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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안녕하세요. 호곤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소설책입니다. 박대 겸 작가의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라는 소설책은 손바닥만 한 책입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니 175라고 찍혀있습니다. 여자들의 작은 가방에도 쏘옥 들어가는 가벼운 책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까지 가볍지는 않습니다. 하하 카페에 앉아서 읽었더라면 단숨에 읽어 내려갔을지도 모를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처럼 푹 빠져서 보게 되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를 경계와 처음 듣는 단어인 '메타픽션'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드라마에서 사극인데 현대와 조선시대를 오가며 주인공이 조선시대의 역사에 대해 이미 알고 설명하는 게 메타픽션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게끔 전개를 합니다. 픽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말합니다. 픽션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나 모순을 제기하여 아이러니와 자아 성찰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주로 쓰입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픽션 속 세계는 현실의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허구이지만 적어도 작품 내에서만큼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이라고 가정하게 됩니다. 메타픽션은 작품 속의 캐릭터들도 자신이 사는 세상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전제로 스토리가 짜여집니다. 메타픽션에서는 아예 작품 내에서도 이것이 픽션임을 전제로 하거나 작품 내 캐릭터들이 자신이 픽션 속에 존재하는 인물임을 인지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메타픽션은 사실 14세기 시절 문학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역사가 깊습니다. 단,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1970년대라고 말합니다. 메타픽션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1920년대에도 그런 시도가 사용되었다고 하니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창작물 속에서 픽션이 인지된다'라는 메타픽션의 경로는 20세기 후반 및 21세기 초반부터 구체화되었다고 합니다. 주관적으로 느낄 때 메타픽션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며 떠오른 몇 가지 영상이 있었습니다. 중국 드라마 '영아성하', 네이버 웹 소설에서 드라마까지 방영된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그리고 최근 드라마 '폭군의 셰프'였습니다. '선재 업고 튀어', '내 남편과 결혼해 줘' 등에서 주인공은 본인이 혼자 어떤 이유로 과거로 왔거나 미래로 왔는데, 그 설정을 본인 또는 한 두 명만 그 사실을 알고 다른 주변인은 아무렇지 않게 각자의 현실을 살아갑니다. 메타픽션은 어떻게 보면 타임슬립과 구조가 비슷하지만 다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에세이를 읽을까 소설을 골라볼까 고민하는 분께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를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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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책과 콩나무'를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박대겸 작가가 펼쳐 보이는 실험적 중편소설로,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을 자유롭게 오가며 문학이 가진 본질적 힘을 탐구하고 있다. 작품은 ‘소설가 박대겸’이라는 실명을 전면에 내세워, 현실의 작가와 허구의 화자가 겹치고 분리되며 다시 얽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소설을 쓰는 나’와 ‘소설로 쓰여지는 나’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인지, 그리고 그 경계가 무너질 때 어떤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첫 장면에서 독자가 마주하는 것은 집 안에 쓰러져 있는 또 다른 ‘박대겸’이다. 그러나 사건의 긴장감은 곧 소설가로서의 현실적 고민—원고 청탁, 생활 공간, 생계 문제—으로 치환되고, 다시 탐정 ‘에른스트’의 등장을 통해 장르적 전환을 맞이한다. 이처럼 작품은 끊임없이 독자의 기대를 비틀고, 허구와 현실 사이를 흔들며, 결국에는 소설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유연하고 무한히 확장 가능한지 증명하고 있다. 저자는 “소설과 현실은 언제든 뒤섞이고 분리되는가 싶다가도 다시 얽히는 무언가”라고 정의하면서, 허구를 단순한 거짓으로 보지 않고 창조된 세계를 믿는 행위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곧 소설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진실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평행우주나 또 다른 ‘나’의 존재에 대한 상상은 이러한 관점을 확장시키며, 문학이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현실과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경쾌하면서도 뻔뻔한 유머, 장르적 혼합, 자기반영적 서사 등을 통해 독자의 몰입을 끌어내고 있다. 