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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마음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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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끝나지 않는 순례의 길- 오쇼 라즈니쉬, 『마음을 버려라』     오쇼 라즈니쉬는 어떤 언어로도 내적 체험, 주관적 체험을 표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어로 표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언어는 언제나 일어난 사건만을 서술할 뿐이다. 라즈니쉬의 말마따나 “언어라는 것은 객관 세계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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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끝나지 않는 순례의 길

- 오쇼 라즈니쉬, 『마음을 버려라』

 

 

오쇼 라즈니쉬는 어떤 언어로도 내적 체험, 주관적 체험을 표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어로 표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언어는 언제나 일어난 사건만을 서술할 뿐이다. 라즈니쉬의 말마따나 언어라는 것은 객관 세계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15) ()은 객관 세계를 넘어선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에 새겨진 대로 선사는 어쩔 수 없이 언어로 깨달음을 표현하지만, 그 깨달음은 언제나 언어를 넘어서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임제(臨濟) 선사는 할의 조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자들이 불법을 물으면 크게 소리를 외쳤는데, 그 소리가 이다. 큰 소리를 듣는 순간 제자는 문득 무심을 경험한다. 물론 깨달은 사람들의 일이다. 일반 사람들은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댈 것이다. ()은 이렇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언어로 이루어진 경전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에 이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선과 연관된 책을 읽어내는 건 쉽지 않다. 예시로 나와 있는 이야기들이 마치 엉킨 실처럼 뒤죽박죽되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라즈니쉬는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해는 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해하지 않는 것도 필요 없다. 그것 역시 지적인 것이니까.”(65)라고 말한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지 않을 필요도 없다면 어떻게 책을 읽으란 말인가.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지적인 견해를 동반한다. 우리는 자동차 운전을 배웠기 때문에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 무턱대고 자동차를 끌고 나갔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에도 배움이 먼저 따르는데, 추상적인 지식을 이해하는 일은 어떨까. 공부를 하다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에 부딪쳐 속을 끓여본 적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나쁜 머리를 탓한다. 라즈니쉬는 이런 식의 이해가 깨달음을 이르는 길에서는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해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이해는 마음의 장난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임제가 말했다.

도를 닦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옛 선사들이 말씀한 언구에 매달려, 그걸 진실한 길로 보면서 이들 선지식은 훌륭하다,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어찌 그 고명한 선사들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한다.

이 눈먼 바보들아! 그대들은 평생 그런 견해를 간직한 채 살아가면서 스스로 두 눈을 가리고 있다. 위대한 선사들만이 감히 붓다와 조사를 비방한다. 옛 선인들은 어딜 가더라도 사람들이 믿어주질 않아 추방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만일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인정받았다면 그런 사람들이 무슨 훌륭한 점이 있겠는가? 그래서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여우의 머리통이 깨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91)

 

임제가 도를 닦는 벗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옛 선사들의 언구(言句)에 매달려 있다고. 언구는 언어를 의미한다. 선사들이 언어로 말한 것을 우리는 머리를 쥐어짜며 이해하려고 한다.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깨달은 선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선사들이 내뱉은 언구에 매달려서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 같은 범부들은 옛 선사들의 유명세만 믿고 그들이 남긴 어록에서 진실한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선지식들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우리 같은 범부가 선지식들의 고명한 혜안을 헤아릴 수 없는 건 당연하다고. 임제는 이런 우리들을 향해 이 눈먼 바보들아!”라고 일갈한다. ‘이다. “위대한 선사들만 감히 붓다와 조사를 비방한다.”는 임제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위대한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이다. 범부들이 우러러 보는 선지식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붓다와 조사를 비방한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스승을 모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어딜 가더라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범인(凡人)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는 걸 사람들은 자꾸만 제 마음대로 판단(‘이해라고 해도 좋다)하기 때문이다.

