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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 강화도조약 Ominous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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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의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진출에 대한 야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지방 영주와 무사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 역시 내가 생각하기에는 임진왜란과 비슷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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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의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진출에 대한 야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지방 영주와 무사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 역시 내가 생각하기에는 임진왜란과 비슷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 강화도조약 Ominous]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나에게 무척 흥미로웠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역사이지만, 일본의 이러한 행태는 고대 시대부터 반복되었고, 1900년대에는 아예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야 했음을 상기한다면 오히려 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태정관 제도(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서 태정대신과 좌우대신이 존재) 아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한 참의(參議)와 행정부의 부처들로 구성된 내각(성료) 체제를 구축하고 이러한 체제를 중심으로 제도 근대화를 꾀한 것이다. 


1. 사법 개혁 : 1872년 사법성을 중심으로 사법 제도 근대화 추진

2. 교육 개혁 : 1872년 9월, 학제 공표를 통하여 전국의 모든 아동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하면서 소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체제 구축

3. 종교 정책 : 1868년 신불 분리령으로 신도와 불교의 영역 분리, 1871년에는 사찰 소유 토지 반환령 선포, 1873년 기독교 해금

4. 지조 개정 : 전국의 토지를 농지와 택지, 상공업지로 구분하고 전국 일률 과세 표준 확립

5. 군대 개혁 : 1873년 징병령 공표를 통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3년의 병역 의무 부과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개혁은 분명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내부적으로 큰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지조 개정은 높은 세금으로 인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야기하였고, '천민 해방령' 역시 사족과 농민들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불만을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여 주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는데, 문제는 이러한 불만이 정부 내에서도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개혁의 내용은 누구나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했지만, 문제는 그것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고 다가모리는 非삿초(사쓰마와 조슈) 세력을 규합하여 해외 군사 원정까지 계획하고 있었으니 '정한론(征韓論)'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일본 내부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이고의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의 다툼으로 정국의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정한론(征韓論)'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는데, 먼저 '정한론(征韓論)'에 대하여 반대하는 관점을 생각해야 한다. 언뜻 전쟁을 반대하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우선순위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근대화 정책의 우선 순위를 감안하여 나중으로 미루자는 것이지 아예 조선을 공략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정한론(征韓論)'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시점 역시 일본 내부에 근대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은 해외 군사 원정을 통하여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의 역사에서 꾸준히 대륙으로 진출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있었지만, 1870년대 초반의 일본은 그러한 주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한론(征韓論)'은 그들이 진행하던 근대화의 성과를 점검하면서 동시에 내부 단속을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실제로 일본의 민중들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애국자로 치켜 세웠으며 이후 삿초 세력에 의한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자 정부에 대하여 비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 추종세력들인데 영화에서도 그들을 상당히 미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일본 민중에게 사이고 다카모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이후 행보는 이 시리즈의 11권의 '서남전쟁(세이난 전쟁)'에서 다뤄질 예정이다. '정한론(征韓論)'은 그 주요 내용은 조선의 정벌에 관한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일본 내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니 그것이 바로 1874년의 '사가의 난'이다. 이 난은 사가현 출신의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의 주도로 일어난 반란인데, 정국을 주도하던 삿초(사쓰마와 조슈)에 非삿초파가 반기를 드는 양상이었으니 '정한론(征韓論)'은 조선을 정벌하자는 목적 이외에도 일본 내부의 치열한 세력 다툼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사가의 난'은 정부에 의하여 토벌되고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는 처형을 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하던 당시 삿초 세력들이 1년 뒤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다음에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는 역사를 상기하게 된다면 일본 내부의 '정한론(征韓論)'의 실체와 그에 대한 반대 세력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강화도 조약을 이끌어 낸 '운요호 사건'은 어떻게 전개가 된 것일까? 단순히 일본의 배가 포격을 실시하여 이에 놀란 조선이 조약을 맺은 것으로 봐야할까? 이 책에서는 '운요호 사건'을 자세히 다루는데,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먼저 일본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열강과 중국으로부터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점에서 그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1875년 5월, 일본은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완력 행사에 대하여 서양 열강의 양해와 지지를 미리 확보하였다는 점은 훗날 일본이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통하여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을 상기키시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하여 1875년 9월 일본의 운요호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다. 승무원 50명에 암스트롱포 4문을 갖춘 250톤급 포함이었던 운요호는 9월 21일 오전 초지진을 초토화 시키며 무력 시위에 들어간다. 다만 운요호의 전력으로 강화도 상륙은 쉽지 않았기에 영정도 앞바다로 뱃머리를 돌렸고 이후 육전대(해병대) 병력 22명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가에 방화를 저지르고 조선의 영종도 수비대를 공격하게 된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전사 35명, 일본군은 부상 2명이 전부였으며 민가가 약탈당하게 된다. 400명의 조선 수비대가 22명의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것은 당시 일본과 조선의 전력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하여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서 고종이 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이러한 도발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고작 하는 것이라고는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미 일본은 청나라의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고 실제 청나라는 내부적으로 조선을 도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홍장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회담에 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관. 조선은 자주국가로, 일본과 평등하게 교류한다. 서로 존중하고,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 규약으로 영원히 친하게 지낸다.

제2관.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해 양국 예조, 외무성에서 각종 시무를 논의토록 한다. 사신의 주재 기간은 재량에 맡긴다.

제3관. 양국 간 외교 문서는, 일본은 일본 글자로, 조선은 한문으로 작성한다.

제4관. 왜관을 혁파하고, 새로이 개항장을 정한다.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이 사정에 맞게 장사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한다.

제5관. 부산 이외에 두 곳의 항구(원산, 인천)를 더 개항한다.

제6관. 일본 선박의 조선 근해 조난 시, 조선 측에서는 그 구난에 최선을 다한다.

제7관. 조선 근해의 암초에 대한 근대적 해도가 없어 모두에게 위험하기에, 일본 배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측량, 조사할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일본은 개항장에 일본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설치한다.

제9관. 양국 백성은 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다.

제10관. 일본인이 개항장에서 죄를 범하면 일본으로 압송해 재판토록 한다.

