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인의 장점들을 들자면 이웃사랑과 봉사정신이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단점들이 더욱 많다는 것을 알게된다. 무엇보다도 크리스천 스스로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무지를 바로 잡으면 어떻게 될까 ? 장로교의 세례를 받았지만 결국은 감리교로 전향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참참상을 실제로 접한 조찬선씨의 "기독교 죄악사"를 읽고나면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양심이 있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을 종교가 되지 못함을‥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인디오 1억명 가까이가 학살되었다고한다. 토지 소유 개념이 없이 자연과 벗하던 그들은 졸지에 선교대상이 되어 잘해주었던 백인들의 은혜를 입어 쫓겨나고 학살당하면서 태동한 나라가 미국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기독교의 침입이 없이 독자적인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이 학살, 강간, 착취를 당하여 남은 결과는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천주교와 혼혈아들, 그리고 백인들 위주의 인종 구성이다. 기독교의 선교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사랑의 최종 결과는 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셈이다. 저자는 상세한 자료를 풍부히 예시하여 읽는 사람이 광신적인 기독교도라 할지라도 입이 딱 막힐 것이다. 어디 교회에서 기독교의 죄악을 만천하에 공포하였는가 ? 사랑을 빙자한 기독교의 이중성은 카톨릭의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프로테스탄스 학살 등의 예로서도 나타난다. 예수의 사랑과는 다른 독단과 배타성, 그리고 야만적인 이런 사례는 기존에도 회자되었던 얘기이다. 저자는 이 사례를 보다 심층화시켜 사건의 전모를 일종의 고발형식으로 쏴부으면서도 비판의 기준을 예수의 사랑으로 확고히 고정시키고 있다. 이는 비기독교인의 비판이라면 적대적인 비난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우나, 기독교 자체의 원초적인 가르침에 의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한결 설득력이 더해지며 독자들에게 맹목적인 반기독교 감정을 더해주기보다는, 크리스천이건 아니건간에 기독교가 세계평화를 위해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下권 말미에는 세계평화와 각 종교의 공존공영을 위한 방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그런고로 기독교의 죄악을 몬도가네식으로 바라보는 책이라기보단, 기독교가 독선에서 벗어나 예수의 가르침을 이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자체적 모순을 극복할 것인가를 솔직담백한 자아비판과 채찍질을 통해 얘기한 양심적인 서적이라보는 편이 타당하다. 비슷한 책으로 <예수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가 있긴 하나 역시 이 기독교 죄악사를 참조하고 있으며 설득력 면에선 단연 이 책이 으뜸일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점도 장황하지 않게 잘 얘기하고 있는 것도 백미라 하겠다.. 예컨대 십일조의 경우는 모세의 율법이므로 이미 예수의 보혈로 풀어진 거라고 얘기하여 한국교회의 십일조 걷기란 신약과 구약을 혼동하였다는 것을 명징한 논리로 증명하고 있다. 성장주의 노선을 취한 교회의 문제, 교회 내부의 권력갈등과 부정부패, 독재정권에 부합하였던 사례도 빼놓지 않고 얘기하고 있다. 저자가 취한 입장은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반론을 다른 독자들이 하였지만 그건 책을 읽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조찬선씨는 전세계적인 종교 갈등/전쟁과 경쟁적인 선교행태를 통계자료를 통해 지적하면서 기독교가 먼저 공격적인 선교를 멈추지 않으면 세계평화에 위협이 될 거라고 하여 자기만 옳다는 식의 근본주의 사상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이미 논증해놓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취한 입장은 애당초 신보다는 인간부터 생각해놓아야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어설픈 신학이론을 통한 <기독교 죄악사=""> 비판은 크리스찬으로서의 무지만 증명할 뿐이라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난 뒤 기독교를 믿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고백한다. 학살과 착취와 강간의 원죄를 지닌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믿기 보다는, 차라리 광야를 헤메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실천적으로 사랑을 설파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본따서 생활함이 양심적이니까. 그리스도라면 천국에 간다는 얘기라기보다는,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처하여 지옥행 십자가에 못 박혔을 것이다. 즉, 교회나 성경 같은 껍질에 안주하지말고 스스로 깨닫고 사랑을 설파하라. 무조건 목사나 전도사라 하여 이순하지말고 부딪쳐가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깨달아라. 타인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나가며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들어라. GOD인지 DOG인지 신경쓰지말고 남부터 도와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어본 양심적인 기독교 서적으로선 단연 유일하다는 점에서 적극 추천한다. 특히 한국처럼 역술이 대거 유행하고 엉터리 기독교와 불교가 판을 치는 국가에서 산다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독해야할 책이다.기독교>예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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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역사학자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인류에게 종교가 없었다면, 태반의 전쟁이 없었을 것이다" . 또 어떤 이는 "종교인이란 신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일반화의 오류로 보여지는 대목이긴 하지만, 최근에 베스트셀러 였던 "네 이웃을 사랑하라"의 피터 마쓰가 지적하듯이 보스니아 내전의 양상 역시도 기독교인에 의한 무슬림 인종청소라는 극악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핑계 삼아 전쟁과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행위가 종교재판이나 또는 저 십자군전쟁과 청교도의 미 대륙 정복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지구 곳곳에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자행되어지고 있는 만행임을 생각해 볼 때, 조찬선 목사님의 "기독교 죄악사"는 그러한 종교인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자성과 각성을 요구하는 시대적 저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의 상권에서 한국교회의 현재상과 그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은 이를 일부분의 문제점을 마치 전체의 문제인양 호도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원론적 비판을 하겠지만,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으로 변했다는 것은 양식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인정하게 되는 대목이라고 생각됩니다. 