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 소설은 화자가 넷이다. 그 첫번째가 중호, 둘째가 윤자(혹은 윤희), 세째가 지원, 그리고 동주.. 책을 읽으면, 내 자신을 어떤 등장인물과 결부시킬까를 먼저 찾게된다. 글을 눈으로 따라가는 동안 난 이미 책속에 맘을 던져놓고 낚시질을 하고있다. 그러다 동주를 선택하게 된다. 2. 가까워 지는 방법을 몰라 무작정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후에 결국 꿈도 잃게되고, 욕망도 품기만하는 아무것도 아닌 나약한 일상의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는것 같다. 3. 지원의 거부하지도, 다가가지도 않는 몸짓이... 윤자가 과거로 부터 벗어나려 몸부림 치는 몸짓이.. 중호가 6살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자기만의 세상만 바라보게 된것이... 내 자신과 닮은듯 하다. 4. 중호! 나비가 되기 전 이스탄불 어느 우체국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가 끝내 목을 메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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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정미경(1960년~2017년)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랑, 욕망, 탐욕과 집착, 연민, 자기애, 허무, 후회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죄다 서로 어긋나있고, 욕망에 가려져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그들의 욕망은 결국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론은 좀 의외였다. 뉘우침의 기회를 잡으려는 자에게는 죽음을, 한결같이 비겁한 자에게는 승리를 안겨주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권선징악의 교훈에 있지 않고 현실의 반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이 그러하듯 소설 속의 역사도 현재진행형으로 둔 것이다. 소설의 시작은 질주이다. 설국열차가 브레이크 없이 무한 궤도를 질주하듯 중호는 자신의 애마, 부의 상징인 재규어를 몰고 한 밤중의 속도감을 즐기고 있다. 속도계가 180을 넘어간다. 아! 그 순간 누군가 따라붙었고 살해 위협을 느낀다. 이 남자 중호는 “리니엔쿠라는 사람이 말했어요. 나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정말 심금을 울리는 말이쟎아요?”(p.183)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돈의 화신인 인물이다. 당연히 피도 눈물도 없으며,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각종 편법을 동원하여 부자들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개인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대단한 실력자이긴 하다. 주위에서는 그를 동물적인 육감을 지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철저한 분석에 의해 나온 계산의 결과물들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살아온 세월만큼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당췌 변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다만, 중호는 삶의 가치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기회,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주어졌다. 윤 신부와 그가 돌보는 아이들, 지원과 몇 차례 만남을 거듭하면서 찾아온 변화였다. 조금의 시간이 그에게 더 허락되었더라면 아마도 중호는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삶의 과정을 즐기는 삶이 되지 못하는 한, 삶은 늘 외롭고 허무하고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또 한 명의 남자, 한석은 자기애에 빠진 이중인격자이다. “머리로는 혁명을, 입술엔 와인을, 가슴속엔 천박한 권력욕의 풍선을 품고 있”(p.235)는 “고쉬 캐비아”(p.235)(프랑스 용어)이다. 겉으론 민주투쟁의 아이콘인양 행동하지만 내면은 더럽고 치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간. 비겁하고 탐욕으로 가득찬 무책임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원과 사랑하면서 어린 윤희를 임신시켰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이 일도 없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연민한다. 투쟁하던 시절, 뜻을 함께 하던 후배를 자살로 내몰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반대했음에도 기어이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윤희.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었던 어린 시절, 야학 선생님이 집 다락방에 피신 중이었다. 그 남자를 사랑했을까? 