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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서 보기 위해 펼친다. 순간 새 책인데도 아득하게 먼 옛날, 느꼈던 냄새를 맡는다. 최근 들어서야 가본적이 없지만, 예전엔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청계천6가 고서점에서 맡을 수 있었던 그 냄새가 오히려 정답기까지 하다. 얼마나 오래된 책일까? 살펴보니 2005년에 초판으로 발간된 책이다. [번역과 주체], 그러나 부제가 [‘일본’과 문화적 국민주의]라 하기에 난 이렇게 해석했다. 문학에 있어서 번역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떠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의 경우 번역된 외국작품들이 일본의 문화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책 이라고.. 한데, 다 읽고 난 지금, 아니 이해가 안되어 부분적으론 몇 번씩 다시 읽기를 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되지는 않는다. 역시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언어문화사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사실만을 깨닫는다. 이 책은 8,90년대 저자가 번역문제를 다룬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애초에 영어로 쓰였다가 일본어로 번역된 것도 있고, 일본어로 쓰였다가 영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고 한다. 그것을 또 다른 일본인이 이제 한국어로 번역해 놓았다. 민족이나, 사상, 민족언어는 선사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초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어떤 시기에 출현한 역사적 시작을 가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이것을 번역의 실천계, 즉 번역을 표상 가능하게 만드는 쌍형상화도식 이라고 부르고 있다. 번역의 실천계란 서로 다른 언어, 사상, 문화사이의 대칭적인 교환을 가능케 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쌍형상화도식은 서로 짝을 이루는 언어나 사상사이의 반사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상화 하는 것 이라고 한다. 또한, 번역이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청중집단을 위한 글쓰기와 같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로 번역해야 하는 까닭은 두 가지의 상이한 언어 통일체가 주어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들을 분절한 결과 번역하는 언어와 번역되는 언어라는 두 가지 통일체를 마치 자기완결적인 실체처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는 번역 속에서 약속을 할 수도 없고, 책임을 질 수도 없다고 한다. 단어 하나하나에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번역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한 말속에서 서약된 것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즉 번역자는 저자도, 독자도 그렇다고 관찰자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언어나 다른 사상 사이의 쌍형상화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마 번역자가 두 언어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서로 다른 언어나 사상은 이질적인 두 개의 언어나 사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일한 문화권내 시공을 달리한 경우도 해당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고전과 번역서 사이의 쌍형상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이러한 쌍형상화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지만, 번역자가 생각하는 형상이 독자가 생각하는 형상과 그 근원이 같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밖에도 저자는 일본사상과, 그들의 문화, 제국주의 문화와 천황제 등에 대해서, 또 번역에 있어서의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언제 시간이 되면 처음부터 다시 한번 읽고,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고, 또 전부 알 수는 없는 것 이라고 스스로 자위해 보지만, 나의 인문학적 소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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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였는지, 토론에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또 그놈의 포스트모더니즘 타령이냐고. 유행 지난 지가 언젠데 데리다, 폴드만, 보드리야르 운운하냐고. 그들의 저서나 제대로 읽어 봤냐고. 솔직히, 면목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 지난 것도 알고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쓴 책도 그렇게 많이 읽은 편은 아니다. 그나마 루틀리지 시리즈로 스피박이나 데리다, 폴드만, 제임슨 등을 접한 게 다행이지. 그럼에도 계속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곧 해체다. 계몽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근대의 추악한 면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격한 지점이다.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정의했듯 근대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 시대다. 