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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여자아이를 말하는 것 같다. 사춘기 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의 성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배경 묘사가 없다. 인물에 대한 설명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목적을 상실한채 우주 바깥쪽에서 유영할 뿐이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난해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머리속으로 배경이 명료하게 그려지는 시점이 생기는데, 이 소설은 끝내 그 지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제 초경을 막 시작한 솔랑주와 친구들은 오로지 성(sex)만 보인다. 그들의 대화는 성에서 시작해서 성으로 끝난다. 그들이 하는 행동 역시 성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일관되고 탈선적인 행위가 다다. 온갖 성적인 행위와 성기를 뜻하는 금기어들이 지면 가득 채워져 있지만, 완전히 발가벗은 사람들로 우굴대는 목욕탕에서는 성적인 흥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은밀한 19금의 성애 소설과는 달리 외설적이라는 느낌마저 달아난다. 그들이 다루는 성이 너무 미숙하고, 사랑을 매개로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혹은 나는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을 싣지 않은 섹스는 '성애'가 아닌 동물적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그럴까?) 그렇다. 이 시대, 이 공간에서 막 가슴이 나오고, 초경을 시작한 여자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인 성에 접근하고 알아가는 경험하는 과정은 우리가 어릴 적, 억압되고 숨겨졌던 은밀한 유혹과는 다른 정반대쪽 세상 풍경이다.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 나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집착한다. 그들은 섹스라는, 경계 넘어의 새로운 세계로 맘껏 도약하고 싶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준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깨닫게 된다(깨달았을까?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면?). 솔랑주를 부모처럼 돌보는 옆집 아저씨 비오츠의 고뇌는 책을 덮고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보였다. 앞뒤 정황없이 아무 설명도 없는 솔랑주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 독신남 비오츠는 솔랑주와 부모 이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조연일 뿐이다. 직업도 없이 고작해야 남의 집 아이를 보는 사람이고, 아이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감은 바닥이다. 파티에서 만난 잘생긴 아르노와 항문성교, 구강성교 등의 매우 난잡한 성행위를 했음에도 아직 '물리적'으로 virgin인 그녀는 고통스럽게 유혹을 떨쳐내는 비오츠를 끝내 굴복시킨다. 그토록 궁금했던 경계를 넘어 맘껏 펼쳐진 성의 세계에 도달하지만 그녀가 찾는 건 사랑이 아니었음이, 그 아이의 목적은 행위와 경험과 싫증날때까지 싫컷 해보는 것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인해 돌아온 상처는 온전히 아이와 섹스를 한 그 자신의 몫.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정말? 성행위를 했다고 해서?) 아르노에게 나도 해봤다고 말할 수 있게 당당해졌고, 비오츠가 필요없게 되었다. 아이에게 버려지고 남겨진 어른 비오츠가 한 행동은 얼마 전 읽은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를 연상시켰다. 그 곳에서도 주인공은 아이에게 버려지지는 않지만 아직 미성년인 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스스로의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비오츠.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부모처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대고, 아이의 성적 일탈을 나무라던 어른이, 그 아이의 끈질긴 유혹에 손을 들고 넘어간 후에 그 불꽃처럼 뜨거운 섹스의 향연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들의 그저 짐승같은 본성의 충족에만 그 목적과 의의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는 그런 결정을 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아마도) 절망했어야 했을 어른은 만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어른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면 절망하지 않은 것보다 나았을까? 정제되지 않은 중2 쯤되는 아이들의 그 직접적이고도 적나라한 섹스 놀이는 난해하다. 뭔가를 얘기하고 있지만 뭘 얘기하고 있는지. 뭔가를 기억해내고 있지만 그게 언제이고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누구와 대화하고 있지만 거기가 어디인지. 그저 생각 생각 생각.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처럼 앞뒤 설명도 없이 뚝뚝 끊어진 의식의 징검다리를 따라 가면, 겨우 겨우 가느다랗게 명맥을 유지하는 어떤 이야기의 흐름이 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어렵게 통과한 사춘기의 성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미치도록 궁금한 곳,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허세와 분별없는 온갖 위험한 시도와 멸시와 유혹과 위험한 행위들 사이에서 두서 없이 섟인다.