현실의 고단함과 허구의 자유로움, 그리고 두 세계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긴장과 해방은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결국 이 소설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동시에 소설을 믿는 일 자체가 또 하나의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을 완성하는 동시에, ‘픽셔너리 시리즈’라는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독자가 작가와 함께 소설의 본질을 탐험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경계와 규범을 넘어서는 문학적 모험이자, 소설이 왜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한지에 대한 힘 있는 답변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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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평행우주와 창작의 상상력 - 낯익은 얼굴과의 마주침, 흔들리는 현실 그런데 곧 낯익은 복장을 한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뒤흔들기 시작합니다. 책을 읽으면 이 만남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혹은 그 사이 어딘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되죠. 어느 순간에는 출판 원고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지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탐정 ‘에른스트’라는 인물이 등장해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톤으로 바꿔버립니다. 작가님은 장르의 문법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도 비틀어내는데, 그 과정이 매우 유쾌합니다. 마치 독자가 소설의 울타리를 벗어나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소설에 탐정이 등장하는 순간, 아무리 에세이처럼 써도 완전히 픽션이 된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을 보여줍니다. 소설은 결국 허구라는 사실, 그러나 허구를 믿는 순간 현실보다 더 진짜처럼 다가올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이 대목에서 박대겸이라는 작가는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를 유희의 장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평행우주라는 설정은 작품에 한층 더 넓은 상상력을 불어넣습니다. 내가 창조한 소설가 박대겸이 또 다른 세계 어딘가에서 진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발상은, 단순히 흥미로움을 넘어서 창작 행위 자체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책은 작가와 작품, 독자와 세계가 서로 맞물리며 무한히 확장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인 셈이죠.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무겁게 들릴 수 있는 주제들을 작가가 경쾌한 리듬과 위트 있는 문체로 풀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며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문득 깊은 질문 앞에 서기도 합니다. 이 균형감각 덕분에 책은 결코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가볍게 읽히면서도 여운을 오래 남깁니다. 이 책은 단순히 하나의 소설을 읽는 경험을 넘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현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우리가 믿는 세계의 경계를 슬며시 흔들어놓는 이 작품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해준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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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픽셔너리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정의를 보면 ‘픽셔너리’는 ‘픽션(Fiction)’과 ‘딕셔너리(Dictionary)’의 합성어로, ‘나’를 픽션화하는 A부터 Z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낸 일종의 가상 사전이라고 한다.(책 뒷표지 中) 마치 영화 등에서 내가 죽으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육체를 바라보는 것마냥 이 작품에서는 박대겸이라는 인물이 밤 1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왔을때 현관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 이제 누군지 알아보겠지?”유체이탈도 아니고 신선한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탐정이 등장하지만 이 책에서는 박대겸이라는 소설가 본인을 등장시키고 그와 똑같은 인물이 죽게 되는 설정 등을 통해 죽은 이가 실제 박대겸인지 아니면 현재 에른스트와 이야기하는 박대겸이 진짜인지 죽은 박대겸은 누구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지는 가운데 전개되는 이야기가 파격적이여서 그런지 뭔가 굉장히 실험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런 발상을 한 작가님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는 흥미롭게 진행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진짜 묘미가 아니였나 싶다. #모든세계가하나였다 #박대겸 #북다 #리뷰어스클럽 #픽셔너리시리즈 #박대겸3부작 #중편소설 #선넘는이야기 #책 #독서 #도서리뷰 #책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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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수개월 전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란 장편소설을 출간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김대겸 작가가 이번엔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란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출판사 〈북다〉의 새로운 중편 시리즈 '픽셔너리'의 첫 번째 작품이다. ‘픽셔너리’는 ‘픽션(Fiction)’과 ‘딕셔너리(Dictionary)’의 합성어로, ‘나’를 픽션화하는 A부터 Z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낸 일종의 가상 사전이라고 출판사 측은 설명한다. 저자 김대겸은 이전 작품들을 통해 ‘소설을 쓰는 사람’과 ‘소설을 읽는 사람’ 간에 작동하는 소설의 원리를 집요하게 탐구하며, 그 관계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지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의 과감한 패치워크를 통해 ‘소설을 쓰는 나’와 ‘소설로 쓰여지는 나’의 내밀한 역학관계를 드러내며 “말 그대로 ‘선 넘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또한 패치워크된 이야기 조각을 또 한 번 비틀며 독자의 예상을 과감하게 넘어선다. 김대겸 특유의 비틀림과 혼돈의 소용돌이를 뚫고 나오는 경쾌하고 뻔뻔한 유머에 낯선 독자로서는 사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대겸 소설에 매력을 느낀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매력에 다시금 빠져들게 한다. 『이상한 나라의 소설가』 『부산 느와르 미스터리』에 이어 이번에 출간된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의 완성이자, 픽셔너리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힌다. SF소설에 익숙지 못한 독자는 이 소설의 〈차례〉를 펼치는 순간 무척 당혹스러웠다. 중편소설 한 작품에 무슨 제목이 이렇게 많을까? 작은 책 한 권에 무려 13개의 낯선 문구들이 나열돼 있다. 순서도 「프롤로그」의 번호를 '0'번으로 잡았다. 이어 장(章)을 나누는 듯한 제목에서 소설에서는 생경한 단어들이 줄을 잇는다. 1장 「메타픽션은 안 됩니다」, 2장 「그것이 에세이와 자전소설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3장 「일상 미스터리 장르에 나올 법한 이야기」, 4장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을 집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등 에세이에서도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제목이 횡설수설하는 듯, 무의식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인 듯하다. 몇 개만 더 적어 본다면 5장 「갭모에라도 느낄 수 있으면 좋았겠건만」, 11장 「어떻게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인가」, 12장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아」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마지막 장인 13장에서는 「작가 후기를 겸해서」라며 소설이 끝난다.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독서량이 적은 독자로서는 다행이다 싶다. 왜냐하면 아날로그 시대의 필법과 문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몇 년 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면 기왕 상경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혼자 힘으로 살 생각을 해야지 하필 마침맞게 제안해 온 에른스트의 호의를 넙죽 받아들여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p.7) 페이지를 넘기자 분위기가 돌변한다. 그리고 저자 특유의 (신비주의 혹은 가상세계) 전략이 나온다.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질문과 응답이 섞인다. 집 안에 엎드린 채 쓰러진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독자의 느낌으로는 앞 문장에서 연결되는 글로 보아 동거인 에른스트를 생각해낸 말인가 싶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는 늘 어깨 아래까지 내려가는 장발을 선호했으니까.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인공이자 저자 박대겸의 시선이다. 주인공은 지금 사태 파악을 위한 관찰자이기도 하다. 지금 집 안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주인공 박대겸은 문득 자신이 집을 잘못 들어왔나 고개를 들어 거실을 살펴본다. 거실 가운데 직사각형 목재 테이블과 의자 두 개, 벽에 걸린 동그랗고 하얀 시계, 그 앞에 갓이 씌어진 키가 큰 전등으로 미루어 확신한다. "여긴 내가 사는 집이 맞아." 그러나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누구와 대화하는가? 스스로 묻고 답하지만 의식 속인가. 혼잣말도 아닌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독자는 받는다. 독자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한 번 자문해 보면서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것도 무척 재밌을 것 같다. "잠깐, 112에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119에 먼저 신고를 해야 하나. 