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품인 007 시리즈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이 책에 그려내는 스파이의 세계는 음산하고 암울한, 실제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철의장막 쪽의 첩보체계를 분열시키기 위해 투입되는 주인공 리머스의 모습은, 어찌보면 영화 '이중간첩'의 한석규와 비슷한 분위기입니다(연도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작품 내에서의 묘사는 이야기 중심 줄기의 행동과 심리 상태에 극히 치중되어 있으며, 흐름과 관계없는 설명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관계없어 보이던 사건과 행동들이 나중에 모두 거미줄처럼 얽혀서 끌려나오는 점에서 추리소설의 스타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흐름과 문체는 하드보일드하게 전개됩니다. 40년 정도 된 작품인지라, '냉전'이라는 현재와 괴리가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지금 읽어도 감탄이 나올 만한 명작입니다. 막판에는 나름대로 반전의 묘미도 있습니다(중간 즈음에 눈치채 버렸지만). 액션 활극이나 풍부한 감정 표현이 아닌, 절제된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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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을 세 가지 판본으로 가지고 있다. 모 출판사의 문고판으로 처음 샀는데,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도중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 출판사 자체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데, 아쉬운 일이다...). 그리고 곧장 외국으로 이사를 와서, 원서를 샀다. 그 얇은 책을 몇 날 며칠이나 낑낑거려가며 결국 읽었고, 강하게 남는 여운에 한동안 잠겨 있었더랬다. 최근 지인이 한국에 들를 일이 있다 하길래 이 책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열린책들의 번역이라면 믿을만할 거라는 믿음에서다. 그래서 어제 책을 받았고, 단숨에 읽어냈다. 이 책과는 인연이 참 길기도 하구나 싶다.
이 책의 줄거리야 워낙 유명하고, 또 자칫하면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도 있고 하니 나까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냥 번역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사실 그 동안 엉망진창의 번역에 화도 많이 나고 실망도 많이 해 본 터라, 앞으로는 차라리 원서를 읽고 말겠다고 포기 아닌 포기를 하던 참이었다. 왜 좋은 우리말글을 놔두고 외국어를 가지고 고생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함량미달의 번역자들은 독자들에게 미안한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역시 우리글로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축복에 다름없다. 특히 좋은 번역자에 의해 잘 번역된 책은 보배나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니 번역자 김석희씨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원서로 읽었을 때 이런저런 맛깔나는 문장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떻게 하려나 싶었던 문장들이, 에누리없이 똑 떨어지는 적확하면서도 세련된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존 르카레의 문체가 그 이야기 전반이 그러하듯 건조하면서도 냉정한 그런 문체였는데, 그런 문체의 스타일까지 그려낸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혹 두 세가지 실수가 있었지만, 오타 수준 정도의 그런 실수는 이 멋드러진 번역에 큰 흠결이 되지는 않을 듯 하다 (사실 그런 류의 실수는 편집자가 잡아줘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편집자들이 어지간해서는 김석희씨의 번역에는 손을 안 댄다더니 정말 그랬던 것일까?). 특히나 내가 이 책에서 고마웠던 건, 작가의 1989년 후기까지 번역을 해 주었던 것이다. 소설 부분은 그래도 어떻게 읽어 내려갔는데, 이 후기(원서에는 서문 형식으로 달려 있다)는 전문용어가 너무 많아서인지 도통 아리송했었더랬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작가의 진지하고 절박했던 고민이 전해져서 참 좋다.
리뷰글에 보면 번역에 대해 불평하는 글들은 많이 보았는데, 번역이 잘 되었음을 추켜올리는 글은 많이 못 본 것 같다. 뭐 그만큼 좋은 번역이 드물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좋은 번역에 대해서 나름대로 보상이 되어야 번역자들이 일할 맛이 나지 않을까. 내가 뭐 어떻게 보상을 할 방법은 없겠으나, 부족하나마 리뷰에서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훌륭한 책을 훌륭하게 번역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