죽도록 사랑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반신불수 아버지가 버젓이 두 눈 뜨고 누워있는데도 매일 미친 듯이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것 아니겠는가. 그 선생님, 한석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만을 탐한다. 현재는 배우이자 고급 콜컬이다. 또 한 남자 중호, 한석이 그녀의 몸만을 탐하는 인물이라면 중호는 그녀의 시간만을 탐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두 남자 모두 또 다른 여자, 지원을 사랑한다. 그림으로 세상, 자연과 인간을 표현하는 유지원, “내 작품에 매달린 이런 저런 꼬리표들을 전부 떼어내고 순수하게 작품 자체로 승부하”(p.144)고픈 그녀, 새침하면서 부탁도 거절도 못하는 게 천성이다. 하지만 유독 한 남자에게만은 부탁도 거절도 자유롭다.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가 동주다. 그 남자에게는 지원이 해바라기 자체이고 그는 그녀의 키다리아저씨다. 하지만 그녀에게 동주는 만만한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알았지만, 글쎄.. “야학은 처음엔, 앨리스가 우연히 가게 된 이상한 나라와도 같았다. 좁은 구멍을 다시 돌아 나오면 잊혀져버릴 낯선 공간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는 호기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땐 토끼의 귀를 잡아당기면 다시 그 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멍의 안과 밖,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코드가 동주였다. 동주는 아무 때나 잡아당기면 될 것 같은 토끼의 귀였다.”(p.62) 또 한 사람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 윤 신부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영웅이라 불릴 만한 딱 한 사람이다. 영웅이라 불리기에도 사실 옹색한 것이 사실 그조차도 주인공들의 삶에는 그렇게 관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올곶은 삶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전부이니 작은 영웅이라고 해두면 좋을 듯 하다. 사실 그도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에 소문내서 같이 하자.(...) 천사의 집의 천사는 아이들이 아니라 신부님이라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귀여운 천사가 아니라 주름이 지고 아랫배는 나오고 애들을 위해서라면 은근슬쩍 편법도 마다 않는 사기꾼 천사. 동네 과수댁의 연정을 사업에 이용하는 제비 천사. 기부금 독촉 전화하면서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뻔뻔 천사.”(p.61)일 뿐이다. 소설에는 절대 캔디도, 절대 백마 탄 왕자도, 절대 얄미운 이라이자도 없다. 말하자면 피해자가 곧 가해자이고, 가해자가 곧 피해자인 것이다. 하물며 중재자도 없다. 보통은 이 존재가 주요 사건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우연히, 혹은 캐물어서 어렵게 알게 되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전달해주는 사이다 역할을 해야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존재가 애초에 없었다. 사실 그 역할을 윤 신부가 해 주리라 기대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의 요지일지라도 대상자 역시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가버린다. 사실 이런 것이 더 현실과 부합하는 장치라고 본다. 요란스러운 신파도, 글을 꾸미려는 미사여구도 없다. 그리고 감정고조를 시킬 일도, 감정에 호소해야하는 부분도 없다. 그저 묵묵히 그려내는 디테일한 현실적인 묘사만으로 사건들을 설명하고 그것으로 가슴이 쫀쫀해지는 긴장감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이런 것이 과연 정미경 작가의 필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람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싣고 목초지 위로 달아난다. 악을 쓰는 윤희를 뻔히 바라보던 한석이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윤희는 왼손에 쥐고 있던 베레타를 들어올려 조준경에 눈을 갖다댄다. 눈물 속에 그의 뒷모습이 몇 겹으로 흔들린다. 손등으로 눈을 쓱 닦고 다시 구멍을 들여다본다. 수그린 목덜미 아래 완강한 어깨, 차진 모래가루가 아직 반짝이며 들러붙어 있을 등줄기, 손바닥이 기억하는 그의 엉덩이의 굴곡, 그 아래 강인한 두 다리. 억세게 내 허리를 감싸던 푸른 나무 같은 다리. 손가락을 당기는 순간 누군가 낚아채 듯 어깨가 뒤로 밀리고 꼭 그 힘만큼 누가 민 듯 그가 휘청하며 주저앉는다. 윤희의 귀에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억누른 비명만이 귀를 찢는다. 풍경이 아득해진다. 손바닥이 차갑게 미끈거린다. 바람과 햇살 아래 그의 모습이 꿈속의 풍경인 듯 희게 바랜다.”(p.283~284) 책 무게는 2005년 1쇄판 누런 종이라 한없이 가벼웁다. 하지만 책이 담고 있는 무게는 대체 몇 톤일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이다. 한 장 넘기면, 다음 장, 다음 장 넘기면 그 다음 장....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성찰과 사유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할 수 없었다. 