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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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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 「무진기행」       무진은 안개로 뒤덮인 곳이다. 안개로 덮인 무진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바깥세상은 ‘서울’로 대표되는 대도시로 나타난다. 주인공 ‘나’는 서울을 떠나 무진을 향해 가고 있다. 무진에서 나고 자란 나는 무진을 안개로 기억한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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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 「무진기행」

 

 

 

 

 

무진은 안개로 뒤덮인 곳이다. 안개로 덮인 무진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바깥세상은 ‘서울’로 대표되는 대도시로 나타난다. 주인공 ‘나’는 서울을 떠나 무진을 향해 가고 있다. 무진에서 나고 자란 나는 무진을 안개로 기억한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는 진술에 드러나는 대로, 나에게 안개는 마음을 뒤흔드는 주문(呪文)과도 같이 느껴진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언제나 뚜렷이 존재하는 안개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먼 곳과 떼어놓았다. 이런 무진에 오면 나는 항상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서울에서 벗어났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물론 나는 서울에서 펼쳐지는 무한 경쟁에 익숙한 사람이다. 이번만 해도 주인공은 제약회사 ‘전무’ 자리에 오르기 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무진을 방문했다.

 

나는 새 출발이 필요할 때면 으레 안개에 휩싸인 무진 땅을 밟았다. 무진에 간다고 새로운 용기가 생기고,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이런저런 엉뚱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서울살이와는 상관없는 공상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주인공은 무진에 가면 방안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돌봐주던 노인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독한 담배를 피며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마음 한켠에 언제나 무진을 새겨 넣었다. 서울 생활에 지칠수록 나는 한없이 조용한 무진을 거듭 생각했다. 서울과는 다른 무언가가 무진에는 있었고,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무진에 내려가 몇 날 며칠을 보냈다.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서울에 비한다면, 무진은 이러한 경쟁의식이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6.25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나는 무진에 내려왔다. 어머니는 군대에 끌려갈까 우려해 나를 골방에 숨겼고, 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오욕을 일기로 쓰며 그 시절을 견뎠다.

 

서울에 사는 나는 사실 아내와 장인에게 꽁꽁 묶인 삶을 살고 있다.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은 나를 전무에 앉히려고 한다. 이런저런 일을 좀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장인은 나를 무진으로 내려 보낸다. 오랜만에 온 무진은 언제나 그렇듯 활기가 없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사람들은 처마 밑 그늘에 숨어 강렬한 햇볕을 피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터인 서울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풍경이다. 이모님 댁에서 잠시 낮잠을 잔 나는 신문을 구하기 위해 신문지국들이 몰려 있는 거리로 나온다. 지국에 이모님 댁 주소와 약도를 그려주고 나오다가 나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거만, 출세, 폐병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보면 그들은 아마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무진 중학 출신 중에서는 제일 출세한 인물로 알려진 나를 시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4년 전 나는 경리 일을 보던 제약회사가 다른 회사와 병합되면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사귀던 여자마저 떠나버려 나는 마음이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다. 아내와 인연이 닿으려 했는지 바로 그해 아내의 전 남편이 죽었다. 스물아홉 살 때였다. 이모 댁으로 찾아온 중학 후배 ‘박(朴)’이 고등고시를 패스하고 무진에서 세무서장으로 있는 ‘조(趙)’를 이야기한다. 저녁식사 후 두 사람은 조가 사는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음악교사로 근무하는 하인숙을 만난다. 성악을 전공한 인숙은 그 자리에서 ‘목포의 눈물’이라는 대중가요를 불렀다. 그녀의 노래에는 작부(酌婦)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 꺾임이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에 맞춰 부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인숙이 노래를 끝내자 나는 형식적인 웃음을 띤 채 박수를 친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따라 나온 나에게 박은 속물들 틈에 끼어 앉아 유행가를 부르는 인숙이 좀 딱해 보인다고 말한다. 자기 입장에서 보면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를 타인보다는 순수하게 생각하는 법이니까. 밤이 퍽 깊어져서야 조가 사는 집을 나온 나는 인숙과 함께 거리를 걷게 된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사람들을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사람들과 그녀는 왜 어울렸을까? 심심해서란다. 심심해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이 여자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숙이 갑자기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다는 말을 하며 그녀는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는다. 그러면서 인숙은 정말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나도 무진에서는 살기 싫다고 고백한다.

