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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어느 정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인터넷 유행어 중에 이런 게 있죠.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반려동물 키우는 사람들이 이 문구를 넣어 짤방을 만드는 걸 심심치 않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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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할 필요도 없이 게으름과 한가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욕구이자 쾌락입니다. 앙리 베르크손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p58~59)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라는 명령을 ‘고통’, 운동하지 못하게 하는 사로잡힌 무기력을 ‘쾌락’이라고 했습니다.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는 그러한 ‘고통’과 ‘쾌락’의 역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분전환(Divertissement, 디베르티스망)을 추구하는 불행이 인간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인류가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넘어가면서 사유재산 같은 소유의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경제적 격차, 계급)이 생겨났고 지루함의 문제도 등장했다고 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가 국가에, 집에, 관계에, 소유와 분배에, 자아에 골몰하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소비사회에 압도되어 있는 우리는 하이데거가 표현한 ‘얼빠짐(마비상태)’, ‘붙잡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현실을 벗어나기도 바꾸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나 ‘헬조선’ 같은 표현들은 우리에게 ‘기분전환’용이기도 할 겁니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상의 지루함과 기분전환이 얽힌 양식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라고 하며, “지루함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능성의 발로”(p226)란 하이데거의 말처럼 상황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자유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이론생물학자 윅스쿨이 고안해낸 “환경 세계”는 그 가능성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환경 세계”는 모든 생물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을 살아가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18년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포유류가 발산할 뷰티르산 냄새를 기다리는 어떤 진드기의 세계와 인간의 삶은 다릅니다. 18분의 1초가 연속되어야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인간과 그보다 더 빠른 시간 내에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물고기도 다른 시공간을 삽니다. 해바라기를 하기 위해 바위를 받침대로만 여기는 도마뱀과 감상을 비롯해 여러 용도로 바위를 이용하는 인간도 다르게 세계를 감각합니다. 동물들이 자기 환경 세계에서 ‘충동의 정지’와 ‘충동의 해제’ 로 안주한다면, 인간은 동물보다 환경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이 상당히 발달해 있습니다.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말은, 하나의 환경 세계에 머물러서 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세계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환경 세계를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하는 것이다” ㅡ 하이데거의 지루함론
예술, 결혼, 놀이, 독서, 우주 탐사 등 우리 행위들은 환경 세계를 바꿈으로써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일 겁니다. 행위가 안정되고 습관을 통해 우리는 쾌락을 얻지만 반복의 지루함이라는 불쾌함을 다시 마주해야 합니다. 파경, 무질서, 광기, 노예 같은 상황들은 나쁜 결과에 해당되겠죠. 경험의 반복과 스스로 사고하는 체험 속에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결론은 매우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 이런 삶을 누구나 누리고 살고 있지 않기에 이 결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또한 이 결론이 타당한 것인지 고쿠분 고이치로가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을 두루 살펴 37명이 넘는 인물들의 이론을 탐구하며 말하고 있기에,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저는 고맙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 발전소에 윤활유가 되어 주었으니까요. 지루함과 기다림의 보고서였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가 본문 논의에 들어가지 않아 아쉬웠는데, 고쿠분 고이치로가 예상을 비껴가서 저는 살짝 즐겁기도 했습니다. 아,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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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지루한지' "인간의 불행은 누구라도 방에 꼼짝 않고 있을 수 "동물은 건강하고 먹을거리가 넉넉하면 행복하다. "모두 똑같은 것은 싫어! "지루함이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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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렵채집 및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농경으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부터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는데 그게 바로 지루함이다. 이 지루함이 어떤 문제를 만들고 인류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현대 소비사회에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하나씩 설명을 전개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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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는 사람에게 지루함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변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에세이 형식을 띠고 있는데, 역사, 문화 등을 넘나드는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입담이 흥미를 돋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루함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해 다룬 부분이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에 바빴던 시절에는, 지루함이란 있지도 않은 개념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의식주를 위해 탐색하고 노력해야만 했던 선사 시대에 지루함이 웬말인가. 그리고 지루함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 표식처럼 여겨졌다. 남들이 열심히 눈코 뜰 새 없이 일해야만 할 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으니까. 그러니 여유 시간을 즐기고, 그 동안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느낀 것이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배계층이 아닌 사람도 여유가 생기게 되자,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은 일종의 죄악처럼 취급되기 시작한다. 죄악이라기보다, 강박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지루해한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니,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항상 열심히 무언가를 바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증 말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는 수많은 다채로운 자료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에세이처럼 잘 읽힌다.