절판이란다. 나는 다행히 어떤 이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겠으나, 책이 없어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수작을 놓치는 일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석과 지원이 사랑에 빠지는 아름다운 장면을 발췌해 보았다. “강기슭에 매여 있는 두 개의 목선이 미풍을 못 이겨 서로의 몸을 부딪는 것 같은 그런 부딪침. 그렇게 무언가, 똑같은 원형질의 존재가 부딪쳐오는 느낌에 지원은 몸을 움츠렸다. (..) 잠에서 깨어난 숲에서 풀잎을 짓이기는 듯한 초록빛 향기가 번져왔다. 강물이 기슭에서부터 뒤채기 시작했다. 발 아래서 노란 애기똥풀 꽃이 하나둘 피어났다. 바로 그 때. 그 순간처럼 삶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때가 있을까. 다른 생의 길을 질주하던 두 영혼이 맞부딪치며 달려오던 가속도로 뒤섞이고 회오리쳐 끝내 분리될 수 없는 새로운 화합물로 변화하는 순간. 그 부딪침은 다른 모든 존재들을 지워버렸다. 두 개의 낯설고 오만한 세계가 섞일 때 저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신생의 별처럼 탄생했다. 낮과 밤이 살을 섞는 일몰의 시간, 혹은 여름과 가을이 서로 섞이는 그 형이상학적인 시간처럼. 연애를 시작하는 두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 두 세계가 부딪치는 순간의 광휘에 먼저 매혹되는 것인지도 몰랐다.“(p.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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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의 '장미꽃 인생'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작가가 쓴 책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우울'이다. 인생에는 많은 감정이 칵테일처럼 섞여있다. 행복, 희망, 슬픔, 우울, 격정, 무기력 등등등... 하지만 작가는 그 중에서 우울의 액기스만을 뽑아 책에 담는다. 책을 보고 있는 사람까지 우울하게 만들어 다음 책장을 넘기기가 힘겨워지게 만드는 걸로 봐서 이 우울 액기스의 농도는 순도 99.99%이다.
이중호,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영향 하에 두고 싶어한다. 요동치는 주식의 흐름도 치밀한 분석으로 데이터를 쌓아놓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이익을 낸다.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그가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에 반드시 있게 한다. 여자도 그렇다. 돈으로 여자를 사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고싶으면 자고 이야기를 하고싶으면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꺼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예측하기 위해 심리분석전을 편다. 이렇게 치밀한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이중호 자신은 행복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는 톡 건드리면 무너질 모래성처럼 연약하다. 다만 그 밖에 튼튼한 유리벽을 치고 있어 모래성이 무너지고 있지 않은 것 뿐이다. 뭔가 삐뚤어져 보이는 그의 인생관은 그 단단한 유리벽을 우울로 덧칠하고 있다.
유지원, 그녀는 행복할까? 과거 80년대의 격렬한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그녀는 그때의 모습을 벗고 현대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평범한 화가가 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우리의 그때의 불타는 정신을 결국 돈에 팔아 넘기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질타당한다. 하지만 질타하는 동료들도 유지원과 다른 바가 없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이 떳떳하기 위해 자신들은 그때를 잊지 않았노라 앞으로 잊지 않겠노라 소리높이며 그저 무표정으로 덤덤히 견디고 있는 유지원을 비난한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지난 날을 잊지는 않았으나 벗어버린 자신의 현재 모습이 행복할까? 그녀의 삶 또한 고뇌와 우울로 가득 차 있다.
인물들 하나하나 곱씹어 보지만 어디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다. 동수? 한석? 윤희? 말할것도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실패한 인생으로 보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윤희의 마지막 말이 자꾸 맴돈다. 나는 지금 원더랜드에 있는데 왜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걸까요 하고 묻고있는 그녀의 모습이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짙은 안개가 낀 것 처럼 인물간의 관계는 경계가 모호하다. 확실한 것도 없고 희망적인 것도 없다.(사실은 하나가 있긴 했지만 소설 마지막 이중호의 죽음으로 인해 이마저 사라지고 만다.)
