.. 이후
먹고 사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몫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수많은 시간을 절망과 싸웠다. 아마
이때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지 싶다. 당시 내가 버터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당시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와중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는 사치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도 아버지와는 화해를 하지 못했다. 말년에 7년여를 병원에서 보낸 아버지를 볼 때마다 이제는 화해해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지만, 선뜻 입밖에 내지 못했고, 그렇게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순탄하다면 순탄하다고 할만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물론 역경이 없었던 것도, 삶의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던
삶이 최근 들어 흔들리고 있다.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까닭 모를 분노가 마음을 흔들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부정 당하는 것 같아 가슴 속에서는 불길이 일어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솟구치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책들을 읽으면서 보낸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철학 책을 비롯한 인문학 서적은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고, 즐겨 읽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적 소양이 짧아 그 책들 속에서, 철학자들의 삶 속에서 위안을 얻지는 못하지만, 읽고, 또 읽을 뿐이다. 평소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 많은 시간을 이 문제와 씨름 하고 있다. 나도 답을 얻기
위해 철학자들의 책을 찾아서 읽는다. 비록 저자처럼 절박하게 철학 책에 매달리지는 않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른 말로 옮기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일맥 상통한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도 자주 생각 해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거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죽음까지 생각해보는 그런 절망에 빠져보지 않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간혹 가족이나 친구들처럼 가까운 사람들, 혹은
주위 지인들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당혹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것이 비로소 내 주위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실감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답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죽음을 생각하면 우선은 막막함을 느낀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도, 수년 전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그리고
그렇게 건강하던 매제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종양으로 죽었을 때도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속에 빠져든 것 마냥 막막했다.
남아있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존재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저 막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은 나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막막함은 사라졌다. 그게 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비로소 남아있는 사람들이 생각났을 뿐이다. 여전히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머리 속에서 맴돌지만 마땅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나 역시 니체를 읽고, 몽테뉴를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에 맞춰진 삶에서 벗어나라는
니체의 말을,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즉 죽음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 몽테뉴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걱정하지 말고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라는 몽테뉴의 말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학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삶 속에서, 또 그들의
말 속에서 위안을 얻고 삶을 추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역시 흔들리는 우리의 삶에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인가에 매달려 볼만하다.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억이
희미해져 치유되었다고 믿게 되기 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말이다. 근래 들어 주역에 푹 빠져있다. 냉정하게 나를 돌아다보고, 운명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예전보다 치열하게 읽고 있다. 마음의 화를 잊기 위해서라도..
즐거움을 얻기 위해, 교훈을 얻기 위해 [에세]를 읽지 말고, 오직 살기 위해 읽으라고 했던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의 말이 생각나다. 나 역시 살기 위해 오늘도 읽고, 또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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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의 불행은 현실이 되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한다. 남보다 평온한 여로를 지나온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때때로 찾아오는 삶에서의 '부침'은 삶에 새로운 철학을 부여해주는 시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불행이 나만 피해가는 기분에 우쭐대기도 하였고 남보다 조금은 낫다는 오만함으로 실존의 존재인 ‘나’를 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밥벌이의 지겨움과 사회적 책임의 무게가 한 쌍의 수레바퀴가 되어 굴러가게 되는 중년의 삶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거친 바다에 떠있는 부표처럼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거친 파도처럼 요동치는 중년의 삶에 난파나 충파를 겪지 않으려면 결연하게 방향타를 놓지 않는 삶의 키잡이가 되어야 한다.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의 저자 홍정은 살기 위해 사유하는 인문인이자 철학 낙서가이다. 어느 날 찾아 온 불행-아버지의 사고사와 동생의 자살-로 죽음의 문턱에서 방황하던 저자에게 날아 든 ‘철학’은 거친 바다에 떠 있는 부표 같았던 저자를 구원해 주는 구원의 동앗줄이었다.
저자는 ‘삶은 부정과 그 부정이 지니는 고통으로 이행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대립과 모순을 제거할 때 비로소 스스로를 위해 긍정적으로 된다. 물론 만약에 그런 모순들이 해결하지 않은 채 계속 모순으로 머물면 그때 삶은 그 모순 때문에 무너지게 된다.’ 라며 삶에서의 ‘부정과 모순’을 반복하며 자신의 중심을 깨달아가야 한다고 한다. 삶에서 수많은 부침에서 깨달은 ‘부정과 모순’을 깨닫는 과정이야말로 ‘나’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고사와 동생의 자살로 세계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경도되며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삶을 부정하는 의지를 통해 삶을 고양시키는 힘으로 바꾸는 것처럼 철학자들의 경구들로 통해 마주한 삶에 대한 진경을 소개해 주고 있다.