이 책은 지루함이라는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화에 대해 풀어낸 뒤, 마지막에서 독자들에게 말한다.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은 강박을 가질 일도, 죄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여유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이다. 한가함과 지루함도 그 나름대로 즐기자. 지루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데 남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는 우월감을 가지지도, 무조건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지지도 말자고 말이다. 지루해하지 말고, 여유를 편안히 누려보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지루함'의 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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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나는 우리 나라 작가들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미상불 그런 말은 전체 작가를 매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일한 세상에서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느껴지는 '한가함'과 '지루함'이라는 주제를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으로 연구하고 제시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일본이라는 나라 보다는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는 나로서는 우리나라의 작가 중에 그러한 인간의 미세한 측면까지 다루어준 이가 없었기에 더욱 조바심을 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고 하겠다. 삶의 다양한 현장을 보게되면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욕망에 이끌린 애씀이 있고, 그 애씀의 결과를 이루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곡선을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를 삶의 굴레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되짚어내고 시대적인 관념이나 성향을 넘어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의 시간을 그저 소모해야 하는 상황이 자연적인 조건의 상실이라는 루소의 주장과 일치함을 느낄 수 있다. 지루함은 현재를 느끼는것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를 바꾸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를 바꾸는데만 온통 힘을 쏟는다면 바뀌고 난 후의 현재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딜레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지루함은 회전문 유리통 너머 보이는 출구를 계속 들여다 볼 뿐 과감히 회전문을 없애거나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채 매일매일 회전문같은 현실을 답보하며 지옥같은 현실을 살 수 밖에 없는가 보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지루함의 극치를 느끼게 되고 무기력에 빠지지만 희망없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바로 꿈이라고들 한다. 그 꿈대로 나를 이끌어 온전히 이루어내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설령 이미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이들 조차도 그 일에서의 지루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을터 이고 보면 지루함은 인간이 행동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자꾸 우리는 지루함을 메우려 새로움을 추구하고, 창의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물품,창의적인 인재,창의적인 사회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새로움, 다름, 창의는 서로 다른 말이지만 한가지에서 기원한 파생어라고 말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한 인간을 매개로 한 어미를 둔 얼굴 다른 세자녀와 같은 동화를 현실에서 목도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무엇인지 의미심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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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되는 책인것 같습니다. 많은 것을 즐기면서 살아갈려면 그많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음악 미술 스포츠 여행 등등... 많은것을 배우고 익혀 항상 지루하지 않게 즐겁게 살아 갈수 있도록 노력하고 무엇이든 즐기면서 살아 가다보면 나이가 들어서 많은 추억이 생겨 늙어서도 추억을 생각 하며 즐겁게 살아 갈수 있을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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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로서 최재혁 선생은 독자에게 언제나 믿음을 주는 선택으로 손꼽힙니다. 저는 이분이 옮기신 <무서운 그림>을 재미나게 읽었는데요. 언제나 정확하면서도 원저자의 의도에 충실한 문맥, 그 한국어로의 재현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분입니다. 처음에 저는 표지 인쇄를 잘못 봐서 최재천 서울대 교수님이 옮기신 줄 알았습니다. 이 고쿠분 고이치로 동경대 교수도 통섭적 학문을 지향하는 분이고, 최 교수님도 그런 분이니까요. 여튼 그 저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베테랑 번역가의 손으로 이 흥미롭고 알찬 철학책이 번역되었기에, 독자는 "해독의 고생"을 각오할 걱정 없이 술술 책장을 넘겨갈 수 있습니다.
사진은 저자 고쿠분 교수님입니다.