구약의 무수한 율법 중에서 유독 십일조만이 악착같이 악용되어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한국교회의 상업성에 강한 경고를 가하고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거나 형이 죽으면 형수와 살아야 한다는 율법 등은 예수님의 보혈로 율법에서 벋어났다고 주장하면서도 교회 상업성의 기초로 활용하는 십일조에 대해서는 "온전한 십일조"까지 강조하면서 십일조 내고 은혜 받으라는 기복신앙으로까지 발전한 모습이 오늘날 이 땅의 상업주의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돈 밝히는 하나님, 돈 받고 대신 복 주시는 하나님을 만들어 낸 교회들, 무수한 죄인들을 양산하면서 구원을 공갈 협박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절대적인 반성 위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령의 저자를 보면서 아직도 기독교에 소중한 희망이 남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저자는 상권과 하권의 대부분을 종교재판과 십자군 전쟁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기독교 만행과 청교도의 대륙발견으로 주장되어졌던 콜럼버스이야기, 또 청교도들에 의해 학살 된 중남미, 북중미 원주민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예수사랑의 정신은 무엇인가? 또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고민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모체가 되었던 천주교 교황들의 비인간적 만행과 종교재판으로 희생되어 진 무수한 마녀들, 또 십자군 전쟁으로 야기 된 대량학살의 이야기들은 중세 기독교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는가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반증으로 설명되어 집니다. 또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열강들이 기독교라는 깃발을 들고 얼마나 무수한 대량학살을 통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모범처럼 알려지고 가르쳐져 왔던 청교도들이 잔인한 살인과 배반을 통해 성장하였으며, 그리고 그러한 살인마저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감사해 하던 대목에서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열강의 도움으로 옛 영토를 회복하여 이스라엘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중동의 화약고로 불리 우며 온갖 분란의 씨앗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교도들에 의해 학살되어지고 사라져 간 수 많은 인디언들과 같은 원주민들도 먼 미래의 어느날 자신들의 영토를 회복하여야 함은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원칙에 저 역시도 찬성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기독교는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먼저 물질을 숭상하는 이 땅의 교회들부터 진정한 예수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피는 본연의 예수사랑의 전파사로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신사에 참배하고 정권에 아부하며, 친미에 목숨 걸었던 과거의 모든 구태를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더불어 모든 기독교인은 온 몸을 던져 전쟁에 반대하고 학살에 반대하며, 약한 자를 위해 헌신하는 테레사 수녀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마지막 남아있는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책, "기독교 죄악사"와 더불어 한용상님의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그리고 강준만 교수의 "종교는 영원한 성역인가' 까지 의 세 권은 현대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일독을 하고 참 신앙인의 자세는 무엇인지, 또 참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 혼자만 구원 받자고 다른 이의 아픈 모습은 외면하고 사는 기독교의 모습과 오로지 돈 모아서 성전건축 하여 목사의 권세를 세상에 들어내 보이는 것만이 최대의 지상과제 인 모든 교회들은 이 땅에 가난하고 병든 자의 모습으로 재림해 계시는 무수한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당사자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억압과 박해 속에서 무저항으로 희생하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참되신 사랑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 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임을 다시 한번 깨달은 소중한 독서였습니다. [인상깊은구절] 성직자들이 필요에 따라 개인의 생각이나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도록 신도들을 유도하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자기 개인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가장하여 신도들을 오도하는 것은 자기 뜻과 신의를 혼돈케 하는 죄악이며, 진실과 진리를 부정하고 종교를 개인의 영광과 영리 추구를 위한 수단방법으로 하는 비양심적인 종교인들의 기만행위이다. 그러한 교활하고 비겁한 종교인들은 자기들만의 무지, 무식, 무능과 고의로 범한 그들의 죄악을 종교조직과 성경을 이용하여 비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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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당연히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이 지음 받고 종교가 생긴 것이지, 종교가 생기고 인간이 지음 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따름으로 그것이 종교가 된 것이지, 종교가 만들어지고 인간이 그것을 따르게 된 게 아닌 까닭이다. 세계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이다. 그리고 힌두교와 그 외에 소수 종교가 세계에 분포 되어 있다. 이들 종교 중 유독 눈에 띄는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일 것이다. 