세상과 인간관계에 이렇게 우울만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지만, 이 책을 읽고있으면 마치 우울이 전부인것만 같아 내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음과 함께 팔이 무거워지고 책장이 무거워져 한장한장 넘기면서 계속 알 수 없는 침울에 침잠한다. 밝고 희망적인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권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읽는 것이 고통과도 같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어두운 면을 모아놓은 종합 선물 세트를 열어 볼 마음이 생긴다면 이 책의 표지를 넘겨주기를 바란다. 보고싶어 하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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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서 느껴지는 나비와 제목의 원더랜드.이상을 향해 나가는 젊은이들의 소설인가? 나름대로 내용을 짐작해보고 책을 열었다. 아, 사실, 초반에 너무 어렵고 루즈했다. 음, 도대체 이리 저리 화자를 바꾼는 건 무언지.그러나 그 화자 모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영원한 숙제로 남을 그 시대를 다시 만났다. 바로 80년대의 젊은이들. 그 과거를 각색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 예상되어지는대로 그 시절에 항쟁으로 몸부림치던 사람들은 모두 흐터지고 만다.시간이 그렇게 이끌었고 세상이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야학에서 만난 지원, 한석, 동주그리고 윤자.
이념의 표출과정이 달랐기에 수배를 피해 한석은 해외도피를 하고 동주는 그 항쟁에서 눈을 잃게 된다.동주가 의안을 가지고 바라보는 현재는 과연 진실 그 자체일까? 드러나지 않는 투쟁의 한 부분이었던 지원은 본연의 그림으로 돌아오고 야학의 지겨움에 눈 돌리고 싶었던 윤자는 더이상의 가난한 여공이 아닌 화려한 배우,윤희로 살고있다. 다시 만난 그들은 또 다시 엊갈린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여전하게 사랑하지만 주는 사랑을 택하는 지원를 향한 동주의 해바라기,떠나버린 사랑이라고 다짐하지만 가슴에 한석을 묻어두고 사는 지원, 육체적인 관계뿐이라도 당신곁에 있고 싶다는 한석에 대한 윤자의 집착. 내게 사랑은 과거도 현재도 너뿐이라는 지원에 대한 한석의 사랑.
그리고 그 중심에 이 중호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모든 중심에 1 과 0으로 구성된 돈이 있는 남자. 그 남자가 사랑하게 되는 맑은 여자,지원. 나방이 아닌 나비를 꿈꾸며 그곳에 지원과 함께 하고자 했던 중호는 더 많은 부가 채워지면 그 때 행복를 향해 떠나려고 한다. 더 나은 미래는 과연 있을까? 오늘이 쌓여 그 미래가 되는 현실을 중호는 간과한지도 모른다.
중호와 한석은 지원을 사랑하며 중호와 한석은 윤희와는 육체적 상대이다. 중호와 한석은 비밀거래를 시작하고 둘 사이에 지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 관계도는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2002년 6월의 붉은 물결과 지나간 6월 항쟁을 오버랩하고 있는 모습은 지나친 강조일지도 모른다. 지나친 강조.우리에게 6월이 가지는 의미를 던지고 있는 걸까? 게다가 200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새로운 정권의 문으로 들어가는 시점이다.
비밀거래는 그 자체가 리스크가 엿보이고 결국 위험에 처한 중호는 이스탄불로 떠나고 지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중호는 지원에게 긴 엽서를 보낸다. 유명한 정치가로 다시 돌아온 한석은 사랑이라고 이름지어 지원곁에 서성이나 결국 지원을 이용하고 중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한 번도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던 윤자 역시 한석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지만 한석에게 총을 쏘고 만다. 손 안에 든 중호의 엽서를 보며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지원. 나비를 꿈꾸던 중호는 그곳에 있을까?
작가 정미경은 지난간 그 6월을 기억을 꺼내놓고 싶은 것일까? 아님,우리가 바라는 원더랜드에 도착하려면 너무 많은 댓가를 치뤄햐 함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어쩜 그 원더랜드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과거로 속해버리는 열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단단한 것일수록 시간의 세례속에 더 빨리 부식하니까. 79쪽
*이렇게 내게 다가온 정미경이 장편 소설집을 읽는 내내 나는 두 명의 남자가 떠올랐다. 한 명의 같은과 선배로 목소리가 커서 어디든 과행사나 학교행사에서 빠지지 않았던 사람,다른 한 명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지금쯤은 화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상상이 되는 나의 짝사랑이다. 선배의 사랑은 너무 두려워 모른척 지나쳐 버렸고 또 다른 나의 사랑은 아주 어려서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설프다고 짝사랑이었으니 할 말이 없다.