니체의 트라우마였던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과 잇다른 몸의 고통으로 니체가 깨달았던 영원회귀 사상이 결국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피하기보다는 당당히 받아들이며 현재 찰나의 순간을 긍정하는 것이였듯이 저자는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의 문턱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힘을 니체와 세네카, 소크라테스, 몽테뉴, 플라톤 과 같은 철학자들의 '삶'을 철학한다. 진리의 언어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지만, 생각하는 삶을 살게 해준다. 진리의 언어는 지금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가 진실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형이상학은 우리를 ‘알게’ 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했던가!)-p74 중년이라는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단연코 '철학'이라 할 것이다. 조금씩 노쇄해져 가는 육체를 이끌고 삶이라는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것자체가 중년의 삶에 직면한 고통이자 절망이다. 많은 곳이 낡아서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무너져버리는 배가 아닌 스스로 정비하여 다가오는 폭풍과 불행에 대비하는 선장이 되어야 할 때가 중년이라는 변곡점이다. 삶에서의 부정과 그 부정이 지니는 고통을 이행하면서 대립과 모순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삶이라는 화두는 완성된다. '나' 라는 삶을 완성하는 척도는 바로 이 책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에 있다.
‘나’란 화두는 내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고 끈질기게 물어야 할 근원적 물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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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홍정/인간사랑]삶과 죽음 사이의 인생길에서 철학하는 즐거움을 주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불가항력의 문제다. 태어나는 일이든 죽는 일이든 모두 내 맘대로 어쩌지 못하는 초인적인 일이다. 그러니 많은 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했을 것이다. 실존 자체도 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 않나.
탄생의 순간은 환희지만 죽음의 순간은 슬픔이다. 살면서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마주한 적이 없지만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깊은 슬픔에 빠질 것이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이왕이면 늦추고 싶은 것도 깊은 슬픔을 이겨 낼 자신이 없어서 일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질병 없이 천명을 다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게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웰다잉에 대한 관심도 높은 것이리라.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마주했던 저자의 삶을 보면서 삶은 기대한대로 흐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예고가 없는 죽음 속에서, 심장을 후벼파는 슬픔 속에서 저자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인문학과 조우한 것도 놀랍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했던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의 공감과 위로를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대학 졸업 후 굴지의 광고회사에 다녔다. 40대 초반,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동생마저 자살로 잃었다. 그 이후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하며 세상을 등지고 축사로 도망쳤고, 2년 반의 시간동안 아내가 보내주는 인문학 책을 파고들었고, 이후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인문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고통의 순간에서 인문학 공부에 몰입했고, 인문학 공부를 하게 되면서 즐거운 글쓰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의 인문학 공부의 밑바탕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서재에서 함께 책을 읽었고, 군대에 있을 때도 아버지가 보내주신 책들로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고 한다. 그러니 멘토 같은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더욱 인문학의 세계로 인도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구원의 손길을 잡는 심정으로 인문학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으리라.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들수록 인문학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졌다. 인문학은 나에게 플라시보(위약) 효과로 작용했다. 테세우스를 아리아드네의 실패 역할을 한 것은 인문학이었다. 내 삶의 전부는 인문학에 걸려 있었다. (73쪽)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자기를 둘러 싼 외부적인 것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돌보는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스피노자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은 자기 삶의 원인을 스스로 파악하여 사는 삶이다. 자기 삶의 원인이 되는 것, 즉 내 삶이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영향 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삶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을 돌보며 사는 삶이다. (51쪽)
형이상학은 우리를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이다. (55쪽)
스스로도 병약했기에 공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휴식과 사색으로 자기 돌봄에 철저했던 니체의 삶에서 위로 받고 긍정 에너지를 받게 되고…….
내가 몸과 정신의 고통으로 힘들던 시절 니체는 내 상처를 보듬고 위로해 주었다. 니체가 없었더라면 내 삶은 황폐해졌을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문제란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댔을 때 나를 건져 올려 구해주었으며, 이를 넘어 내가 앎의 문제로 공부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고, 진정한 자기 돌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87쪽)
‘이 하루로 인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전 생애에 만족하게 되었다’는 니체의 말에서 전율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난 아직 그런 기억이 없기에 나도 그런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빌게 된다.