니체는 낙타와 사자를 자신의 비유에서 중요 상징매개로 사용한 적 있지만, 인간이나 원숭이 등의 영장류는 정말 특이한 동물입니다. 맹수의 왕이라는 사자(獅子)가 평소에 취하는 모습을 보면, 게으름뱅이도 그런 게으름뱅이가 없습니다. 벌렁 드러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졸거나, 잠시 몸을 뒤집는 게 다입니다. 물론 프라이드의 암사자들이 위기에 몰리거나, 다른 숫사자가 자신의 자리를 가로채러 접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공포의 저승사자(使者)가 따로 없지만 말입니다. 반면 인간은 어떤가요? 인간이 자신의 생존 과정에서 가장 못 견뎌할 일은, 수면 부족, 추위와 더위, 기아를 제외하고는 바로 "지루함"입니다. 지루해서 죽는다는 말이 일상의 관용어로도 쓰이지만, 인간에게 있어 가장 몹쓸 적 중의 하나는 바로 권태입니다. 우리의 친족이라 할 원숭이의 행태만 봐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한 열매에서 다른 장난감으로, 도무지 쉴 줄을 모릅니다. 우리 영장류만의 종족 특성이라 할 이 "지루함의 극력 회피"는, 우리 존재를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도, 반대로 존재의 위기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저자는 그런데, 이 "지루함의 위기"를 두고, 비교적 근대적 기원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 역시, 인간은 크로마뇽인 단계 이래 지루함을 못 견뎌하는 종(種)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끊임 없이 이윤의 획득과 자본의 자기 증식을 꾀하는 현대의 경제 체제 그 본질적 특성이, 본래대로라면 지극히 건전한 방향으로 존재의 정적 풍요를 꾀할 수 있는 이 속성을,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강박" 쪽으로 추돌, 왜곡하는 악성인자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는 과감한 가설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기에 고안하고, 상상하고, 구체적 성과물로 빚어낸 그 모든 생산적 활동의 역정이, 이제는 반대로 인간의 영혼과 창의를 좀먹는 무서운 병인(病因)으로 둔갑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Angst Essen Seele Auf! 지루함은 이제 생산 과정에서의 이탈과 소외를 걱정하는 상수(constant)적 두려움으로 탈바꿈했고, 경제 활동 인구의 대부분은 번아웃(burnout) 증후군에 시달리며 대체 무엇을 위해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는지도 모를 무의미와 약탈의 프로세스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모든 불안요소의 근원, 그 속성을 탐구하려면, 그 탄생 과정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저자는 인간만이 각별히 느끼는 거대 볼륨의 지루함을, 대뇌의 발전, 진화 과정에서 일당단은 찾고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없지 않으나, 저자는 일단 인류 집단 생활의 원형은 유목민의 행동패턴이라고 봅니다. 유목민족은 말 그대로, 본질적으로 "이동"을 속성으로 삼는 종족이기에, 환경이 바뀔 때마다 거센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을러 보이나 근육과 독아(毒牙)와 민첩함의 힘으로 매번 위기를 모면하는 사자와는 달리, 인간은 타고난 근력과 스피드가 다른 동물에 비해 부족하기에, 지력(智力)과 재치로 곤경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잦은 환경 변화는 그에 상응하여 엄청난 대뇌 활동을 요구했고, 이에 걸맞게 진화한 두뇌는 타 종의 대응 신체 기관, 활동 중추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커다란 용량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커진 두뇌는, 그러나 다시 라이프 패턴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은 순간, 즉 농경 혁명이 이뤄지고부터 잉여의 부품으로 위상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뚱뚱한 여인이, 효과적인 다이어트 요법 후 체중이 줄고 나서,지금까지 입던 규격 큰 옷을 못 입게 된 모습이나 비슷합니다. 헐렁해진 의상을 버릴 수도 없고, 입고 다니자니 남 보기 우세스러운 건 둘째치고 내 운신이 불편합니다. 바로 여기에, "지루함"이 그저 지루함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생존에의 위협을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는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지만, 철학에 대해 일반 대중이 느끼는 감정이나 태도를 그대로 공유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줍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하이데거야말로 지루함의 최고봉이었다"는 비교적 솔직한 토로를 책 중에서 하고 계신데요. 그런 하이데거가 특이하게도 자신의 저작에서 "지루함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흥미진진합니다. 워낙 생전에 많은 주제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분이었기에 이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나 추측합니다. 그는 지루함에도 계층 구조가 존재하여, 1단계는 통제못할 동력에 의해 빚어지는 수동적인 지루함이 위치한다고 합니다. 2단계로 그가 지적하는 바는 상황적 지루함입니다. 인간이 이 상황에 의해 조종당하거나 끌려다니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가 처음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던 상황적 분위기가 그의 모든 활력을 잠식하고 무기력 상태로 몰아가는 결과를 빚는 거죠. 여기서 그는, 현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짚기 위해, 마르크스의 유명한 지적을 인용합니다. 기계의 톱니바퀴에 매어 부품처럼 마모되고 마침내 폐기되는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지루함을 적으로 삼게 되며, 결국 자본의 이윤 창출 압박과 신경증적 파멸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고비에 몰리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해답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저자가 내어 놓은 해답은 "아무 생각 없이 강박 없이 초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동물 되기"입니다. 다소 엉뚱하지만, 인간에게 여유를 용납하지 않고, 나태에 빠지는 상태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숨 막힐 듯한 몰아대기에서, 인간이 최종적으로 자유를 획득할 방법은 이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답을 우리 독자들이 아무 망설임 없이 최종의 대안으로 선택하기란 물론 무리입니다. 그러나 대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처럼 각박하고 소모적인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지, 이 재미있고 천연덕스러운 책은 작은 안식의 계기와 전환의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