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스타이그의 또 다른 동화다.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마침 최근 본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조약돌>과 내용이 흡사했다. <실베스터>는 작가의 초기작인데 비해 이 책은 최근의 책이었다. 아마 작가에게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가진 주제인가 보다. <실베스터>는 요술조약돌의 힘으로 바위로 변했던 데 비해 솔로몬은 스스로의 특별한 능력으로 못(nail)으로 변한다. 이렇게 어른들의 눈을 피해 뭔가로 변해 숨는 스토리는 아마도 어린 아이들의 판타지를 반영한 듯 하다. 그렇게 어른들 몰래 숨는 재미를 들이다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난관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듯 하다. <실베스터>를 읽으면서도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한 곳에 갇혀있는 장면이 유괴된 느낌을 주었었는데 이 작품에선 보다 확실하게 유괴 모티브를 드러내고 있다. 토끼인 솔로몬 앞에 살쾡이가 (칼까지 들고) 나타나 위협하는 장면이며 못으로 변신한 솔로몬을 갖고 가 우리에 가두는 장면 등은 가뜩이나 험악한 헐리우드 영화들에 찌들은 세상에 동화에서까지 이런 장면들을 보여줘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실베스터>에서는 유괴라는 모티브가 매우 숨겨져 표현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만큼 직접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작가가 어린 시절 이런 일을 겪었던 것일까. |
| 우리는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변신의 욕구는 지독히 현실적이 될 수 밖에 없다. 탓할 수는 없다. 어른이 된 사람이 풍선으로 변한다거나 돌로 변신하기를 바라는 건 흔한 풍경이 아니므로. 그저 우리들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더 열정적이거나 더 성공하거나- 을 종종 바란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 변신의 욕망은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면 그 모양새가 또 달라진다. 아이들도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이기는 하되 지금의 나는 아닌 변신을 꿈꾼다면 아이들은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아주 다른 그 무엇으로의 변신을 꿈꾼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변하려는 욕망 때문에 다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명랑하다. 터무니 없는 변신은 역으로 언제든, 무엇으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동화 속 주인공 토끼는 솔로몬. 아무 생각없이 코 후비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만 녹슨 못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솔로몬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아무 상관없는 듯한 우연적 행동이 만들어 낸 개연성의 결과다.(아, 이 무슨 말장난이란 말이냐.) 아무도 우리가 녹슨 못 따위로 변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녹슨 못이 된 솔로몬의 변신은 의외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우리가 바라는 변신은 목적성이 있다. 변신 그 자체가 아니라 변신의 결과로 생기는 것에 주목을 하는 게 우리가 꿈꾸는 변신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변신에는 목적성이 없다. 그저 변신 그 자체를 좋아하고 즐길 뿐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무엇으로 변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지금의 나와는 생뚱맞은 다른 것으로 확 변할 수만 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즐겁고 뒤집어지도록 신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녹슨 못이 된 솔로몬은 다른 무엇도 될 수가 있다. |
| 이 책을 접한 첫 느낌? 솔직히 말하면 좀 별로 감동적이지않을 그렇고 그런 많은 동화책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이에게 읽어주면서도 별 시시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 소재로 삼는다는 생각, 왜 하필 새못도 아니고 녹슨 못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페이지까지 전부 읽고 난 다음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아하, 이래서 동화작가들은 따로 있구나. 같은 어른이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여전히 아이때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난 육체적인 나이와 더불어 정신적인 면, 특히 동심이라고 하는 상상력과 순수한 면에선 너무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는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는 이야기거리일것 같다. 내가 아이들의 눈높이로 이 책을 처음부터 읽을 수 있었더라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