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떤 책이든 가능하면 작품 해설을 읽지 않으려고 한다. 책을 읽기 전 읽는 것도 그렇지만 다 읽고 나서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말하는 그 느낌을 내가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그들과 나의 의견이 다를 수도 있지만,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부분에서 다른 것을 느껴도 평론가가 정답이고 내가 오답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란 내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게 편집되고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근데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살짝... 평론가의 작품해설을 읽을까 고민을 했었다. 시를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아팠고, 어려웠으니까. 이승하의 시는 모두 고통의 집합체 같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그의 머리를 통해 글자로 만들어지면서 시가 되고 예술이 되지만 읽고 있는 나는 힘들고 아프다. 세상에는 좋은 말과 글이 많다. 사랑스럽게 표현하고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승하의 시는 아름다움보다는 비루함을, 따스함 보다는 차가움을, 행복보다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살아 숨 쉬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공허한 눈을 표현하기도 하고, 잠자고 있는 양심에 불을 지피기도 한다. 세상에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눈 길 한번 돌려주겠니?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많은 시들 앞에 포스트 잇을 붙이지만 내가 이 시들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한두 편 소개하고 싶다. 지긋지긋한 욕창 뒤척일 수 없는 그대 고인 몸 / 썩어가고 있다 짓물러진 저 거죽을 / 돌려 눕혀야 한다 / 돌아눕지 않는 세상 삼복더위인데 그대 몸 / 움직이지 않는 바위덩어리 / 엄동설한인데 그대 몸 / 움직일 수 없는 고목 밑둥치 / 누구라도 부축하여 지금 당장 / 돌려 눕혀야 한다 혼자 돌아누울 수 있는 자유 / 혼자 가려운 곳 긁을 수 있는 자유 / 그 어마어마한 자유가 없는 이곳에서 / 그대 천장 노려보며 이빨 꾹 깨물고서 / 참고 있구나....... 뼈가 갈리는 비명을 (43) 나도 엉덩이에 욕창 흉터가 있다. 이 시처럼 움직일 수 없어 생긴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생겨 버린 그 흉터. 만약 내 부모님이 누군가의 부모님이 이 상태라면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스러울 것 같다. 누워있는 사람도 누워있는 사람을 지켜보는 곁에 있는 사람도. 삶은 아름답고 살아볼만 하다고 하지만 세상엔 이 삶이 비루하고 아픈 사람들도 있다. 행복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아픔 속에 감금 된 채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아프다. 그래 나도 아프다. 안락한 죽음 병실에서 눈뜨는 그대의 새벽은 / 아프다는 말과 함께 시작되곤 하지 / 이를 악물어도 너무 아파서 / 영원한 잠을 원하고 있네 / 고통 없는 세상이 천국일까 / 약물로 날 죽여주거나 / 치료라도 중단해 달라고 그대 외치네 하나뿐인 생명 갖고 / 나 흥정하고 싶지는 않네 / 아, 저렇게 몇 개의 관을 꽂고 / 목숨을 자꾸자꾸 연장해야 할까 / 그대 한사코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 의사는 오늘도 정량의 모르핀을 / 그대 혈관에 넣어야 하네 나 역시 언젠가는 목숨 버리겠지만 / 내 손으로 그대 목숨 거두어야 하나 / 은사죽음으로 내버려두어야 하나 / 그대 가슴 오르내리는 이 병실에서 / 십계명 중 하나를 생각하다가 / 자비로운 살해 방법을 꿈꾸다가 / 침대 모서리에 머리 박고 잠들고 마네 (120-121) 새해 첫날엔 아빠가, 요즈음엔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어제도 그곳엘 다녀왔는데 솔직히 마음이 아프다. 아직 음력으로 2015년이 오지 않았으니 음력 2014년의 모든 액땜을 마무리 하고 싶다. 병원 침대에 누워 ‘에구구구’를 외치며 아픔을 호소하는 엄마를 보며 건강이 제일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 먹으면 누구든 조금씩 아프다고 하는데.. 몰라보게 달라진 엄마의 얼굴이 아프기만 하다. 그나마 뼈만 붙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누워만 있는 엄마의 모습이 아기 같아 우울해 진다. 