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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희망'을 심고, 내일의 '흔적'을 남기는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나무를 심은 사람】
"어제는 '희망'을 심고, 내일의 '흔적'을 남기는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보기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일이나 행위를 끝마친 뒤에는 항상 '보상'이나 '대가'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는 게 결코 잘못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사회에 적응하다 보면 내 것을 모두 내어주면서까지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별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어제는 '희망'을 심고, 내일의 '흔적'을 남기는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보기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일이나 행위를 끝마친 뒤에는 항상 '보상'이나 '대가'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는 게 결코 잘못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사회에 적응하다 보면 내 것을 모두 내어주면서까지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별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목격하게 되지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그런 인물입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작은 희생과 실천과 노력이 세상을, 나아가 지구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꿈을 품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황폐하게 죽어버린 땅에 씨앗을 심고 물길을 만들고 자연의 순환법칙 따라, 곧게 성장해준다면 고마운 일이고 설사 그러지 못한다 해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묵묵히 씨앗을 심어 나갈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임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9쪽

 

세상에 태어나 어떤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길 바라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것일 테고요.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 엘제이즈 부피에는 타인에게 자신의 흔적을 확인받고 싶어 나무를 심은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나무를 심는 일이 좋아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메말라버린 황무지에서 생명의 빛을 보고 싶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라 믿어서 날마다 100개의 최상급 도토리를 골라내고 몇십 킬로를 왕복하며 그것을 심고 떡갈나무가 뿌리를 내리길 간절히 바랐겠지요. 이렇듯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자연이 순환의 고리를 거스르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보기 위해 시간과 노동을 소비한 사람들은 얼핏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지구는 애초부터 유지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지나친 비약일까요? 아닙니다. 잘 모르고 있을 뿐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지구는 존속할 수 있었고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저자 장 지오노는 한 여행을 통해 나무를 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여행지는 자신의 터전 프로방스를 기점으로 했으나 문명의 발화점이 전무한 산악지대였지요. 실제로 당도한 그곳은 예상보다 더 황폐했습니다. 생명의 불씨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초적인 황무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야생 그 자체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양치기는 매일 최상급의 도토리를 고릅니다. 그렇게 모인 100개의 도토리를 알맞은 땅에다 심어요. 이 중에 살아남는 것은 채 20%도 되지 않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관대한듯하면서도 알고 보면 끝없는 인내심을 담보로 재생을 허락합니다. 왜 자연을 훼손하면 안 되는지 이만 봐도 알 수 있겠지요. 파괴하기는 쉬우나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에는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통계와 표본자료를 통해 보아왔고 모르지 않습니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은 '자연' 앞에서만은 영원히 예측불허의 말일뿐입니다. 세상이, 지구가 양차 대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도 그는 묵묵히 나무를 심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뜻, 사명이었으니까요.

 

가끔 바람을 맞을 때면,

눈물이 또로록 흐를 것만 같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슬픈, 가슴 아픈 일이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이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언젠가는 이도 먼 추억이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뼈아픈 자각 때문에 그럴 겁니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너무 상쾌하지 않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따라 피고 지는 색색의 향연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하늘의 색깔이 다채롭게 변화한다는 것, 알고 계세요? 하지만 머지않아 이런 눈의 호사도 그리운 옛것이 될지도 모를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문명의 발전 뒤에 야기되는 몸살로만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자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않았던 탓입니다. 지키지 못했다면 최소한 파괴하는 만행을 멈추는 것이 도리 아닐까요? 엘제이즈 부피에처럼 보상 없는 희망의 씨앗을 심지 못한다면 지키려는 양심은 가져야 할 테고요.

 

낯설지 않은 책이었지만 이 책을 무조건 읽어야겠다 마음 먹게 한 것은, 얼마 전 읽었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덕분이었습니다. 큰 욕심 내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저는 욕심 내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압니다. 사람이란, 욕심내고 욕망하는 삶을 사는 게 당연하다는 변명은 정말이지 변명에 불과할는지도 몰라요. 그런 허영에 찌들고 이기적으로 돌아선 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희석해봅니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의 울림을 전해주는 책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긴 호흡을 요하는 책이 모두 대단하고 좋은 작품은 아니듯이 짧은 분량의 책이라 해서 큰 울림을 전해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책을 위시해 그 어떤 모든 것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와 닿을 때 하나의 큰 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짧은 우화 한 편을 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독을 즐기는 나이 든 양치기에게서 자잘한 심장의 울림을 전해 받았습니다. 가족을 잃고 혼자서 세상의 구석진 곳으로 스며들어 나무를 심은 양치기 할아버지. 살아갈수록 '말'을 잃고 대신 자연의 무한한 생명을 몸소 실현하고 그 자연을 통해 심신의 건강을 얻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저 흐뭇합니다. 한편으론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낸 고독의 시간은, 훗날 사람들에게 행복한 미소로, 사람답게 화합하며 믿음과 희망을 담보로 공생하며 나아가는 발판을 제공해주었으므로 값진 희생이자 고독의 사간이 아니었나 합니다. 

 

때때로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차창 밖 풍경으로 보이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내 눈은 푸르른 녹음을 기대하고 있는데 보이는 거라곤 황토색의 벌판뿐인데 왜 그렇지 않겠어요. 특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은 벌거벗은 민둥산, 다갈색의 흙덩어리를 보는 심정은 더욱 불편하기만 합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자신이 심은 나무를 통해 자연의 재생력과 순리를 깨달아갔습니다. 그래서 장 지오노는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서 자연의 재생력과 함께 인간의 올곧은 의지와 그에 따른 생의 기적을 바라봤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는 거겠지요. 희망과 기적,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일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의 힘은, 실행하는 자에게는 가깝게 와있되, 배척하는 자에게는 영원히 미지의 틈에서 흔적을 내비치길 거부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우리 집은 매년 자연이 선사하는 빛, 바람, 물, 토양의 힘으로 자라나는 푸르른 녹음을 즐깁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내년이 걱정스럽습니다. 올해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자연의 기쁨을 선사했지만 결코 이 기쁨이 내년, 내후년까지 이어지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이 전하는 선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함부로 대하는 순간,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것이 더는 선물이 아닌 재앙으로 탈바꿈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애정과 노력만으로도 인간에게 이로운 것들을 선사하는 자연이라는 선물 바구니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손에 들고 싶다면 대가 없는 마음으로 아껴주어야 함은 자명하겠지요.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8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같이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고요히, 정말로 고요하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금도 프로방스 지방의 산악지대에는 그가 심은 여러 종류의 나무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상과도 같은 노력 덕에 맑은 공기를 마시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그곳 사람들은 진정 행복한 부자가 아닐까 싶어요. 가만히 자신을 돌아봅니다.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진짜 나무를 심을 수 없다면 내 주변, 누군가의 허기짐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땅에 심는 나무든, 사람의 마음에 심는 나무든, 희망을 발하리라는 기대는 담보돼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세상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잘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거, 희망을 바라는 마음 안에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끝없이 쏘아올려야하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뿐이니까요.