오랜 시간에 흘러서 그 녀석과 우연하게 연락이 되었다. 이쁜 수채화 하나 그려줘라.그랬더니 녀석이 웃으며 말했었다.내가 그리는 그림은 그런 그림이 아니야. 그는 여전하게 민중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새삼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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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상하지 않아요? 꿈꾸던 것들을 손에 쥔 이 순간에, 왜 독하게 가난하고 모든 게 결핍되었던 그날들보다 더 이상한 슬픔이 날 사로잡는 거예요? 왜 제겐 슬픔과 두려움이 또같은 정서에 붙여진 다른 이름처럼 생각되는 거예요? 눈부신 것들이 사실은 두려워요. 저만 그런 걸까요? 선생님이 얘기했던 후회하지 않는 삶이 이런 게 아니었던가요? 그걸 잘모르겠어요. 여기. 지금. 그토록 꿈꾸었던 원더랜드에 도착했는데 말예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中에서
* 세월이 흘렀다. 아니 세월은 흘렀다. 그 시간을 따라 사람들도 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월의 변화는 인정하면서 스스로의 변화는 알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변화를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도 한다. 스스로의 청춘을 담보삼아 세상을 바꿔 놓으려던 그 시절의 열정이 지나고 나자 세상은 다 타버린 재처럼 시들어 버리고, 조그만 온기마저 사라져 너무나 춥고 냉랭해졌다. 청춘을 쓸고 가버린 세월이 지나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 일 투성인 것이다. 잘 먹고 살게 되면, 자신을 인정을 받기만 하면, 어른이 되기만 하면, 사랑을 만나기만 하면... 우리들은 그런 바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 그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 있고, 인정을 받고, 사랑을 하고... 그러나 그런 곳에 있어도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 와 있는 세상은 그들이 그렇게 원하던 그 곳이고, 그들이 그렇게 더 살고 싶어 하던 그 하루인데 말이다. 우리들은 왜 슬픔에 얼굴을 찡그리나? 이 소설은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원했던 곳으로 우리가 원했던 시간으로 우리는 와 있는 듯이 보이는데 우리들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우리들은 왜 환히 웃지 않는가? 우리들은 왜 슬픔에 빠져 있는가?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정미경의 장편 소설<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의 이야기는 언제나 슬프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 슬픔이 그 절망이 오히려 읽고 나면 마음을 개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이 장편 보다는 단편이 더 좋다.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늘어지고 힘이 조금 달린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일까? 슬픈 이야기는 짧고 굷은 편이 더 나아서 일까? 그녀다운, 그러나 조금은 아쉬웠던 소설이었다. - 허뭄 |
| 후일담 소설의 등장과 쇠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문학과 사회, 혹은 예술과 사회의 지난한 관계 속에서 사회를 추동하지 못한 문학이 결국 사회의 변화 앞에서 무릎을 꿇고야 만 것이었으리라. 결국 후일담 소설은 (당대를 제대로 향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비겁함에 대한 변명(그러니 더욱 비겁한) 혹은 합리화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또 시간은 흘렀고, 이제 후일담 소설이 사라진 자리에 그 무브먼트의 시절, 그 시절의 인물들은 몇몇 캐릭터로 남아 소설의 소재가 됨으로써, 아직 박제되지 않았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검열이야 늘 존재하지. 우리 속에. 공안의 검열이 없어진 자리에 자본의 검열이 시작되지 않았니? 바깥에 존재하던 검열이 우리 속에 자리잡았지. 이제 우리는 스스로 검열하잖아. 이거 돈이 될까. 주목받을 수 있을까.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요즘 투쟁이 더 강렬하고 필사적으로 보인다.” 다양한 주인공들 중의 한 명인, 과거 걸개그림을 그리며 예술운동을 펼쳤던 지원... 이제 그 지원의 친구들은 모던하게 그림풍을 바꾸고 개인전을 열며 그림을 판매하고 있는 지원을 향해 야유를 보낸다. 모여서 그렇게 할 짓이 없느냐는 지원의 친구 동주의 힐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이 지원을 향해 보내는 야유는, 그렇지만 자신들 스스로를 향해 보내는 야유에 가깝다. “웃기네. 자본주의 지난 지가 언젠데. 정보화 시대도 후기로 접어들었어. 한번 매스컴에 떴다 하면 사랑과 돈과 권력을 단숨에 움켜쥘 수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건 튀는 거지. 