내가 이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둠을 부각시켜 좀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려는 세계관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 자체를 불신하지만...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가 그러하듯 민족 역시 해방과 속박의 서사를 동시에 전개했다. 민족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보라. 프랑스 대혁명 때 민족은 해방의 서사였지만, 제국주의 시절 민족은 폭력과 수탈 억압의 동의어다.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가 노골적으로 그러한 사례였고 상대적인 정도만 덜할 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 역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결합한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제3세계는 민족을 다시 해방의 무기로 사용했고 2차대전 종전 이후 해방된 식민지에서 독재자는 민족을 독재의 도구로 이용했다. 당신에게 민족은 무엇인가요……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감성적이지만 이 땅에서 위의 물음은 이성적인 차원에서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1주일에 최소 1번 이상 듣고 자란 대다수의 사람은 나와 민족의 운명을 쉽게 등치시킨다. 고구려 역사도 독도도 당연히 우리 것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단일 공동체를 꾸려 왔기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현상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한국은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더욱이 강국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굴종적인 자세로 임한다. 예전에는 형과 아우의 나라라며 중국에 사대했고 지금은 혈맹이라며 미국의 핵우산에 쏙 안기려 한다. 민족을 부르짖으며 만주 벌판에서 쓸쓸하게 주검으로 잊혀진 사람과 일본제국주의 만세로 사회 지도층에 편입된 사람이 있다. 민족에 절대 열광하는 다수와 민족을 거부하여 지도층이 된 소수가 공존하는 지점에서 민족은 이미 레토릭으로 전락한다. 민족을 공격한 사람 중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민족이란 관념이 근대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좌파가 불행했던 점은 자본에게나 노동에게나 국경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민족 문제에 참패하면서 맑시즘은 파탄 났다. 맑스-레닌주의, 마오이즘, 주체사상까지… 다들 혼자 싸웠고 기형적으로 발전해서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혹은 망하는 중이다. 어쨌든 근대 들어서 가장 강력한 대안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주의마저 민족주의에 졌다. 과연 그 누가 민족을 이길 수 있으리오. 『번역과 주체』의 저자 사카이 나오키는 탈민족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일본의 지성이다. 사실,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는 『상상의 공동체』와 견주면 그렇게 특이할 것도 없다. 다만 민족의 문제를 동아시아에 – 특히 일본 – 적용시켰고 아직도 일본제국에 향수를 느끼는 대부분의 일본인과 달리 천황제와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했던 만행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의 주장 중 특이할 만한 것은 ‘쌍형상화 도식’이다. 굳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언어철학자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언어는 인간 사유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개별 인간에서 범위를 넓혀 민족으로 존재를 확장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민족에게 민족어는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사카이 나오키는 민족어 형성 과정에서 번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일본의 표준어 정립 과정에서 19세기 한자의 번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설명. 언뜻 보면 라캉의 거울자아 이론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는 쌍형상화 도식을 일본사상사의 형성과도 관계 지어 설명한다. 어쨌든 흥미로운 지적이다. 나머지는 저자의 말을 직접 옮긴다.
번역은 스스로의 언어, ‘우리’의 언어 이외의 것에 대한 참조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데, 마찬가지로 ‘주체’ 도한 사실은 자기 또는 자기들 이외의 것, 즉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18쪽) 주체는 표상하는 나와 표상되는 나라는 분열의 매커니즘을 통해 자기를 자기에게 표상하는 자로서의 근대적 주체=주관성으로 이해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주체는 마치 자기완결적인 존재자처럼 설정된다. 