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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니체”
서양의 고대인들은 지금과는 달리 시간을 순환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령 차고 기우는 모습으로부터 나타나는 탄생과 죽음, 부활의 순환을 보여주는 달에 대한 숭배는, 고대인들의 시간관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의 등장으로 이러한 관념은 해체된다. 최후의 심판으로 귀결되는 종말론은 시간이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시작과 종말, 그리고 신의 목적을 갖는 직선적인 것이란 사고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클라스트르는 자신들만이 최고로 발전된 존재이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따라야만 된다고 착각하는 서구와, 미개하기 때문에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원주민사회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서구인들이 원주민사회에 비해 문명화 되었다고 자부하는 부분은 바로 ‘국가(권력)의 존재’와 ‘노동과 소유’일 것이다. 그러나 원시 사회는 결코 서구에 비해 불완전하였기 때문에 국가형태로 나가지도, 잉여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사회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즉 권력의 독점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생산물의 축적을 통해 권력을 가지려는 의지를 효과적으로 차단한 사회이다.
원주민들에게는 필요이상의 것을 생산하여 저장하려는 욕구 역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저장하는 것이란 도덕적 차원에서도, 경제적 차원에서도(자연의 저장량이 고갈될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도(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다)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노동시간에 잘 반영되어 있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의 욕구와 의지를 군주에게 위임하고 그의 통치에 따르는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푸코는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홉스의 전쟁 안에는 전투가 없고 유혈도 시체도 없다. 요컨대 그것은 역사적이고 실질적인 전쟁이 아니라 표상 게임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결국 자연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엇나간 상상으로 인해 국가는 정당화되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가치로 둔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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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기원은 무엇인가? 일종의 작은 공동체들로부터 시작하여,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부족공동체가 발전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인가? 우리는 쉽게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인류학자들의 연구는 그러한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그의 저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남미의 수 많은 원주민들을 연구조사한 결과, 그들이 국가를 만들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성이 어떤 후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클라스트르는 그들이 어떤 선진성을 갖기에 국가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많은 매체를 통해 그들의 후진성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에 대해 어떤 불쌍한 동정심을 갖는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태도에 단호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그들은 권력의 생태에 대해 선험적으로 잘 알고있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에 집중되면 차별과 폭력을 낳고, 그런 사회는 평등한 인간의 사회를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생산성에 대한 문제도 그러하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먹고살만한 시간 이상을 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게으름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삶의 가치를 잘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삶은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사회가 보다 선진화된 사회인가?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 아니면, 삶을 위한 노동을 행하는 인디언들?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그것은 그들의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학자와 클라스트르 처럼 좋은의미를 부여하든, 아니면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쁜의미를 부여하든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최소한 나쁜의미를 부여하는 태도를 중지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편견은 과거 선진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침략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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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본질 국가는 곧 권력인가? 사회는 곧 국가인가? 교과서적으로 말한다면 국가와 권력은 동일선상에 있으며 사회는 인류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곧 권력이 행사되는 장이다. 홉스의 말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가 야만이었다면 계약에 의한 권력과 복종의 관계는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토대이다. 하지만 클라스트로는 이런 모든 사고를 전복한다. 추장은 권력을 가지지만 전시에 한정될 뿐이고 악과 죽음과 질병과 비참함만이 있었을 것 같은 인디언의 밀림지대는 여유와 신화가 숨쉬는 사람의 공간이다. 그들의 국가에 대한 대항은 생각보다 진지해서 문자조차 거부한다. 그들 사이에도 불합리함은 분명히 있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그들의 사회가 지속되기 위한 이성적 선택이다. 나는 다소간 아나키즘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이 책을 선택했지만 혼돈이상의 무엇을 찾지는 못했다. 물론 나의 무지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매력적인 사회가 그토록 비참하게 서구의 총과 균과 쇠에게 무너진 것은 답답함 이상의 고통과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아타우알파 유팡키의 노래나 들으면서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의미없는 노동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의 안락한 중산층의 생활도 포기해야 한다는 강박때문에... 인류학에 대한 무지때문에 개념조차 정확히 잡지 못한 상태에서 읽어본 책이지만, 그래서 어떤 장은 지루하기도 했지만 신화아닌 신화의 세계로 초대하는 책이었음을 밝혀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