 

 



w*****8 2013.04.23. 신고 공감 17 댓글 16
리뷰 총점 종이책
아름다운 영혼.. 세상을 바꾸다
"아름다운 영혼.. 세상을 바꾸다" 내용보기
사람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왜 사냐건 웃지요' 라 말한 시인 김상용도 남(南)으로 창(窓)을 내고는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일상을 모두 시적 언어로 승화시키며 국어교과서를 통해 자라나는 많은 아이들의 정서를 살찌웠다. 그게 애초 시인의 삶의 이유는 아니었을런지 모르나, 이미 오래전 많지 않은 나이로 고인이 되신 그 시인은 강원 도지사와 명문대 영문과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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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왜 사냐건 웃지요' 라 말한 시인 김상용도 남(南)으로 창(窓)을 내고는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일상을 모두 시적 언어로 승화시키며 국어교과서를 통해 자라나는 많은 아이들의 정서를 살찌웠다. 그게 애초 시인의 삶의 이유는 아니었을런지 모르나, 이미 오래전 많지 않은 나이로 고인이 되신 그 시인은 강원 도지사와 명문대 영문과 교수까지 역임한 그의 화려한 커리어 보다, 자신의 시를 통해 많은 아이들의 정서를 어루만지고 시인의 꿈을 심어주었다는 데에서 더 흐믓한 삶의 이유를 찾고 계시지는 않을까..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겨야한다고 하지만,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람 역시 이름을 남길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싶다. 누군가의 이름이 세인들을 뇌리에 오래 남고 또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는 건,  그가 살아온 삶이 후세의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더 나아가 현재의 삶의 호사(豪奢)에 한 몫을 어떤 방식으던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 목적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이유들을 정할 때, 자신 이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을 그 이유로 고려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도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자신과 잘 아는 가족 및 몇몇 지인들까지를 고려할 것이다. 구지 리차드 도킨슨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생존이 가장 최우선적인 전제조건이고, 생존의 정의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삶의 상대적 질(質)과 만족감까지 번져버린 현대적 변용(變用)의 확장성 앞에서 나와 인연이 없는 누군가까지에 대한 고려를 삶의 이유로 상정한다는 건 확실히 여유가 달리는 일일 수도 있다.

흔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 같은 외부효과(External Effect)가 인간의 이기적이고 선(善)하지 않은 생래적 속성을 증거한다고들 말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그것은 선악(善惡)이나 이기이타(利己利他)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음에서 나오는 무관심과 무개념의 소치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주의를 조금만이라도 환기시킬 수 있다면, 비경제적 의사결정이 필요한 환경문제와 빈곤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긍정적 합의를 이끌어냄은 물론, 다른 이들을 좀더 고려하는 삶의 이유를 개개인이 찾아가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작품을 읽는 것 또한 그런 작은 '주의 환기' 작업이지 싶다. 자연과 더부는 양치기를 업으로 삼아 매일 꾸준히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 것을 일과로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역의 황무지를 거대한 숲으로 바꾼 알제아르 부피에의 삶은 한 사람이 일생을 거쳐 할 수 있는 일의 크기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이 아닌, 얼마나 꾸준히.. 또 성실하게 한 가지 일을 일관성있게 수행하는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책의 두께는 150페이지 정도이지만, 정작 소설은 절반도 안되는 70페이지 정도다. 나머지는 작품에 대한 작품만큼이나 긴 해설과 저자 장 지오노의 약력을 담았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로 군더더기라고는 하나 없이 '나무를 심은 사람' 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청 선정 추천도서지만. 아이에서 어른까지 누가 읽어도 괜찮을 듯 싶다. 그저 도를 닦듯 나무를 심어온 한 성자(聖者)의 정화된 영혼은 바쁜 일상에 찌든 누구에게라도 마음의 평화와 따듯하고 잔잔한 감동을 줄테니..




원래 이 작품은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인 장 지오노의 작품이지만, 사실은 캐나다 출신 애니메이션의 거장 프레드릭 벡의 애니메이션으로 더 널리 알려져있다. 지오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1987년 세계애니메이션영화제 대상에 이어 1988년에는 아카데미 최고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려 5년 반에 걸쳐 2만여장의 그림을 직접 그려 만든 이 애니메이션은 이후 장 지오노 소설의 표지는 물론,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주 노출되어 실제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조차도 익숙하고 또 친숙하다. 이 책은 마이클 메커디라는 화가의 판화를 삽화로 실었는데, 판화의 특성 상 분위기가 조금 어두운 감은 있으나 나름대로 작품과 잘 어울려 소박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작품은 요즘같은 늦봄에 파란 하늘 한편으로는 노을이 지고 다른 한 편에서는 샛별이 빤짝이는 즈음에 발코니에 놓인 가벼운 의자나 집앞 가로등 옆 벤치에 않아 공기중에 남아있는 따듯한 온기를 느껴가며 한두시간 쯤을 투자해 찬찬히 읽어나가기게 딱 좋은 작품이다. 그 옆에 따듯한 커피한잔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마침 유튜브를 검색하니 프레드릭 벡의 이 에니메이션이 풀버전으로 올라와 있다. 소스코드가 공개되었길래 살짝 올려본다. 30여분이나 되는 영상이니 찬찬히 즐길 여유가 없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p***i 2011.06.10. 신고 공감 10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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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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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황무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을까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가 지은 『나무를 심은 사람』(두레, 2003)은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11쪽)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보기 드문 인격을 지닌 사람을 작가는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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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황무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을까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가 지은 『나무를 심은 사람』(두레, 2003)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보기 드문 인격을 지닌 사람을 작가는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책 제목으로 따진다면 나무를 심은 사람이 그렇다는 거죠. 작가는 왜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보기 드문 인격을 부여한 걸까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약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40여 년 전 작가(책에는 로 나옵니다)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산지대로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나무 하나 없는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사흘을 걸으니 더 없이 황폐한 마을 하나가 나왔습니다. 물이 떨어진 작가는 마을 옆에 텐트를 치고 마실 물을 찾기 위해 마을 주변을 살폈습니다.