바닥에 쓰러져 있긴 하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119에 신고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도저히 저 사람 목에 손가락을 대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대화는 과연 ‘소설가 박대겸’의 진짜 목소리일까, 아니면 ‘소설 속 박대겸’의 허구적 목소리일까. 의문이 들지만 저자 박대겸은 이미 그런 반응을 예견한 듯, 첫 장면부터 미스터리적 상상력을 덧입힌다. 독자의 기대를 과감히 비틀기도 한다. 자정이 넘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박대겸’이 현관 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낯익은 얼굴에 낯익은 복장”의 또 다른 박대겸과 마주하면서 소설은 마치 사건의 현장으로 독자를 이끌고 있다. 갑자기 에른스트의 침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설마 이렇게 만든 또 다른 사람이 집 안에 숨어 있던 건가. 침실 손잡이를 잡자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린다. 인기척은 침실 문 쪽으로 다가왔고, 박대겸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침실 문이 열리려는 순간, 현관의 전등이 자동으로 꺼진다. 당황한 박대겸은 허공을 휘휘 젓어 휘적거린다. 침실 문이 열리면서 사람 형태의 누군가가 나타난다. 시야에 들어온 건 에른스트이다. 이때 에른스트의 반응이 거실 안의 상황을 파악한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다가 다시 박대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까지 왔나 보네." 이 세계까지 왔다? 박대겸은 에른스트가 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려 했으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지. 이 세계까지 왔나 보다." 박대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가까이 다가온 에른스트에 물는다.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야?" "당연히 알지." "누군데?" (중략) 낯익은 얼굴에 낯익은 복장.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박대겸 자기 자신이었다.(p.11) 독자의 머리가 혼동되고 혼란 속을 헤매지만 소설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사건 현장을 말끔히 지워낸다. 2장 「그것이 에세이와 자전소설의 차이점이기도 하다」에서는 출판사로부터 청탁받은 원고 구상에 골머리를 앓으며, 신인 소설가로서 발돋움하기 위해 출판사들이 밀집한 서울에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 부산의 부모님 댁에서 살아야 할지를 두고 갈등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실제 주인공과 저자 박대겸이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두 개의 자아를 붙였다 떼어놓다를 자유자재로 시도하는 사이 주인공의 현실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독자들이 소설가로서의 주인공이 갖는 고충에 공감하려는 순간, 박대겸의 친구이자 탐정인 에른스트를 등장시키며 소설은 또 한 번 장르적 비틀기를 시도한다. “소설에 탐정이라는 존재가 나오는 순간, 아무리 에세이처럼 써봤자 완전히 픽션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한국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은, 비유하자면 유니콘 같은 존재니까.”(p.31) 이처럼 이 작품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에서 저자는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의 조각들을 능숙하게 이어 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패치워크 원단은 소설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중심으로 재단된다. 저자는 “소설과 현실이란, 언제든 뒤섞이고 뒤엉키고, 분리되는가 싶다가도 다시 뒤범벅되는 무언가”(p.87)라고 말하며, 어떤 세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세계도 결코 쓰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또 한 번의 ‘선’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우주 어딘가에 우리와 조금 다른 시간대의, 우리와 조금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는 것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발상은 더욱 부풀어 올라 어쩌면 내가 창작한 ‘소설가 박대겸’ 역시 다른 평행우주에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다른 세계의 ‘나’ 역시 소설을 쓴다면?”(p.48)라는 물음으로, 소설은 확장된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저자 박대겸은 능란하게 직조한 ‘불일치의 세계’를 통해,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도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소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진심으로 믿는 일이라고. 이것은 곧 작가가 소설이라는 허구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세계에 품는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에는 서울 우이천변에 있는 저자의 집필실에서의 일상 등 현실에서의 자신의 활동을 포함해 글을 쓰는 이야기부터 메타버스, 소설가, 탐정, 유니콘, 평행우주 등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드며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때로는 SF소설 같고,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를 힘들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의 소설관도 일반 소설가와 다소 차이점이 있다. "어떤 세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세계를 쓸 수 없지 않겠는가. 