* 문체가 난해해서, 번역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뒤저보니 최정수님의 번역이다. 이분의 번역서를 최근 많이 읽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딸2><딜레마><기 드 모파상> 등.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 1년 전에 올렸던 글인데, 못읽으신 이웃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 에이바님이 기억하고 계셔서 저도 다시 읽어보니 새롭더군요. 이렇게 안써놨으면 뭔 내용인지 가물가물했을텐데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고스란히 적고 보니, 새삼 1년 전일이 새롭네요. 확실히 1년 전만 해도, 책을 조금 덜 읽을 때라 그런지 오자도 적고 비문도 적네요. 반성반성 덜읽고 제대로 쓰기 운동을 전개해야겠어요 (주말에 놀러다니느라 책을 못읽어서 새 글 올릴 게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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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에 가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쓴 일기장과 친구들이랑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그걸 읽고 있노라면 내 어린 시절의 사건과 그 당시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일기장은 선생님이 검사를 했기에 다소 형식적인 부분도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쓴 일기장은 평범하지만 그 당시 내가 고민했던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 재미있다. 여학교만 다녔기에 여자 아이 수다 같은 이야기가 주류지만 당시 고민했던 친구 관계, 옆 학교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 부모와의 갈등과 형제자매의 갈등까지.. 그 당시의 나를 알 수 있어 생각이 많아지는 기록들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만 때론 생각한다. 만들어 놓은 틀. 그 틀을 나도 깨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그게 ‘평범’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다시 그 시절로 간다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춘기 여자 아이들. 내가 ‘가시내’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정말 사춘기 여자 아이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는 의문이다. 나도 사춘기를 지났고, 성장했지만... 글쎄. 너무 생소하고 적나라해 거북하다고나 할까? 프랑스의 시골 마을. 이곳에서 솔랑주는 지루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솔랑주의 주변에는 정상적인 어른이 없다. 솔랑주에게는 멋진 아빠지만 그는 밖에서 바람을 피며 돌아다니고 솔랑주의 엄마는 그런 아빠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린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솔랑주를 돌봐주는 사람은 비오츠 씨. 어른도 아이도 아닌 이상한 경계를 가진 남자가 솔랑주를 돌본다. 친한 친구 로즈의 집은 평범하지만 정상적인 가족으로 보인다. 이 심심하고 재미없는 시골 사춘기 소녀들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섹스. 누가 경험을 했고 누가 처녀인지, 혹은 누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를 열심히 이야기 한다. 일상이 재미없는 솔랑주에게 관심은 남자와 데이트하기 즉 남자와 함께 자보는 것. 솔랑주는 남자와 자 보게 될까? 어떤 과정을 통해 솔랑주는 남자와 함께 할까 사춘기 아들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모두... 머릿속에 이런 생각만 하는 것일까? 싶어 난감했다. 읽는 동안 내가 이 책을 읽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만약 100페이지 미만을 읽었다면 읽다가 그만 뒀을까? 일단 책을 잡으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읽기는 했지만 멘붕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나 역시도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시대적 배경이 1980년대면... 내가 사춘기를 겪고 있던 시점이다. 우리 때만해도 성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실제로 실행해 보는 것 자체를 불순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누군가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도 모두 나와 같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성적인 것에만 관심 있는 아이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으니까. 성적인 호기심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걸 숨기고 아닌 척 하는 것이 더 큰 사단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 만약 솔랑주의 주변에 그녀의 아픔이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이야기해 줄 어른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도 어른이 되고 보니 누군가 정성어린, 사랑어린 충고를 그 당시에 해 줬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사춘기 여자 아이의 일기장 같은 풍. 어떤 형식도 틀도 없이 이야기 하듯 흘러가는 이야기는 다소 산만하고 정신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그 또래의 아이의 생각 같다. 이 소녀는 이후 아가씨가 되고 중년의 아줌마가 될 것이다. 그때 자신에게 딸이 있다면 자신의 성적인 혼란함을 겪었듯 이야기 해 줄 수 있을까? 