자기 자신을 돌봄을 영혼으로 규정했던 소크라테스에 빠졌다가, 칸트를 시작으로 피히테와 셀링 그리고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철학부터 본격적인 ‘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죽음의 문제와 대면한 철학자인 플라톤, 스피노자,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많은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음주흡연을 모두 끊었고, 좋은 집과 좋은 차, 좋은 옷이 없어도 행복하고, 아내와 소통의 시간을 늘려서 행복하다고 한다.
이 책은 ‘인문낙서(人文樂書) ‘시리즈 1편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인생길에서 철학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곁에 두고 음미하고 싶은 人文樂書다.
자기운명의 수레바퀴 속도를 누구나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죽음에 대해 초연하기가 그리 쉬울까.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삶은 이야기 도중에 마감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중간에 끝나기에 ‘어~’하다가 갈수도 있다. 그래서 운명론이 나온 지도 모르고…….
누구나 어떠한 죽음일지라도 죽음에 대해 무념무상일 수 없다. 그저 시간이 약일 텐데……. 별다른 삶이 있을까마는 후회 없는 삶, 내면에서 솟아나는 행복한 삶,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노닐다 갈 수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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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 번 더! 철학하라’ 먼저 궁금했다. 저자가 말한 축사 – 저자는 축사에 기어 들어갔다고 했다 - 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정말 문자 그대로 축사- 외양간 또는 돼지우리- 의 바닥에서 지냈다는 말인가? 그런 나의 궁금증은 167쪽에 가서 풀렸다. “나는 소똥 냄새를 벗 삼아 2년 반을 축사에 딸린 방에서 인문학 책을 읽었다.” 다행이다, 내 추측이 빗나갔으니. 그래도 그 고난의 역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철학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는 저자가 소똥냄새 맡으며 철학한 그 과정이 모두 고스란히 담겨있다. 축사에서 돌아와 다시 사회로 복귀한 그의 궤적을 따라 이 책이 진행이 되는데, 삶이 ‘앞으로 가!’ 는데 철학은 행진곡으로 역할을 한다. 아니 행진곡이란 말은 너무 안이한 말 같으니, 삶의 엔진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의 인생은 철학이 이끌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저자는 왜 그런 상황에서 철학을 시작했을까? 무엇 때문에 철학으로 인생을 끌어가게 만들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의 어법을 잠시 빌려보자. ‘그(저자)는 만족하지 못했다, 고로 철학했다.’ 그는 삶에서 만족하지 못했기에 철학을 했다. 이 책에서, 그래서 철학은 철저하게 동사형으로만 쓰였다. 동사형으로 서술되었을뿐만 아니라, 동사가 되어 여기 저기 저자를 몰고 다닌다. 저자는 처음에는 인생의 삶속에서 숨이 막혔길래, 철학을 했고, 그 후로는 철학자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기에 여기저기 철학을 더 하면서 다녔다. 그래서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철학하라, 그리고 철학하라!’ 니체의 말을 빌려 본다면, ‘한 번 더! 철학하라’ 왜 그는 철학을 더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철학은 그를 한군데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철학을 더 하게(여기는 움직인다는 동사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상기하시길)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가 철학에(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무르지 못하고 ‘더 철학하고’ 다녔다. 그는 무수하게 고백한다. <세익스피어의 다음 말도 나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39쪽) <나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침착하게 대응하거나......는 말도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40쪽) <쇼펜하우어의 생사관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했다>(77쪽)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관한 견해도 내겐 어떤 위안도 되지 못했다.>(70쪽) 그런 '위안받지 못하는 상황'은 그를 더욱더 철학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위안을 결국 (찾아내) 얻었다.