어떻게 해야 남들보다 튀어보일 수 있나. 이름하여 튀고이즘. 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튀고 싶은 우리들을 위하여.” 게다가 그러한 야유는 그들의 운동의 이력으로부터 사회가 얼마나 한참을 앞서갔는지를 드러내는 순간 한탄으로 바뀐다. 자본주의의 횡행에 반대하여 목숨까지도 걸었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대하였던 자본주의라는 용어조차 이제 옛말이 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다. 거대해지고 동시에 촘촘해진 정보화의(네트워크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만큼이나 고리타분한 단어일 뿐, 이제 세상은 고도화된 개인주의(인적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사회, 자본이 아니라 자본의 흐름을 좌우하는 금융(돈의 네트워크)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대회에서의 일등이 아니야. 왜 인간이 아닌 침팬지가 승리하는지, 그 이유가 뭔지, 벤치마킹해야 할 점이 뭔지를 배우라는 거야... 기업분석은 당연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참고하니까. 그렇지만, 주식가격은 내재가치에 따르는 게 아니야. 결국은 매수자와 매도자의 공포와 탐욕에 의해 결정되는 거야. 비이성적인 거래를, 원숭이처럼 보고 원숭이처럼 행동한다고 비웃은 인간도 있지만 천만에, 원숭이에겐 숫자에 대한 공포와 탐욕이 없어.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란 말이야... 공포와 탐욕 중 공포가 더 강해. 탐욕이 허기진 자의 식탐이라면 공포는 피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야. 죽음의 공포에 가깝지... 그런데 말야. 어느 순간 탐욕이 공포를 잊게 만들어... 자신을 묶고 있는 공포의 밧줄을 끊고 돈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발광을 하게 되는 거야... 탐욕과 공포를 오가며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 그게 인간이야. 그래서 인간이 침팬지를 못 이기는 거야.”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소설의 핵심은 ‘돈’을 향한 인간의 공포와 탐욕, 혹은 돈을 향한 ‘인간의 공포와 탐욕’이 중심이 되어버린 세상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소설은 트레이더인 이중호와 운동권 출신의 정치가인 최한석이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믿음으로 한때의 좌절을 딛고 이제는 사설 부띠끄를 운용하며 속도를 즐기는 중호나 운동권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이제는 제도권 정당의(그는 대변인이면서 동시에 당의 자금운영책이기도 한 듯) 차세대 주자쯤으로 급부상한 한석은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중역이 된 듯하다. 그리고 이들과 이런저런 연을 맺게 되는 두 여인이 있다. 오윤희와 유지원... 매스컴에 간혹 등장하는 연예인이면서도 동시에 고급창부가 되어 있는 오윤희는 과거 한때 최한석의 도피시절 그를 몸과 마음으로 뒷바라지했고, 유지원은 그를 돈과 사랑으로 뒷바라지했다. 그리고 이중호는 오윤희의 몸을 사면서 휴식을 취하고 유지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시간을 낸다. 한 번도 한 자리에 모이지 않는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오윤희는 최한석을 다시 사랑하지만 최한석은 유지원의 사랑을 도찾고 싶다. 유지원은 최한석과 오윤희의 과거를 알고 있고 현재의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중호는 최한석으로부터 일임받은 돈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유지원의 사랑을 얻어야만 한다. 과거에 가진 것 없던 이들이 무언가를 가졌다고 믿는 현재는 부실하다. 과거를 기억의 창고에 밀어 넣은 채 맞이하는 현재가 떳떳하게 가질 수 있는 무언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후일담 소설이란 어쩌면, 무언가를 떳떳하게 가지기 위한 일종의 부채청산의식과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모두들 부정하거나 잊고 싶어 하는 무엇을 후일에 담하는 일은(책의 뒤편에 실린 해설에서는 이 소설을 후일담 소설에 넣는 일을 극구 만류하고 있지만),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불가피하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어떤 독자에게 이런 소설은 후일담 소설로 읽힌다. 작가이든 독자이든 그 시절을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는 아직도 현존하는 이야기이니까... |