가끔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 한다. 엄마한테 연명 치료는 하지 말라고.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약으로 누워있는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아이들은 벌써 그런 이야기 한다고 울먹이지만 그래도 나는 미리 이야기 하고 싶다. 연명 치료를 한다고 해서 그게 효도는 아닌 거라고. 다시 한 번 생과 사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삶의 중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삶도 그렇지만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이승하 시인.. 기회가 된다면 이승하 시인의 다른 시집도 찾아 볼 생각이다. 그가 바라보는 삶의 시선은 어느 쪽을 향하는지 알고 싶으니까. |
|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고 해서 비판적이고 암울하고 그럴 것 같았다. 세나언니가 선물한 책이다. 조금 더 천천히 읽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씩 읽었다. 그 때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신문과 함께 섞어 비판한 시들도 있고 아픔을 겪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시들이 많다. 읽으면 우울하다. 그리고 밤만 있고 새벽과 아침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고 우리는 식목일에 나무라도 한 그루 심어야겠다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시인이 쓴 것처럼.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시에선 어머니가 걸음마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썼다. 그렇다. 예전에 이모할머니댁에 갔을 때 놀란 게 떠오른다. 이모할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이 마루에 있었다. 저게 이모할머니였다니! 깜짝 놀랐다. 이모할머니, 진짜 미인이셨구나! 이모할머니는 웃으셨다. 정말 저렇게 아리따운 소녀적이셨던 시절이 할머니께도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갔다. 내 상상력은 그렇게 부족했다.
'호스피스 병동의 밤'에선 남들의 남은 목숨을 헤아리면 내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삶이란, 쉴 사이 없이 남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이라고 한다. 밤의 의미를 되새기며 죽어가는 별이 있다고 하여 누가 그 무수한 별의 아픔을 나눌 수 있으랴. 이걸 읽고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떠올렸다. 증조할아버지는 장수하신 편이셨다고 한다. 마르셨으며 생선을 조금씩 드셨단다. 항상 걸어다니셨고 담배는 조금씩 피셨단다. 그런데 어느 날 그냥 곡기를 끊으시고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소원은 단 하나, 집에서, 죽고, 싶다는 것'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그걸 보니 증조할아버지가 현명하게 하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할지라도 지금 웃으면서 살고자 노력해야 겠다. 그리고 노력하고 싶다. 울고 싶다면 울어도 좋겠지만 또 그렇게 일어나고 싶다.(세나 언니, 감사합니다.) |
|
타자의 고통과 마주하는 시
이승하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 2005)는 타자의 고통과 마주하는 시인의 형상을 보여준다. 고통은 타자의 고통이면서, 동시에 시인(주체)의 고통이다. 시인은 타자의 고통을 보고, 느낀다. “네 피고름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연이어 피어”(「아픔이 너를 꽃피웠다」)나는 것을 보는 주체는, 또한 “그 자리에서 네가 아픔 참고 있었기에 산것들 저렇듯 낱낱이 / 진저리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같은 시) 느끼는 주체는 시인이다. 타자가 고통으로써 피워내는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이 있어 말(言語)로 표현된다. 시인이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으로 설정할 때, 시인은 타자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고통 당하는 아들의 아픔을 시화한 「아들은 가렵다」에 표현되는 것처럼, 시인은 타자의 고통을 봄으로써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낀다.’ 고통은 시인이 타자와 공명하는 창(窓)이며, 타자의 심연과 마주하는 시적 징후이다.
