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나는 나와는 문화환경이 참 다른 사람(이것을 어찌 개인이 판단하겠는가)과 적극적으로 나서서 영화를 볼 때가 있다. 물론 그 비용은 내가 지불한다. 얼마 전에는 엉겹결에 상봉하게된 형과 영화 시크릿을 본 적이 있다. 차승원, 송윤아가 나오는 그 영화. 영화 종영시간이 거의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이라, 관람 자체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영화였는데, 형님은 주무시는 것이다. 러닝타임 내내는 아니지만, 얼마나 고단하였으면 이러시나 싶기도 하고, 아마도 이건 영화의 문제이기도 해, 라는 생각 때문에, 몇 차례 깨우느라 영화에 집중을 못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형이 영화관을 들어설 때 포스터를 보면서, 아니 그 영화명을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데 포스터를 보고 아, 이 영화 하면서 반가워서, 저 영화는 꼭 보고싶다, 했던 그 영화가 전우치다. 나는 형님과 함께 영화 한 편을 관람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투자한 보람이 있다. 그런 형이 얼마 전에 동창회(초등학교쯤) 다녀온 얘기를 하셨다. 관람 전 식사를 할 때에, 다녀왔는데 아주 잘 된 녀석들과 아주 힘든 애들 빼고는 다 왔더라, 그렇지요, 그럴 거예요, 라고 대답했지만 참 흥미로웠다. 연말이면 동문회니 동창회는 하는 것들을 많이 한다. 추억 혹은 기억의 되새김질-, 우정이라는 숭고한 단어 대신에 중국식의 우의라는 단어가 더 맞을, 마케팅의 목적 때문에 그 침탈된 상황이 만만하지 않은 단어가 우정이 아닐까, 산다는 것은 조금 우울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로일 수 있다. 부모를 보내드리고 하관하는 그 순간에 얻는 보너스가 있는데, 아마도 그 경험을 하기 전과 후의 느낌은 참 다르다, 비로소 고아가 되는 순간,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덤이 장례씩에는 있다. 연말 연시에 생각하는 우정과 노년에 대한 이야기, 미국 드라마 <로마> 시리즈 1,2를 보았다면 특히, 시리즈2에서 다가온 죽음을 여유있게 받아들이는 키케로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리라, 그 키케로가 극적인 설정을 해서 쓴 이야기, 그것이 이 책이다.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키케로 지음, 숲 펴냄) 관련된 리뷰는 이어질 것이므로(중요한 얘기는 그때하기로 하고), 지금 한 해가 지는 즈음에 와서 이 책에 대한 생각의 조각을 올린다. |
“우린, 친구잖아.” “우리 우정이 그것밖에 안 되냐?” 라는 말로 시작해서, 친구에게 이러저러한 부탁을 많이 해 봤을 것이다. 뭐, 나도 많이 그래 왔다. 우정이란 빌미로 나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친구를 꽤 많이 부렸다. 가끔 친구에게 돈을 빌리는 일도 예사이다. 과제를 위해서 부려먹는다던가, 사적인 일이든 공적인 일이든 필요할 때마다 친구를 부른다. 우정이라는 말 하나로. 대학생인 나는 특히 과제를 해가야 하는 일에 뭇 친구를 부려먹었다. 단지, 내가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정에 관하여>에서 라일리우스는 말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호의를 보이고 선심을 쓰는 것은 나중에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네. 우리는 선행으로 폭리를 취하지는 않네. 우리가 호의를 베풀려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네. 우리가 우정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이익을 바라서가 아니라 우의 자체가 충분한 이익이기 때문이네.”[우정에 관하여 9장 31절] “우정은 이익 때문에 조작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내가 보기에 우정의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을 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네. 우리가 친구에게서 즐기는 것은 그에게서 얻는 이익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 그 자체일세. 그리고 친구로부터 얻는 것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즐거운 법이네.” [우정에 관하여 14장 51절] “우정이 온갖 방종과 범죄를 향해 문을 열어두고 있다고 믿는 자들은 위험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네. 자연이 우리에게 우정을 준 것은 악덕의 동반자가 아니라 미덕의 조력자가 되라는 것이었네. 미덕은 혼자서는 최고 목표에 이를 수 없고, 다른 동반자와 결합할 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네.”[우정에 관하여 22장 83절] “그래서 내가 거듭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가하고 나서 친구를 사랑해야지 사랑하고 나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우리는 부주의했던 탓에 벌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친구를 고르고 사귀는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네. (중략) 우리는 날마다 만나거나 또는 호의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얽힌 다음 우정이 한창 무르익는 도중에 갑자기 어떤 불쾌한 일이 생겨 갈라서게 되는 것이라네.”[우정에 관하여 22장 85절] 그렇지.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내가 왜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아니, 같이 있다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자주 만나는 친구는 만날 때마다 질리지가 않았지. 그저 만나서 이야기하고, 같이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 하루를 신나게 놀고 나서, 헤어질 때 말한다. ‘조만간 또 만나자구.’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는 감회가 새롭다.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다.’라고 하지 않는가. 변하지 않은 녀석의 예전 모습. ‘내 기억의 친구가 아직도 그대로구나.’ 라고 생각돼서 다시 대하기가 편하다. 반대로 많이 변한 녀석.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친구를 만나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아직 젊은 나이이지만, 사회에 대해서 배워 나가면 나갈수록, 친구를 만나는 이유가 점차 잊혀져가는 것 같다. ‘만나서 놀자!’ 