소설 속 세계가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한들, 소설가는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를 진심으로 믿을 것이다. 소설을 써본 적은 없지만 벌써 2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살아가는 동안 소설이 현실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반대로 현실이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p.86~87) 돌고 돌아 다시 온 현실에서 저자는 13장 「작가 후기를 겸해서」에서 "나는 이 마지막 챕터를 일본 사가현 사가시 복합쇼핑몰 유메타운 2층에 있는 푸드코드 창가 자리에서 쓰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번 소설에서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기성 작품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거나 참조한 부분이 있다고 밝힌다. 새로운 소설 결말도 떠오르지 않고 새로운 집도 못 구하는 진퇴양난의 시기, '나'는 사실상 현실도피를 하고 만다고 고백한다. 그가 일본에서 현실로 돌아온 후 공교롭게도 갑작스러운 계엄 사태에 다시 일본에 못 가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며 국회 상황을 라이브로 지켜보았다고 덧붙인다. 다행히 자정을 넘긴 새벽에 계엄이 해제되었다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표제어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라는 경험을 에세이 형식을 빌어 결말에 이르면서 현실 인식이 뚜렷해진다. 형식과 내용, 허구와 현실, 가상세계와 현실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추천사〉를 통해 문학평론가 박인성은 "자전적 에세이조차도 메타픽션으로 다시 쓰는 시도는 작가의 뇌절마저 문학으로 승화한다. 패치워크(patchwork) 스타일로 기워진 복잡한 옷감처럼, 이 소설은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의 원단조직을 과감하게 짜맞춘다. 누군가에게는 섬세한 조각맞추기 유희처럼 보일 수 있는 이유다. (중략)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에고이스트적인 이 세계가 나는 그리 싫지 않은 것 같다."고 썼다.(p.174~175) 저자 : 박대겸 소설집 『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 장편소설 『그해 여름 필립 로커웨이에게 일어난 소설 같은 일』 『부산 느와르 미스터리』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중편소설 『이상한 나라의 소설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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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겸과 에른스트 그리고 메타픽션 정연금의 조언 소설같은 일들과 일상생활 속의 미스터리 장르를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그속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살아간다.원래의 계획대로 잘 안되는게 사람사는 세상에 일들인데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은 어떻게 풀어낼지 고된 삶 자체가 소설을 권하고 싶은 현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한 것 하나의 긴 끈을 잡고 계속적으로 이어가면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박대겸과 에른스트 함께 살아가는 아니,한 몸일 수도 그리고 쵸이쵸이가 등장하고 수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타로 점에 대해 흥미를 잃은 대겸,그 이유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타로 점의 결과를 본다.결국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대겸과 배탈과 술 타로 쵸이쵸이와의 만남의 연속으로 이어지고 그 점괴가 맞아가는 것일까?애써 부인을 하려해도 점술을 믿어야 할지 의지가 약한 나로서도 믿어야 할지 그를 따라 책 속으로 계속해서 볼 수 밖에 없다.
멀티버스 탐정이 된 박대겸 80억 명의 멀티버스에서 살아가는 나라는 것과 분리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상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상한 소설을 좋아하는 작가라는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것을 현실을 넘어 2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을 풀어내고 있다.멀티버스 범죄자의 다른 점은 자신의 육체를 다른세계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그러나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 그런 범죄자가 80억 개와 80억 명이나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은 색다른 색채를 풀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보는 듯 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과 허구를 픽션과 메타픽션을 믹스한 소설을 풀어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을 볼 수 있는 책이다.박대겸의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새로운 소설의 시작점을 만들어간다.꿈과 현실 언뜻 눈치를 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설의 완성도는 진행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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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장르. 