다소 충격적인 책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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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여자아이를 말하는 것 같다. 사춘기 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의 성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배경 묘사가 없다. 인물에 대한 설명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목적을 상실한채 우주 바깥쪽에서 유영할 뿐이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난해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머리속으로 배경이 명료하게 그려지는 시점이 생기는데, 이 소설은 끝내 그 지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제 초경을 막 시작한 솔랑주와 친구들은 오로지 성(sex)만 보인다. 그들의 대화는 성에서 시작해서 성으로 끝난다. 그들이 하는 행동 역시 성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일관되고 탈선적인 행위가 다다. 온갖 성적인 행위와 성기를 뜻하는 금기어들이 지면 가득 채워져 있지만, 완전히 발가벗은 사람들로 우굴대는 목욕탕에서는 성적인 흥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은밀한 19금의 성애 소설과는 달리 외설적이라는 느낌마저 달아난다. 그들이 다루는 성이 너무 미숙하고, 사랑을 매개로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혹은 나는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을 싣지 않은 섹스는 '성애'가 아닌 동물적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그럴까?) 그렇다. 이 시대, 이 공간에서 막 가슴이 나오고, 초경을 시작한 여자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인 성에 접근하고 알아가는 경험하는 과정은 우리가 어릴 적, 억압되고 숨겨졌던 은밀한 유혹과는 다른 정반대쪽 세상 풍경이다.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 나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집착한다. 그들은 섹스라는, 경계 넘어의 새로운 세계로 맘껏 도약하고 싶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준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깨닫게 된다(깨달았을까?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면?). 솔랑주를 부모처럼 돌보는 옆집 아저씨 비오츠의 고뇌는 책을 덮고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보였다. 앞뒤 정황없이 아무 설명도 없는 솔랑주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 독신남 비오츠는 솔랑주와 부모 이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조연일 뿐이다. 직업도 없이 고작해야 남의 집 아이를 보는 사람이고, 아이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감은 바닥이다. 파티에서 만난 잘생긴 아르노와 항문성교, 구강성교 등의 매우 난잡한 성행위를 했음에도 아직 '물리적'으로 virgin인 그녀는 고통스럽게 유혹을 떨쳐내는 비오츠를 끝내 굴복시킨다. 그토록 궁금했던 경계를 넘어 맘껏 펼쳐진 성의 세계에 도달하지만 그녀가 찾는 건 사랑이 아니었음이, 그 아이의 목적은 행위와 경험과 싫증날때까지 싫컷 해보는 것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인해 돌아온 상처는 온전히 아이와 섹스를 한 그 자신의 몫.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정말? 성행위를 했다고 해서?) 아르노에게 나도 해봤다고 말할 수 있게 당당해졌고, 비오츠가 필요없게 되었다. 아이에게 버려지고 남겨진 어른 비오츠가 한 행동은 얼마 전 읽은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를 연상시켰다. 그 곳에서도 주인공은 아이에게 버려지지는 않지만 아직 미성년인 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스스로의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비오츠.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부모처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대고, 아이의 성적 일탈을 나무라던 어른이, 그 아이의 끈질긴 유혹에 손을 들고 넘어간 후에 그 불꽃처럼 뜨거운 섹스의 향연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들의 그저 짐승같은 본성의 충족에만 그 목적과 의의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는 그런 결정을 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아마도) 절망했어야 했을 어른은 만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어른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면 절망하지 않은 것보다 나았을까? 정제되지 않은 중2 쯤되는 아이들의 그 직접적이고도 적나라한 섹스 놀이는 난해하다. 뭔가를 얘기하고 있지만 뭘 얘기하고 있는지. 뭔가를 기억해내고 있지만 그게 언제이고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누구와 대화하고 있지만 거기가 어디인지. 그저 생각 생각 생각.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처럼 앞뒤 설명도 없이 뚝뚝 끊어진 의식의 징검다리를 따라 가면, 겨우 겨우 가느다랗게 명맥을 유지하는 어떤 이야기의 흐름이 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어렵게 통과한 사춘기의 성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미치도록 궁금한 곳,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허세와 분별없는 온갖 위험한 시도와 멸시와 유혹과 위험한 행위들 사이에서 두서 없이 섟인다.
