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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생성_중동태와 당사자 연구』는 『중동태의 세계』를 펴낸 일본의 현대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와 뇌성마비 장애인 의사이자 당사자 연구자인 구마가야 신이치로의 오랜 공동연구의 성과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연구자가 약 10년에 걸쳐 함께 연구한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가는데, 고쿠분 고이치로의 저서 『중동태의 세계』가 구마가야 신이치로의 당사자 연구와 어떤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차근차근 펼쳐 보인다. *** 오늘날의 세계는 능동태/수동태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 속에서 개인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거쳐 행위 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개인들이 행한 선택의 결과로 발생한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우리 내부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책임'은 오로지 개인에게만 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더 앞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세계가 오로지 능동과 수동으로만 기술될 수 있을까이다. 언어의 한계는 곧 사고의 한계이다. 현재 우리의 일상언어는 능동태와 수동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언어는 우리가 겪는 것을 충실하게 기술할 수 없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우리의 세계와 경험을 보다 충실하게 기술할 수 있는 언어 규칙으로 '중동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 중통태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현재 능동태로 사용하고 동사 '반하다'를 통해 현재 언어의 한계를 설명한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게 반했다면 과연 이것은 능동일까 수동일까? 반한 것은 오로지 내 의지이며 내 책임인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에게 반해버린 것은 수동이다. 그 대상이 반할만한 이유를 가졌고 나는 거기에 반응하여 반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상이 가진 매력으로 인해 욕망이나 욕구가 동해서 반하게 되었고, 욕망이나 욕구가 작용하는 장이 되었다. 즉 중동태는 반했다는 과정 안에 '내'가 있음을, '나'라는 주어는 그 과정의 자리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어에는 'fall in love(사랑에 빠지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중동태는 이 사태를 동사의 태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분은 언어의 역사에서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프랑스 언어학자 에밀 뱅베니스트에 따르면, 이 구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언어에서도 이 구별은 상당히 후대에 이르러서야 출현한 새로운 문법 법칙이다. 기원전 4세기 정도 무렵부터 고대 그리스어에는 능동태, 수동태, 중동태 세 가지 형태가 등장한다. 그전에는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았고, 능동태와 중동태가 대립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잊혔던 언어(중동태)를 배우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현재의 언어('의지'와 '책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와 경험을 지배한다. 이 책은 사라진 언어문법 중동태를 다시 불러와서 삶을 재기술할 수 있도록 돕는다. *** 당사자 연구란 무엇인가 이 책은 먼저 구마가야 신이치로의 당사자 연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구마가야의 당사자 연구가 고쿠분의 중동태 연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차근차근 대화를 풀어나간다. 먼저 '당사자 연구'란 무엇인가. 당사자 연구란 조현병이나 자폐스펙트럼과 같이 비가시성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나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범위이고 어디서부터가 바꿀 수 없는 범위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동료와 함께 연구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한편 당사자 연구는 왜 생겼을까? 당사자 연구가 생겨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 연구의 이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70년대 당시에는 장애인이 태어나면 가능한 한 정상인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구마가야 신이치로가 받았던 재활 훈련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뇌성마비를 앓고 난 뒤 손도 다리도 구부러졌고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그는 최대한 정상인에 가까운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매일 여섯 시간 정도 누워서 몸을 뒤집는 연습이라든가 무릎으로 서기 연습 등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재활 훈련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정상인에 가까워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몸에 멍만 들 뿐이었다. 장애에 대한 이러한 예전의 사고방식을 '의료적 장애 모델'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장애라는 건 피부 안쪽이 아니라 피부 바깥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이 영화관에 갔는데 그 영화관은 엘리베이터가 없고 계단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자. 장애인이 영화관 시설의 문제로 영화를 관람하지 못한 경우 의료적 장애 모델에 따르면 이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는 오히려 계단만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영화관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사회적 장애 모델'이라고 부른다. 이 모델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장애 모델은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에게 스스로를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당사자 연구는 2000년대 초반 홋카이도 우라카와에 사는, 주로 조현병이라는 정신장애를 안고 있는 당사자들에 의해 생겨났다. 앞서 말했듯 조현병과 같은 정신장애는 주위에서 알아채기 힘든 비가시적 장애이다. 