라고 전화하던 시절은 어느새 가고, ‘나, 좀 부탁할 것이 있는데...’가 주가 되는 통화 내용.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우정에 관하여> 부분을 읽고, 전화기를 들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려고. 손익?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그냥 만나서 그들을 느껴보려고 한다. 뭐, 술은 그 자리에서 빠질 수 없겠지만... |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시간들을 위해 나는 많이 생각하고 준비하며 살고 자신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 T. Cicero, B>C 106~43)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옮김, 숲 펴냄)를 읽으며 새로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돈을 모아 좀 더 편안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은 아니었나. 그저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깔끔하게 사는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노년기에 할 수 있는 것들과 죽음에 대해 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생각했을까? |
평균수명이 기대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지 않아도 알고도 혹은 의식하지 못한 채 섭취하게 되는 각종 음식물들에는 각종 항생제를 비롯해서 전반적으로 자잘한 병들로부터 안전해질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나 보다.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생명체의 삶이다. '생명'이라는 말은 는 죽음의 대립어인데, 생명 자체에 이미 죽음이 내포 혹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서양의 고전, 특히나 고대시대에 씌어진 책들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기도 전부터 망설여진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런 책들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 일부러 찾아서 읽은 적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괜히 머리만 아플 것 같은 선입감에 선뜻 손이 가지를 않는다. 그러다 어찌어찌 하여 읽고서는 왜 진작에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또 다시 새로운 책을 잡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망설임이 따른다. 이 책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아는 분의 선물로 받고서 막상 책을 읽기까지는 두어 달 가량을 뜸만 들였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원로원과 민회가 충돌하던 시기, 소수의 원로원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법치와 조화에 기초하여 공화정을 지켜내고자 했던 로마 제일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다. 한때 집정관을 지내기도 했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집권하던 시절 로마에서 추방되기도 했지만, 그 후 로마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 시기에 쓰여졌으며, 그의 철학적 저술들은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사상은 문명화된 가치 체계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이 책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는 케케로의 대표적인 저작 [노년에 관하여]와 [우정에 관하여] 두 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키케로의 사상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두 책 모두 키케로가 그의 평생지기인 앗티쿠스에게 헌정한 것으로, 선대의 사람들이 노년과 우정에 대하여 각기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먼저, [노년에 관하여]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기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50년 84세의 대카토가 30대의 스키피오와 라일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노년의 짐을 어떻게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를 알려주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를 하는 대카토와 스키피오 그리고 라일리우스는 모두 로마시대의 정치가들이라고 한다. 키케로는 이 대화에서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 즉 활동할 수 없고, 몸이 허약해지며, 모든 쾌락을 즐기지 못하고,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카토의 입을 빌어 밝히고 있다. 그는 노년이 되면 활동할 수 없기에 비참하다는 것에 대해, 노년이 되면 젊음과 체력이 필요한 활동은 할 수 없겠지만, 정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큰일은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며, 이것은 노년이 되어야 비로소 원숙해지기 때문이다. 몸이 허약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현상으로 설명한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며, 장년은 위엄이 있고, 노년은 원숙한 것과 같은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다는 것이다. 또한 노년에도 훈련과 절제를 통해 이전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으며, 비록 육체는 노인이 되었어도 정신은 노년과 관계없다고 말한다. 노망이라 불리는 노년의 어리석음은 모든 노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경솔한 노인들의 특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년에는 감각적 쾌락이 없어 비참해 진다는 것에 대해 키케로는 강하게 반론한다. 