* 문체가 난해해서, 번역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뒤저보니 최정수님의 번역이다. 이분의 번역서를 최근 많이 읽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딸2><딜레마><기 드 모파상> 등.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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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암퇘지'의 저자로 기억되는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큰 논쟁적인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의 신간 가시내다.
가시내- 그야말로 한국적인, 오랜 만에 들어 보는 말이다. 학창시절 국어선생님께서 친구에게 가시내란 말을 했다가 크게 화를 내는 일을 겪었다고 하는 이 단어는 사실 지극히 여자아이를 나타내는 말임에도 말의 뉘앙스가 변해 점차 사람들 인식 속에 어떤 속된 나쁜 이미지로 변질이 되어 버린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좀 특이하게 읽힌다. 전개과정이 기.승.전.결의 양상이 아닌 두서없이 그냥 나오는 말대로 툭 내뱉듯이 이 말 저 말이 나오고 독자들은 그 때마다 뭐지? 하면서 상황을 그려보면서 읽게 된다.
1970~8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가상의 소도시 클레브에 사는 솔랑주라는 소녀의 성장일기라고도 할 수있는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이 되어있다. 1부인 ‘시작하다’에서는 주인공이 첫 여인으로서의 발을 내딛게 되는 초경의 경험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주위의 친구들의 상황들을 그리는 구성, 2부 ‘사랑하다’에서는 여러 남자들과의 만남과 첫 경험, 그 중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던 가혹하다고 할 슈있는 여러 형태의 성 체위의 묘사 장면이 '날'것 그대로 표현이 된다. 3부 에서는 성장한 소녀의 복잡해진 내면과 성인 남자와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바로 자신의 어린시절 부터 보모 비슷하게 보살펴 온 비오츠란 아저씨와의 일이 그렇다.
주위 사람들부터 소외되고 이상한 사람이란 인식이 있는 비오츠를 유혹하고 그가 마침내 무너졌을 때 솔랑주는 이미 그녀가 상상했던 섹스의 생각이 전혀 다름을, 오히려 비오츠가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와 엄마와의 이혼으로 더욱 혼란에 빠진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이 일을 하면서 클레브를 떠날 결심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또 다른 남자 아르노와의 꿈을 꾸는 당찬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지게하고 망가지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나머지 인생 말년을 비참하게 만들면서도 오히려 이제는 귀찮게 느끼는 솔랑주란 인물을 통해 소녀에서 여인으로서의 성적인 감각과 그 뭔가를 막연히 깨달아 가게 되는 이런 성장의 일기는 무척 당황스럽게 다가왔다.
저자 자신의 유년시절에 목소리로 테이프에 담았던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드러냈다고도 느껴지는 이 소설은 한 인간의 태어남과 성장의 기로에 있어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춘기에 느껴지는 호기심의 발산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작품이다.
누가 누군가를 이성으로서 호기심을 가지고 느끼게 된다거나, 성적인 부분에서 나누는 또래의 친구들과의 이야기들은 확실히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확실히 알고나 있다는 듯한 착각, 피임이야기, 비오츠와의 관계를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엄마로서의 행동들은 자신의 아이라고는 하지만 일개의 독립된 개체로서의 엄연하게 구분되어지는 개인적인 비밀사이기도 하기에 어쩌면 가시내가 의미하는 말 속엔 한 인간의 성장의 기로에서 소녀에서 가시내, 그리고 여인으로 변해가는 중간지점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솔랑주를 지켜봐왔던 비오츠에 대한 무심한 행동들은 차후 그녀가 살아 갈 앞 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있을까? 자신이 해 온 행동에 대한 반성을 느끼게는 될까? 도발적이고 섹스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에 스스로 그 세계에 자신의 몸을 맡김으로서 더 이상의 기대치는 별로 없다는, 이젠 귀찮게만 느껴지게 됨을 알아가는 솔랑주란 주인공의 행동이 책을 덮은 후에 과연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를 생각해 보게 된다.