제11관. 6개월 안에 별도의 통상조약을 맺는다. (이후 7년여간 조일 무역은 무관세 상태)

제12관. 이상의 내용을 양국은 성실히 이행하고 영원히 준수해 친하게 지내도록 한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으로부터 공격받고 그들과의 외교를 위하여 뒤늦게 [만국공법]을 번역하여 조약을 맺는 데 있어서 대등한 위치를 얻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는데, 조선은 아예 그런 노력조차 없었으니 '조일수호조규'는 대부분 일본의 의도대로 체결된 것이었다. 문구상으로는 특별히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항목은 조선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든다면 조선을 자주국으로 표현한 것은 추후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때 청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해안 측량 조사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제10관의 내용은 치외법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조선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관세의 개념에 대해서도 무지하였기 때문에 무관세를 특별히 문제로 삼지 않았지만, 이는 일본과 조선의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손해였다. 결국 조선은 쇄국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의 첫 등장의 파트너가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불행이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조선 내부의 사정 역시 변화와 갈등이 뒤따르게 되는데, 기존의 수구파와는 반대로 개혁을 부르짖는 젊은 개화세력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국외적으로는 열강의 반열에 들고자 조선에 대한 물리적인 압박을 통하여 결국 '조일수호조규'까지 체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근대화라는 커다른 흐름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이제 쇄국의 빗장을 꺾은 조선은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교가 된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로 치닫게 되었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이러한 흐름을 조선이 아닌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으니 이 시기를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한중일 삼국의 역사는 서로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설명되거나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역사에 대하여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은 시선으로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정확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책으로 그러한 부분을 보완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g*******7 2021.08.12. 신고 공감 21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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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9 :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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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도입부에서 조선과 미국의 치열한 전투를 다뤘다. '신미양요'의 과정 중 벌어진 광성보의 전투는 사실상 일방적인 조선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9]는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에 착안하여 이 역사적인 사건에 또 하나의 제목을 붙였으니 바로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이다. 드라마의 제목에 빗댄 이 부제가 다소 시니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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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도입부에서 조선과 미국의 치열한 전투를 다뤘다. '신미양요'의 과정 중 벌어진 광성보의 전투는 사실상 일방적인 조선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9]는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에 착안하여 이 역사적인 사건에 또 하나의 제목을 붙였으니 바로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이다. 드라마의 제목에 빗댄 이 부제가 다소 시니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신미양요'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더없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병인양요'와 더불어 '신미양요'를 외세의 침입에 대한 저항, 나아가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식으로 다루기도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 민초의 상황과 이후 조선이 겪게 될 운명을 감안한다면 '블러디 선샤인'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 친조선파 K-국뽕 독일인 오페르트, 그는 왜 남연군 묘 도굴과 시신 탈취를 계획했나?

-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의 언플에서 시작됐다? 보불전쟁의 결말은?

- 불평등조약으로 평등조약을 만든다? 청과 일본의 자강두천 수호조약 줄다리기

- 광성보가 조선군의 피로 붉게 물든 그날, 참패는 어떻게 승리로 남게 되었나?

-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령, 번주님들은 왜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순순히 바쳤을까?


 [본격 한중일 세계사 9 :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는 위와 같은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신미양요는 물론 그 일이 일어나기 전후의 전세계의 상황을 잘 정리하여 요약하고 있는데, 이는 신미양요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꽤 광범위한데, 리뷰에는 신미양요에 초점을 맞추고 그간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미국이 조선으로 시선을 돌린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866년 8월, 조선에서 사라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실종 사건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평양의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조선군의 화공으로 불타버렸는데, 미국은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러 루트로 알아보다가 결국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70년 말,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천명하였고, 미국은 이를 계기로 조선의 개항을 목적으로 아시아 함대를 파견한다. 우선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시키고 청을 통하여 조선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하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은 미국의 통교 요청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미국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여 강화도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당시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조선의 상황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알 수 있다. '병인양요'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신감과 독일의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적개심으로 미국과의 교섭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조선의 의도를 확인하고 1871년 5월, 조선 원정 계획을 발동하고 5월 16일에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5월 23일 영종도에 진출한다. 당시 미국의 전력은 해병대 병력 650명을 포함한 1200여 명의 병력과 프리깃 2척, 슬루프 1척, 연함 포함 2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남북전쟁 이후 대대적인 군비 축소로 인하여 당시 조선으로 출병한 미국의 함대는 남북전쟁 때 쓰던 구식 전장포였으며 병력 역시 한양까지 공격하기에는 어림없는 병력이었다. 이는 미국의 원정 목표가 외교에 중점을 둔 것이었으며, 무력은 조선에게 미국의 힘을 과시할 정도였던 것이다. 

 

 영종도 부근에서 정박한 미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외교가 목적이었기에 다시 조선의 관리를 통하여 입경 목적을 알리는 서찰을 보내지만, 5월 31일 주청 미국 공사 로가 조선으로부터 받은 답변은 통교 거부와 함께 철수요청이었으니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871년 6월 1일, 2척의 미국 포함이 손돌목에 진입했을 때, 조선의 포대는 일제 사격을 가하지만 딱히 미국의 함선에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한다. 조선의 주력 대포가 홍이포와 블랑기였는데, 이들 대포는 수백년 전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투를 할 때 사용한 것이었으니 구식무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반하여 미국의 대포는 비록 남북전쟁에서 사용하던 낡은 무기였지만, 조선의 무기에 비한다면 압도적인 화력과 살상력을 갖추었으니 조선은 애초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6월 1일의 첫 교전은 미국이 잠시 물러나면서 종료된다. 그리고, 미국은 다시 서신을 통하여 조선에 통교를 요구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무시하면서 오히려 강화도에 병력을 더 파견하게 된다. 