픽셔너리 시리즈를 맛볼 수 있는 소설가 박대겸의 이야기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일단 자전적인 내용이 있고, 소설이니까 당연히 허구도 섞인 이야기인데, 아무튼 읽어보면 알 거야. 45p." 새로운 장르의 책이다. 에세인가 소설인가 애매하게 시작된 이 책은 박인성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선 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책은 '픽셔너리'라는 장르로 이야기한다. 과연 픽셔너리란 무엇일까? 픽셔너리 픽션(Fiction) + 딕셔너리(Dictionary)의 합성어다. 그리고 '나'를 픽션화하는 A부터 Z까지의 이야기를 수록한 '가상의 사전'이다. <저자> 저자는 자신을 책에 등장시킨다. 그래서 에세이인가 싶다가도 중후반부에 가면 환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책표지의 모습을 보곤 저자가 정말 궁금해졌다. 소설가 박대겸은 프롤로그에서 집에서 쓰러져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우스메이트인 '에른스트'는 그런 박대겸을 보며 "이 세계까지 왔나 보네"라는 엉뚱한 말을 하며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 박대겸은 그대로 도망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프롤로그 후 첫 장에서 박대겸은 메타픽션(소설에 대한 소설)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이 소설이 메타픽션인지 픽셔너리인지 모를 이야기 속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소설은 소설가 박대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직업이 '탐정'이라는 에른스트가 화자로 나서 챕터부터 빠르게 진행된다. 출판사로 의뢰로 시작한 일로 시작된 이야기가, 하우스메이트 에른스트와의 자연스러운 이야기. 그리고 에른스트는 자신을 '멀티버스 탐정'이라고 말한다. 80억 명이 넘는 다중세계의 자신들이 있고, 두 명의 다중세계의 정보를 의식만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다중 세계 범죄자가 있고, 그 범인을 찾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일이라고 말이다. 보통 소설 속엔 다중세계의 탐정이 등장할 수 있지만 직접 소설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직접 등장시키는 과정을 포함시킨다. 그래서 자연스레 메타픽션 속으로 안내한다. 그러고도 환상적인 이야기와 실제인지 모를 이야기들이 혼재하며 등장한다. 책은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빠르게 진행된다. 에른스트의 멀티버스와 탐정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서술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몰입된다. (이게 필력의 힘인가?) 소설 속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우이천 변을 질주하는 13인의 대겸이다. 이상의 '오감도'를 변형한 시를 시작으로, 저마다의 박대겸이 서로를 돕고, 서로의 인생에 대해 서술하는 모습이다. 2페이지에 걸쳐서 한 호흡으로 이어진 문장은 내 호흡도 멈춘 채 눈으로 따라가기 너무 바빴다. 그리고 박대겸은 어떤 인생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소설가였다. 어떻게 다른 삶은 하나도 없을까. 정말 매력 터지는 책이다. 170여 페이지밖에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 🔖어떤 '나'인지 모른다면, 어떤 '나'라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 147p. ✔️ 추천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의 완성작입니다. 픽셔너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경험해 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모든세계가하나였다 #박대겸 #북다 #픽셔너리시리즈 #박대겸3부작 #중편소설 #메타픽션 #멀티버스 #멀티버스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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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 책등을 위로 향한 채 펼쳐진 책을 내려놓는 무심한 표정의 인물과 펼쳐진 책의 사이로 충격과 혼란함을 느끼며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빠져나오는 작은 인물이 그려진 표지의 이책은 현실과 허구를 교묘히 오가며 주인공도 독자들도 혼란함을 느끼게하는 복합적인 장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가인 대겸은 픽션과 에세이의 결합이라는 테마로 소설을 계약하고 집필을 하기위한 고민에 빠집니다 대겸은 하우스 메이트인 에른스트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던중 에세이라면 대겸의 실제 생활이야기가 들어갈수밖에 없고 에른스트와의 이야기도 소재가 될수있음을 이야기하는데요 에른스트는 자신의 직업인 탐정을 그대로 쓴다면 아무도 에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며 등장인물이 되는 것에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에른스트의 조언에 힘을 얻은 대겸은 자신의 주변인들과의 이야기들중 특별해보이는 이야기를 소설로 다듬어 가는데요 그중에서는 친분이 있는 독립서점 주인과의 이야기와 서점을 찾은 점술가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더불어 타로전문가인 쵸이쵸이와의 일화도 경험을 적은 후 소설로 가공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요 하나의 세계에서 시작해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로 그리고 또다른 세계로 확장되는 이야기는 에른스트가 멀티버스 탐정이라는 고백에 이르며 