책 발간 당시에도 많은 이슈를 일으켰다고 하는 작가의 작품은 정말 낯 뜨겁고 어린 소녀라고 하기엔 성숙의 길엔 미치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질 만큼 용기가 앞선 것인지, 아니면 한 때의 치기어린 행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을 던져 주는 작품임엔 틀림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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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때는 가시내란 말을 할머니에게 종종 들으며 자랐다. 프랑스 현대 문학을 이끌고 있는 작가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의 '가시내'...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시내란 말을 들을 수 있는 딱 그 시기의 소녀가 주인공이고 그 또래 소녀들이 품게 되는 성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예전과 달리 성에 대해서 여성들도 많이 자유로워지고 당당해진 모습을 보게 된다. 터놓고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케이블 TV '마녀사냥'을 비롯하여 남녀 간의 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그램이 몇 개 되는데 이런 TV에서 다루고 있는 성 이야기보다 책에 담겨진 십대 소녀의 성은 상당히 쇼킹하고 내가 주인공 소녀와 같은 십대일 때를 떠올려 보아도 충격적이다.
조용한 시골 마을 프랑스의 지방 클레브에 살고 있는 솔랑주는 항공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가게해서 일하며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를 둔 소녀다. 부모님의 손길이 필요하기에 옆집에 살고 있는 비오츠 아저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솔랑주는 물론이고 소녀의 친구들의 지금 가장 궁금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성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했느냐가 항상 궁금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한다.
비오츠 아저씨는 솔랑주를 아끼고 소녀의 성장에 관심이 많다. 소녀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도 느끼지만 어른으로서 가지지 말아야 할 감정으로 인해 곤혹스러워 한다. 솔랑주의 아버지는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하면 가족들이 받을 수치심, 창피함은 모르는지 발가벗은 모습으로 있는 것을 솔랑주는 보게 된다. 여기에 아버지는 항공사에 근무하는 것은 맞지만 그가 말한 부서와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다 모르는 여자 차에 올라타 고 사라진다. 아버지가 떠난 후 엄마의 우울증은 좀 더 심해진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느낄 때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단짝처럼 지낸 친구의 성 이야기를 자신이 먼저가 아닌 다른 친구를 통해 듣는다는 것에 가슴이 아픈 솔랑주... 속상한 것은 또 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고 있다고 알고 있는 친구가 파티를 여는데 자신만을 쏙 빼고 다른 친구들을 초대한 것이다. 속상한 마음을 비오츠 아저씨에게 털어 놓게 되고 아저씨는 솔랑주가 파티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파티를 연 소녀에 대한 진실을 알게 해준다. 그 곳에서 솔랑주는 잘 생긴 나쁜 남자 아르노를 만난다. 물론 얼마 전에 클럽에서 소방관과 진한 키스를 나누었지만 아르노와 나누는 섹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비오츠 아저씨의 열망을 알기에 아저씨를 자신에게 빠져들고 결국에는 그를 자신 앞에 무릎 끊게 만든다. 허나 솔랑주가 원했던 것이 그의 사랑이 아니다. 솔라주로 인해 비오츠 아저씨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지만 솔랑주는 비오츠 아저씨에게 무심함을 보이며 소녀는 젊은 남자와 떠나려고 한다.
사춘기 성이 가진 모습을 대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너무나 솔직하고 대담하여 오히려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면이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여자, 남자의 성기에 대한 표현을 이처럼 과감하게 표현하는 책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책 속에 무수히 나오는 단어는 살짝 거북함을 주는 면이 있지만 이렇게 대범할 수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솔랑주와 소녀의 친구들이 가진 성에 대한 호기심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나타나는 사춘기 몸의 변화가 더욱 성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붙인다. 소녀들이 가진 성적 환상과 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담하고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부단히 주변을 기웃거린다.