<쇼펜하우어도 나처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나는 마음이 평온해져 왔다.>(78쪽) <나는 니체로부터 몸관리에 대해 위안을 얻었다.>(78쪽) 그는 언제 위안을 받지 못하고, 언제 위안을 받았는가 그것은 철학자로부터 ‘말’의 성찬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위로받지 못했고, 철학자의 고뇌가 자기 자신과 같을 때에 위로를 받았다. <철학은 삶의 피로에 지친 내 마음과 몸을 추슬러 활력을 찾을 수 있게 해 준 훌륭한 멘토였다. 내가 운명이란 최대의 삶에 중량에 짓눌려 있을 때 니체의 치열한 삶의 에피소드로 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는 철학에서 삶의 위안을 얻었다. 나는 철학 때문에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88쪽) 또 언제 위로를 받았을까 <그(쇼펜하우어)가 죽음에 달관해 해답을 찾은 듯 단언하다가 인간의 세대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체념하듯 말을 끝맺는다. 쇼펜하우어도 나처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나는 마음이 평온해져 왔다.>(78쪽) 바로 철학자가 인생의 문제에서 해답을 찾은 것처럼 번드르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해답지를 찾지 못하고 체념할 때에 그때 저자는 오히려 거기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그렇다면 철학은 곧 공감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위로를 받기 시작한 저자에게 철학은 그야말로 구원의 존재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글에서 부족이란 말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때부터일까 <내가 몸과 정신의 고통으로 힘들던 시절 니체는 내 상처를 보듬고 위로해 주었다.>(87쪽)
바로 그 시점부터 철학은 그에게 위로의 원천이 되었고, 따라서 '삶의 자리'가 곧 '철학의 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철학을 두 번 한다. 첫번 째는 숨막혀서 그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철학했고, 그 다음에는 인생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철학을 더 했다. 그렇게 철학은 그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서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엔진이 되었다. <니체는 한편으로 나를 채찍질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니체로부터 삶의 위안을 받았다. 니체는 내 삶과 끝까지 할 것이다.>(88쪽) 이 책은 그러한 그의 처절한 기록이다. 철학이 그를 질곡에서 이끌어 내었고, 그 뒤로 그는 삶을 제대로 살기위해 철학을 더 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책상에서 읽고 쓴 글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서두에 말한 소똥의 냄새가 짙게 밴 살아있는, 그래서 움직이는, 아니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철학이 있다. 그러한 철학을 그와 함께 '해보고', 또 '더 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기쁨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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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장병욱 선임기자께서 <숨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서평을 한국일보 지면에 게재해 주셨더군요. http://www.hankookilbo.com/v/45c3bb77cbd6423ba3039f475198add9
죽음 절망의 늪에서 나를 치유한 것은 사유
'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2014.11.21
40대 초반에 들이닥친 아버지의 사고사와 동생의 자살은 이 철학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인문학적 소양이 나름 두텁게 쌓여 있던 저자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과 동일시했다. 그는 쇠똥 냄새 나는 축사를 택했고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탐독하며 절대고독의 늪을 헤쳤다. 잘 나가던 광고회사 직원이었던 저자 홍정(55)씨는 절망의 나락에서 사유의 힘으로 회생한 사람이다.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과 그들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을씨년스런 축사에서 살아야 했던 그에게 인문학은 고통을 잊게 하는 위약(僞藥ㆍplacebo) 효과를 제공했다.
저자는 죽음의 문제로 방황하면서 마음과 몸이 모두 병들었던 그 시기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났다. 그가 니체를 통해 만난 것은 몸이었다. 그는 “몸으로 걷고,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며 “니체를 통해 몸 관리의 위안을 얻었다”(78쪽)고 한다. 니체가 몸의 고통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15세에 썼던 자서전 ‘나의 삶으로부터’를 읽은 뒤에는 니체를 따라 양생술과 섭생을 실천했다. 그런 저자는 니체의 글을 경구처럼 책 곳곳에 배치한다. 그것은 결국 니체에 대한 감사의 형식이었다. “내가 고통으로 힘들던 시절, 니체는 내 상처를 보듬고 위로해 주었다.…(중략)…진정한 자기 돌봄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87쪽) 거기서 매 순간 긍정하라는 영원 회귀의 가르침을 통찰한 것이다.
저자는 힐링 열풍을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경쟁에서 비롯된 지친 마음을 치유 받으려는 움직임이라고 해석한다. 이 시대는 고작해야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 놓고 닦달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과잉 쾌락의 시간 활용에서 삶은 왜소하고 비루해지는”(101쪽) 때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저자는 죽음을 사유한다. 군 기갑학교에서 겪었던 죽음의 공포를 떠올린 저자는 하이데거, 쇼펜하우어, 몽테뉴 등의 철학자를 호출한다. 그에게 그들은 곧 위안이었다.
책의 후반부는 철학의 의미 혹은 효용에 대해 상술한다. 인간이 왜 없는(ou-) 장소(topia)인 유토피아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지를 물으며 하이데거와 지젝, 원효를 논한다. 축사로 들어갔던 무의 의지가 곧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지라는 이치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을 시작으로 ‘어느 낙서가의 인문학 공부’(12월), ‘결혼에 관한 문ㆍ사ㆍ철 스토리텔링’(2015년 1월) 등 자신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인문학 서적을 계속 낼 계획이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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