 

샘이 있긴 했지만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바짝 말라붙은 상태였습니다. 허름한 집 몇 채가 보일 뿐 그곳엔 살아있는 것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텐트를 걷고 다섯 시간을 더 걸었지만 작가는 여전히 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을 찾을 희망을 거의 놓은 그때 저 멀리에서 작고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입니다. 긴가민가하며 작가는 그곳으로 걸어갔습니다. 양치기 목자였습니다. 30여 마리 양들이 뜨거운 땅에 몸을 뉘고 쉬고 있었습니다. 양치기는 작가에게 물병을 건넵니다. 그리고는 도르래가 달린 우물가로 작가를 데려갔습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살아온 사람들은 원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양치기는 돌로 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지붕은 튼튼했고 물이 새는 곳도 없었습니다. 살림살이가 잘 정돈된 걸 보니 양치기가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작가는 그제야 양치기 얼굴을 봅니다. 산뜻하게 면도한 얼굴이 보이네요. 옷매무새도 좋습니다.

 

작가는 그날 하루를 이 집에서 묵기로 합니다. 다음 마을로 가려면 하루 하고 반을 더 걸어야 하니까요. 고산지대 기슭에는 너덧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주로 숯을 만드는 나무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차에 숯을 싣고 도시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그곳에서 벗어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숯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바람은 또 어찌나 불던지 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은 가슴 속에서 밀려오는 뜨거운 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양치기는 이런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걸 느낍니다. 한없는 편안함을 주는 집과 사람을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요? 하루 더 양치기 집에 머물기로 한 작가는, 도토리 자루를 들고 양떼들과 풀밭으로 나가는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양떼들은 개에게 맡기고 그는 길이가 1.5미터 정도 되는 엄지 굵기 만한 쇠막대기를 들고 산등성이를 오릅니다. 별다르게 할 일이 없는 작가도 따라 나섭니다. 양치기는 쇠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파고는 그 안에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양치기는 자기 땅에 떡갈나무를 심은 걸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 땅이 누구 땅인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이 그는 하루 백 개가 넘는 도토리를 땅에 심었습니다. 3년 전부터 이 황무지에 홀로 나무를 심어왔다고 양치기는 말합니다. 3년 동안 10만 개가 넘는 도토리를 심었답니다. 그 가운데 2만 그루에서 싹이 나왔지만, 2만 그루 중에서도 또 절반이 죽어나갈지 모를 일입니다. 잘 하면 열에 하나 정도가 살아남는 거네요. 황무지에 서 있는 일만 그루 나무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일만 그루로 그치는 게 아니겠죠. 양치기는 계속해서 황무지에 도토리를 심을 테니까요.

 

양치기는 나이가 쉰다섯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고요. 평야지대에서 농장을 운영했지만, 아들과 아내가 연달아 죽으면서 그는 고독한 양치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산지대로 온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땅이 죽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을 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얘기죠. 그는 너도밤나무 재배를 위해 집 근처에 어린 묘목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양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까지 쳐놓았네요. 습기가 많은 골짜기에는 자작나무를 심을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소유 관념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하고 있는 거니까요. 작가는 삼십 년 후를 상상하며 그와 헤어집니다. 상상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죠. 황무지를 가득 메운 나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넓어지는 게 느껴지지 않나요?

 

이듬해(1914)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작가는 5년 동안 보병으로 전쟁터에 있어야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전쟁이 끝났을 때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적은 제대 수당과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강한 욕망밖에 없었다.”(37)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곳이 전쟁터가 아닌가요? 사람만이 죽는 게 아니죠. 온갖 생명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는 곳이 전쟁터니까요.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작가는 양치기가 살던 곳으로 다시 갑니다. 지난 5년 동안 작가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엘제아르 부피에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 기운이 넘쳐보였습니다. 양들이 자꾸만 어린 나무들을 해쳐서 양 대신 벌을 치는 게 다를 뿐이었습니다. 전쟁이랑 상관없이 그는 황무지에 계속해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5년 동안 심은 나무라? 지금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나요?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은 그때 10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나보다,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엘제아르 부피에도 말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숲 속을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구역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넓은 곳은 폭이 11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기술적인 도구도 지니지 못한 오직 한 사람의 손과 영혼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2)

 

작가는 전쟁터에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전쟁은 기껏 쌓아올린 것들을 모두 파괴시키죠. 한마디로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죽음과 파괴가 어지러이 널린 전쟁터만 보다가 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보니 작가는 마음이 확 뚫리는 경험을 합니다. 떡갈나무와 자작나무가 둘러싸인 숲입니다. 자작나무는 작가가 떠나는 해에 심었을 테니까 이제 5년이 되었게네요. 엘제에르 부피에는 어떻게 이런 숲을 이룬 걸까요?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나갈 뿐이었다.”(44)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고집이라는 말이 이럴 때는 참 아름다운 말로 들리네요. 작가는 마을로 내려오다가 도랑에 물이 흐르는 걸 봅니다. 5년 전만 해도 언제나 물이 마른 도랑이었지요. 황무지에 나무를 심자 자연도 변화를 일으킨 거지요. 도랑에 물이 있으니 새로운 생명들도 그 주변에 많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버드나무와 갈대가, 풀밭과 기름진 땅이, 꽃들이, 그리고 삶의 이유 같은 것들이 되돌아왔다.”(45)고 작가는 적고 있네요.

 

엘제아르 부피에가 처음부터 떡갈나무를 심었던 건 아닙니다. 한때 그는 1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를 심었지만 기후가 맞지 않은 건지 모두 죽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더불어 하는 일도 아니고 혼자서 하는 일인데, 그는 이런 시련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작가는 뛰어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홀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48)라고 강조합니다. ‘철저한 고독이란 무슨 뜻일까요? 수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단풍나무가 죽은 바로 그때 그가 나무 심는 일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묵묵하게 땅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희망은 희망대로 품고, 절망은 절망대로 품으면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했습니다. 여러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좋은 때가 있는 법이죠. 고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독 속에서 엘제아르 부피에는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새삼 깨달은지도 모릅니다.

 

1933년 산림감시원이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세운 공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산림감시원은 천연숲이 우거졌으니 밖에서 불을 피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75세가 된 이때도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너도밤나무를 심으러 다녔습니다. 매일 오고가는 게 힘들어 그는 다음 해 나무를 심는 곳에 조그만 돌집을 지었습니다. 1935년에 정부 대표단이 천연 숲을 시찰하러 왔습니다. 산림청 고위관리와 국회의원, 전문가들이 함께 왔네요. 그들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지만, 숲을 나라의 관리 아래 두고 나무를 베어 숯을 굽는 행위를 금지하는 단 하나의 일만 했습니다. 숲을 파괴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요? 대표단 가운데 작가 친구가 있었나 봅니다. 작가는 친구에게 숲이 이루어진 비밀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은 대표단이 시찰한 지점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한창 나무를 심고 있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역시 뜻이 통하면 길은 보이기 마련인 거죠.