자기완결적인 회로는 때로 국민문화라고 불리기도 하고 국민의 전체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8-19쪽) 『번역과 주체』는 분명히 제국 권력의 행사와 합법성, 즉 국민 공동체의 제작을 위해서 세속적으로 번역을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제국과 국민에 의해 쫓겨난 사람들을 위한 생존과 저항의 장소로서 번역을 재고하는 작업을 한다. (30쪽) 하나의 언어 속에서, 단일 언어 공동체라는 상정된 균질성 속에서 쓰기와 읽기의 순환이 완결된다는 관점에서 쓴 글은 하나도 없다. (45쪽)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로 번역해야 하는 까닭은 두 가지 상이한 언어통일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번역이 언어들을 분절한 결과 어떤 번역의 표상을 통해서 번역하는 언어와 번역되는 언어라는 두 가지 통일체를 마치 자기완결적인 실체처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47쪽) 일본어와 일본민족의 출현은 번역이라는 문제틀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47쪽) 자크 랑시에르가 평등이라는 신조에 대해 주장했듯, 우리를 모이게 하는 것은 우리 사이의 공통성이 아니라 전달의 어려움을 잘 알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다. (53쪽)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실천계를 피하는 독자들과 더불어 비집성적 공동체라는 관계를 분절하려고 신중히 노력하면서 나는 국민이라는 귀속으로서의 ‘우리’나 문화적 또는 문명적 공동체로서의 ‘우리’에 의해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집단적 동맹관계를 가리키지 않기 위한 방법을 배워야 했다. (54쪽) 학문의 대상이 먼저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할 학문분야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학문분야의 존재가 학문의 대상을 산출하는 것이다. (104쪽) ‘일본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설정함으로써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날 때 담론 영역으로서의 일본 사상사는 시작된다. (105쪽) 서양에 철학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결여의식으로부터 일본사상사는 출발할 수밖에 없다. (중략) 일본사상의 자기 언급적인 성격은 모방성에 대한 욕망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113쪽) 일본의 독자성과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곧바로 서양의 보편성을 찬앙햐는 것이 되어버리는 체계 (116쪽) 쌍형상화 도식이라는 용어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본 대 서양이라는 비교의 틀이 본질적으로 상상적이라는 점이다. 형상은 한편으로는 허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를 향해 사람을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형상은 감각적인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행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 따라서 형상은 정체성/동일성에 대한 욕망을 생산하는 상상력을 통제한다. 현상은 상상력의 논리에서 핵심적인 문제이다. 형상을 거치지 않고서는 동일화에 대한 욕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형상에 대한 욕망은 하나의 형상을 향해 단선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상과 대비를 이루면서 공간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일본사상’을 알고 싶다는 욕망 속에서 일본이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서양이 형상화되어야만 했다. 일본 혹은 서양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이 모방적일 수박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119쪽) 정체성, 동일성에 대한 신뢰 표명은 항상 정체성의 불안정성에 대한 부인을 수반하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 배타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 (133쪽) 근대 국민국가가 행정, 입법, 사법 제도 외에도 국가, 국기를 비롯해 국사, 국문학, 국세 중심의 세제, 국민교육 등의 장치들을 발명함으로써 균질화, 보편화된 국민공동체의 이미지를 투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 가운데 근대 국민국가 특유의 것은 국민개병이라는 이념이다. 이 이념은 일정한 연령에 달한 성인 남성이 군에 복무할 것을 명령하는데, 그 결과 이 이념은 국민공동체를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즉 이 공동체의 모든 정식 구성원은 잠재적인 병사로 규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프랑스 혁명이 열어놓은 국민국가의 가능성이 동시에 모든 인민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회의 성립을 의미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권의 이념 등과 프랑스 혁명은 총력전의 가능성을 현실화 한 것이다. (183-184쪽) 자신의 ‘의견’ 안에서 스스로 인종주의자라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인종주의는 우리생활의 너무나 많은 측면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자로서 또는 식민주의자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233쪽) 서양은 스스로를 갱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서양일 수 없다. 서양은 실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반성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은 필연적으로 자기확장적이며 비서양에 대한 침략성은 서양의 주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계기가 된다. (289쪽) 패전 이전부터 죽음은 문학 생산의 초점이었으며 문학이 죽음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집단이든 죽음을 표상 가능케 하는 문화장치를 갖고 있다. 전쟁동안 일본 전통시의 수사적 어휘는 죽음을 심미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중략)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집단에 의해 기억되고 추앙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번역된 것이다. 