 

시골(소도시)에 사는 여자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강렬하게 열망한다. 시골은 심심한 곳이다. 활력이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하면 서울은 화려한 스펙터클이 넘치는 곳이다. 늘 안개에 휩싸여 안과 밖을 나누는 무진과는 달리 서울은 사방으로 열려 있는 공간으로 비쳐진다. 무진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형식적인 관계를 맺는 인숙 입장에서 보면, 서울은 무진에서의 심심한 삶을 단번에 없앨 수 있는 매혹적인 장소인 셈이다. 서울에서는 무엇보다 ‘책임’을 중시한다는 내 말에 인숙은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무진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낫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서울은 무진에서 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을 할 수 있는 열린 장소이다. 서울살이를 직접 체험하지 않는 한 ‘서울’에 대한 인숙의 꿈은 사라질 수 없으리라.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 여자는 서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그 여자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문득 그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니, 내 심장에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단 무진을 떠나기만 하면 내 심장 위에서 지워져 버리리라.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낮잠 때문이기도 하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모 댁에 들어온 나는 서울로 가고 싶다고 외친 여자를 생각한다.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온다. 서울에는 능력 있는 아버지를 둔 아내가 있다. 서울에 사는 아내는 서울로 가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이 여자의 마음을 과연 이해할까? 아내가 서울에 있다면, 인숙은 무진에 있다. 서울로 다시 올라가면 나는 ‘전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서울 땅을 밟는 순간 무진에서 일어난 일들은 자연스레 잊을 것이다. 인숙은 나에게 한순간 스쳐가는 여자일 뿐이다. 하룻밤 충동을 해소하는 대상으로서 여자. 이것은 저수지에서 자살한 술집 여자를 보며 이상스레 정욕을 느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성공한(?) 남자들에게 여자는 성기(性器) 하나를 밑천으로 배짱을 부리는 ‘도구들’이다. 조는 나에게 인숙이 바로 그런 여자들을 대표한다고 단언한다. 고시에 패스한 조는 나처럼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 처가 덕을 보며 사는 삶을 소망한다. 그런 그가 집안이 허술한 인숙을 결혼상대로 생각할 리는 없다.

 

나와 다시 만난 인숙은 여전히 서울 타령이다. 서울만 가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에게 서울은 텅 빈 장소와 같은 곳이다. 어떤 의미도 채워 넣을 수 있는 장소. 달리 말하면 서울은 그녀에게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머릿속으로만 그릴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나는 어느 해던가, 더러워진 폐(肺)를 씻어내기 위해 찾았던 셋방 집으로 인숙을 이끈다. 그때 나는 밤바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홀로 아픈 몸을 견뎠다. 그때 쓴 편지를 지금 읽는다면 나는 과연 밤바다에서 들려오던 애처로운 울음소리와 공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공명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왜 그때 그런 편지를 썼느냐고? 기분 탓이 아닐까. 폐가 나빠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비애를 나는 다만 ‘바닷가’라는 변방의 장소에서 새삼 느끼려고 한 것. 서울로 올라가면 금방 사라질 형식적인 감정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집 주인 부부는 반갑게 나를 맞는다. 예전에 내가 머물던 방에 들어간 두 사람은 이내 하나가 된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여자는 칼을 들고 조바심을 치고, 남자는 그 칼을 빼앗듯이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는다. 무언가를 뺏고 빼앗기는 관계에 사랑이 있을 리 없다. 여자는 서울로 가기를 원하고 남자는 하룻밤 욕정을 풀 대상을 원한다. 내가 이 상황을 아무리 미화해도 두 사람이 만든 도구적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바닷가로 나오자 인숙이 갑자기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서울에 가고 싶은 마음과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중 무엇이 진실일까? 아마도 둘 다 진실일 것이다. 무진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여자가 서울에 간다고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는 외로움이 싫어 서울로 가려고 하지만, 그곳에 가더라도 운명과 같은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서울에서는 벌일 수 없는 일을 무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 있다. 서울로 가면 그는 ‘전무’라는 가면을 쓰고 부잣집 딸인(그래서 능력 있는) 아내와 살아야 한다. 인숙이 해줄 수 없는 것을 아내는 해줄 수 있다. 아내가 해주는 것을 받으려면 나는 서울에서만큼은 아내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國語)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는 진술에 인숙과 아내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의 면모가 뚜렷이 드러난다. 나는 이러한 갈등이 무진이라는 안개 지역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감상적인 해석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헤어지면서 여자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계획이라고 내게 말한다. 나는 진실인 듯 아닌 듯 결국에는 서울에 같이 올라갈 거라고 농담처럼 대답한다.