 

작가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마지막 만난 게 19456월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많이 변했습니다. 1913년에는 열 집인가 열두 집이 있던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며 살았죠. 그런데 지금 마을은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마을에는 향긋한 바람이 불고, 상큼한 바람 소리가 저 높은 언덕에서 들려왔고, 샘에는 물이 넘쳐흘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28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젊은 부부 네 쌍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을 안고 찾아오는 마을로 변한 겁니다. 그리고 8년 만에 이 고장은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이 묵묵히 도토리를 심은 땅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69)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 누구를 존경할까요?

 

장 지오노는 이 작품에서 나무를 심은 사람이 일으키는 거대한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나무는 희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황무지에 늘어선 나무들은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에둘러 보여줍니다. 작가가 왜 전쟁터에서 겪은 비극을 숲길을 거닐며 풀고 있을까요? 숲길은 사람들 마음을 편안케 합니다. 사람들(나아가 모든 생명들)을 공포로 내모는 전쟁터와는 다른 정서를 숲길은 지니고 있는 셈이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전쟁보다 더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구가 파괴되는 상황 말입니다. 인간은 파괴된 지구를 과학기술로 재생시킬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이 상황을 목격하면 얼마나 서글퍼 할까요? 나무가 살 수 없는 세상에서는 인간 또한 살 수 없습니다. 나무와 인간은, 나아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같은 공기를 마시는 형제라는 점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요?

 

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연은 언제든 복구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은 스스로 복구를 포기하고 인간(자연 입장에서는 바이러스)을 생태계에서 내쫓는 일을 벌이게 될 겁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연을 정복할 수는 없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면 도시는 물에 잠기기 마련이고, 뜨거운 태양이 거침없이 내리쪼이면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기술로 홍수를 조절하고, 과학기술로 태양열을 차단한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요? 과학이라는 힘 뒤에 숨어 자연을 지배하는 망상을 우리는 언제가 돼야 버릴 수 있을까요? 장 지오노는 나무를 심는 사람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산다고 말할 때, 핵심은 자연에 있지 인간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사는 한 생명일 뿐입니다.

 

자연이 숨 쉬고 사는 곳에서 인간 또한 숨 쉬고 삽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바로 이 점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으면 황무지에도 꽃이 필 거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황무지에 꽃이 피려면 물이 흘러야 합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메마른 도랑에 물이 흐르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 스스로 물이 흐르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거죠. 과학기술이 그래서 있는 게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과학기술로 인간은 자연이 파괴되는 비극을 넘어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생명들은 어쩌지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다른 생명들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생태 환경이 완전히 바뀐 지구에서 그네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무가 없는 사막을 생각해 보세요. 물이 흐르지 않는 황무지를 생각해 보세요. 나무도 물도 없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생명도 없을 겁니다. 다른 생명은 사라진 지구에 인간만이 살아남는 끔찍한 상상을 하는 건 아니지요? 저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처음부터 떠올린 상상에 제 미래를 맡기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o*****s 2018.08.13. 신고 공감 5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우공이산: 시간을 묵묵히 쌓는 사람이 숲을 만든다
"우공이산: 시간을 묵묵히 쌓는 사람이 숲을 만든다" 내용보기
유튜브에서 음악 하나를 찾아 듣다 한동안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는데, 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유튜브에 그런 기능이 있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음악 클립이 끝나자 자동으로 다른 동영상들이 재생되었던 것 같다. 재생되고 있던 동영상을 끄려다가 ‘핫핑크돌핀스’라는 게시자 이름을 발견하고 마우스를 멈췄다. 핫핑크돌핀스는 두레아이들의『바다로 돌아간 제돌
"우공이산: 시간을 묵묵히 쌓는 사람이 숲을 만든다" 내용보기

 

유튜브에서 음악 하나를 찾아 듣다 한동안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는데, 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유튜브에 그런 기능이 있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음악 클립이 끝나자 자동으로 다른 동영상들이 재생되었던 것 같다. 재생되고 있던 동영상을 끄려다가 핫핑크돌핀스라는 게시자 이름을 발견하고 마우스를 멈췄다. 핫핑크돌핀스는 두레아이들의『바다로 돌아간 제돌이』(리뷰 보기: 동물 사랑, 공감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단체인데,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남방큰돌고래 보호단체다.

여기서 올린 클립이라면 분명 볼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영상 밑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작가, 프레데릭 백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아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헌신적으로 자기를 바쳐 일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무를 심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자신의 노력이 헐벗은 대지와 그 위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대지가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신을 바쳐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나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큰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그것은 장 지오노의『나무를 심은 사람』을 영화화한 프레데릭 백의 작품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일곱 글자를 보는 순간, 12년 전의 기억이 환기됐다.

그러니깐 2003년의 일이다.

 

그해 초 나는 원인도 모르는 병이 발병해서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퇴원하고도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원인을 모르니 치료 방법이라는 것도 딱히 없었다. 그저 다시 재발하지 않길 바라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앞으로는 사회 생활은 절대 못 하실 거예요. 돈 많은 남자 만나 유한 분인으로 사실 생각하세요.” 담당 의사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곧 사형선고였다. 사회생활을 안 하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나로서는 좀처럼 감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울면서 겨우 잠들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깨어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투병중이었고, 미래는 불투명할 정도가 아니라 암울했다. 나는 살아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살아있다는 게 저주처럼 느껴졌다. ‘절망적이라는 말로 서술이 안 될 정도로 많이 힘든 시기였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나를 위로하려 종종 불러냈다. 에스테틱이라는 데도 그때 처음 가봤다. 벌거벗은 몸을 맡기고 누군가의 서비스를 받는다는 게 생각처럼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향유한다는 건 곧 돈을 얼마나 쓰느냐에 달린 건데, 소비라는 것도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왜 이런 걸 해야 하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이런 걸까?’ 해답 없는 질문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풀이되었다.

 

그러다가 8월쯤? 여름밤에 친구가 불러냈다. 연극표가 있으니 압구정역에서 만나 같이 보러 가자는 거였다. 어디서 하는 무슨 공연인지도 모르고 생각없이 나갔다.

친구가 손을 꼭 쥐어주었다.

 

대부분의 번화가가 그렇듯, 한 골목만 들어가도 조용한 주택가가 이어진다.

압구정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우리는 조용히 타박타박 걸었다.

걷기 좋은 여름밤이었다.

 

그때 우리가 간 곳이 유 시어터였고, 거기서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공연을 봤다.

 

작은 소극장 규모의 공연이었는데, 공연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고 가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미련하리만치 우직한 한 노인의 삶을 보면서도 크게 감동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내 앞에 산적한 문제가 너무 거대했고, 그건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장 지오노 원작이라는 것도 알았고, 원작도 오래 전 읽어보았지만 식목일에 보면 좋을 것 같은 연극정도의 감상 외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의 투병이 이어졌고, 2005년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의사를 만났을 때  내가 물었다.