이 맥락에서 미적 상상력이 도움되는 그런 종류의 집단이란, 중세적인 씨족이나 고대적인 민족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303-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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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내 눈을 끈 것을 책에 앞서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돌에 새겨진 듯한) 한자 迹과 수렵도였다. 우리가 과거의 수렵도를 발굴하고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처럼 모든 번역의 의미과정 또한 迹 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저자의 말에도 설명되어 있는데, 표지를 커다랗게 장식한 이 한자는 흔적을 뜻하는 迹(자취 적)이다. 저자는 이 글자로 여러 가지를 암시하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중 번역에 있어서 타자의 흔적에 관한 迹 의 의미가 가장 와 닿았다. 저자의 말대로 그가 쓴 여러 논문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여러 친구들의 도움이 그렇고 그러한 영향을 받아 탄생한/번역된 논문이 바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론에서 예로 든 서예처럼 서예의 글자의 의미를 읽을 것인지 글씨체를 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글로 씌여진 이러한 텍스트들이 이데올로기적인 번역의 과정에서 얼마나 축소 혹은 왜곡, 그리고 (역사처럼) 날조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 낼 필요성을 느낀다. 플럭서스의 수많은 낙서와 메모의 오래된 종이딱지들이 왜 액자 속에서 그 가치를 발하고 우리는 왜 그 종이와 낙서와 이미지를 함께 읽어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하나의 플럭서스의 작은 메모의 일상적인 내용의 글자들이 그 배치와 콜라쥬로 인해 다양한 해석을 가져오는 것처럼 번역가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거의 모두가 사실을 말하는 하나의 문장이라고 주어진 것에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종종 신문기사나 독서토론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저자-번역-텍스트-제1독자, 저자-번역-텍스트-제2독자 등으로 또 다른 해석/번역의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다. 균질적인/동일언어 생활권 내의 독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다양성이 분명 존재한다면 그 비균질적인 번역의 과정에서는 어떠한 해석이 있을지, 어떠한 배경과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을지 그 정도를 상상하기가 힘이 든다.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역이라는 개념의 범위를 확대시킨다. 그도 그럴것이 저자에 의하면 번역은 대칭적으로 다른 언어로 변환을 하는 작업과정에서 끊임없이 넓은 의미의 해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번역은 또 하나의 텍스트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의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의 대칭적인 변환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일 뿐인 번역의 실천계는 사실 상상적인 것으로 이는 그의 ‘딕테’에 대한 예시로 자세히 설명된다. 번역은 우리가 이미지를 해석하는 것과 같이 모든 번역자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양한 시점에서의 읽기 작업을 동반하므로 실재하는 대칭적인 작업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가 시도하는 글쓰기는 비균질언어적 말걸기,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는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 역할을 바꿔가는 소통체계를 배려한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언어, 비균질적 언어공동체로서 번역된 텍스트를 받아들이면서 번역자의 배경을 이해하고 역자의 이데올로기를 알고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원 저자에 대한 그것 또한 파악하고 있다면 저자의 이러한 우려가 지극히 우려에 그치지 않고 사유될 가치가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뒤흔드는 담론을 제시했다는 것을 염두하고 ‘번역과 주체’를 읽어내려간다면 왜 그가 폭넓은 듯 하면서 이토록 깊은 사유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저자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주체로 해석되는 subject를 인식론적 주관으로 볼 것인지 실천하는 행위체로서의 주체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의미작용을 설명하면서 주체이론을 정리하는 부분에서는 세계담론의 축약본을 보는 듯 하다. 주체이론과 식민사상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사카이 나오키의 주체에 관한 논문부분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호명된 주체로서의 모든 해석/번역/독자를 가늠해보자면 이 리뷰 자체마저도 하나의 어긋나 있는, 주인 아닌 주체로서의 번역가를 가진 텍스트에 불과해지겠지만, 그리고 그의 주체가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가능하게 하는 개념이라고 아직 믿지만, ‘번역과 주체’와 같은 텍스트처럼 탈이데올로기적 노력으로 비균질언어적 글쓰기와 모국인 아닌 외국인의 한국어번역과 같은 저항은 분명 글쓰기 자체로서의 운동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그가 부정하는 일본성, 일본사상은 이미 그가 말했듯 다양한 해석과 번역을 거친 혼용적 존재이기 때문에 균질언어적 경계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인식체계 또한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일본사상에 대한 명명조차도 비교대상에 의해서만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고유적 일본사상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며 일본역사와 시들이 지금껏 행해온 민족주의적 표현들 또한 개인을 집단으로 포함시키려는 사회적 행위를 일으킴으로써 정치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그의 연구를 해체주의적이라고 말해야 할지 구조적이라고 말해야할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그의 이러한 면이 나의 탈국가적 가치관을 자극하여 공감을 끌어낸다. 