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에 '개인'의 개념이 도입된 건 과연 언제일까.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이 결집하는 유교 문화의 뿌리 깊음 탓에 여전히 우린 가족 단위의 사고에 능하다. 동시에 짧은 시간동안 압축해 벌어진 변화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이질적인 것이 곧 선진적이고 뛰어난 것이라는 인식이 마치 진리인양 받아들여졌고, 개인을 중시하는 태도 또한 이와 함께 조금씩 인정 받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뿌듯하다는 사실에 도취된 나머지 몇몇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오도하기 시작했다. 뭇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억압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정도가 더욱 강해진 듯하다. 가정의 유일한 아이를 예전의 어른들이 대하듯 어여삐 여겼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상대의 자유를 방해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탓이다. 옳고 그름을 정의하는 게 힘의 논리에 따라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지독한 경쟁, 한 치라도 손해를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강박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최대로 누리는 걸 곧 정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잦다. 자유. 어느 가치보다도 중시되는 이 단어를 거론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혹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더불어 서양 철학의 4대 윤리 사상가로 그의 이름을 꼽는다던데, 제러미 벤담이 나에게는 보다 익숙하다. 아무래도 행복의 조금은 다른 측면, 즉 양과 질에 대해 두 인물이 주장을 펼쳤기 때문 같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표현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이른바 다다익선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어떠한 행복인지, 누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따지기보단 많은 인원이 행복하다 응답하면 선한 결과로 해석하는 식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극도로 불행한 인물의 존재는 무시당할 수 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을 감당하는 것도 용납된다. 행복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불행을 강제할 수 있는지,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 밀은 질을 추구한다. 나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건 금기이며, 그 역도 동일하다. 말은 쉽지만 세세하게 파고들면 난해하다. 적정선을 어찌 설정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이다. 전작 ‘자본론’에 이어 이번에도 저자는 만화의 힘을 빌렸다. 실제 인물과 참으로 닮은 밀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한다. 일방적인 강의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그의 발언은 친구와의 대화처럼 친숙하다. 등장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한계를 시험하려 들다가 일정 부분에서 경계를 마주한다. 만화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해 보이는 상황이기에 독자로서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개인과 집단 차원을 넘나드는 화두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의 일부를 엿보게 만들어 주었다. 으레 이래야 한다는 식의 주된 사고 안에 속한 이들은 의심 없이 자신이 진리를 행하고 있다 여기겠지만, 경계선에 걸쳐 있거나 아예 속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시선이 참으로 따가울 것이다. 타인의 삶을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겐 존재하는가. 나의 심적 불편함이 타인의 고결함 침범에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이는 옰고 그름에 대한 질문이자 더불어 사는 자세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행복을 원하는 만큼 남의 행복도 지켜줄 필요가 있다. 같은 의미에서, 나의 자유가 타인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사고의 발현이 곧 ‘존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과정에서는 질에 집중했지만, 그로 인한 누림의 양 또한 증가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는 이리 생각하지만, 현실을 결정하는 건 아마도 실천일 거다. 개개인의 이기심이 부닥쳐 불꽃이 거하게 일수록 자유론은 한낱 이론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양보는 너무 거창하다. 나의 생각과 남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순간 기억하는 선에서 조심스레 출발해볼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