 

다음날 늦은 아침 서울에서 전보 한 통이 온다. ‘27일 회의 참석 필요, 급상경바람 영’이라는 내용이 적힌 전보다. ‘영’은 아내 이름이다. 27일이면 모레다. 이틀 후면 나는 서울에 있어야 한다. 아내가 부친 전보를 보자 무진에서 자신이 벌인 일이 명료하게 그려진다. 전보는 내가 무진에서 벌인 일을 여행자에게 잠시 주어진 자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이 여행자가 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하지만, 그것을 마냥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전보와 타협한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무진에서 벌인 무책임한 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긍정하고 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전무’라는 가면이 보장된 서울의 삶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 그는 전보의 눈을 피해 인숙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에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에 인숙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제대로 나타난다. 그는 무진과 서울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숙을 통해 예전 자신을 본다. 나와 인숙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준비가 되면 서울로 부르겠으니 꼭 와 달라는 말로 나는 편지를 맺는다. 아내와 인숙을 동시에 품으려는 이 욕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나는 편지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무진을 떠난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본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분명 무진에서 세무서장 조와 같은 속물들과 다르지 않은 일을 벌였다. 조는 자신이 속물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사랑’이니 하는 달콤한 말로 제 행동을 합리화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어떤가? 인숙과의 짧은 만남에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서울과 무진 사이에서 서성대는 인숙을 보며 한없이 아팠던 자신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이미 지난 청춘의 대용물로 인숙을 선택했다. 나는 인숙을 통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철저한 나르시시스트라고나 할까. 서울에서 가면을 쓰고 산 것처럼, 무진에서도 나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러면서 나는 무진에서 쓰는 가면을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인숙과 벌인 일을 내가 ‘사랑’으로 합리화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서울로 가기 전 무진에서 일어난 일을 마지막으로 긍정하려는 마음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무진을 떠나 나는 이제 서울로 간다. 속물들이 무한 경쟁을 벌이는 서울에 가면 나는 아마도 무진을 잊고 서울 생활에 무난히 적응을 할 것이다. 부잣집 아내와 적절한 거리를 두며 때에 맞춰 ‘사랑’이라는 말을 주억거리며 행복하게(?) 살 것이다. 무진이라는 또 다른 장소를 안개 속에 꼭꼭 감춘 채 사방으로 열린 서울이라는 공간에 자신만의 성채를 세울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나는 무진을 어떻게 기억할까? 여전히 무진에 살고 있을 인숙을 그는 또 어떻게 기억할까? 나에게 무진은 맨얼굴이면서 동시에 그 맨얼굴을 교묘하게 가리는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전보를 받고 무진을 떠나는 그날, 나는 이제 더 이상 맨얼굴로 무진과 대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돌려 말하면 나는 인숙을 통해 무진의 맨얼굴(청춘 시절이라고 해도 좋다)을 마지막으로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이 맨얼굴을 긍정함으로써 나는 부잣집 아내가 있고, ‘전무’라는 가면을 쓸 수 있는 서울로 기꺼이 복귀한다.