그것은 젊은 시절의 가장 위험한 약점에서 해방된 것으로, 정신보다 고귀한 것은 없으며, 이 고귀한 선물에 쾌락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며, 육체적인 쾌락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때 느끼는 정신적인 쾌락이야말로 가장 큰 쾌락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노년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에 대해 키케로는 죽음은 나이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올 지 모른다며, 주어진 수명이 짧다 해도 훌륭하고 명예롭게 살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인들은 짧은 여생에 너무 집착해서도 안되지만, 까닭 없이 그것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충고한다. 노인들이 고집이 세고, 불안해 하고, 화를 잘 내고, 괴팍스러운 것은 성격상의 결함이지 노년의 결함이 아니라는 말하는 그는, 명망과 권위는 노년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하고, 그것은 명예롭게 보낸 지난 세월의 결실이라고 강조한다. 현대는 고령화 사회라고들 말한다. 의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만들었고, 따라서 우리들 모두는 노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불로불사를 원하는 것이 인간들의 욕망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노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원하는 일에 몰두할 때 노년의 비참함은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노년은 키케로의 말처럼 우리들이 보낸 젊은 시절의 결실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우리 자신의 노년을 결정하리란 생각이 든다.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노년의 삶에 대해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우정에 관하여] 역시 키케로가 앗티쿠스에게 헌정한 것으로, 우정의 본질과 지켜야 할 원칙들에 대하여 라일리우스가 자신의 두 사위와 주고 받는 문답 형식으로 되어있다. 라일리우스는 스키피오가 죽은 뒤, 자신과 스키피오 사이의 우정을 토대로 우정의 의미와 본질, 원칙과 규범, 그리고 우정에 적용되는 평범한 규칙들을 설명하고 있다. 키케로는 라일리우스의 입을 빌어 우정이란 모든 사물에 관한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며, 우정을 낳고 지켜주는 것은 미덕이기 때문에 미덕이 없이는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또한 우정은 이익보다는 사랑의 감정과 결합된 호감에서 발생되며, 호감은 바로 미덕과 정직성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우정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키케로는 우정에 있어 가장 큰 재앙은 대중의 경우 금전욕, 상류층의 경우는 관직과 명예에 대한 경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도의에 어긋나는 것은 요구해서도 안되고, 설사 그런 요구를 받더라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익이 있고 우정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정이 있은 다음에 이익이 그 뒤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우정에서 요구하는 견실함과 의연함의 버팀목은 신뢰이며, 이는 조금도 가장하거나 꾸며대지 않는 것이고, 남이 친구를 비난해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우정이 나중에 적대적 관계로 바뀌지 않도록, 처음 친구를 사귈 때 신중 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충고를 하는 것이나 받는 것, 모두 진정한 우정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충고를 주고, 받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키케로는 충고를 할 때는 거리낌은 없으되 거칠지 말아야 하고, 충고를 받을 때는 참을성 있으되 대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키케로는 우정이 처음 시작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도 미덕에 기초한다며, 미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셈이다. 우리는 대부분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 친구부터 시작하여, 학교에 다닐 때,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사귄 사람들까지, 우리는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좋을 때는 그런 관계가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유지되지만, 서로간의 이익이 부딪힐 경우에도 그러한지 생각해 볼 일이다.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과연 나는 우정의 본질을, 그리고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것을 지켜나가는지 반문하게 만든다. 혹시 나는 친구라는 이름 하에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
키케로는 아들에게 쓰는 형식의 책인 의무론이 유명하다. 우연히 읽게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는 키케로가 고민하고 생각하였던 노년과 우정에 대한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 노년의 아름다움을 기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우정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을 수 있다. 물론 시대의 차이를 받아 들이면서 읽어야 겠지만. 책은 양장으로 아주 잘 꾸며져 있고, 내용도 간략하게 보기 좋게 구성되어 있다. 더구나 사진을 내용고 매칭되게 실어 놓아 더욱 보기에 편했다. 단지 책값이 좀 비싸다는 거^^;; 좋은 책이다. |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지만, 세월이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기본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은 바뀌지 않는다.