두 종교가 여러 종교 중 가장 많은 신자 수를 자랑하고 있고, 서로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반목과 대립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종교는 내부적으로 여러 파로 나뉘어 있어 그들 간에도 오랜 기간 반목과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역사가 오랜 만큼 인류 문화와 기술 등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또한 많은 병폐를 낳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대립이자 병폐는 단연 십자군 전쟁 일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2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루었다.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약탈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인간의 씻지 못할 과오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는 근현대사를 주름잡는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로 인해 문학과 문화에 발전을 이루었다. 기독교로 인해 노예해방,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의 노예제는 기독교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그리 칭찬 할 만 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기독교는 인류 문명에 득과 실을 가져 왔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면만을 본다면 장점만 있는 종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 책은 기독교의 2천년 역사 동안 기독교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을 고발한다. 기독교는 선의 종교라 스스로 부르짖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추악한 과거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그것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의 그러한 일면을 모두에게 고발한다. 먼저 기독교 내에 만연된 잘못된 문제들을 지적한다. 성직자의 잘못 등을 고발한다. 그리고 선교 등으로 인한 기독교의 외적 잘못을 지적한다. 이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독교로 인해 발생한 큰 사건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그 죄악상을 드러낸다. 이 책을 보면 기독교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생히 알게 된다. 기독교가 저지른 죄들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지 비록 활자로 보지만 눈으로 보는 듯 생생히 느껴진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끔찍한 죄들을 저지를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은 죄의 유혹에 약하기에 그러한 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죄를 그리도 태연하게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참으로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와 오늘 우리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의 죄악을 고발하기만 하려는 책이 아니다. "보아라, 선의 종교라 자칭하는 네가(기독교가) 이래도 선의 종교인가? 너는(기독교는) 위선의 종교이다!" 라고 꾸짖는 것을 목적으로 출간된 게 아니다. 기독교의 죄악을 고발하여 잘못을 꾸짖고, 그것을 통해 사죄와 용서를 얻어내기 위해 출간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난 과거의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담고 출간 되었다. 앞으로 모든 종교가 합심하여 인류 평화를 이루길 바라며 출간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보고 단순히 분노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 책의 목적에서 한참 빚나간 것이고, 평화와는 또다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의도로 출간 되었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목사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보면 그는 결코 목사가 아니다. 그는 확실히 삯꾼이요, 거짓 교사이다. 왜냐 하면 그의 구원관이 심각하게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관은 기독교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 상권 84p. 라고 말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수차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에 대한 결론은 분명하다. 그는 기독교,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 목사가 아니다. 그는 명백히 종교 다원주의자이다. 그가 말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공영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주장이지 기독교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도 인류의 평화를 원한다. 다만 그가 목사라면 목사다운, 목사의 관점에서 주장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를 비롯해서 오늘날까지도 기독교가 자꾸만 죄악을 범하는 이유가 무언지 아는가?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에 속한 자들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저자와 같이 자기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선의 종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 그분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 전쟁과 기근이 그치게 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당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기독교로 인한 인류의 혼란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분께 온전히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면 인류에 혼란이 멎을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자가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주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혼란이 발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참 구원의 종교로써 이 땅에 평화 곧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전도하는 것이다. 온전히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혼란이 멎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혼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신자들이 온전한 신자는 아니라는 반증이다. 온 종교가 저자의 주장대로 함께 공존공영을 위해 애써야 한다.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에도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이 아니다. 