요즘은 무수히 많은 정보들이 인터넷을 통해 쏟아진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성을 접하는 시기도 빨라지고 성에 대담해진 사람들이 많다. 성에 대해 감추고 대놓고 들어내지 않는 것을 미덕, 아닌 조금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정서와 분명 부딪히는 면이 있지만 허영, 허세 등의 사춘기 소녀들이 가질 수 있는 감정들에 솔직함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사춘기 소녀이 감성이 잘 묘사한 것은 저자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 담겨져 있어서다. 자신의 감정에 당당한 솔랑주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했을지 책을 놓으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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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쓰인 듯 보이는 탄탄한 작품이다. 외설은 더 이상 예술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소변기마저 예술로 인정받은 지 오래다. 이 작품의 외설, 날 것 그대로의 표상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 무언가에서 불쾌함,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곧 그것으로부터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어떤 속성을 발견했음을 의미하며,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 잣대로 예술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이 작품이 놀라운 것은 청소년의 성을 ‘있는 그대로’ 그저 보여주기만 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어쭙잖은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조건에 포함되는 게 바로 ‘가치판단을 미루는 것’이다. 작가가 섣부른 가치판단을 배제할수록 독자의 역할은 커지며, 그렇게 만들어진 작가의 세계는 그렇지 않은 작가의 세계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현실적이다. 물론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서양 중에서도 프랑스는 조선시대를 거친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 정서, 행위, 문화적 관습이란 것은 별과 별처럼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무지개처럼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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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암퇘지>를 읽었을 때도 느낀 점인데요. 이런 소설은 참 강렬하고 솔직해서 좋습니다. 문학, 예술에서 그저 솔직한 것만으로는 미덕이 될 수 없겠으나, 솔직함 안에 치열함, 자세함, 그리고 순수한 모종의 열망까지 담았다면 그건 타인의 말초적 흥미를 자극한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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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럽고 은밀한, 그래서 더욱더 잔혹한 사춘기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 ‘가시내’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큰 논쟁적인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의 신간 ‘가시내’입니다. 저자인 이 마리 다리외세크는 1996년 발표한 데뷔작 ‘암퇘지’로 당시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단숨에 ‘화제의 작가’가 됐다고 하죠. 무엇보다 적나라한 성적묘사에 섹스에 직찹하게 되는 여성을 ‘암퇘지’라는 비유를 써가며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엄청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작품에 담긴 독창성과 정치성향으로 인해 출간 직후 바로 프랑스 극우세력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자유의 상징인 프랑스에서 이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요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가시내>라는 작품은 십대 소녀의 소녀에서 여자로의 성장에 대한 작품인데 무엇보다 육체적 발달과 성장의 과정을 무엇보다도 여과없는 적나라한 표현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한 소녀의 비밀스럽고 다소 충격적인 일기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순진한 소녀가 여인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상상력을 넘어선 입체감있는 표현의 극치로 그려내고 있으며 여성의 신체에 관한 깊은 이해와 표현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으로 엄청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사춘기시절이라면 누구나가 느끼고 고민하고 낮설어서 당활할 수 있는 그 상황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상황이라면 느끼고 고민했을 상황으로 당면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시작하다’에서는 주인공 소녀가 초경을 경험하는 시절을, 2부 ‘사랑하다’에서는 여러 남자들과의 만남과 첫 경험, 3부 ‘다시 시작하다’에서는 성장한 소녀의 복잡해진 내면과 성인 남자와의 관계 등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저자는 “오래전부터 청소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가 십대 시절 일기처럼 녹음했던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잊고 있던 그 복잡한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고 말했다 합니다.
비밀스럽고 은밀한 일기인 ‘가시내’는 1970~8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주인공 ‘솔랑주’의 청소년기 삶을 조명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작가의 체험이 짙게 담긴 자전적 소설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14~17세 때 일기를 손으로 쓰지 않고, 카세프 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하는데 이 일기를 재구성하다 보니, 전통적인 소설 문법과는 다른 서사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소녀의 체험담이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이 토막토막 끊어진 채 등장하여 소설을 진행해 나가는 특징이 있는 작품이죠. 그래서 더욱 더 마치 육성 녹음 파일을 듣는 것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생생한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극중 주인공인 ‘솔랑주’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가시내’에서는 솔랑주를 비롯한 작품 속 청소년들의 무신경함, 겉멋을 부리는 대사를 통해 사설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솔랑주의 내면으로 들어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녀의 사고를 독자들에게 여과없는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읽는 이로 하여금 파격적으로 와 닿고 프랑스에서 조차도 논란의 단상에 오른 작품으로 보여지던 이유에 대해선 아직도 다른 것들은 다 개방적이고 용납될 수 있지만 이 성에 관련되선 은밀하고 개방할 수 없는 영역이여서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라고 여겨지는 오늘날에도 충격으로 와 닿을 수 밖에 없는 듯한 것 같습니다.