 

 결국 6월 10일 미국의 본대는 강화도 침공을 개시하였으며 초지진과 덕진진을 간단히 제압하고 해병대를 상륙한다. 그리고, 어재연이 지키는 광성보로 향하게 되는데, 결국 조선은 본토에서 전투를 하면서도 내륙에서는 미 해병대와 바다로는 미 해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니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6월 11일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은 패배하게 된다. 치열했지만 일방적인 전투였다는 사실은 그 결과가 말해준다. 미국은 단 3명이 전사(부상 10여 명)한 것에 반하여 조선군은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을 포함하여 243명이 전사를 하였고, 100여 명 자결, 20명이 포로로 잡힌다. 비록 미국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조선의 처절한 저항에 충격을 받았다. 살아있는 조선군을 포로로 잡으려고 하였지만, 대부분 자결하였고, 조선의 정부는 조선의 포로 교환에 일절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무려 100여 명이 자결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전투에 책임을 지고 지휘관이 자결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의 병사들마저 자결을 한 이 상황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는 당시 조선이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 양인을 악마와 같은 끔찍한 존재로 백성들에게 각인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확실히 조선군과 조선 정부의 대응은 미국의 상식 밖이었다. 전투에 패배했다면 무기를 버리고 포로가 되어야 하는데, 흙과 돌을 던지면서 처절하게 대항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선군과 힘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는 조선 정부의 태도는 미국의 계산에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결국 미국은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애초 조선 원정의 목적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한 후에 외교적인 관계를 체결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조선은 신미양요를 통하여 척화의 의지를 더욱 강화한다. 전국 각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으며 신미양요를 조선의 승리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성적으로 바라본다면 조선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오히려 당시 조선의 기득권은 국가 수호와 척화를 주장하며 내부를 단속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연평해전', '백령도 포격 사건', '천안함 사건'을 정확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쟁점으로 다루고 있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제목과 달리 저자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 좀 더 초점을 맞추겠다고 천명한 시리즈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기에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라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대부분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9권에서 다룬 신미양요를 보면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고대의 역사가 아닌 조선 말기의 이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생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신미양요를 미국의 침입과 이를 격퇴하는 역사로 봐야할지 내부 결속과 기득권의 오판으로 빚어진 핏빛 참사로 봐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는 조선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후자의 평가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1871년 조선의 신미양요. 시기적으로는 3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일본이 메이지 유신 단행과 이후에 보여준 행보를 감안한다면 조선이 미국과 전쟁을 벌인 신미양요를 과연 일본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1871년 일본은 '폐번치현'을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신분제를 폐지하며 중앙군을 조직하며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상황이었으니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격차의 차이는 1875년 강화도에서의 일본의 무력 시위와 이듬해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가 바로 '강화도 조약'이니 그 상세한 과정은 10권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g*******7 2021.08.05. 신고 공감 16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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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 : 서세동점의 시작-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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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재치있는 표현이 돋보이는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서세동점의 시작'이라는 타이틀의 1권은 본격적인 이 시기에 대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중일 역사'에 대한 각국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19세기 이후의 한중일의 세계사를 다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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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재치있는 표현이 돋보이는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서세동점의 시작'이라는 타이틀의 1권은 본격적인 이 시기에 대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중일 역사'에 대한 각국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19세기 이후의 한중일의 세계사를 다루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한중일 세계사'라는 타이틀에 대한 자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타이틀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과연 중국과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타이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왜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동안의 역사책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한 부분이기에 흥미롭다. 물론 그 당위성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책들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보여지는 부분은 누구나 쉽게 그러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라는 점이 돋보인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중일로 표현되는 세계사는 지엽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동아시아의 대국으로서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중국이 맞닿은 국가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인도, 서아시아와 같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중일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할까? 동아시아의 가장 끝쪽에 존재하는 섬나라이기에 우리와 비슷한 관점일 수 있지만, 서양에 의한 근대화가 먼저 이루어지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脱亜入欧)'론처럼 일본의 시선은 아시아 역사의 일부가 아닌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로 향해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일본의 행보는 아시아보다는 유럽과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러한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중일 세계사'는 한국의 시선에 맞춘 비보편적인 관점일까?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으로 하여금 이 시기의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기에 한국은 약소 국가로서 열강의 침략과 더불어 결국에는 일본에 합병되는 암울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암울한 시기가 오히려 한국을 통하여 중국과 일본을 밀접한 관계로 맺어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한중일 세계사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제시한다. 3국의 근대 이후의 역사는 결국 한중일이라는 카테고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기에 한중일 세계사에 대한 3국의 관점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필요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 시기의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라는 점에서 살아있는 역사로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서양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세기 동아시아를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1권은 바로 그 시작점에 대한 배경과 진행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기존의 책들과 달리 색다른 표현으로 그러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면테크 전성시대'라는 소제목을 통하여 영국의 확장을 설명하는 이 부분은 영국의 산업의 발전이 어떻게 중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영국은 면화가 아닌 모직에 주력해 왔다. 면화라는 것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방의 목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이전에 양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직물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섬유라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의 원인 역시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 산업과 관련이 있다라는 부분과 후일 영국에서 발생하는 인클로져 운동 역시 바로 이러한 모직 산업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면화가 수입되면서 영국은 인도로부터 그 원료를 수입하여 그것을 가공하여 수출을 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결국 산업 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면화로부터 실을 얻고, 그 실로 옷감을 짜야하니 자연스럽게 방적기와 방직기가 개발되고, 이로 인하여 점점 공장화가 이루어지면서 영국에는 산업 혁명이 도래하고, 영국이 만든 면직물은 인도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결국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의 면직물에 의하여 자국의 면화 산업이 몰락을 초래하고, 영국은 자신들이 생산하던 면직물을 팔기 위하여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중국에 대한 영국의 무역이 그들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흘러갔다는 점이다. 중국으로부터 차와 비단을 수입하면서 자신들의 면직물을 중국에 수출하려는 그들의 계산은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공장화를 통한 대량의 영국 면직물이 중국에 대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여 충분히 자신들의 수입을 만회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으나, 인도와 달리 중국의 면직 산업은 비록 가내 수공업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막대한 인구를 감안한다면 그 생산량은 영국의 생산량을 초과함으로써 오히려 저렴하였기에 영국은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러 나라들로 분리되어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인도와 달리 중국은 청나라에 의한 강력한 중앙 집권화로 인하여 기계로 면직물을 생산하던 영국을 가내 수공업으로 오히려 압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무역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하여 영국은 바로 아편을 생각해낸다.