 

무진을 떠나면서 내가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은 그러므로 자신의 맨얼굴과 더 이상 대면할 수 없는 상황을 직관한 자가 느끼는 한없는 슬픔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내가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올라가려는 마음을 먹은 순간, 내가 지닌 또 다른 얼굴인 인숙은 저 멀리로 사라져버린다. 이리 보면 나는 정말로 인숙을 사랑했을 수도 있다. 단, 그 사랑은 무진에서만 가능한 일회용 사랑이다. 서울의 삶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매개로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니 말이다.

 

인숙을 사랑함으로써, 동시에 그런 인숙과 헤어짐으로써 나는 폐병으로 떠오르는 청년 시절의 낭만과 완전히 결별한다. 완전한 속물이 되는 길로 비로소 들어선 거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다. 무진이라는 한없이 익숙한 장소는 이렇게 내게는 한없이 낯선 공간이 되어버린다. 이제 무진이라는 무의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서울이라는 낯설지만 익숙한 의식이 채워진다. 무진과 청춘과 인숙은 그렇게 시간 저 너머로 덧없이 흩어진 것이다.

 

 

o*****s 2019.12.0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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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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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유자약전 조용한 강 20세기 한국소설 19 김승옥, 백인빈, 이제하 지음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중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등과 이제하의「유자약전」, 「초식」,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백인빈의 「조용한 강」등을 수록했다. 그 중에서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중점적으로 읽고 감상을 적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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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유자약전

조용한 강

20세기 한국소설 19

김승옥, 백인빈, 이제하 지음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중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등과 이제하의「유자약전」, 「초식」,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백인빈의 「조용한 강」등을 수록했다. 그 중에서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중점적으로 읽고 감상을 적어보았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64년 겨울의 서울이다. 1964년이라고 하면, 우리 아빠가 태어난 해인데,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이야기인 만큼 내가 그 상황을 이해하기는 좀 힘들었다.

'나'와 안 씨 성을 가진 청년은 둘 다 스물다섯 살로, 선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어쩌다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는 자세한 정황이 없지만, 아마 초면인 상태로 예상이 된다.

아무튼 둘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술집에서 나가기 위해 계산을 하려던 중에, 한 서른 중반의 힘없는 아저씨가 함께 가도 되냐면서 말을 걸고, 결국에는 셋이 동행하게 된다. 그 남자는 아내가 오늘 낮에 죽었고,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아내의 시체를 팔고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돈을 다 쓸 때까지 오늘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중국요리로, 넥타이로, 귤로, 택시비로 쓰고도 남은 돈은 불타고 있던 화재 현장에 버린다.

여관에서 셋이 각방을 써서 자고난 그 다음 날, 결국 아저씨는 자살하고, 남은 둘은 여관을 도망쳐 나오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차분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안 씨 성의 청년이 아저씨를 계속 귀찮아하고, 자살할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각방을 쓰자고 한 것이 최선의,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둘러대는 것 같다. 아저씨가 죽은 걸 알게 되자 그에 대해 욕하는 이 소설의 '나' 또한 그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고 기리기보다는 그 전에 그에게 갖고 있던 경멸심을 내보이는 것 같아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무슨 말을 전하려 하는지는 명확하게 추측이 안되지만, 이 두 사람의 냉정함에 대해서가 아닌지 생각된다. 마지막에 안 씨 청년이 뭔가 곰곰하게 생각했다는 대목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2015.5.26.(월) 이은우(중2) 

