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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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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2000년부터 2002년까지 사극 드라마 왕언이 방영되었다.물론 왕건은 최수종께서, 견휜은 서인석, 궁예는 김영철께서 배역을 소화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폭군으로 알려진 궁예의 미륵 보사과 관심법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화랑 정신으로 데표하는 통일 신라가 쇠퇴하고, 후백제가 건국되었다. 통일신라는 신라와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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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사극 드라마 왕언이 방영되었다.물론 왕건은 최수종께서, 견휜은 서인석, 궁예는 김영철께서 배역을 소화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폭군으로 알려진 궁예의 미륵 보사과 관심법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




화랑 정신으로 데표하는 통일 신라가 쇠퇴하고, 후백제가 건국되었다. 통일신라는 신라와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나뉘게 된다.그 과정에서, 후삼국시대의 영토 전쟁이 본격적을 이어졌으며, 후고구려 궁예 밑에 있었던 왕건은 포악한 궁예의 그늘 밑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게 된다. 물론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이야기는 태조 왕건 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충신으로서,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장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면서, 고려를 건국한 뒤 개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던 왕건의 일대기가 나오고 있으며, 왕건의 남다른 포용력을 엿볼 수 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그의 리더십 속에서 관대함과 포용력은 남이 해낼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낸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한 뒤,지방 호족을 규합하였던 왕건이 보여준 군왕으로서 보여준 자질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918년 태봉국을 고려가 멸망시키고, 1392년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건국까지, 474년간 고려의 중흥기를 이끒었다.