전개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듭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감상을 적는 에세이와 무한한 상상의 이야기를 담는 픽션의 만남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어디까지가 저자의 경험인지 혹은 저자가 주인공으로 정한 소설가 대겸의 경험인지 그리고 소설가 대겸이 구성한 소설의 내용인지 헷갈리게 되는데요 저자가 느끼는 소설가로서의 미래와 고민을 소설속에 녹여내며 장르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발함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이야기입니다 * 출판사를 통해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에 쓴 후기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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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중편 시리즈 〈픽셔너리〉 첫 번째 작품이다. 픽셔너리는 픽션과 딕셔너리의 합성어로 ‘나’를 픽션화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출판사는 작가에게 소설과 에세이를 결합한 작품을 의뢰한다. 작가는 혼란을 겪는데 이것을 소설 속에 그대로 말한다. 당연히 에세이가 담겨 있다 보니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씩 말한다. 생각보다 많은 작품과 그 사이에 읽었던 단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미세먼지> 속 ‘미세먼지 살인사건 - 탐정 진슬우의 허위’다. 다행스럽게 이 책을 읽어 그때 평을 찾아보니 연작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글이 보인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아 연작으로 나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소설은 간결한 진행 속에 살짝 살짝 상황을 꼬았다. 첫 장면에 집에 들어온 작가가 현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누구지? 같이 사는 동거인 에른스트? 아니다. 고민하고 있는데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혹시 살인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한다. 언제나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에른스트가 보인다. 그가 한 말은 황당한데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이다. 뭐지? 그리고 엎드린 자세의 남자를 돌려 눕히는데 박대겸 그 자신이다. 이 황당하지만 재밌는 프롤로그를 지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실제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인물은 박대겸이다. 그런데 박대겸 한 명이냐고 하면 아니다. 다른 박대겸도 등장해서 이야기의 꼬임을 만들어낸다. 프롤로그에 쓰러져 있던 인물도 박대겸이지 않은가. 여기에 박대겸과 함께 사는 에른스트가 이 황당한 설정의 해설자 역할을 한다. 부산에서 책방을 하다 탐정 재능을 발견하고 탐정으로 전직한 인물이다. 그는 일반적인 탐정이 아니라 멀티버스 탐정으로 활동한다. 쓰러져 있던 박대겸을 보고 이세계라고 말한 것도 그의 이 능력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른스트가 박대겸의 삶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박대겸은 자신의 삶과 주어진 목표를 엮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실과 거짓이 엮이지만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가 출간한 작품들이 나오고,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감상평을 말한다. 타로 점을 보는 장면과 현실적 고민이 만나는 순간 또 꼬인다.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 능청스럽게 풀려나가는 꼬리를 문 이야기들이다. 어느 순간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관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황당함은 더 거대해진다. 이상의 시를 패러디한 시와 장면들은 잠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장면들 속에서 다중우주의 가능성은 닫지 않는다. 나중에 작가의 다른 책을 읽으면 왠지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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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소설 쓰는 일에 소명의식을 느낀 적도 없고 소설가를 천직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하려는 일이 자꾸 엎어지고 친구마저 줄어드는 상황이라면 현실을 직시할 법도 한데 별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지도 않았고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냥 계속 썼다. 고집하는 장르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일반 문예 소설뿐이었다. 그러던 중 메타픽션에 꽂히는데 친하게 된 작가인 정연금 님이 책 출간을 축하한다면서 메타픽션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해준다. 그건 작가들이나 좋아하지 독자들은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대겸 작가는 메타픽션을 시도하고 있다. 독자 입장에서 독특하고 흥미로운 구성인데 왜 다들 말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새롭고 낯선 시도는 언제나 반항적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마치 비트코인의 첫얼굴이 낯설었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