 

선사들이 가는 곳마다 인정받는다면 그들에게 무슨 훌륭한 점이 있겠느냐고 임제는 반문한다. 선사들은 선사들의 길이 있고, 대중들은 대중들의 길이 있다. 대중의 눈으로 선사가 가는 길을 보면 못마땅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내치는 대중들의 이해가 선사를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여우의 머리통이 깨진다는 말에는 무엇보다 이러한 대중들의 무지를 가혹할 정도로 깨우치려는 선사들의 의도가 담겨 있다. 침묵하던 사자가 포효를 하면 사자 없는 세상에서 권력자 노릇을 여우들은 단번에 머리통이 깨져 죽거나, 도망친다. 물론 사자의 포효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한해서다. 꽥 소리를 지른다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이 책 곳곳에는 임제에게 로 맞서는 사이비 선사들이 나온다. 그들은 이라는 형식만 취하고 있을 뿐, 임제가 을 통해 전하려는 내용(무심)에는 관심이 없다. 선이라는 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언급은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자신의 어리석은 관념에 매달린다. 모든 존재계가 즐거움에 춤추고 있는데 인간만이 근심에 싸여 있다. 나무가 근심하는 것을 보았는가? 어떤 동물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평화롭게 죽는다. 태어나는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것이 존재계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사사건건 끼어들어 문제를 일으킨다. 마음은 사물이 다른 상태로 존재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계의 여여함(suchness)’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사대로 되기를 바란다. 존재계를 자신의 의사대로 바꾸려는 것, 이것이 모든 불행의 근본이다. 그대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관념대로 사물을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존재계를 바꿀 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180~181)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어리석은 관념에 매달린다. 선법(禪法)을 고정된 형식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는 죽음이 임박한 임제가 수제자인 삼성(三聖)을 대하는 자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임제가 삼성에게 묻는다. 훗날 사람들이 너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에 대해 묻는다면 너는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삼성이 바로 !’이라고 소리친다. ‘은 임제가 주론 쓴 선법이라고 했다. 자신의 선법으로 대답하는 수제자에게 죽음을 예감한 임제가 외친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당나귀에게서 멸해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223) 라즈니쉬는 삼성이 스승의 선법에 매여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마음을 개입시켰다는 말이다. “존재계를 자신의 의사대로 바꾸려는 것, 이것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라는 말 그대로, 이 말을 들은 삼성은 어쩌면 지독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라즈니쉬는 말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삼성은 도 버리고 스승의 꾸지람도 버리는 무심의 차원에 과연 이르렀을까.

 

라즈니쉬는 이뀨 선사의 시를 인용한다. 마지막 목적지도 없고/ 아무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임제는 수제자인 삼성에게 무엇을 원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수제자가 자신의 선법을 그대로 계승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승이 죽으면 제자는 제 길을 가야 하는 게 선의 예법이다. 스승은 스승이고 제자는 제자다. 스승과 제자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라는 얘기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바깥에 부처를 세워놓으면 내 안의 부처가 힘을 쓰지 못한다. 깨달음은 어떤 뚜렷한 목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깨달음은 과정이고 또 과정이다. 목적지가 없으니 그리로 가기 위해 세워야 할 가치도 있을 리 없다. 수제자인 삼성은 을 외침으로써 스승 임제가 평생토록 지킨 이 무심(無心)을 저버렸다.

 

라즈니쉬는 만물은 춤추고 즐기고 노래하라고 있는 것이다. 가치에 대해 묻지 마라. 무엇이 덕()이고 무엇이 선()인지 묻지 마라. 모든 것을 즐겨라. 삶은 어디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며,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순례의 길을 가라. 길이 끝나는 지점은 없다.”(218~219)고 말한다. 무엇이 덕이고 무엇이 선인지 묻지 말라는 얘기를 제 마음대로 살란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해석은 앞서 말한 이해에 해당된다. 덕을 따지려면 먼저 덕에 대해 알아야 하고, 선을 따지려면 먼저 선에 대해 알아야 한다. 덕과 선을 안다는 건 가치를 따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가치를 따지기 시작하면 춤추고 즐기고 노래하는 만물이 보이지 않는다. 가치를 따지기 시작하면 자꾸만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생각하게 된다. 끝나지 않을 삶을 어딘가에서 끝날 삶으로 만들어버리니, 당연히 집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라즈니쉬는 길이 끝나는 지점은 없다고 단언한다. 끝나지 않는 길을 우리는 영원히 걸어가야 한다. 그게 순례의 길이다.

 

o*****s 2019.03.07. 신고 공감 1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