 

 사실 아편전쟁은 역사상 가장 비도덕적인 전쟁으로 일컬어진다. 당시 영국에서는 아편을 피우는 것이 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아편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국이 중국으로 아편을 수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영국과 달리 그러한 아편 수출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영국 홀로 주도적이었다라는 점에서 역시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중국에 군대를 파견할지의 여부에 대하여 고민하던 영국의 모습은 내부적으로도 아편 수출에 대하여 부담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국 외무부 장관인 파머스턴의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결국 이 비도덕적인 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되고,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임칙서 이후의 파견된 대신들의 무능으로 인하여 결국 영국에 굴복하게 된다. 다만 영국의 목적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무역의 판로 대상이라는 점에서 청나라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는 고난의 연장선이긴 하지만.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면직 산업이 어떻게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과정이 무척 흥미롭다. '산업 혁명 - 제국주의 - 서세동점'이라는 흐름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에 도움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상황은 간략하게나마 난학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쇄국 정책을 고수한 에도 막부의 외교 정책을 통하여 일정 부분 해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기에 훗날 개항의 과정과 연계하여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아직 출간되지 않은 시리즈의 3권의 가제가 '국화와 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내용들은 3권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g*******7 2018.07.22. 신고 공감 14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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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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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은 제목처럼 200년 넘게 일본을 통치하던 도쿠가와 막부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무너졌고, 이후 일본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의 일본 역사에 대하여 우리는 대부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압박(1853년)과 이로 인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 유신(1868년)을 통하여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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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은 제목처럼 200년 넘게 일본을 통치하던 도쿠가와 막부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무너졌고, 이후 일본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의 일본 역사에 대하여 우리는 대부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압박(1853년)과 이로 인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 유신(1868년)을 통하여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흑선이 내항한 이후 단 15년 만에 막부가 무너지면서 메이지 유신이 단행된 상세한 과정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과정을 상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과 달리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만화로 말이다. 

 

  이미 6권에서 막부의 제2차 조슈 정벌은 1866년 쇼군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1867년 1월 30일, 고메이 천황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들인 무쓰히토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메이지 천황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이미 1868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음을 알기에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짧은 기간에 무수히 많은 사건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실제 이 책의 대부분은 이 짧은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를 하고 모리 가문이 많은 봉토를 삭감당한 채 조슈 지방으로, 시마즈 가문이 사쓰마 지방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이들은 변방의 번 취급을 받다가 이제 격변의 시대에 주축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면서 막부 타도였다. 1867년 1월 10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30세의 나이고 정이대장군, 즉 쇼군으로 취임하니 요시노부는 이제 조슈와 사쓰마와 같은 도막파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미 선대의 쇼군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는데, 그가 쇼군에 취임하였으니 조슈와 사쓰마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고메이 천황이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였다는 점이다. 분명 '존왕양이'와 '도막'을 주장하는 조슈와 사쓰마로 기울어야 할 것 같은데, 천황이 오히려 막부를 지지하였다는 점은 의외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황 입장에서 일단 조슈와 사쓰마는 반란을 일으킨 역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동안 실무를 막부가 담당하였고, 요시노부 역시 교묘하게 천황을 떠받들고 있었으니 고메이 천황으로서는 굳이 막부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메이 천황이 급사하고 무쓰히토가 15세의 나이로 천황의 자리에 오르니 분위기는 급변한다. 일단 메이지 천황이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 명확하게 지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1월에 이미 '대정봉환'을 통하여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게 된다. 이는 막부체제의 멸망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오히려 막부에게 상당히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통치권을 줘도 교토의 조정은 그동안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결국 막부에게 의존할 것임을 꿰뚫어 봤기 때문에 '대정봉환'을 단행했던 것이다. 실제 '대정봉환' 이후 교토의 조정은 오히려 친막부파가 득세를 하였고, 막부는 여전히 일본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것도 천황을 등에 업고 통치를 하였으니 형식적인 부분에서만 막부가 사라진 것이지 이는 삿초(사쓰마와 조슈)가 원하는 막부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닌게 아니라 '대정봉환' 이후 삿초는 그러한 문제를 꿰뚫어보고 크게 반발한다. 비록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 체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각 지방 영주, 특히 강대해진 조슈와 사쓰마 번의 영주들을 조정의 정책을 정하는 회의에 참석시켰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쓰러져 가는 막부의 희망처럼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정봉환'으로 오히려 명분을 획득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 세력으로부터도 그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육군과 해군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사쓰마와 도사, 히로시마, 에치젠, 오와리의 5개 번의 병력은 1868년 1월 3일 새벽에 왕궁을 점거하였고, 어전 회의에서 이와쿠라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을 단행한다. 개혁의 주된 내용은 막부의 완전한 폐지였으니 막부로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요시노부는 무력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열강의 지지와 교토 조정의 친막부파를 동원하여 어전 회의를 다시 장악하면서 이 쿠데타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사쓰마 번은 1868년 1월 17일 막부의 중심인 에도 성에 방화를 저지르면서 막부를 자극하였고, 결국 막부 역시 병력을 동원하여 에도의 사쓰마 번저를 전소시키면서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한다. 이를 빌미로 결국 요시노부는 1868년 1월 25일, "사쓰마 징토의 표"를 선포한다. 이로써 1868년(무진년), 전쟁의 막이 오르니 이것이 바로 '무진전쟁(보신전쟁)'이다. 

 

 영리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최대한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도막파에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사쓰마 번은 게속 막부를 자극하였고 막부 내부에서도 무력을 주장하는 상황이었으니 요시노부 입장에서는 피하려던 전쟁의 상황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비록 2차 조슈 원정에서 막부가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막부가 동원한 병력은 막부의 주력군이 아닌 여러 번의 군대를 모은 것이어서 실제 막부가 패배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진전쟁'은 육로로는 막부군 1만 5천이 오사카에서 교토로 진군하기 시작하였고, 바다로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신식 해군이 나섰으니 '무진전쟁'은 곧 직접적인 막부의 참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기세 앞에 도막을 주장하는 신정부는 막부의 위세에 관망의 분위기가 나타났다. 조슈의 군대는 아직 교토에 입성하지 못하여 소수의 선발대만 존재하였고, 도사 번은 이번 전쟁이 사쓰마의 단독 도발에 의하여 벌어진 것이기에 참전을 거부하였으니 막부의 1만 5천에 대항하는 교토의 병력은 사쓰마 번의 3천을 포함한 4천 정도의 병력이 전부였다. 누가봐도 막부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868년 1월 27일 무진전쟁의 실질적인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러한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게 된다. 초반부터 막부의 선봉은 붕괴되었으며, 심지어 막부의 사령관 다카가와는 총성에 놀란 말 때문에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막부군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미 시작부터 막부군은 사기가 저하되었고, 실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를 거둔다. 더구나 신정부군은 천황의 깃발인 '금어기'를 앞세우면서 전진하였으니 명분에서도 막부를 압도하게 된다. 또한 이 전투 이후 관망하던 세력들은 대거 신정부군에 가담하면서 막부에 등을 돌렸으니 막부로서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막부는 무력으로 다시 저항하려고 하지만 문제는 그토록 유능한 모습을 보였던 요시노부가 오사카에서 에도로 탈출하면서 이제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가 신정부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애초 요시노부는 무력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재림이라 평가받던 그도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이에야스와 같은 결단력이 부족했으니 막부는 이제 200년 넘게 이어오던 그 명맥이 끊길 상황이었다. 