다소 일방적인 소설의 방식이 아닌 육성녹음에 은거한 자전적 소설이라지만 흔히 접한 방식의 소설이 아니고 조금 끊긴듯한 방식의 소설이여서 읽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신선한 소설임에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여겨지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사춘기 소녀의 성에 대한 접근과 남자에 대한 목마른 갈증에 미칠 것 같은 모습에서 그리고 염원하던 경험 이후의 솔랑주의 정말 쿨한 반응 등 예전에 국내에서 처음 사춘기 소년들의 2차성징에 과정에서 일어나는 성적 호기심에 관련된 영화 <몽정기>가 처음 개봉했으때도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었는데 이 작품은 그 보다 더 엄청난 충격으로 와 닿게 만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덮어두고 비밀스럽고 은밀한 영역으로 닫아두기 보단 이렇게 함으로써 올바른 성에 대한 접근을 알려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여겨지는 또 하나의 우리의 구성애의 <아우성>이 아닌가 라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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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만 들어봐선 혹시 했었습니다. <가시내>가 그 “가시내”냐고요.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계집아이를 속되게 일컫는 방언 “가시내”를 제목으로 사용했다면 10대 소녀 “솔랑주”와 그 친구들은 필시 정숙함과는 거리가 먼, 일탈적 성격이 강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솔랑주”가 사는 곳은 프랑스 남부지방의 ‘클레브’라는 마을인데 바쁜 부모님 대신에 이웃에 사는 “비오츠”씨가 돌봐줍니다. 따분한 일상을 보내던 중에 생리라는 신체적 변화를 겪게 되면서 남녀의 신체의 차이점, 가령 생식기 같은 것에 궁금증도 덩달아 느낍니다.
학교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섹스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은 토막토막 단락으로 끊어지면서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않으니 굉장히 모호하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습니다. 섹스에 탐닉하는 아이들을 위해 남녀의 생식기는 백과사전을 펼쳐 사전적의미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다 이해했다고 볼 수 없겠네요. 그래서 “솔랑주”는 일기를 써 보려 합니다. 직접 펜으로 쓰자니 그렇고 녹음기의 녹음버튼을 눌러서 기록하기로 하죠.
아버지의 자동차 안에는 잡지들이 있습니다. 잡지 속의 여자들을 비교하면서 자위행위를 체험하기도 하고 사전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자연이라는 순환 주기처럼 스스로 터득한 부모님들을 이해해 보려고도 하지요.
“저런 바보가 어느 세월에 여자가 되겠어요? 그리고 언제 애를 낳겠어요 사람들은 여자이길 포기하지 않으려 하죠. 나는 기꺼이 포기하겠지만.”
어머니의 투덜거림대로 무엇이든 첫 경험이 중요합니다. 첫 사랑, 첫 키스, 첫 섹스, 첫 출산 등등 소녀에서 여인으로 나아가기 위해 통과의례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남자랑 데이트로 했다가 늑대 티셔츠를 입은 해변의 서퍼를 나이트에서 만나기도 하고, 영국 펜팔친구, 오토바이 타는 바이크족 “아르노”, 이웃집 어른 “비오츠”씨까지 상대를 고민하다 결국 순결을 잃게 됩니다.
아직 철없는 이 어린 소녀에게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할 보호자가 없었음에 안타깝고 무기력함을 느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물지 못한 정신적 성숙을 부모도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피임에 대해서 엄마조차도 무관심에 방임했던 것이라 “솔랑주”가 “비오츠”씨에게 다시 “아르노”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이끌렸던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죠. 무척 당혹스럽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10대의 性(성)이란 민감하고도 은밀한 주제입니다. 性(성)에 눈 떠가는 와중에 느끼게 되는 격정적 사건이나 몽상과 흥분 등을 적나라하게, 직설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의의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표현은 확실히 난폭했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들이 여진처럼 남는 문제작입니다.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 여의치 않은 탓에 몇 번을 반복해 읽어보면 다소 가닥이 잡히지 않을 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