미국에서 재발하면 어떻게해야 하나요?”

어차피 거기선 치료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거예요.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을테고. 그러니깐 제일 빠른 비행기표 사서 얼른 들어와요.”

그러다 비행기 안에서 잘못 되면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죠.”

 

이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대화가 의사와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거의 중간쯤 재생된 프레데릭 백의 애니메이션을 처음으로 되돌려 동영상을 클릭했다.

황량한 황무지와 바람 소리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연거푸 세 번이나 봤다.

그리고 바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장 지오노의『나무를 심은 사람』 을 구입했다. 

 

2003년 이후 멈춰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봉인해제되어 스쳐갔다. 

동안 나는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고, 취직을 했고, 일을 하고 있다.

 

공부하는 동안 내내 의사가 한 말이 따라다녔다.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하지 않으면서 공부한다는 게 가능할까?’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이러다 재발하면 어쩌지?’하는 두려움도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녔다.

졸업을 할 때쯤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졌다. 추풍낙엽처럼 해고가 이루어지는 마당에 취업이 쉬울리가 없었다. 그것도 유학생 출신 외국인에게.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미국 내에서 취업을 할 수 있는 데드라인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건 실력보단 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의사의 말은 따라 다닌다.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하지 않으면서 일한다는 게 가능할까?’ 여전히 나는 이런 고민을 한다. ‘이러다 재발하면 어쩌지?’하는 걱정도 한결같다.

그렇게 일상에 치여 하루하루 별의미 없이 살았는데, 영상을 보고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가슴이 점점 벅차 올랐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1913가 처음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났을 때, 그는 지난 3년간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나무를 심어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이라는 게 자못 미련하게 보인다.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으면 그 중 겨우 2만 개만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1/5의 확률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싹을 틔웠다고 해도 들쥐나 산토끼가 먹어치울 수도 있고 자연재해나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절반 정도는 나무로 자라지 못한다. 결국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는다고 해도 그 중에서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건 겨우 만 그루 정도이다. 1/10의 확률인 셈이다. 사실 도토리를 선별하는 작업까지 감안하면 이것은 훨씬 지난하고 고된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제아르 부피에는 나무 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설령 아주 작은 확률이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성실성 앞에서 확률이라는 것은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주 무의미한 것이 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누군가의 미련해 보이는 행동이 쌓이고 쌓여 숲도 만들고 산도 옮기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서의 10년을 돌아보았다. 처음 발병해서 투병했던 2003년 시점에서 보자면 1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내린 결론은 시간은 확실히 쌓인다는 점이다.

설사 그 순간에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처럼 느껴지고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들도 결국엔 쌓이고 쌓인다.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라고 해도, 그 미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현재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렇게 쌓인 시간은 아주 정직하다는 점이다. 내가 쌓은 것이 내 미래가 된다.

언뜻 미련해보이는 한 노인의 행동이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진실이다. 시간은, 노동은 매우 정직해서 결국은 쌓인다는 점.

 

우리는 한 인간이 이룬 거대한 숲을 목도한다. 그 숲은 생명의 샘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자란다. 새와 동물들과 인간이 그 숲에 깃들어 산다. 바람이 청명한 노래처럼 숲 사이를 가른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풍경은 오직 한 사람, 단 한 사람의 오랜 노동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감동스러웠다.

 

의사의 말을 듣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삶을 택하는 대신, 뭐라도 하는 쪽을 택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다행이다. 이쪽을 선택해서.

10년 동안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본다. 감히 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하지만, 내가 심은 나무들이 제법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이렇게 묵묵히 시간을 쌓다 보면 언젠간 나도 숲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숲의 좋은 점은 그 기쁨을 나만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많은 이들과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

 

1913년 당시만 해도 황무지에 살던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며 희망 없이 살았지만, 숲으로 인해 모든 것이  변했다. 모진 바람 대신 향기롭고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었고, 숲속에서 물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메말랐던 곳에 샘물이 솟고, 샘터 곁엔 부활의 상징같은 보리수들이 자란다. 희망이 살아나면서 마을은 누구나 살기를 꿈꾸는 곳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자연이 선사한 건강한 생명력으로 활기에 넘친다.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산다. 젊음과 활기, 모험심, 건강하고 티없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부피에라는 단 한 사람 덕분에 행복을 찾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이 매우 경이롭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p.9)

 

이 사람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평화로웠다. 다음 날에도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 더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무엇도 그의 마음을 흐트러뜨릴 수 없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p.25)

 

여전히 순간순간 두려움이 밀려들지만, 그래도 나는 묵묵히 내 일을 해야겠다. 아주 작은 확률일지라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하는 편을 택하겠다. 결국 그 시간들이 쌓여 내 인격이 되고, 나를 형성하게 될테니깐. 그리고 언젠가 내가 만든 그 숲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시간이 쌓이고 쌓인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누구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엘제아르 부피에는 몸소 보여주었다.

 

다시 프레데릭 백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품은 헌신적으로 자기를 바쳐 일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무를 심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자신의 노력이 헐벗은 대지와 그 위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대지가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신을 바쳐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나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큰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은 한 사람의 노동으로 대지가 천천히 변해 갔다. 그 단순한 진리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나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귀감이 되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이순간부터 당신의 시간은 쌓이게 될테니깐.

작은 도토리 알 하나가 틔워졌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거기에서 미래에 도래할 숲을 보게 될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c*****g 2015.04.29. 신고 공감 4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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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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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기적에 관한 이 이야기를 놀라면서 읽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작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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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기적에 관한 이 이야기를 놀라면서 읽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작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 - 책의 첫 페이지에서

 

흑백 판화에서도 보여지지만, 황폐한 산야가 울창한 숲으로 변해가는 과정만 봐도 행복해진다. 한 사람이 평생동안 의지를 갖고 실천해 온 "나무를 심은 사람"은 삶에 대한 열정을 쏟는 다면 어떤 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어떤 댓가도 원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라면 정말 멋진 인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은 어느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 지구의 표면을 바꾼 실제 이야기를 문학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의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는 현대를 위한 한 편의 탁월한 '우화'이기도 하다:" - 책소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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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노인은 내게 나무를 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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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작고한 법정 스님에겐 평생토록 소중히 벗했던 한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다. 그 책에 대해 법정스님은 언젠가의 에세이에서 말하길,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과도 같다면서 '사람의 폭을 재는 자'라고 했다. 내게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정말 그렇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가장 영향을 미친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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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에 작고한 법정 스님에겐 평생토록 소중히 벗했던 한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다. 그 책에 대해 법정스님은 언젠가의 에세이에서 말하길,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과도 같다면서 '사람의 폭을 재는 자'라고 했다. 내게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정말 그렇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가장 영향을 미친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번에 대답할 수 있다.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고.