 

 결국 1868년 4월 7일, 에도 성 개성 협상 타결이 되면서 에도에 대한 무혈 입성이 결정되었으며, 4월 26일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당주를 5살의 이에사토에게 내주고 미토로 낙향하여 은거하였고, 5월 3일 신정부군이 에도 성에 무혈 입성을 하면서 결국 도쿠가와 막부의 260년의 통치 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비록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물러났지만, 여전히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세력'이 저항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역적 2호로 지명된 아이즈 번주의 가타모리는 동북지역 번들과의 연합을 주도하였고, 에도 한복판에는 쇼군 호위를 명목으로 '창의대'가 등장하였으며, 막부의 신식 해군을 이끌던 에노모토 함대 역시 신정부의 함선 반환을 거부하면서 신정부의 저항 세력과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선조'를 비롯한 막부의 신식육군인 '전습대' 역시 북상하면서 우쓰노미야 성까지 점령하면서 저항의 의지를 내비치게 된다. 또한 신정부군에 투항하려다가 그들의 가혹한 동북지방에 대한 정벌에 분노한 센다이가 이끄는 14개의 열번이 아이즈 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이제 동북지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게 된다. (참고로 센다이 번은 일본 전국시대 유명한 무장이었던 다테 마사무네의 가문이 다스리던 지역으로서 나름 자존심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이를 대하는 신정부군은 무례하였기 때문에 센다이 역시 아이즈에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신정부군의 동북 지방 원정은 '아이즈 전쟁'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지역은 쇼나이 번과 같이 적극적인 열강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조슈와 사쓰마와 같은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지만, 이외의 번들은 구식군대였다. 비록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용맹하였지만 이들 지역은 차례로 신정부군에 의하여 격퇴되면서 1868년 10월 28일, 센다이 번 항복, 11월 6일, 아이즈 번 항복. 마지막으로 11월 9일 쇼나이 번의 항복으로 '동북 전쟁(아이즈 전쟁)'은 마무리된다. 전쟁의 결과로 이들 지역의 번들은 대부분 봉토가 삭감되는 '개역'을 당하게 된다. 또한 원래 이 지역에서는 좌막 세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도막 세력과 치열한 다툼을 벌이면서 서로에 대한 피를 부르는 보복과 복수가 이루어졌으니 1868년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신정부군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발표하였고, 메이지 천황이 1868년 11월 막부의 본거지였던 에도에 입성하니 이제 막부는 일본의 역사에서 그 명맥이 끊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은 이제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우는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근대화의 끝이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일본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일본 역사를 너무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근대화와 같이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인 이들의 역사 역시 우리로서는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본의 방식이 꼭 맞다고는 볼 수 없으나, 당시 조선은 이러한 변화 자체를 아예 겪지 않기 위하여 체제 유지와 결속만을 최우선으로 하다보니 개혁과 변화에 뒤지지 않았던가?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개혁과 변화는 생각지도 못한 반대급부를 마주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을 읽어 본다면 우리로서도 염두에 두어야 할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g*******7 2021.08.01. 신고 공감 1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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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7 : 흥선대원군과 병인양요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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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역사책을 읽으면서 정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콱 막힌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기간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왕권은 하염없이 약해져만 갔으며, 온갖 자연재해는 물론 탐관오리의 수탈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고, 대규모의 민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상황에서 유교는 별다른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양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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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역사책을 읽으면서 정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콱 막힌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기간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왕권은 하염없이 약해져만 갔으며, 온갖 자연재해는 물론 탐관오리의 수탈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고, 대규모의 민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상황에서 유교는 별다른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양반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배타적인 성격으로 새로운 학문의 도입을 통한 변화마저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863년 고종의 등극과 함께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게 된다. 세도정치의 철폐와 더불어 기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획기적인 개혁 정책들이 다수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고종에 의한 것이 아닌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살아있는 대원군인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왕의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행보는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상갓집 개'라 불리울 정도로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일족으로부터 천대받으며 비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에 왕족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세도정치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하여 세도가에서는 똑똑한 왕족을 역모죄로 처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사가 없던 헌종의 뒤를 이은 인물은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이었으며, 철종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살아남기 위하여 이하응은 가슴에 품은 큰 뜻을 철저히 감추면서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했고, 왕실의 어른인 신정왕후(조대비)와 미리 입을 맞추게 된다. 안동 김씨는 마땅히 왕으로 추대할 왕족을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정왕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으로 지명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었다. 여기에서 이하응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를 왕위에 올림으로써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게 된다.

 

 이러한 치밀한 과정을 거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였으니 조선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에서 7권이 거의 유일하게 조선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유 역시 바로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조선 후기의 큰 변화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자연스럽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러한 과정에서 딱히 피바람이 불지 않았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은 명목상 김병국과 김병학과 같은 일부 안동 김씨는 물론 풍양 조씨의 인물들도 함께 정치에 참여시킨다. 여기에 그동안 소외되었던 전주 이씨를 대거 불러들이고, 또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남인과 북인 계열의 인물들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고종이 왕으로 등극하였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이 컨트롤 타워가 된 셈이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초반부는 분명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문란해진 삼정(三政)을 바로잡기 위하여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대한 개혁을 실행하였으며, 1971년에는 서원 철폐령을 내려서 47개를 제외한 1000여개의 서원을 없앰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준다. 1864년부터 1871년까지의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확실히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개혁정책조차 장기적으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을 지적한다. 삼정(三政)의 개혁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보완한 수준에 그쳤으며, 서원을 철폐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조선은 유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양반에 의한 지배 체제는 굳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역시나 기득권층의 관점에서 현상 유지 내지는 안정에 그친 것이었고, 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뜻하지 않게 열강의 침략을 받고 또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국가의 부의 크기를 확장하는 단계였음을 떠올려 본다면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그저 찻잔 안의 태풍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반기에 이루어진 흥선대원군의 실정은 이후 조선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뼈아픈 것들이었다. 그 시기에 굳이 경복궁을 재건하여 왕권의 권위를 드높인다는 생각 자체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한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광해군도 임진왜란 당시에 총명하다고 여겨졌지만, 정작 전쟁 이후에 대규모 왕국을 지으면서 민심을 잃었는데, 흥선대원군은 화재 사건에도 불구하고 원납전 강요, 당백전 발행 등을 통하여 결국 경복궁을 완성시켰으니 이는 조선의 명줄을 더 앞당긴 결과가 되었다. 민심이 이반한 것은 물론이요 조선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보더라도 앞서 이루어진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과연 백성과 조선의 장래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개혁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취하면서 조선의 시계를 더욱 뒤로 되돌리게 된다. 청나라와의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는 연해주를 획득하게 된다. 이는 곧 조선이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가 아닌 러시아와의 국경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전세계 곳곳에서 부동항 확보와 남하정책을 취하던 러시아가 곳곳에서 영국과 충돌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국내의 천주교 교인들을 통하여 프랑스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유연한 외교적인 전략보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성격이 짙었지만, 훗날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흥선대원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천주교인들이 확실한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에 접근하였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힘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이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고, 오히려 흥선대원군은 그를 견제하려던 세력으로부터 외세와 결탁하였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하여 결국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면서 척화를 내세우게 된다.