i***2 2015.05.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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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울, 멘붕의 역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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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기저기서 '멘붕' '멘붕'이라고들 한다. 멘탈(정신)이 붕괴되어 허무하고 멍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어떤 종류의 기사나 SNS 쪼가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어김없이 하나의 구심점을 만나게 된다. 18대 대선 결과. 너무나도 추운 이번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드는 동시에, 이 추위를 잊게 만들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막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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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기저기서 '멘붕' '멘붕'이라고들 한다. 멘탈(정신)이 붕괴되어 허무하고 멍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어떤 종류의 기사나 SNS 쪼가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어김없이 하나의 구심점을 만나게 된다. 18대 대선 결과. 너무나도 추운 이번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드는 동시에, 이 추위를 잊게 만들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막 한 달여가 지나가고 있지만, 마치 일 년이 지난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이번 대선 이후의 한 달이 길게 느껴졌다는 반증일까.

연말과 연초를 즐기며 마시는 술 한 잔. 하지만 서로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대선 결과의 허무함만을 얘기하고 있다. 추운 겨울에 공허한 공기를 안주삼아 의미 없는 고성만 오고갈 뿐이다. 멘붕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종류의 멘붕이라면, 예전에 비교도 되지 않는 큰 놈이 덮쳐온 적이 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1948년 건국이 되고,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1953년 전쟁이 (잠정적으로) 끝나고,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일어나고... 1961년 이후 18년간 우리나라에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4.19의 실패와 5.16으로 멘붕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이런 정신의 연속적인 붕괴 위에 세워진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흔히 이 소설에 나오는 세 사람을 두고, 현대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절망과 권태에 빠진 비극적인 인물의 상징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이들은 서울의 한 선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술 한 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이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영보빌딩 안에 있는 변소 문의 손잡이 조금 밑에는 2센티미터 가량의 손톱자국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아주 무의미하고, 편집증적인 집착이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 그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필요했을까?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너무 힘들거나 슬플 때, 그 상황을 잊으려고 광적으로 일에 집착하거나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말이다. 60년대 서울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런 집착이 위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일종의 '힐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 이 소설이 단순히 현대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와 닿지는 않을 거라 생각된다. 김승옥의 의도는 그랬을지 몰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일단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두는 소설을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소설은 시대가 변해도 영원히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1964년 겨울>은 좋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2013년 1월 현재의 상황에서 이 소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일단 소설의 배경을 볼 것이다. 1964년 겨울과 서울이 가지는 의미. 앞서도 말했듯이 1960~1964년까지 일련의 중요 사건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실패, 성공, 실패했는데 혁명과 투쟁은 실패했고 쿠데타는 성공했다. 소설의 배경인 1964년 겨울은 투쟁의 실패 직후인 것이다. 서울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당시 서울은 온갖 욕망이 폭발할 듯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온갖 물산과 자본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만큼의 고독과 외로움도 생겨났다. 그 속에서 누구는 도태되었으며 절망에 몸부림쳤다. 이 소설의 세 주인공은 그런 사람들을 대표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모습을 투영한다. 일단 굳이 서울일 필요가 없다. 이미 전국이 욕망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2012년 겨울은 어떠한가?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던, 48% 사람들이 극도의 허무함에 빠져있다. 물론 이보다 많은 51%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이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세 사람은 술을 마시며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했을까? 이들도 편히 쉬길 원한다. 그래서 여관을 찾아 나간다. 도중에 맞닥뜨리게 되는 화재 현장. 모든 걸 집어삼킬 것만 같은 그 불길 속으로 서적 외판원이 돈뭉치를 던진다. 그 돈은 뇌수막염이 걸려 죽은 그의 아내의 시체를 팔아 받은 돈이었다. 그의 그런 행동은 나와 안이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절망과 허무를 이겨내려 한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들의 절망의 성격이 서로 다르듯이, 그들 간에 소통은 완전한 부재에 가깝다. 서로 대화는 하고 있지만 통하지는 않고 있다. 좌절과 절망의 시대에서 소통은 사치에 불과할지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통 활성화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이유는, 사치에 불과한 소통 자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적 외판원의 절망은 나와 안의 절망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현실적인 절망으로, 지금 우리네 이웃에도 존재한다. 가난에 찌들어 아내의 시체를 매장해주지 못하고 외려 팔 수 밖에 없었을 그의 모습을 보고도, 어떤 감정의 변화도 느끼지 않는 나와 안의 모습도 우리네 이웃에 존재한다. 모두가 피해자고, 모두가 가해자이다. 나는 어디에 해당할까?