시인은 존재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적 상황에 시선을 집중한다. 거기에는 돈이 없어 해체되는 가족이 있고, 힘이 없기에 희생을 강요당한 종군위안부와 이산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아픔이 어린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고 / 설움이 젊은 나를 늙은이 되게 했으나 / 나는 그 날을 잊지 못해 악물고 살아왔고 / 억지로, 억지로 살아왔다”(「빼앗긴 시간」)고 이야기한다. “빼앗긴 시간”은 고스란히 그들이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고통의 시간일 터이다. 시인의 시선이 미치는 자리는 바로 이러한 타자들의 “빼앗긴 시간”과 맞닿아 있는 바,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묵시록적인 시대인식은 타자들의 “빼앗긴 시간”이 결국은 ‘세상의 폭력’과 무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인간의 마을에서 살고 싶었다 집도 없고 절도 없던 그대, 아내를 만나 벽체를 이루고 지붕이 되어 비바람을 막듯이 낙숫물을 받듯이 체온을 나누며 미움도 쌓으며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겠지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돈인가 가족이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하는 돈이 돈을 낳고 빚이 빚을 낳는다 대출금 납부 기한에 납부를 못하면 카드 결제일에 결제를 못하면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하면 연체가 누적되면? 점점 줄어드는 가계 날이면 날마다 조여드는 것들 - 「너를 미치게 하는 것들 1」에서
“인간의 마을”을 지배하는 것이 돈이다. “체온을 나누며 / 미움을 쌓으며” 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돈이 없다. 돈이 없는 데도 그들은 “인간의 마을”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너를 미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다.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고, 미치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세상이다. 「너를 미치게 하는 것들 2」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세상은 “정글”이고 그 정글을 지배하는 법칙은 “지느냐 이기느냐 그것뿐 / 죽느냐 죽이느냐 그것뿐”이다.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침묵의 거리」)는 시집의 제목은 “복음은 다시 들려오지 않는” 세상, “잠언과 묵시가 사라진 지구”(같은 시)의 상황을 대변한다. 인간의 세상은 “침묵의 거리”로 변하고, “침묵이 세상을 암흑에 휩싸이게 한다”. “미친 혼들이 떠”도는 세상에서 고통에 떨지 않는 시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고통은 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고, 나아가서 온세상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러한 고통을 인간이라면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구멍 속으로」라는 시를 보자.
길을 터라 구멍 막히면 죽는다 내 몸 비록 하나의 창窓일지라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막장일지라도 구멍이 없으면 밥 먹을 수 없다 똥 절대로 눌 수 없다 내 어미 몸의 구멍을 열고 나왔다 목구멍으로 처음 울음 쏟아놓던 날 세계는 나의 기氣를 받아들였고 똥구멍으로 처음 똥을 눈 날 나는 세계를 느꼈으리 구멍을 통해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구멍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텅 빈 구멍을 채우는 동안 나는 나를 잃어버리곤 했고 꽉 찬 구멍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나를 되찾곤 했다 - 「구멍 속으로」에서
시인은 구멍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멍은 틈이면서, 세상의 기원이다. “내 어미 몸의 구멍을 열고 나”온 것처럼, 구멍은 세상의 기원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또 이 세상으로 나오는 문이다. 묵시록적인 세상 너머에서 피어나는 ‘구멍’의 상상력은 실상 “저만큼 아름다운 풍경”(「세 번의 만남」)을 향한 시인의 시적 다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늙은 어머니(할머니)를 시화하는 시들(「어머니의 두통약 뇌신」,「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리며」,「외할머니의 마지막 굿판」,「울 할매 생각」)이 이승하의 이번 시집에서 주목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메말라가는 세상”(「산불 진화에 나선 아버지」)에서, 늙은 어머니-할머니의 형상은 세상을 파괴하는 불(“저 깊은 골짜기가 지금은 온통 불 / 불의 밭이랑 불의 논배미입니다”)을의 이미지와 맞서서 생명을 길러내는 양수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묵시록적인 세상은 어떻게 보면 생명으로서의 양수가 사라진 세상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구멍’의 상상력이 이러한 생명의 상상력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인이 타자의 고통을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으로 고정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은 불이 지배하는 세계에 양수가 흐를 수 있는 구멍을 내려 한다. 구멍이 막히면 생명은 살 수 없다. 암흑에 휩싸인 인간의 마을에 구멍을 내는 것, 그것이 고통의 흔적으로 여며진 이번 시집에서 이승하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시적 상상의 자리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