 이유도 법정스님과 비슷하다. 물론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폭'이란 타자를 포용하는 정도를 뜻하는 것이라 조금 다르긴 하다만 분명 '나무를 심은 사람'도 내게 사람을 이해하는 폭을 한껏 넓혀주었던 것이다. 아니, 아예 달리 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내게 '나무를 심은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였다. 그 연유를 묻는다면 나는 스스로 가장 엄혹한 시절이라 부르는 군대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일병을 단지 5개월 쯤 지난 식목일. 그 날, 나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처음 만났다.

행정병이었던 나는 부대 차원에서 치뤄지는 식목일 행사로 텅 비어버린 사무실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오래만에 맛보는 느긋함에 취해서는 창으로 넘실넘실 흘러드는 환한 햇살을 옆 얼굴로 받으며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멍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눈은 거길 향했으나 머리로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군대에 들어와서 영혼의 파괴 같은 것을 경험했다. 인간의 가장 질나쁜 면을 수차례 목격했고 불법과 부조리 그리고 폭력에 한껏 노출되다 보니 인간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있었다. 인간이 자아낼 수 있는 건 악취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까지 여겼다. 식목일날 나무 같은 걸 심는 것도 웃겼다. 차라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게 지구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원작으로 한 캐나다 감독인 프레데릭 벡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그것이 '나무를 심은 사람'과의 첫 만남이었다. 아아,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마치 잔잔한 물결이 흐르듯 경이로울 정도로 부드럽게 전환하던 화면하며 섬세한 터치의 데생과 연출 그리고 후반부의 눈을 사로잡았던 화려한 색채까지. 하지만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던 것은 역시 이야기였다.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끝나고 나서도 솟구치는 여운을 어쩌지 못해 오래도록 화면에서 눈도 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 때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에 대해 거의 혁명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알려주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가슴 깊이 공감을 자아내면서.

 덕분에 인간에 대하여 나는 긍정의 시선을 열어놓게 되었다. 인간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추악하지 않다는 것과 한 인간의 영혼에 잠재된 힘은 우리의 짐작을 뛰어넘어 세상마저 변화시킬 정도로 막대하다는 것을.

 그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고 그래서 마치 내 입술에 와 닿은 연인의 첫 호흡처럼 좀 더 오래 다가온 이 깨달음을 지속하고 싶었다. 군대에서의 나란 존재가 내가 일하고 있는 좁고 궁색한 사무실만큼이나 졸아들었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인간의 영혼이 하고자 한다면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내게 구원의 경전과도 같아서 더욱 그랬다.

 휴가를 나가자마자 책을 구했다. 읽고 또 읽었다. 자기 전에도 읽고, 깨어나서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고 버스 안에서도 읽었으며 친구들과 만날 때도 틈틈이 읽었다. 그리고 말을 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에 대해. 그가 보여주었던 가능성과 구원에 대해 그리고 인간과 세상을 향한 사랑에 대해.


 사실 그 때의 친구들은 예전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비관론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짧은 휴가 동안 만날 때마다 그렇게 떠들었더니 하루는 친구에게서 군대간 줄 알았는데 전도사가 되어 돌아왔냐는 비아냥마저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준 깨달음이 옳다고 여겼다. 물론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의 패악은 만만치 않다. 더 크게 실망하고 더 많이 절망할 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은 결국 누구일까? 스스로 왜소하다는 생각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난 약해', '난 못해' 이런 식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정당화 하려고 이리저리 내어놓는 변명들. 그 말로 쉽게 타인과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넘겨버렸기에 결국 이런 세상을 초래한 건 아니겠냐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구원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고, 생각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노인을 보라고. 그는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매일 나무만 심을 뿐. 아니, 사실 그에겐 말이 필요 없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자신을 알아주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토양에 알맞는 나무를 고르고 황무지에 나무를 심을 뿐이다. 약속된 미래 따위도 신경쓰지 않는다. 나로 인해 얼마나 세상이 달라질 지도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도 심고, 내일도 심는다. 바위 위로 매일 무심히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도 같이. 그것은 작고 연약하지만 결국엔 시간의 도움을 받아 바위를 뚫을 것이다.

 나는 최종적으로 선언하듯이 말했다. "아주 작은 것도 기적을 이룰 수 있어. 시간이 우리 편이 되어 줄 거야. 그게 나의 믿음이야. 그래서 절망하지 않을 거야." 노인이 내게 심었던 나무를 나는 그렇게 친구들에게 심었다. 얼마나 잘 자라날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기에 쓴 것은 모두 예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마침 리뷰대회가 있기에 썼지만 그렇지 않아도 꼭 한 번은 오래 전 이 책이 내게 주었던 것을 밝혀두고 싶었다. 이렇게 내가 노인에게 진 해묵은 빚을 갚는다. 덕분에 나는 조금 성장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만둬 버렸을 지도 모를 삶을 지금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순진하리만치 인간 영혼이 가진 힘을 믿기에 세상 앞에서 아파하고 절망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아니,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아주 작은 선의라도 그것이 꾸준히 지속되기만 한다면 무한의 변화를 가져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작은 선의를 가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작 어려운 것은 타인의 인정을 포함하여 그 노고로 내가 받을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 노인이 했던 실천의 무한정한 지속은 오로지 그런 포기가 있고서야 가능하다. 시인과 촌장의 유명한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와도 같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이 들어 있으면 진정한 타인을 위한 마음은 깃들 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옹졸한 나만 있을 뿐.

 그러고 보면 노인에게 나무를 심는 일은 혹시 마음 속에 들어 앉은 나를 하나 하나 내어놓은 일은 아니었을까?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때마다 내 거라는 마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덜어내었기에 오히려 많은 이들이 행복하게 더불어 살아갈 숲을 만들 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다.

 지금 보니 노인은 또 하나의 교훈을 내게 준 것 같다. 아, 그렇게 오래 자주 벗했는 데도 당신에겐 여전히 내가 들을 말이 남아 있군요. 이제 과거의 그리운 이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나무를 심은 사람'은 오늘도 현재형인가 보다. 평생을 묵묵히 심었던 그답게 오늘도 내일도 내게 내가 제대로 살도록 만드는 나무를 심을 모양이다. 고맙게 받는다. 잘 자라나도록 하고 싶다. 혹시 아직도 이 노인에게서 나무를 받지 못한 이가 있다면 권해주고 싶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영혼이 사실은 얼마나 커다란 거목인지를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잘 느끼게 되리라 믿는다.