비가시적 장애를 가진 사람은 본인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혹시 본인의 성격이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노력 부족 탓인지 고민하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사회를 바꿔 달라며 요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우선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아는 것을 목표로 연구를 해나갔다. 즉 '바꾸다'에 앞서 있는 '안다'를 지향한 활동이 바로 당사자 연구이다. 이러한 당사자 연구는 조현병을 시작으로 약물의존증 당사자, 자폐스펙트럼 장애와 같은 발달장애 당사자, 만성 통증을 가진 당사자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당사자 연구는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적절하게 수행될 수 없다. 각종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것은 능동태와 수동태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 가진 증상들을 그들을 조종한다. 증상에 조종당해 이들이 내린 선택과 행동, 그리고 따라오는 책임을 이들에게 물을 수 있을까? 능동태와 수동태로 이루어진 언어의 세계에서 당사자들의 경험은 축소되고 왜곡된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고 이 언어는 바로 잊혔던 언어규칙인 중동태이다. 이렇게 당사자 연구와 중통태가 만나게 된다. *** 심문과 자책의 언어에서 인책과 책임의 언어로 우리의 의지와 선택과 책임에는 복잡한 인과관계가 엮여 있다. 우리의 행위는 스스로 했는지, 아니면 당했는 지로만 설명할 수 없다. 능동과 수동태의 세계는 심문과 자책의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인지 아닌지로 강하게 추궁하는 언어를 '심문하는 언어'라고 부른다. 심문하는 언어는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이러한 언어가 이끌어 낸 책임은 '타락한 책임'이자 '떠맡겨진 책임'에 가깝다. "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강하게 추궁하는 이 언어를 '심문하는 언어'라고 저는 부르고 있습니다. '중동태가 소멸한 후에 나타난 건 그런 언어였던 게 아닐까. 즉 중동태의 소멸과 의지 개념의 발흥에는 평행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제 가설입니다." ___ 고쿠분 고이치로, 이 책 p87 우리에게 '의지', '선택', '책임'이라는 언어는 낯섦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일상 언어이다. 능력주의 사회 하에서 개인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고,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각자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다. 한편 이 '의지'라는 단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고대 그리스에는 '의지'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한나 아렌트의 책 『정신의 삶』을 소개하며 의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의지 개념을 발견한 것이 기독교 철학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세계의 탄생을 설명하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이 있다. 신은 먼가 재료를 사용해서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주위나 과거로부터의 영향과는 관계없이 무에서 태어났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과연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모든 것에 선행하는 의지가 가당키나 할까? 고쿠분 고이치로는 이러한 의지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세계는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혀 있고, 동시에 이것은 얼마든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즉 의지는 무로부터 창조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지와 선택을 동일시하지만, 고쿠분 고이치로는 양자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는 중동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해 우리가 가진 '의지'와 '선택'과 '책임'을 낯설게 보도록 돕는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세상 속에서 심문과 자책의 언어밖에 몰랐던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리고 삶에서 겪었던 무수히 많은 상처와 실패, 좌절과 잘못을 재검토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책임을 깨닫는다. 책임이란 처벌도 자책도 아니며 밖에서 부여될 수 없다. 능동과 수동의 패러다임을 넘어 중동의 패러다임으로 자기와 세계를 바라볼 때 책임은 자기 안에서 저절로 생성된다. #책임의생성 #중동태와당사자연구 #고마가야신이치로 #고쿠분고이치로 #에디토리얼 #심문과자책의언어 #인책과책임의언어 #당사자연구 #중동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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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4 어떤 것과의 사용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그것(사용한다는 동작)의 영향을 받아야 하며, 나 자신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구성해야 한다. p322 아렌트에 따르면, 고독은 사고를 위한 조건입니다. 나와 나 자신의 대화, 바로 그것이 사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독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334~335 “ 결국 '나'라는 주체는 내장 기관을 포함한 자기 안쪽의 흐름과 작용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 우리 존재가 다양하고 복합적인 '흐름의 연속체'자체이며, '나'는 그 흐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다채롭고 복잡하며, 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지닌 필연적인 흐름에 따르기 때문이지만, 또 그만큼 의외의 흐름을 타고 급변하기도 한다. 반면, 의지는 이러한 흐름을 절단함으로써 생겨난다. 절단은 말 그대로 끊어내는 것으로, 우리는 일련의 연속적이고 다층적인 흐름을 끊어내면서 '의지'를 출현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 갑작스레 어떤 행동에 돌입하게 된다. 이처럼 의지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흐름을 끊어내려고 하기에, 과거를 미워하는 것이다 ” 중동태라는 새로운 단어가 있었는지 인지하지도 못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원래 알고있던 단어에만 적응하려고 살아왔었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문답형식의 독특한 구성과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 책을 쓰신 저자님들의 대화를 보면서 라디오를 듣는것처럼 편안하기도 하지만 심오한 주제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책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