오직 기독교의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만이 참이다. 다른 종교의 구원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기독교의 방법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것을 명심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배타성을 버리고 말이다. 마음은 고자세 그러나 태도는 저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자신을 교만하고, 우월하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지키되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말이다. 굽신거리라는 말이 아니다. 관용과 섬김을 보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간과했다. 아니 무시했다. 그의 눈이 먼 까닭일까? 기독교의 구원은 이 땅에서의 평화가 아니다. 물론 이 세상에 평화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다가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 진정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구원관은 그것을 무시한 채 단순히 이 땅에서의 구원으로 그친다. 저자가 주장하는 구원관을 보면 내세적 구원은 전혀 없고, 오로지 이 땅에서의 구원으로 그친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관이 아니다. 기독교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기독교의 진정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확언하건데 그는 목사가 아니다. 단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선생일 뿐이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이 못내 아쉽고, 저자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누구나 참으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도 해당 된다. 기독교에도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지난날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은 단순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와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이 된다.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잘못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잘못인 것이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기독교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은 이들에게 사과와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하나님께 한 발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회개이다. 지금과 같이 그것을 무시한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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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기독교인이지만 목사님께서 쓰신 책의 제목치고는 조금은 과격하게도 느껴져서 이책을 읽게 되었는데, 정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읽어봐야 될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알기 어려웠던 기독교의 어제-역사-를 잘 알게되었다. 항상 승자의 입장에서 밝게만 그려졌던 역사이였지만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의 패자, 약자들의 아픔이 있었다. 이러한 어두웠던 과거들을 우리는 늘 승자, 강자의 편에서서 밝게만 포장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독선과 배타성으로만 얼룩진 기독교의 어제였는데, 오늘에 와서는 어떠한가? 예전의 독선과 배타성은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다가 상업주의를 가미하였다. 잘못된 성직자들의 가르침으로 신도들을 죄인의 굴레에 얽어메고 교회는 사회와 멀어만 가고 있다. 어제의 잘못이 본질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기에 생겼는데 오늘에도 그러한 잘못은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인상깊은구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희망을 얻기보다는 도리어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것 같다. 교회라는 조직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위선과 기만으로 성인군자를 가장하면서도 속으로는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살기위해서는 신도들은 스스로를 위선의 죄인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것 같다. 교회는 의도적이든 혹은 비의도적이든 신도들이 기쁨과 화평과 희망속에서 살아가게 하기보다는 도리어 죄의식을 심어주고 죄인으로서 불안하게 살게하는데 주력하여 온 것 같다. 종교는, 고민속에서도 기뻐하고 억울한 처지에서도 인생을 감사로 살아가며, 절망속에서도 희망과 보람을 찾아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주어 사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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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많은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나는 이책을 통하여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예수의 사랑을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아 왔는가....하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미명아래 저지러진 많은 죄악사는 결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배타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 아닌가?
인간이 공존하려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기독교 사상의 기본을 지키는 일이 될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에 대하여 나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면서도 많은 의문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계속 듣는다면 믿음이 임한다는 말만을 믿고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편안하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판단으로 기독교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이다. 사랑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려고 한다.모든 것의 열쇠는 사랑임이란 깨달음을 얻게 되어서 기쁘다.