  

l****1 2015.04.29.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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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무를 심은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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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는 일이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한다면 귀를 기울여 들어줄 이가 얼마나 될까? 지구온난화 영향과 환경오염, 무차별적 개간으로 지구를 보호할 하나의 방편으로 나무 심기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런 생각도 해마다 황사로 인해 마스크를 써야 하는 계절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철학적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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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심는 일이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한다면 귀를 기울여 들어줄 이가 얼마나 될까? 지구온난화 영향과 환경오염, 무차별적 개간으로 지구를 보호할 하나의 방편으로 나무 심기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런 생각도 해마다 황사로 인해 마스크를 써야 하는 계절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철학적 의미를 떠나 나무를 심는다는 게 얼마나 위대하고 존경받을 일인지 『나무를 심은 사람』의 엘제아르 부피에 삶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 합당한 대가를 바란다. 보수를 받거나 명예를 원한다. 그도 아니라면 칭찬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무를 심었다고 말한다. 소설 속 1913년에 사막화를 걱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메마른 땅을 걱정하며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름다운 나무로 채워진 숲에 기대어 쉴 계획만 할 뿐 나무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그는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도토리 100개를 심었다.’ (29쪽)

 

 정성을 다해 도토리를 심는 일. 도토리 100개가 전부 싹을 튀우고 나무로 자라지 않을 걸 알기에 멈추지 않고 나무를 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심은 나무는 물이 말라버리고 황폐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이익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희망이었고 나눔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초록의 파도가 물결치는 아름다운 숲, 개울을 흐르는 맑고 투명한 물.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마을로 다시 내려오다가 나는 개울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그 개울은 언제나 말라 있었다. 자연이 그렇게 멋진 변화를 잇달아 만들어 내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43쪽)

 

 저절로 꽃을 피우고 잎을 키우는 게 당연한 자연의 이치로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나무를 심은 사람』은 누군가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바람과 새의 도움으로 씨앗이 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두 번의 크나큰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반대편에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었다. 유려한 단문의 짧은 소설은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은 채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안긴다. 엘제아르 부피에와 그를 세상에 알린 장 지오노에게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지오노는 책쓰기에서 존재 이유와 행복해지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일 테고, 우리 독자들은 행복한 노래든 불행한 노래든 인간의 고향인 자연의 노래 소리를 들려주는 지오느의 책읽기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124쪽)

 

 경쟁과 물질 만능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엘제아르 부피에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더불어 이제는 우리가 나무를 심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100 년 뒤 숲에서 치유와 행복의 기운을 얻을 그 누군가와 아이들을 위해.

r*********s 2015.04.28.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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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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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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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오래 전 읽었던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 책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는 이야기였고 아주 얇은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쉬흔 다섯의 이 남자는 혼자 산다.  1913년에 쉬흔 다섯이었으니, 그때 당시로는 이미 노인이었던 셈이다.

혼자 사는 이 남자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 이 남자가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왜 나무를 심게 된 걸까?

 

이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결과로 드러난 숲과 마을에 마음이 뺏겨 이 남자가 왜 나무를 심게 된 건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이젠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원래는 산 아랫 마을에 살며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는데, 아들과 아내를 차례로 잃고 홀로 외진 황무지로 들어와 양떼들과 개와 함께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러니깐 이 남자는 무척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한 남자의 깊은 고독에 감정이 이입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황무지가 숲을 이룰 정도로, 그 남자의 고독은 깊고도 깊었던 셈이다.

아들과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철저한 슬픔과 완벽한 고독을 어찌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그래서 가슴을 쳤다.

 

아내를 잃고 얼마 안 돼 나는 재혼을 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의 성화도 있었지만, 아내가 죽고나자 나는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한 사람인지를 알게 됐다. 나는 밥도 빨래도 청소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일상생활에 무능했다. 지금껏 아내의 도움과 가꿈이 있었기에 내 삶이 영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변명처럼 말하자면, 아내와 금슬이 좋았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기에 나는 혼자 사는 게 외롭고 두려웠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등떠밀려 억지로 하는 것처럼 재혼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식들을 잃었다.

 

자식들의 심정까지 헤아리기에는 내 외로움과 고독이 너무 컸던 거라고 이제와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게 못내 미안하다.

내가 그때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선택을 했었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이들을 잃지도 않았을테고 지금보다 훨씬 위신 있고 명예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순간의 외로움을 참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부피에를 찾아갔던 '' 1920년 이래 매년 그를 찾아가는데, 그는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나무를 심는다. 하나님은 숲을 통해 이미 그에게 천국을 보여주신 셈이다.

 

숲을 이루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신념을 이루기까지 절망감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묵묵히 나무를 심는다. 너무나 철저히 혼자여서 나중에는 말하는 것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 일에 몰두한다. 어쩌면 그는 말을 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젊은 시절도 그러했다. 그때는 나도 부피에처럼 내 신념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과 절망을 이겨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건 모두 옆에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내가 죽고 나는 모든 걸 잃었다. 아내는 삶의 무게 중심이었다. 닻을 잃은 배처럼 나는 서서히 침몰해갔다. 현명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살 생각을 못했을까? 그랬다면 노년의 모습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텐데.

영혼과 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던 엘제아르 부피에는 황량했던 대지를 약속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 남자의 인생은 누가 봐도 너무나 멋지다. 그의 신념과 인내를 생각할 때마다 그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이 생긴다.

 

1947년 바농의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기까지 그는 나무를 심는 일을 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황무지는 건강한 생명력으로 넘쳐 흐르게 된다. 말랐던 샘에 다시 물이 흐르고 그 곁엔 부활의 상징같은 보리수가 자라난다. 마을은 희망이 넘치고, 누구나 살기 꿈꾸는 곳으로 변한다.

이 모두가 한 늙은 양치기 남자의 외로운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만약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면, 그 마을에 살았던 여느 사람들처럼 싸움을 일삼거나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고독이 두려워 누군가를 찾는 대신 철저히 고독해지는 쪽을 택했다

아들과 아내를 잃고  황무지가 숲을 이룰 정도로 완벽한 고독과 철저한 슬픔을 가졌던 한 남자는, 숲을 이루며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천국을 볼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거라는데, 우연찮게도 부피에가 죽은 1947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했던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나도 내 남은 여생을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 '신이 내린 일꾼'으로 평생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그리고 그 노동으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봐야겠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무능해지는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성실한 노동으로 미약하게나마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일상을 영위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도 내 숲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최소일지 최대일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오늘부터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내 고독을 심어야겠다.  그렇다면 또 다시 언젠가 봄이 찾아올 때 초록의 신록을 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h*****1 2015.04.26.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내 인생의 나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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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게 소개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을 만나면 적어도 열번은 읽어 보고 어떤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한단다.. 좋은 책을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글을 남기긴 하지만, 책이라는 것이 무엇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물건이라서 이렇게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빠가 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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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게 소개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을 만나면 적어도 열번은 읽어 보고 어떤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한단다.. 좋은 책을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글을 남기긴 하지만, 책이라는 것이 무엇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물건이라서 이렇게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빠가 보기에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을 선정해 주고 꼭 읽어 보라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이란다.. 쉽진 않겠지만 매달 한 권씩을 선정하도록 노력해 볼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지금 이 순간 다음 책은 무엇으로 할까 고민이 되네.. ^^;;

 

오늘 이야기 할 책은 프랑스의 '장 지오노'라는 작가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 이라는 소설이야..