 

 1866년 발생한 병인박해로 인하여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의 로즈 제독 휘하의 극동 함대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있으니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프랑스의 극동 함대는 척후선 3척을 조선에 보내고, 이들은 강화도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성 근처의 양화에 이르게 된다. 조선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서 정중하게 떠날 것을 요청하고, 프랑스는 불법적인 조선의 영내 침입을 강행한 이후 중국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의 극동 함대는 강화도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의 시작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역사서적에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열강의 침입에 맞서 조선이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두 전투 모두 패배에 가까웠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이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프랑스가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강화도에 있던 각종 서적과 문서를 약탈당하였으며, 신미양요는 미국의 전사자는 전무하였지만, 조선의 강화도 수비진 수백명이 사망한 전투였다. 다만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어 이후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이 책에서도 병인양요에 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것을 프랑스의 극동 함대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 진실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는 조선보다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의 식민지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베트남과의 전투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중국에 남은 극동 함대는 전력적인 측면에서 그리 크지 않았고, 실제 이들의 목적 역시 조선의 수도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도를 공격하여 한강으로의 수로를 차단하여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열강들이 엄청난 규모의 시장으로서의 중국과 막대한 광산에서 대규모의 은을 제련하는 일본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조선이 그다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의 부는 중국과 일본에 비한다면 크게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호랑이를 잡는 포수들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프랑스를 압박하는 데 성공하여 그들이 물러가게 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제대로 된 정규군이 없어서 호랑이를 잡는 포수를 동원하였다는 점프랑스가 사용하는 후장식 소총과 조선이 사용하던 화승총이 무려 수백년의 간극이 있다는 점은 조선의 암울한 사정을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병인양요 이후에 흥선대원군 역시 국방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모하지만, 제대로 현실에 적용된 것은 전무하였다. 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였고, 내부적인 역량 역시 스스로의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른 상황이었다. 이에 반하여 비록 나중에 실패로 돌아가지만, 중국의 양무운동은 적어도 그 규모에 있어서 중국의 부(富)가 여전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근대화의 속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이 시기의 흥선대원군에 의한 변화의 크기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에서는 조선의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다소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 병인양요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평하면서 일본에도 그러한 사실을 공유해주지만 당시 일본은 오히려 막부의 육군은 프랑스 출신의 교관들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병인양요에서 승리하였다는 조선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다음 이야기는 아마도 일본이 막부와 도막을 부르짖는 번과의 내부 갈등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는 과정과 중국의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에서 어떤 결실을 맺는지를 다루지 않을까 예상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8권은 나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7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g*******7 2020.05.20. 신고 공감 11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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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7. 우리 모두 역사교양을 갖춰야 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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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한국사'가 펼쳐진다. 5권까지 중국과 일본의 '근대의 여명'을 살펴보았고, 6권에서 총정리를 한 다음에, 드디어 '한국사의 근대'를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아름답지만은 않은 까닭에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중국,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인 안목을 넓혀보아야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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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한국사'가 펼쳐진다. 5권까지 중국과 일본의 '근대의 여명'을 살펴보았고, 6권에서 총정리를 한 다음에, 드디어 '한국사의 근대'를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아름답지만은 않은 까닭에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중국,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인 안목을 넓혀보아야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시도 '역사적 고찰'을 멈춰서는 안 된다. 누군가 그랬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 번은 '우연'으로, 다음에는 '필연'으로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단점을 보았다면, 그 단점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우여곡절 끝에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권력을 잡았다. 조선왕조 사상 '대원군(임금자리에 오르지 못한 현 임금의 아버지)'이 살아 있는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며,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앞서 '세도정치 시대'가 매우 엉망이었던 관계로 새로운 실세인 '대원군의 등장'으로 개혁의 물꼬가 찬란하게 펼쳐질 것인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먼저, '토지개혁'이다. 삼정문란의 하나였던 '전정'을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인데, 전국토지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대장을 재작성하고, 은닉을 찾아내고 면세지를 대폭 축소하는 등 비효율적이던 제도를 깔끔하게 손 보았다. 다음은 '환곡 개편'이다. 환곡 업무를 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꾸는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백성들이 직접 운영하게 하여 부담도 확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군정 개혁'도 실시하여 양반들도 세금을 매기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양반들의 반발로 인해 실제 효과는 미미했지만,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는 만빵이었다. 여기에 '서원철폐'를 통해 세도가문 뿐만 아니라 지방유지들의 정치적, 경제적 향촌 기반을 위축시켜 '왕실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까지 노렸다.