그리고 정의가 없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서 정의를 가슴에 가진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솔직히 이런 책을 낸다는 것은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비난(?)이 쏟아 질 것이라고 예상을 한다. 그러나 이런 자기 반성을 하면서 진정으로 기독교가 변화를 보여 준다면 기독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다. 계속 고언을 접하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책을 접하게 된것에 진정으로 감사한다. 아무튼 가슴에 뜨거운 믿음을 주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교회는 자기의 구원과 축복만으로 만족하는 곳이 아니다.만일 교회가 그런 것만으로 사명을 다한 줄 알고 만족한다면 그런 교회는 그 사회에서 쓸모 없는 교회, 끼리 끼리들만이 모이는, 빛이 없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회 참여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참 교회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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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처럼 기독교의 수치스러운 죄악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또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서는 종교다원화를 인정해야한다고 하는 등, 기존의 기독교 서적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띤다. 나 또한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라는 사실"(상권, p.84)을 선교 이전에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상당히 충격적이기도 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은퇴한 신학대학 교수이며 목회자이기도 했다. 다른 생각으로는, '혹시 이 책.. 위작이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해봤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로서 이런 책을 낸다는 것은 하나의 자기고백이며,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진실 된 애정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죄악사를 썼다. 중요하게 다룬 것으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종교재판, 십자군 전쟁,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등이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봐도 가장 큰 기독교의 죄악이므로 크게 다룰 필요가 있다. (너무나 크게 다루다 보니 계속 중복된 내용도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것들 이외의 국내의 기독교 죄악사는 그다지 넓고 깊게 다루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인이자 목회자'인 저자의 한계일 수도 있다. 국내 기독교 역사가 그래도 아직은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인류사에서 지울 수 없는 사악한 짓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뒷 표지의 (국내) 개신교의 죄악 3가지를 소개한 "1. 일제 때의 신사 참배 / 2. 유신 정권지지 / 3. 5·6공 정권에 대한 협조"가 상당히 궁금했는데, 왠지 속이 빈 중국 호빵을 먹은 기분. 국내 기독교 죄악에 관한 책도 나왔으면 한다. [인상깊은구절] 구약시대 때, 십일조는 제사장과 왕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그때는 신정일체(神政一體) 시대로 성직자들은 성직뿐만 아니라 교육, 국가행정, 사법, 의료 등 국가 공무원의 역할까지도 수행했으며, 그래서 왕도 십일조를 받았다. 즉, 그 당시 십일조는 세금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므로 세금을 국가에 내는 현대에서는 십일조가 필수인 것이 아니며 강요되어서도 안되고, 자유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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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백만이 기독인구라는 신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 이렇게 약점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목사직함 역시 다 목사는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기독출판사에서는 거절했을 것이기에 일반출판사에 의지해서라도 필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기독교와 교회체계는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목사인 저자는 사회와 교회에 만연한 부패와 죄악의 실체가 부분적임을 추호도 긍정하려 하지 않고 시종일관 싸잡아 성토하는 정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디에든 여지를 남기지 않고 외쳐대는 '기독교 말살정책'과 같은 볼멘 소리에 기독교 역사의 치부를 반성하고 개혁하려는 의지초자 상실케 한다. 필자의 가장 큰 오류는 부분의 전체화이다. 물론 기성교회의 적지 않은 부패와 잘못된 관행들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저자의 부정적 시각에서 발로한 비판의 대상을 일말의 여지도 없이 전체화하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각오로 교회의 각성을 외치고자 했다는 필자의 의지를 퇴색케하는 전개방식이다. 예를 들면 책의 초입부터 등장하는 기독교와 교회의 대한 저자의 정의들을 살펴보면 "사회악의 거점, 인류의 평화를 해치며, 평화공존의 최대의 걸림돌." 또한 교회내의 예배생활에 있어서도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제도화된 정신적 노예 양성소"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책의 부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주류를 이루는 주요 제목이며, 얘기거리이다.
또한 과거 천주교의 만행 앞에 기독교가 개혁의 기치를 높였음에도 천주교와 기독교 또는 그 외 여타의 종교와 동일선상에서 싸잡아 성토하는 모습은 저자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런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과거사를 비판한다면 합당한 책의 내용이 되겠으나, 기독교의 역사를 그런 자유주의적인 생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접근 자체부터 무리가 따름을 알려주고 싶다.
부분 부분을 적용하기에는 적합한 것도 있으나, 수용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기독교의 본질이 외곡된 느낌이 든다. 모든 형식적인 면과 방법들이 어떤이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서 그릇된 결과를 초래했다 할지라도 본질은 그대로인 것이다.
다시말해 예수의 참뜻인 복음전파에 대한 한을 풀어드리는 것은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이며, 그들에게도 천국을 소망케하는 축복된 일인데, 청교도의 만행인나, 원주민들에 대한 박해를 예를 들어 선교가 필요악임을 교묘히 드러내는 내용은 잘못됐다.