 

내용은 아주 간단하단다..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사람이 예전에 사람들이 살다가 떠나간 프랑스 남부 지방에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 나무를 심었고, 그로인해 황무지였던 곳이 광활하고 푸르른 숲으로 자라나 자연이 회복 되고 사람들도 마을을 이루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다는 게 커다란 줄거리란다..

 

'나'라는 1인칭 관찰자의 시선으로 주인공인 '엘제아르 부피에'가 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한 소설이지..

 

1913년 '나'는 프랑스 남부의 고원지대에 우연히 여행을 갔다가 황무지에서 55살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났고, 그가 지난 3년 동안 10만개의 도토리를 심어 약 1만 그루의 떡갈나무를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1914년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나' 역시 군인으로 5년간 근무를 하고 전쟁이 끝난 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강한 욕망으로 그동안 잊고 지냈던 프랑스 남부의 황무지를 다시 찾았단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전쟁이 있던 기간 동안에도 매일 나무 심는 일을 반복했었고 그 결과 단지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크기의 숲을 만들었던 것이지.. 사람이 없는 황무지에서 일을 하니 전쟁도 그를 비켜갔나봐.. 그런 숲이 생기자 말라 있었던 골짜기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주변 환경이 변하게 된거야..

 

'나'는 1920년부터 매년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가 1945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까지, 프랑스 남부의 황무지가 숲이 되고 그로인해 마을에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1만명 이상이 살게 되었고,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

 

내용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중에서 아빠가 생각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게..

 

'엘제아르 부피에'는 왜 자신의 땅도 아닌 곳에 나무를 심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데, 그는 그저 황량한 땅에 나무 심는 일을 죽는 날까지 35년 이상 했다는 사실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런 답도 있구나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거 같아.. 나는, 우리는 무엇을 인생의 의미로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거 같구나.. 개인적인 행복과 만족 그리고 욕심을 채우는 것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큰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일이고 아빠도 그렇게 살고 있지만, 그와는 다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가에 대해 숙고해 보는 일도 가치 있을 거 같아.. 그런 생각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엘제아르 부피에'가 35년 이상 매일 나무를 심으면서 많은 어려움과 고난, 역경 등이 있었을텐데 그것을 어떻게 헤쳐 나갈수 있었을까?

 

그가 혼자 살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활을 유지 하기 위해선 필요한 것들도 많았을거야.. 그런 것들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무를 심는 일 말고 다른 하고 싶었던 일들도 있었을텐데 나무를 심느라 다른 일들은 하지 못했잖아.. 그런 아쉬움은 없었을까? 나무를 정성껏 심었는데 실패했던 일도 많았을거야.. 그 때의 아픔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우리의 인생에도 항상 굴곡이 있다고 생각해..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은 때도 있겠지.. 그의 삶에 대해 좀 더 많이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나만의 해결 방법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내 명예를 높이기 위한 일을 한 것도 아닌 일을 한 것에 대해 여러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는데 이 책은 도움이 될 수 있을거라 아빠는 믿는다..

 

동현아, 연우야.. 너희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중학교 다닐 때,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교 다닐 때, 사회 생활을 할 때 각각의 시절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달라질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 두었다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은데.. 또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고.. 이 책은 읽기도 쉽기 때문에 꼭 그렇게 해보자꾸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이 책에 대한 사족을 붙이면..

 

이 책은 소설 내용 보다 편집자의 책에 대한 해설 부분이 더 많아.. 그런 책들이 있거든.. 그럴 때 자신의 생각이 정리 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읽어 보는 것은 추천해 주고 싶지가 않단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본인의 생각이 어떤가이니깐..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 '엘제아르 부피에'가 나무를 심기 전의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모습과 나무를 심은 이후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 되어 있단다.. 실제 인간들의 삶이나 생각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표현할수는 없단다.. 어떤 책에서건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이 책에 나오는 나무를 심기 전 사람들이 왜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그렇게 마을이 사라졌는지, 내가 그 속에 있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면 삶에 대해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 같구나..

 

아무튼 사랑하는 너희들이 커서 같이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어서 오기를 너무너무 간절히 기다려 지는구나..



k*******1 2012.04.01.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자신과 나무와 신을 만나게 해 준 고독
"자신과 나무와 신을 만나게 해 준 고독" 내용보기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과 정진홍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에서 추천된 책이다. 황무지에 푸른 숲을 남기고 평화로운 고독 속에 눈을 감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그렸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작가 장 지오노는 어느 날 남부 프랑스 오트-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한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혼자 살면서 여러 해에 걸쳐 끊임없이 나무를 심는 양치기
"자신과 나무와 신을 만나게 해 준 고독" 내용보기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과 정진홍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에서 추천된 책이다. 황무지에 푸른 숲을 남기고 평화로운 고독 속에 눈을 감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그렸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작가 장 지오노는 어느 날 남부 프랑스 오트-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한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혼자 살면서 여러 해에 걸쳐 끊임없이 나무를 심는 양치기였다. 이 책은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 그루의 나무가 새로운 숲으로 변하고, 수자원을 회복하며 희망과 행복이 복원되는 공간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짧고 낮고 고요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그리고 있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잔잔한 감동이 흐른다. 우선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온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고독 속에서 자신을 바쳐 일하는 모습은 동양의 현자의 모습을 닮았다. 욕심 없이 그저 나무만 심으며 사는 그는 열자에 나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꿈과 열정이 있었다. 침묵 속에서 꿈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한발씩만 나아갔다. 급한 성질을 지닌 주위사람의 눈에는 변화의 모습이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인 나무를 심고 행복을 가꾸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그에게 자연은 서서히 답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을 원한다는 진리도 배울 수 있다. 식물도 목이 마르면 비명을 지른다는 말이 있다. 식물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하고 감정을 가진 생물체란 뜻일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부피에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과 나무와의 교감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환경파괴에 대해 우리가 무슨 일들을 해 나가야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제 우리는 대선을 마친 상황에서 새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정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준비해 나갔으면 좋겠다.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공동의 선을 위해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일하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모습에서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의 덕목 한 대목을 보는 듯하다.



c******4 2012.12.20. 신고 공감 2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