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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남자 시코쿠에는 덜떨어진 오리를 키우는 자들과 흔들리는 성 정체성에 달뜬 수치심을 통렬히 토로하고 혼돈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모호한 인간 군상들이 살고 있다. ‘사성장군 협주곡’에는 별을 네 개나 달고도 여전히 별을 잉태한 범죄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 이 시집을 손에 쥐고는 마치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암호 같은 이 책에서 뭔가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어디를 가든 가방 속에 쑤셔 넣고 다니며 읽기를 반복했다. 퇴근 무렵의 혼잡한 전철 속에서도 미친 세상에 정신을 처박았다. 몇 날 비가 내리던 때 하늘은 죽은 고양이들 시체로 그들먹해졌고, 죽은 여자가 자신의 장례식에 갈 수 없어 욕을 해대는 미친 세상을 거닐며 혼몽해져 있었다. 가족은 해체되었고, 꿈속은 모든 것이 섞이고 뒤집혔고, 외로움과 고독은 정신착란으로 별세계를 구축했다. 원초적 이질성으로 흔들리는 성 정체성과 해괴한 성도착증자들이 구조 안에서 위태롭게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현재 이성의 구조물 안에서 그들의 자리는 갇히고 막힌 채 비좁았다. 시인은 아무런 단서도 의미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내가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무엇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성이 규정한 것 안에 우리가 모두 포함되지 않았다. 포함되지 못한 것들은 이성의 밖에서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없는 단서들을 쫓으면서 시인이 만난 시심을 찾았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었고, 오래전에 본 게이에 관한 영화 메종 드 히미코를 생각했다. 동화에서 만난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를 기억하려고 했으며, Yo La Tengo의 last days of disco를 들었다. 그리고 ‘비의 조지아’에서 Brook Benton의 rainy night in georgia를 들으며 보이지 않는 이 시코쿠의 세계가 품은 비수를 느낄 수도 있었다.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 이쪽은 춤추고 저쪽은 눈물바다지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깐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e 부분) 그러나 엘리스는 미친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체셔 고양이가 말한다. “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거든.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어.” “네가 미쳤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넌 틀림없이 미쳤어. 안 미쳤으면 여기에 왔을 리가 없거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중) 여장남자 시코쿠가 사는 세상은 바로 우리가 사는 그 세상이다. 저쪽은 미쳤고, 이쪽은 안 미쳤다. 그러나 저쪽도 이쪽도 한 세상이다. 체셔 고양이는 내게 “너도 미쳤어”라고 말하고 웃음을 남긴 채 사라졌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 도무지. 시인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괄시당하는 그래서 영혼을 잃어가는 존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성으로 지어진 세상에 비이성으로 이성을 뚫고 나아가려는 존재들에 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을 지우려고 할수록 우리 자신 또한 영혼을 잃어가고 지워질 수밖에 없는 그 모호한 일면을 와중에 드러내놓고 있을 뿐이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시대의 완강한 질서에 대한 부정적 몸짓이었다면 황병승의 이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는 현재의 주류의 질서에 대한 비주류의 존재 표현이다. 이성이 이성을 잃어가는 세상에서 범죄는 극악해지고 있다. 성범죄는 시코쿠의 세상만큼 아니 그 이상 이해를 가릴 수조차 없어졌다. 신문과 뉴스는 그러한 범죄 사건들로 우리를 격정으로 휘몰아 분노케 하고 있다. 사형 제도를 부활시키고 법적 구속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울분을 통탄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위험에서 지켜내는 것일까. 그렇게 저들을 묻는다 해도 그들이 묻히는 세상 또한 같은 세상이다. “이 세계는 병원과 감옥과 지하실과 무의식과 환상을 ‘타지’로 밀어내는, 그 지속적인 타자화를 통해서만 존속하는 거대한 학교이다.” 이장욱 시인의 작품 해설에 있는 이 말처럼 우리가 그들을 밀어내고 그 밀어내는 자리들은 확장되어 갈 것이다. 현재의 세상은 점점 타자화를 양성해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중세에 광인의 개념 폭이 노인과 부랑자 또는 가난한 자들까지를 포함하는 확장된 의미였다면 근대의 광인의 개념은 그 폭을 대폭 줄였었다. 그러나 현재의 타자화는 주류와 비주류라는 확고한 분리를 통해 광인을 양성해내고 있다. 비이성은 이성을 위협하는 존재일까? 우리가 이성이라고 규정한 테두리는 과연 정당할까? 이성의 정당성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의 이성은 어느 시점에 규정되어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에 적당한 폭과 깊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현재 우리가 새롭게 이성의 확장을 꾀해야 하는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어버이날 아버지를 뵈러가던 전철 안에서도 내 손에는 이 시집이 있었다. 이해를 막아서는 낡은 이성을 힘겹게 밀칠 때, 정오의 햇살이 창으로 쏟아지던 한가한 전철 안으로 손님이 없어 하릴없이 열리고 닫히던 문으로 민들레 씨 하나가 냉큼 들어왔다. 그리곤 어안이 벙벙한 듯 반들거리는 전철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쩌자고. 여장남자 시코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우리가 밀쳐내고 타자화시킨 존재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이쪽과 저쪽에서 살고 있다. 원하지 않았던 뜻밖의 장소로 몸을 들여놓은 민들레 씨처럼 우리는 뜻밖의 상황을 만나게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규격화시켜놓은 이 구조 안에서도 뜻밖의 상황은 언제나 생겨나고 있다. 다시 열리는 전철 문으로 민들레 씨가 내렸을까. 부디 흙 한 줌이라도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여장남자 시코쿠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낡은 이성에 발목을 잡힌 채 힘겹게 시집을 다시 들춰 미친 세상으로 들어갔다. 체셔 고양이는 예의 그 웃음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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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작년이었다. 이 시집에도 실려있는 '부드럽고 딱딱한 토슈즈'였는데, 그런 시를 접한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 만난 황병승 시집에는 '부드럽고 딱딱한 토슈즈'보다 더 매력적인 시들이 많이 있었다. 거침없는 문장들이 마치 빨리 달려가는듯 가득 쏟아져나왔다. 황병승 시인만의 독특한 상상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에게는 좀 난해한 시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런 속도나 거침없는 문장들과 시인만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재미있고, 어느 정도는 통쾌하게 시집을 봤다. 황병승 시인의 다음 시집이 더욱 기대된다. [인상깊은구절]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뒤로 걸을까 봐요//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입술을 뜯어버리고/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