나와 안은 서적 외판원의 자살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에 올라타 있었다. 다만, 간신히 매달려서 편안하지 못했을 뿐. 외판원의 자살에도 이들의 심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이들은 불과 25살이었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와 25살의 이들 모습. 2010년대와 75살의 이들 모습. 그리고 그의 후예들. 예전 25살의 나를 보니, 소름이 돋는다. 이들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기에.



YES마니아 : 로얄 a***3 2013.0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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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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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더운 날이면, 오히려 차가운 소설이 끌린다. 뜨거운 날씨에 사람들의 머리까지 달구어지는 그때 나는 이 옛날 소설들을 꺼내든다. 이 소설 모음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서울, 1964년 겨울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아니오.” 나는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주인공은 모르는 사람과 합석을 하며 술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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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더운 날이면, 오히려 차가운 소설이 끌린다. 뜨거운 날씨에 사람들의 머리까지 달구어지는 그때 나는 이 옛날 소설들을 꺼내든다. 이 소설 모음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서울, 1964년 겨울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오.” 나는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주인공은 모르는 사람과 합석을 하며 술자리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자신의 이야기를 의심받기도,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도 하며 그는 담담히 서울의 밤을 즐긴다.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 있습니다만……”이라고 그 사내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힘없는 음성으로 봐서는 꼭 끼워 달라는 건 아니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나와 안은 잠깐 얼굴을 마주 보고 나서,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이라고 내가 말했다.

“함께 가시죠.”라고 안도 내 말을 이었다.

 

어쩌다 주인공과 안이라는 인물은 한 남자와 술을 마시러 가게 되는데, 여기서 이상하고도 섬뜩한 일들을 겪게 된다. 이 무리는 여러 곳을 방황하며 남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자는 기구한 삶을 산 자로,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고 그 돈으로 주인공과 안과 함께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게 된다. 주인공은 이때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무언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상관없다고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은 더 깊게 생각하고 동정하기에는 너무 술에 취해 있다.

작품 내에서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술자리 장면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술자리는 더없이 가볍고 허무하다. 결국 남자는 그렇게 처절하게 번 돈을 불 속에 던져 버리고 여관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그를 두고 주인공은 도망친다. 주인공이 여기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죽은 남자의 삶에 관여할 권리는 없다.

 

“어떤 꿈틀거림이 아닙니다. 그냥 꿈틀거리는 거죠. 그냥 말입니다. 예를 들면 ……데모도 …….”

“데모가? 데모를? 그러니까 데모…….”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라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을 지어서 대답했다.

 

그 시대 서울은 지금처럼 아주 바쁘고 정신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판자촌과 신식 건물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무언가 새롭게 지어지면 그만큼 무너지기도 하는 그런 도시. 이 소설에서도 그런 ‘꿈틀거림’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온다. 어떤 꿈틀거림이 아니라 그냥 꿈틀거리는 것. 마치 지렁이처럼 작은 존재를 가진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 많은 장소의 이동과 장면의 전환으로 인물들의 심리변화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서울과 그런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은 소설이라 생각했다. 난 서울에 갈 때마다 이 소설을 생각한다. 복잡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이지만 더없이 외로운 서울. 1964년이나 2016년이나 비슷한 것 같다.

w*******5 2016.08.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