 

  하지만 이런 '대원군의 개혁'이 빛 좋은 개살구로 그친 까닭은 '경복궁 중건' 강행,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심화, 천주교 탄압으로 인한 서양세력의 침략 유발 등등 삽질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이 '나라안'에서만 일어나는 '근시안적인 조치'에 그쳐 나라밖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세계로 넓혀 볼 것도 없이 이웃나라인인 중국과 일본과도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동시대인 19세기에 청 왕조와 일본 막부는 서양의 침탈에 내리막길을 탔으며 서양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뤘고, 그로 인해, 청 왕조는 '양무운동'을, 일본에서는 신정부가 등장해 '명치유신'을 일으키며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결과론적인 비판'일 수 있다. 대원군 시절에 조선이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뒤쳐진 까닭은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의 관심'이 덜 집중되었던 탓이 크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웃나라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때론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효과를 낳기도 하는 법이다. 조선은 임진, 병자, 양란 이후에 또다시 200여 년의 평화시기를 거치면서 다시 병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랜 병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대원군의 개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하여서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안타까운 시간은 흘러흘러 '제너널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벌어진다. 조선에겐 아직 서양이 '낯선 조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조선이 '서양의 힘'을 직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조선은 그 소중한 기회를 그저 날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 사건 모두 '조선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이는 온전히 '조선의 힘'이 서양을 압도한 결과가 아니라 서양이 미처 조선을 제대로 탐색하지 못하고 섣불리 다가섰다가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비슷한 경험'을 한 중국과 일본도 제대로 본 바다. 비록 조선이 얼떨결에 승리하고, 서양의 힘이 의외로 깊숙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조만간 조선이 자신들처럼 '호된 신고식'을 당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오직 '조선'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의 지배층'이었다.

 

  실세에서 조금 벗어난 '식자층'에서는 서양의 힘이 중국과 일본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여러 소식통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직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개항의 필요성'과 '상업의 발달'이 중요하다는 것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세력들은 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당장 맛볼 수 있는 떡밥'에 안주하고, '어항속의 풍요'처럼 자신들만의 안락함에 빠져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권력층이 그리 폭망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대원군의 개혁'이 거기서 멈춘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내다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이 없었음이 미치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과거의 영광'에 취하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진실은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학문인 것이다. 우리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지만, '과거'를 연구하는 것으로 '미래'를 점쳐볼 수는 있다. 왜냐면 '현재'는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를 연구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다보면, 어느 정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가능한 범주안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대전제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비교적 정확한 예측이다.

 

  물론, 역사에 '정답'은 없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정답 같고, 저렇게 보면 '저것'이 정답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예측한 것은 신뢰할 수 없지만, 수천, 수만 명의 연구자가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저것이 정답 같다'라고 예측한 결과보다 높은 결과치를 내놓았다면, 정답이 없는 역사에도 '신뢰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서로의 '정답'을 비교분석할 수 있는 깜냥을 갖춰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역사전문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고 말이다. 이제 역사교양이 더욱 널리 보급되어야 하는 첫 번째 까닭인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2.08.09.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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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1. 미처 몰랐던 낯익은 역사의 뒷이야기를 낱낱이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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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도 역사의 범주를 '한국사'와 '세계사'로 가르며 한국사는 '나라안의 역사'를, 세계사는 '나라밖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사관의 그릇된 인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는 힘으로 우리 나라를 강제병탄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왜곡하고 축소하며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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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아직도 역사의 범주를 '한국사'와 '세계사'로 가르며 한국사는 '나라안의 역사'를, 세계사는 '나라밖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사관의 그릇된 인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는 힘으로 우리 나라를 강제병탄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왜곡하고 축소하며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이라 부르며 차별과 멸시의 대명사로 만들었으며, 우리 역사의 장면은 '한반도'로 축소되고 말았고, 외세의 위압에 자율적 대항은 꿈도 못꾸고 오직 '타율적 순응'만 하는 식민의 DNA를 갖고 있을 뿐이라며 왜곡을 일삼았다. 이런 시각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순삭했어야 마땅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오늘날에는 우리 역사를 '한반도'라는 작은 그릇으로만 보지 말고, '한반도'라는 세상의 중심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던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다시금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고대 4대문명과 동시대에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고조선이 다시 보일 것이며, 중국세력이 춘추전국시대로 사분오열이 되었을 때 우리도 4국시대를 맞아 군웅할거의 쟁패를 벌였으며, 중국의 혼란을 틈타 팽창정책을 펼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면모를 선보였고, 중국이 오랜 혼란을 접고 수당시대를 맞이하자 우리도 똘똘 뭉쳐 통일국가의 면모를 보이며 세계정세의 흐름과 맞물려 역사를 꽃 피웠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 중국 이외의 세력과도 연이 닿아서 활발한 외교전을 펼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신라의 청해진과 고려의 벽란도는 아주 사소한 사료일 뿐일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저멀리 인도와 아라비아를 넘어 유럽의 로마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아직은 사료가 태부족한 탓에 이들과 어떠한 역사를 맺고 풀었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우리가 '우리의 시각'으로 세계를 톺아보면 분명히 우리의 영향력이 고작 '한반도' 안에서만 머물고 있지 않았을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세계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이 결코 우리 역사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의 근대사에 깊이 영향을 끼친 중국과 일본에서 벌어진 일들을 확대경으로 깊이 들여다보는 동시에 '우리의 시야'를 확 넓혀서 좁게는 동북아시아 삼국을, 넓게는 서구열강세력까지 포함해서 '함께 읽는' 소중한 안목을 선사한 책이기에 매우 뜻깊다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책으로 '서세동점의 시작'이라는 제목이 참으로 솔깃하다.

 

  이 책의 시리즈는 '한국사' 정도는 통달했을 독자 여러분들의 지적 수준을 높이보고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우리 역사'는 쏙 빼고서 '남의 나라 역사'만 주야장천 풀어내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허나 우리가 고등학교 수준의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서구열강이 동쪽으로 밀려들면서 아시아국가 곳곳이 극심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 차원에서 서구열강이 중국에서 한 일과 일본에서 한 일을 각각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시기에 우리는 조금 외돌톨이처럼 따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까닭은 바로 '은'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었단다.