그런데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집단적 애국주의를 꼬집는 것으로만 말해버리기에는 이 책의 역자인 후지이 다케시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라는 식의 단순한 표상에 의해 그의 글이 안이하게 '이해'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의식되는 부분이 있다. 사례없이 급진적이고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일본인, 일본어, 일본사상이란 보편적인 것과 대조된 특수성일 뿐, 그 보편성이 바로 잡종성을 반증한다는 것을 누누이 언급하는데도 그가 탈중심적으로만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반제국주의적임이 강한 그의 주장의 한쪽은 허상인 자민족중심에 대한 반민족주의적 입장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두 입장을 견제하기 보다는 잡종성에 대한 인정과 탈국경적인 글쓰기/말걸기를 위한 1차 저자라는 권위를 버리고 해석자/변화유도가능자로서의 번역가로서(실제로 자신의 글을 영문에서 일문으로, 일문에서 영문으로 번역해 간 논문들을 이뤄진 이 책은 그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공존(탈국가적 친구:저자가 국경과 태생적인 구분보다는 모두 다른 언어를 가진 비균질적이지만 공동체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느꼈다)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실천은 신념이 아닌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에 암묵적으로 편승될 가능성이 있는 학문의 책임과 창조적인 융통성을 가진 연구를 위한 사명의 실천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독자에게 책 소개의 출판사리뷰를 정독해보길 권하고 싶다. 나는 미건 모리스(홍콩 링난대학 문화학과 교수)의 서문과 더불어 이 책의 출판사리뷰가 훌륭한 리뷰라고 생각한다. 또 정확하게 사카이 나오키의 의도와 주제를 관통하는 서문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경우 책이 쉬이 넘겨지질 않다가도 길다 싶은 저자의 서론 부분의 반복과 다양한 설명을 가지고 어설프게나마 맵핑을 한 이후의 본격적인 ‘일본과 문화적 국민주의’에 대한 본론은 마치 예시를 읽는 듯 독서를 즐길 수 있었다. 저자의 서론을 다시 펼쳐보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그의 연구관은 거의 서론에서 다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0년 8월인 현시점에서 내가 받은 ‘번역과 주체’는 2005년 6월의 초판 1쇄본이다.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인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과 주체’ 초판을 받고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여지면서도 문헌연구와 더불어 끊임없는 자기사유의 연구서를 만난 데 대한 반가움은 감출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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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을 부르는‘쌍형상화’,‘문화본질주의’, ‘근대성’과‘보편주의’의 담론을 통한 근대‘일본’을 비롯한‘문화국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라는 것이 100 년 만에 나왔다는 발표는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근간이랄 수 있는‘와쓰지 데쓰로’의 전체성의 기획을 위한 문화적 국민주의에 대한 비판론이 주요부분을 장식하는 이 저술의 시각을 이해할 때 혹여 2010년의 일본, 일본인이 자기중심적 역사의 허구와 서양에 대한 동일시의 욕망인 부정적, 대립적 분리주의를 벗어날 정도의 각성이 이루어질 만큼 성숙해졌나 하고 의아해 질정도이다. 저자‘사카이 나오키’의 발화자로서의 위치는 일본인이나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未知의 타자, 즉 상호 말이 통할 지 알 수 없는 자로서의‘외국인’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이 저술의 첫 장인 31 세로 요절한 재미 한국인‘차학경’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딕테』가 집요하게 시도하는‘말하는 주체’의 제작을 유산시키고, 안과 밖을 가르는 대칭적 경계선을 혼란시켜 쌍형상화 과정을 위기에 빠뜨리고자 하는 작업의 독해와 일맥상통한다. 식민지민으로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강제된 외국어를 사용해야만 했던 어머니, 그리고 미국의 이민자로서 영어를 쓰지만, 말하는 것과 의미사이의 거리가‘0’으로 환원이 불가능함으로써, 신체가 보이는 완강한 단념으로서의 상실의 발견을 통해 주체적 기술의 작업을 무효화시키는 문학의 정치성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서양의 근대적 담론에 의해 제작된‘민족공동체’나‘국민 주체’라는 작위적인 주체 만들기를 통한 ‘일본국민’의 제작 과정에서부터 서양에 대결하는 것으로서의 발상으로서 단지 욕망의 재생산 이상이 아닌 자기의 사상이나 역사의 잘못된 출발을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오류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모방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리적 이름과 그 영역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예로서 상고시대에도 과연 한국이라는 지역이 있었던 이상 민족으로서 한국인 또한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서양과의 대칭성과 평등에 대한 요청에 의해 발상된 국가와 역사라는 관념은 현재의 지리적 영역에는 고대에도 자신의 민족이 존재하였다고 정의해버리고, 그저 시대를 확장해 버린다.