요즘 부쩍 나이 들어감에 대해 비애감을 느끼고 있다. 일정 나이가 되면 나이 먹는 것에도 면역이 생기고 배짱이 생기게 될까? 지금은 딱 과도기적인 상황이라ㅋ 종잡을 수 없는 히스테리로 승화시키고 있는건지... 에고. 아무튼 뒤숭숭한 심정 갈피에서 엉뚱하게 이런 종류의 글을 읽게 되면 약간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심경에서 책을 들었다. 더불어 갈수록 깊이 있는 우정을 쌓기가 힘들어지는 악화일로의 인간관계 안에서 진정한 우정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찰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기계발서를 수없이 읽어봐도, 계발은 결단코 요원한 평상시 모토로, 몇천년 전 인물의 주장이 멕혀 들고, 크게 공감하여 감화받을거라고 생각치는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척척박사처럼 너무 잘 알고도 있다. 하지만 또 어지러질것을 알면서 청소를 하는 것처럼 뜬구름 처럼 내 생활에서 학습하고 습득하여,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원론들을 책을 통해 되새김질 해보고픈 성의이다. ^^
세월의 갈피 갈피마다, 이뤄야만 하는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삶에 대한 열정과, 애정의 끈을 가끔씩 놓쳐 버리기에 나는 이렇게 흐르는 세월에 처량하게 넋을 놓고 있는 걸거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 변해가는 세상 다를 수 밖에 없는 마음..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숙한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열심히 살아가지 ^^
(그렇다 해도, 난 나이 먹는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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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추천된 것을 보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키케로의 작품 중 두 가지를 묶은 것인데 아마 출간의 편의를 위해서였겠지요.
내용은 별로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다만 개인의 생각이고 오래전에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나와는 일부 생각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내용은 꼼꼼이 읽어볼 경우 매우 쉬운 편입니다. 하지만 생각할 점이 많아서 어렵기도 합니다.
문제는 편집상의 불편함이었습니다.
아래 다른 분은 그림에 대해 좋게 평가하였지만 저는 내용과 거의 상관없는 그림이 중간에 끼어 있어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게다가 주석이 책의 뒷부분에 위치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 문제인 것은 다른 곳에 이미 내용이 있어 몇번을 참조하라고 된 것은 대부분이 그 번호가 틀렸다는 것이지요. 특히 [노년에 관하여]에서는 제가 확인한 것만 해도 15 개나 틀렸습니다. 아직 초판본이므로 재판본에서는 고쳐지리라 믿어야겠습니다.
주석을 해당 페이지 하단에 배치할 것인지 아니면 책이나 장의 말미에 배치할 것인지는 정답이 없는 주제입니다. 게다가 배치 위치에 따라 편집이 달라지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책이라는 것은 (저자보다는)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주석은 글의 이해를 돕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방대하지 않다면(어떤 책에서는 한 주제에 대한 주석이 두 페이지가 넘는 경우도 있더군요. 그런 게 잦다면 하단에 배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단배치가 적절한 형태일 것입니다.
책의 가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불만이라는 것만 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