이 책의 특이점 중에 하나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적인 것이라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의문점들을 애매모호하게 제시하며, 헷갈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은 부정적인 생각을 유도하는 고차원적인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아울러 충격적인 얘기가 이어진다...
50보 100보를 양보하고서라도 열흘을 금식하고서라도 물러설 수 없는 당연한 진리에 필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기독교만이 사랑과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인가?" 기가 막히지 않는가?``
이 책의 저자 역시 100년전의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면 복음을 듣지도 못했을텐데, 의욕이 앞섰던 초기의 선교방법적 실수가 피선교국 고유의 문화와 민족을 파괴한다는 이류로 선교 자체를 부정하고 선교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고유의 문화와 종교는 구원의 다원론적인 관점에서 유지되야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일부 나타났던 선교방법의 패악을 인정하고서라도 천국을 소망하는 삶이란 이 땅의 어떤 괴로움도 감내할 수 있는 값진 것이 아닌가! 또 신유,기해,신해,병인박해 등을 무릅쓰고 헌신했던 그들이 오늘날 우리를 세계선교에 눈물로 헌신하게 만든 원동력임을 어찌 모르는지, 복음은 살아 운동력이 있기에 끊임없이 순환하는 구조로서 어떠한 악조건속에서도 열매를 맺게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기에 이 책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들, 전도의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 행위의 모범을 강조하고, 삶에서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야 그것이 진정한 전도라고 믿는다.. 분명 필자도 그렇게 믿고 이 책을 썼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믿음을 내가 주는 것인가? 그럼 내 행위가 가져다 주는 것인다?..답은 정확히 "아니다" 본질을 되집어 보면 간단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당부의 말씀을 전함에 저자는 역시 부정적이다. 세계선교에 부정적인 이유가 세계평화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다는 어떤 언론의 분석을 인용하여 현재의 세계선교는 지양해야함을 필역한다.
서평을 괜히 썼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과연 이 책한권으로 기독교의 개혁을 어떻게 이루길 원하는지.. 아니면 기독교 말살을 원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부패함을 드러낼 수 있었겠냐"며 스스로 반문하는 형식으로 독자들의 믿음없음을 한탄하지만, 그것은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무능함을 한탄하는 함정에 빠져있음을 독자들은 알아야 한다.
지은이는 어떤 구절도 흔쾌히 긍정할 수 없는 나와 같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겠지만, 시종일관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인내심과 끈기를 요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출판사측엔 미안한 얘기지만, 스스로 판단능력이 없는 초신자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다. 아니, 모든 신자들에게 마찬가지다. 혹시나 하는 맘으로 교계의 각성과 이기적인 교인의 심령을 울리는 참 뜻을 발견하고자 책을 들었으나, 급기야 성질만 벌린 것 같다...^^
끝으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은 아무래도 성도들보다는 무신론자들(종교무용론자)들의 기독교 파괴 발언의 중요한 근거자료로 사용되리라는 것이다. 저자가 노년에 의욕을 가지고 시도한 점은 감히 높이 사고 싶으나, 역시 삼국지는 노년에 읽으면 안되는 책인 것처럼 그렇게 안타까웠던 이 시대의 기독교를 성토하기에 앞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인상깊은구절] ---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 이탈리아의 항해자, 독실한 카톨릭 신자.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 1세의 원조를 받아 1492년 대서양을 서항하여 인도에 도달한 후, 네 번에 걸친 항해 끝에 쿠바.자메이카,도미니카.남아메리카.중앙 아메리카의 일부를 발견. 콜럼버스(Chistopher Columbus:1451?~1506)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왔다. 그는 스페인 왕의 후원을 받아 4차에 걸친 모험적인 항해를 계속하면서 중남미 지역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고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4차에 걸친 그의 항해와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간략하게 살펴보자. 13세기 전반에 몽고의 왕과 장성들이 이끄는 기마군의 동유럽 정복과 실크 로드(Silk Road)교역을 통하여 이미 동양의 부와 신비를 알고 있던 유럽인들의 마음을 더욱 부풀게 한 것은 베니스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었다. 그의 여행기가 나오고 나서 약 200년 후에 유럽의 탐험가들과 무역 상인들은 그때 유럽에서 보물과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