k*******2 2025.09.2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서평]나는 왕건이다. 삼한일통의 영웅, 왕건리더십
"[서평]나는 왕건이다. 삼한일통의 영웅, 왕건리더십" 내용보기
* 컬처블룸 리뷰단을 통해 책을 증정 받아 직접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후삼국시대의 통일, 혼란한 시대에서 발휘한 리더십과 포용력첫째, 왕건의 가장 큰 리더십은 그의 포용력과 애민정신이었다오래전에 대하드라마 " 왕건"을 통해서 보는 왕건의 리더십과 포용력, 그리고 혼란한 후삼국을 어떻게 통일했는가를 관심있게 봤는데, 그 이후 다시 책으로 보게 되어서 반갑고 역사매
"[서평]나는 왕건이다. 삼한일통의 영웅, 왕건리더십" 내용보기
* 컬처블룸 리뷰단을 통해 책을 증정 받아 직접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후삼국시대의 통일, 혼란한 시대에서 발휘한 리더십과 포용력
첫째, 왕건의 가장 큰 리더십은 그의 포용력과 애민정신이었다
오래전에 대하드라마 " 왕건"을 통해서 보는 왕건의 리더십과 포용력, 그리고 혼란한 후삼국을 어떻게 통일했는가를 관심있게 봤는데, 그 이후 다시 책으로 보게 되어서 반갑고 역사매니아라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역사적인 고증도 잘되어 있고, TV에서 보는 스토리는 생략되어서 온전히 왕건의 리더십 측면에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포인트는 현재 한국의 12.3일 내란 이후 탄핵과 내란잔존세력으로 두고 오랜 친일 후손잔존세력과 내란옹호 세력, 통일교등 종교세력 개입으로 개혁을 해야하며, 또한 개혁의 주체로 국민이 나서면서 분열된 한국을 어떻게 통합하느냐하는 당면과제에 매우 적합한 도서로 여기진다.
리더십의 전개와 발전과 완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도서이다.
왕건은 강건한 후백제와는 맞서면서도 허약한 신라를 돕는 데는 최선을 다하는 억강부약의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실리 외교는 신라인들의 신뢰를 얻고 호족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는 효과로 이어졌다.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증오하던 궁예, 경애왕을 자결하게 만든 견훤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대립적인 궁예의 정책은 귀부하는 신라인을 살해하고 욕보이는 정책이며, 견훤은 경애왕에게 자결케하고 왕비를 강제로 겁탈하는 만행은 많은 신라인의 공분과 거부감을 주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궁예를 이어 임금이 된 왕건은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마진,태봉의 국호를 고려로 칭하므로 고구려유민과 발해유민을 포용하고 고토 수복의 의지와 요동수복의 꿈을 가져왔으며, 적대적인 신라를 포용력으로 무혈입성하고 경순왕의 귀부를 이끌어내게 된다. 바로 이점인 후삼국을 통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왕건의 가장 큰 미덕은 그의 포용력이었다.
견훤의 친부인 아자개, 신라 경순왕, 궁예를 지지하던 명주의 김순식 등이 고려로 귀부해 온 것은 모두 왕건의 포용력에 감응한 것이었다. 왕건은 피 흘려 싸우지 않고도 이들이 가진 영토와 세력을 감싸 안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두번째 리더십은 민생을 생각하고 민생을 위한 정책을 썼다는 점이다. 
그가 궁예와 달리 패서지방의 호족출신으로 유복한 가정환경을 타고 났지만,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뒤에는 민생을 생각하고 통치 철학을 국정 운영에 쏟아부었다. 신라가 골품제도의 한계로 육두품등 귀족세력외에는 모두 소외되면서 인재가 육성되지 않고 , 모두 세습제로 이어지는 국정농단과 무능한 왕과 귀족들의 사치, 가혹한 조세로 망한것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왕건은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조세정책과 구휼정책을 펼쳤다. 후삼국시대에 가혹한 조세와 가난으로 부랑인이나 거렁뱅이, 도적떼가 되는 백성을 다시 제 자리도 돌리는데 애를 썼다.
그 정책으로 관리들에게 조세는 10분의 1만 걷으라고 엄중하게 명했다. 동시에, 봄철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철에 갚도록 하는 흑창 제도를 시행했다. 골품제 사회에서 탐학한 관리와 귀족들로부터 이중으로 착취당하던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자는 취지였다. 
종교적으로 숭불정책을 펴서 오랜 전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종교의 힘으로 보듬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정치를 통핸 애민사상과 종교를 통한 민심의 돌봄은 그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안정시키는 큰 힘이 되었다.
셋째, 적재적소의 인재 영입과 후삼국의 분열을 일통한 혼인정책 
왕건이 가장 역점을 기울인 것은 후삼국의 분열을 하나로 꿰어맞추는 일이었다. 지방 호족들의 통합을 위해 그는 혼인정책이라는을 통핸 끈끈한 호족연대를 이뤄냈다. 스물아홉 명의 부인을 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삼한일통을 위한 포용 정신이 그 바탕에 있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각 지방에 산재한 호족 세력들이 중앙 정부에 연합하는 형태로 협조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왕건은 호족들을 포용하고자 할 때는 폐백을 후하게 주고 도리어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유지하는 중폐비사(重幣卑辭) 정책을 폈다. 호족들이 군사적으로 반발하거나 대항하면 강력한 진압정책을 펼쳤지만 호족들의 협조를 유도할 때는 회유정책을 썼다. 왕건은 진압정책과 회유정책을 병행하면서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고 융화하면서 고려라는 하나의 나라로 이끌어가는 대화합의 경륜을 펼쳤다. 겸양의 정신을 바탕에 둔 결과였다.
왕건은 온유함과 포용력으로 신라와 후백제의 통일하고 분열된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 발해를 통일하는 통치기반과 연합을 이뤄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를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오며 자주적인 외교와 고구려 발해의 기상을 계승하며 진정한 민족통일로 승화시킨, 10세기 전반부의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 통한 이러한 왕건의 리더십이 필요할때이다.
적폐와 친일청산, 검경과 사법부의 개혁, 언론개혁,종교개혁등 산적한 과제가 많다. 이러한 적폐를 신라시대처럼 특정계급의 사익추구와 이에 동조하는 법조카르텔, 언론카르텔등 기득권의 부정부패로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적폐카르텔을 깨고, 진정한 민생이 원하는 개개인의 민생회복, 노력하면 신분상승과 성취할수 있는 경제구조, 헌법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 정신과 법치주의를 살려야할 때이다. 

h******0 2025.09.2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까닭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까닭" 내용보기
견훤과 궁예는 기울어가는 신라 말기에 후백제, 후고구려를 세운 창업 군주였다. 견훤과 궁예는 세력이 커질수록 포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궁예 정권의 2인자였던 왕건은 부하들에 대한 포용성과 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황제국 고려를 개국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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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과 궁예는 기울어가는 신라 말기에 후백제, 후고구려를 세운 창업 군주였다. 견훤과 궁예는 세력이 커질수록 포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궁예 정권의 2인자였던 왕건은 부하들에 대한 포용성과 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황제국 고려를 개국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p******3 2025.08.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