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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존의 문제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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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느 덧 가을의 입구에 와 있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정도 가을의 서늘한 바람에 숨을 돌리고 있습니다. 계절의 옷이 갈아 입혀지는 이때에 내 마음도 한 권의 책으로 새 옷을 입습니다. 며칠 전부터 손에 쥐고 놓지 못했던 책,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이 친절하고 고마운 손길로 이 일을 해 주었습니다. 감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세상, 그래서 더 황량하게 느껴지는
"인간 실존의 문제 앞에서" 내용보기
시간은 어느 덧 가을의 입구에 와 있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정도 가을의 서늘한 바람에 숨을 돌리고 있습니다. 계절의 옷이 갈아 입혀지는 이때에 내 마음도 한 권의 책으로 새 옷을 입습니다. 며칠 전부터 손에 쥐고 놓지 못했던 책,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이 친절하고 고마운 손길로 이 일을 해 주었습니다. 감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세상, 그래서 더 황량하게 느껴지는 삶의 한 복판에서 만난 사유의 오아시스, 이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음미하면서 나는 살아 있는 한 인간임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잘 풀려지지 않는 인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잊고 살다가 다시 이 문제를 끄집어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나 자신의 인간됨을 부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언가 명확하게 인간됨을 정의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짊어지고 오던 나에게 소세키의 소설은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직면하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작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진실과 거짓을 오가며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누구하나 승자라고 할 것 없는 싸움판에서 그래도 기어이 타인을 이겨 내려는 각고의 노력은 그 자체가 가련하게 보이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로 서약된 부부관계에서 조차 컵 안에 담긴 물과 기름처럼 섞여지지 않는 이질감을 느끼게 될 때, 나는 ‘아, 세상 어느 곳에서 진실한 관계를 찾아 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인간관계의 이질감은 허구의 세계 뿐 만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에서도 사실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자매 간에도, 친구 간에도 좀처럼 진실은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이 소설이 말하는 인간관계의 사실입니다. 금전의 문제가 개입되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인간관계도 쉽게 허물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서 이것은 또 얼마나 현실 세계와 닮은 모양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이 담고 있는 허구적이지만 사실적인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더욱 현실감 있게 인간과 인간 사회를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인간의 부조리한 현실성이 인간 안에 뿌리 내리고 있는 선천적인 도덕률마저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더욱 날카롭게 대립되는 갈등을 느끼며 말입니다. 사랑이 느껴질 법도 한데, 묘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어느 구석에서도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모두가 다 사랑인 곳이지만 작가의 날카로운 펜으로 그려지는 인간 세상에는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빠져 나와서 현실의 나를 볼 때, ‘나는 과연 이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작가가 너무 의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소설의 주인공들과 등장인물들은 계산적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 말 속에도 상대를 염두에 두어두고 자신이 빠져 나갈 자리를 찾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이렇게 설왕설래하는 이들의 얽힌 관계 속에서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는 차가운 비수들은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각자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결국 상처뿐인 인간들이 거기에 남을 뿐입니다. 이렇듯 치명적인 전염성을 지닌 인간의 고통은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는가?’, 또 ‘어떻게 하면 이런 비참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리 알고 읽긴 하였지만 그 해답에 대해 작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소설을 침묵하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이고 극적인 상황에서 이 소설은 다시 원점으로 나를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미완성의 침묵이 장엄한 미사곡처럼 내 영혼을 울립니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이니 받아들여라.” 온 인류의 합창 소리와도 같이 고막을 찢어내는 듯한 이 소리가 들리고 또 들립니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 나갈 구멍을 찾는 나를 막다른 길목에 몰아넣는 실존의 메시지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합니다. 막다른 인간의 실존을 직면하는 것이 고통이라면 그런 인간에 대해 무지하고 둔감한 것은 더 큰 고통이라고……. 그래서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실존을 끌어안습니다. 아, 입에는 단 한 모금 사유의 물이 영혼에는 이렇게 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 아니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반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흐릿하게나마 깨닫게 되는 건, 인간의 문제는 빛과 어두움으로 양분하여 해결되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빛 안에 존재하는 어두움과 어두움 안에 존재하는 빛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이 어려운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은 참 묘한 소설입니다. 단순함 속에서 복잡함을, 가벼움 속에서 무거움을, 현실 속에서 이상을 보여 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도 진실, 진리가 부르는 그것은 그리 먼 곳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소한 내 일상 속에 떠다니는, 특별할 것 없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진실은 무디지 않은 이성의 눈으로 보려고 하면 언제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인간 내부의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현미경을 통해서 나는 다시금 나로부터 시작되는 문제를 겸허히 인정하며 유심히 관찰할 결심을 해 봅니다. 비록 내 생의 전부를 다 바쳐도 풀 수 없을 오래된 문제이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최대한 인간 자신이 되어 보려고 애쓸 마음을 먹습니다. 책을 덮는 내 손길에 느껴지는 이 따뜻한 절율, 이것을 고이 간직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새로이 시작하고픈 바람을 품으며 다시 나는 시작하려고 합니다.
m*********n 2005.09.2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