‘일본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지적하는 이와 같은 문제는 비서양의 역사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목격된다. “사료들에 나타난 사고방식이나 감정은 현대 일본인에게는 부정할 여지없는 이국적인 것”이라고 역사인식의 오류에 쐐기를 박는다. 자기중심적이고 세계시민주의 전체론적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매개된 합리적 이성 공동체라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은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싶은 전이적인 욕망의 발현, 즉 쌍형상화 도식에 이미 연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황국사관을 정립한‘와쓰지’의『윤리학』과 『풍토』의 담론들을 통해 이 저술의 중심주제인 문화국민주의에 대한 자아도취적 메커니즘과 반역사적 태도의 비판론은 오늘의 일본,일본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또한 국민의 정체성과 동일한 전체의지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가시성의 구조에 대한 천황제에 대한 담론은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에서도 유의미한 관점을 해독케 한다. ‘쇼와 ’천황이 죽기 3개월 전부터 일본대중매체를 통해 천황상을 쏟아내지만 실은 천황의 신체는커녕 병실조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대중매체에 의해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라는 가시성의 구조 속에서 실은 내내 불가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은 부재상태에서 보는 것을 욕망할 것이라고 가정된 집단으로 재정의 되어“같은 욕망을 공유하며 같은 대상을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며 같은 목적을 위해 행동하리라 생각되는 사람들로 국민을 정의”하려는 시도로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떠한 이의신청을 하면 바로 억압되고, 암묵적으로 굴복을 강요하는 공감의 일체화과정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서민의 복지정책을 말하면 친북세력, 빨갱이로 치부되는 한국 보수사회의 집단적 세뇌 과정과 같다 할 수 있다. 이는 와쓰지의 철저한 인간 개별성의 부정과 사람에 내재하는 전체성만을 인정하는 인간론의 모습, 즉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에 대한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을‘문화적 본질주의’라 할 수 있는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문화적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와쓰지의 담론에서 아주 야릇한 오늘의 일본인 정서를 엿볼 수 있는데, 살아있는 전체성으로서의 국민이지만 전체성으로서의 전체의지는 그 존재말고는 아무것도 실현하지 않으니, 전체의지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전체성을 어떻게 대상적이고 눈에 보일 수 있게 하느냐는 것으로서 일본인들은 그것을‘천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천황은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상징할 뿐 어떠한 정치적 귀결에 대해서도 결코 책임이 없다는 얘기와도 상통하는 것이니, 아주 인상적이고 주체에 대한 교묘한 논리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자의성과 문화적 국민주의가 동원된 사례로서 와쓰지의 천황제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국민’과 ‘국가’, 그리고‘전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토양을 마련해준다. 한편 지배력을 가진 실정성으로서의 서양이라는 상징된 통일체가 “지정학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담론 도식의 역할”로서 ‘근대성’을 정의하고, 세계를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다르게 생각해 볼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종의 뒤틀림으로 봄으로써 서양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담론 편제로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합리주의를 말할 때면 보편성과 서양세계를 연결하는 식의 일정한 권력관계를 정식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거나, 힘의 우월성에 의한 일종의 몽상임을 논증하기도 한다. 보편과 특수주의에서 보듯이 역사의 주체는 복수이며 역사적 주체의 위치는 일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결국 이종혼성성과 타자성에 얼마큼 열려있는지, 다원적 결정을 고려할 줄 아는, 그래서 역사 주체들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을 여하히 포섭하여 나가느냐 하는 것은 슬기로운 역사인식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인식론적 subject인 주관에서 탈피하여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마련되는 주체(主體)를 정립 할 것인가는 실로 자명한 귀결일 것이다. 실로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역사 비평서이자 문화에 대한 명료하고 실천적 힘을 부여하는 보배 같은 실천철학서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