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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일의 시는 조용하다. 격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고 세심한 풍경 하나로 마음을 건드린다. 『겨자씨의 문장』은 그런 시들로 가득한 책이다. 시집 제목처럼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겨자씨 한 알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마음속에서 천천히 문장을 피운다.
“나는 나의 집을 짓고 있는 중일까”라는 자문은 이 시집의 출발선이다. 곤충의 생태에서 삶의 궤도를 상상하고, 무심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문장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시선은 특별한 듯 평범하고, 평범한 듯 특별하다.
「도다리쑥국」이라는 시는 분명 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일 듯하다. 도다리쑥국이라는 음식명을 제목으로 달았지만, 그 안에는 사람과 계절, 기다림과 사랑이 녹아 있다. 국물의 온도를 따라 흘러가는 문장은 읽는 이의 체온까지 따뜻하게 만든다. 엉뚱하게도 이 정서에 맞닿아 있는 시가 「콰지모도의 노래」다.
당신 어두워 오는 내 몸 안에 무수히 우글거리는 나 보셨습지 허술한 울타리 새새틈틈이 꼬물거리는 실뱀들의 질주 막을 수 없고 그 한 마리 똬리 풀어 당신께 갈 때 차마 소스라치던 그대 모습 아, 나 억장 무너져 꽃잎 위에 누워 진혼의 노래로만 잠들고 싶었던 것인데요만 헤헤, 이승은 악연입니다요 그대는 나날이 눈부셔지고 나 그대 따라 밝아질 수 없을 것인데요 차마 모가지 뎅강 잘라버릴 수 없는 날들이 파리지옥 모냥 줄줄이 달겨드는데요 꿈이라도 이리 모진 꿈이 있겠느냐군입쇼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나 봄내 눈멀어 꽃피는 나문뎁쇼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의 무덤인뎁쇼 나 어두워 있고 그대 하나 밝아 있어 내 노래는 등에 진 둥근 무덤 속입지요만 양지꽃 샛노란 봄은 불지옥입니다요만 갑지요 갈 것이군입죠 내 어둠으로 이 도시의 어디쯤 세워질 당신의 눈부신 아름다움 증거하며 내 노래 그대 아름다움 야곰야곰 갉아먹으러 헤헤, 갈 것이군입죠
나는 이 시를 피시 통신 시절 푸른 모니터 속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젊었던 시절의 그는 빅토르 위고의 인물을 불러내, 사랑의 절절함과 고독을 토속적인 말투로 풀어 내며 묘한 감흥을 자아냈다. 소설 속 인물을 차용해 서정과 현실을 직조한 「콰지모도의 노래」는 그 쓸쓸한 서사보다 화법 때문에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질적 소재들을 한데 엮는 능력은 따라가기 힘들 만큼 호흡이 가쁘다. 그 시절, 푸른 화면 속에서 그의 시를 탐닉하던 나는 「콰지모도의 노래」에 반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답가를 부르기도 했다.
「내, 너의 콰지모도가 되어」
비가 오거든 우리 노틀담에 가자 중세의 지붕 위에 올라 나는 어둠을 쫓는 종을 울리고 너는 허물어진 성곽에 기대어 비를 맞으렴 비처럼 추락하던 비둘기를 날리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성당의 지붕처럼 장미잎 흩어진 거리에 앉아 있으면 중세의 아름다운 전설이 들려오는 곳 비가 오거든 우리 노틀담에 가자
햇살이 잠들어 가는 늦은 오후 나는 초록빛 투명한 유리창 아래 오열과 참회의 무릎을 꿇고 너는 나티에의 그림 아래 서서 콩세르바토아르의 여선생이 되렴 나는 크리미아 전장의 상처 입은 병사가 되고 너는 흰 머리띠 두른 간호원이 되고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상처를 핥으며 이 세상에서 서로에게 지겨운 동반자가 되자
우리에게도 화려한 절망이 허용된다면 그렇게 상처 입은 자리에 초대될 수 있다면 긴 목의 포도주병 처절한 피의 잔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마지막 사랑을 위해 찬연히 축배를 들자 새벽은 아직 우리를 기다림을 믿으며 이 세상, 더는 망가지지 않을 것을 믿으며
- 1995년 10월 11일
나의 답가가 그의 귀에 당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나의 답가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즈음 다가왔던 사랑에게 띄웠던 부끄러운 연서였으니까. 원래 연서란 감정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에게는 그의 정서가, 그의 시를 읽던 나에겐 또 나의 정서가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며, 또 같은 방향으로 소집되곤 했다. 그게 1990년대에서 젊음이라는 위치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숨 가쁜 정서였던 것 같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가벼운 장면을 묵직하게 쓰는 솜씨에 반했던 것이 어쩌면 그의 시와 맺어졌던 인연이었을까.
인간 세상의 이 인연을 설명하는 것은 「방생」이다. 이 시에는 물고기를 강에 놓아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야말로 이 시집 전체를 요약하는 은유일지도 모른다. “강물은 이 모든 것을 껴안고 흐르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죄책감과 해방을, 자연스럽게 한 장면 속에 녹여 낸다. 묵직한 문장이 주는 여운은 단지 ‘깊다’라고 표현할 수 없는 외연을 보여 준다. “까불지 마. 네가 시를 쓰면 얼마나 써? 네가 쓰는 시가 시야?”라는 자조를 내연으로 끌고 와서는 고스란히 독자의 항복을 받아 낸다.
생각노니! 당신, 이처럼 독자들을 휘어잡는 즐거운 독재자라니!
문득 1990년대에 글을 쓰던 버릇이 나와 뭔가 이상한 문장들을 만들어 냈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 시집은 마음을 조이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용해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우리네 아픈 감정은, 고달픈 마음은, 한껏 자유롭게 풀어놓아도 좋겠다. ‘그의 시’가 주는 정서와 이미지를 가만히 느끼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문장’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이끄는 것, 김보일 시의 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