| 줄거리만 놓고 볼 때 전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드라마게임이라면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미니시리즈인 셈이다. 통속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그의 소설들이 가진 힘은 인물들에 대한 뛰어난 심리묘사와 그 진지함으로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밀도 있는 문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어떤가? 내가 보기엔 전작에 비해 이번 소설은 훨씬 더 아슬아슬하게 통속성에 발을 걸치고 있다. 정미경 소설의 매력인 치밀한 심리묘사나 맛깔나면서도 고혹적인 문체가 이 소설에서는 그리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구성은 개연성이 떨어지며 소설 속 인물은 살아 움직인다기보다는 때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내세운 인물로 생동감 넘치기보다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86년 6월과 월드컵이 열리던 해 6월 다섯 명의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킨 이 이야기는 후일담 문학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탐구이다. 전작 <장밋빛 인생>에서 그랬듯 정미경의 관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의식과 행위일 것이다. 혁명이 그것의 대의적인 명분과는 별개로 어떤 개인에게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축적과 소비는 혁명의 대의명분만큼 절대적인 교조(敎條)이고 그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혁명가의 열정과 닮아 있다. 물론 생각으로 혁명을 모독할 의도는 아니고 심리적으로 그렇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전작<장미빗 인생>에서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면 이번 주인공 중 하나는 펀드매니저이다. 부의 무한 증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직업을 가진 이중호, 그리고 86년 민주화의 중심에 있던 대학생 최한석, 그는 수배된 후 밀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 민주화 전력과 유학을 배경으로 패기 있고 신선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재기한다. 한석과는 노선이 달랐던 동주는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학창 시절 그를 이끌던 신부와 더불어 여전히 도시 빈민 문제며 소수자의 인권 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잡지사 기자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오윤희, 86년엔 야학에서 한석을 만났고 포르노 배우가 된 지금은 고급 창녀로 중호를 만난다. 현실에 도통 관심이 없던 유지원은 처음엔 김동주에 의해 야학에 발을 딛지만 한석에게 끌려 그에게 몰입되어 가면서 걸개그림 등을 그리는 등 민중미술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예술적 내면은 다른 곳을 지향한다. 2002년 이제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만 ‘변절’이라는 옛 동료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그들이 만나는 접점에 “돈”이 있어 한석은 비자금을 운용하기 위해 중호를 찾고, 중호는 돈으로 윤희를 사며, 또한 지원의 그림에 끌려 그의 후원자를 자청한다. 윤희는 예전 한석의 아이를 임신한 적도 있고 지금도 그를 사랑하지만 그의 사람을 얻지는 못한다. 한석이 사랑한 것은 예전에도 지금도 혁명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시간, 86년에서 2004년으로 건너오는 동안 우리는 좌익 컴플렉스도 떨쳐버리고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듯하다.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운가? 어느새 이데올로기를 대신한 자리에 자본이 자리 잡고 우리는 거기에 얽매여 있고 또 벗어나려고 한다. 정도의 문제일 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자본의 힘을 신봉하고 맛보고 싶어한다. 내 집을 소유하고 유기농으로 웰빙하며 주말이면 문화생활을 즐기고 내 아이는 특별하게 키워 영어 유치원을 보내고 어학 연수를 보내고 때론 믿을 수 없는 공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사교육을 시킨다. 작품을 읽는 동안 공교롭게도 “통일의 꽃 임수경 외아들 잃다”라는 가십성 기사가 실렸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 인물 동주가 한쪽 눈을 실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눈에 콩 껍질이 씌워지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그의 잃어버린 눈 하나가 그를 이 넘치게 비옥하면서도 현기증 나는 현실을 견뎌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새로운 문화의 기점이 된 2004년은 되짚어본 작품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지만 며 전작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