 

  서구열강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와 가장 게걸스럽게 탐욕의 본성을 드러냈던 근본적인 목적 가운데 으뜸이 바로 '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 중국의 은과 일본의 은은 서양상인들의 주요 품목이 되어 활발한 무역(?)을 일으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은화'가 아닌 상평통보라는 '동전'을 썼던 탓에 특별한 관심(!)을 덜 받게 되었던 셈이다. 암튼 서구열강은 동양의 은 경제시스템에 당당히 개입을 했고, 자기들 입맛대로 '룰'을 바꾸려 했고, 그 결과 중국은 아편전쟁을 치뤘고, 다음 책에서 다뤄지겠지만 일본은 쇄국정책을 풀고 개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큰 홍역을 치르고 난 뒤에 '근대화'에 접어든 중국과 일본은 또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 물론 우리도 말이다. 그건 차차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암튼, 첫 번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바로 '아편전쟁의 흑막'이 낱낱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의 역사책에서 서구열강의 침탈과 근대화의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아편전쟁'은 수없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아편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맺게 되었는지는 '도식적'으로 간략히만 전할 뿐, 세세한 전개내용과 뒷이야기, 그리고 감춰진 이야기까지 속속 파헤친 책은 내 기억으로 이 책이 첫 번째 책이 분명하다. 그 전까지의 역사책에서는 그저 대략적인 내용만 반복할 뿐이었다. 더러운 영국이 중국인을 상대로 아편밀매를 했고, 이를 근절시키려는 중국의 당연한 조치에 영국이 전쟁을 일으켜 '난징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것이 중국이 근대화를 시작하게 된 까닭이었다...라는 내용 말이다.

 

  이걸 이 책에서는 서양상인들이 '은본위제도' 경제시스템에 전세계의 은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하고 있던 차에 중국에서는 도리어 영국의 은을 빨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전제를 깔아놓은 다음에, 왜 그런고 하니, 바로 영국이 자랑하는 '면직물'이 중국의 비단에 밀리고 더 값싼 면직물에 발려서 제대로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영국인이 사랑하는 '홍차(밀크티)'를 비롯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에 열광한 덕분에 전세계에서 흡입한 은이 중국산 제품 수입 열광에 의해 중국에 죄다 빨려 들어가버린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서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아편'을 유통시켜 영국에 막대한 이득을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는 스토리를 알게 해주었다. 그 뒤에 벌어진 '임칙서, 아편 퐁당', '영국, 해군 출발', '아편전쟁 발발', '청나라군대, 시원하게 발림', '난징조약, 불평등조약의 시초' 등등이 저절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뿐 아니다. 이 책에는 '아편전쟁의 민낯'을 낱낱히 밝히며, 당시 청나라의 무능과 헛발질, 영국의 탐욕스런 전쟁사, 당시 무기체제의 비밀 등등 알면 알수록 역사적 흥미가 쑥쑥 올라가는 경험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재미는 '결말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재밌는 역사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과정도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적인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또 다른 역사의 비밀 장면'을 들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딴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고 의문을 품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역사란 '정답'이 없는 학문이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고, 그 해석에 '납득'이 더해지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납득'이란 개인의 납득이 아닌 '모두의 납득'일 때만 그렇다. 그렇게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을 갖춰야 하며 당연히 학문답게 '보편타당한 근거'로 탄탄하게 역사를 풀어내야만 할 것이다. 이 책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설득력의 높낮이가 오르락내리락하곤 하는데, 그 역시, 현명한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다음 책은 문제의 '태평천국운동'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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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3. 일본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일본의 내우외환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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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일본개항'이다. 19세기말, 일본이 쇄국에 이어 개항을 하기까지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에 굴육적인 개항과 '태평천국의 난'이란 대혼란을 맞은 것처럼 일본도 실질적인 권세를 누리던 막부가 굴욕적(?)인 개항 이후에 '존왕양이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권력의 핵심이 막부에서 일왕으로 넘어가게 되는 일련의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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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일본개항'이다. 19세기말, 일본이 쇄국에 이어 개항을 하기까지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에 굴육적인 개항과 '태평천국의 난'이란 대혼란을 맞은 것처럼 일본도 실질적인 권세를 누리던 막부가 굴욕적(?)인 개항 이후에 '존왕양이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권력의 핵심이 막부에서 일왕으로 넘어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도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심해지면서 혼란기를 맞이하지만 서구열강의 침략이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 비해 덜했던 터라 말도 못할 정도로 국력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은 '동북아 삼국'이 공통으로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중세 이전까지만 해도 국력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던 '동북아 삼국'이 몇 백년만에 역전해서 맥을 못추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하루가 멀다하고 피 튀기는 싸움과 함께 '근대화'를 맞이할 만큼 이성이 깨이는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 그리고 그 정점이었던 '산업혁명'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서양의 괴력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는데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근대화'가 뒤쳐졌던 탓에 '서양의 제국주의 팽창'을 막을 방도도 찾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문명국'으로 앞서던 동양의 여러 대국들이 차례차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맥없이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암튼, 작금의 세계화를 이끄는 서양의 선진국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발빠르게 선도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를 볼작시면, 우리가 얼마나 뒤쳐졌다가 '대역전'을 이루며 앞서나가고 있는지 한 눈에 비교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경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 시리즈의 참 매력일테고 말이다. 자, 지금부터 '일본개항'을 소개하겠다.

 

  일본은 일찍이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서 '조총'을 수입하며 서양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한다. 허나 서양의 문물과 함께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까지 들어오게 되자 '살아있는 신'이라 불리는 일왕을 모시는 일본인들의 정신적 건강(?)에 심히 해롭다는 결론을 내리고 '쇄국'에 돌입하고 만다. 서양을 향한 유일한 통로는 '네덜란드(화란)'를 파트너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쇄국을 이어오며 외국인을 철저히 못 들어오게 하였는데, 중국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서구열강의 공격에 맥없이 패배하고 굴육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고 후덜덜해진 상황이라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게 된다.

 

  바야흐로 '쇄국'을 철회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실세는 '막부'에 있었다. 막부를 이끄는 '쇼군'이 지방영주인 '다이묘'들을 다스리며 일본 전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외국인들도 그런 '막부'와 조약을 맺고 이권을 챙기려 했다. 허나 일본은 '막부'가 다스리고 있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일왕'이 다스리는 '만세일계의 신(神)국'이었기에 쇼군은 일왕에게 승인을 밟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유예기간'을 달라고 한다. 이때가 바로 페리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함포를 발사한 뒤에 서양과 첫 외교를 시작한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 내부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던 터라 '외세의 압력'에 개항을 결정했더라도 수월하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당시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던 '막부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일본의 자존심(?)을 바로 세우겠다는 '존왕양이 운동'이 지방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에게 충성하겠다는 것은 '왕조국가'의 당연한 진리이며, 유교국가에서는 으뜸으로 취급받던 자연스런 사상이었지만, 일본은 '일왕'에게 충성을 받치되 '권력의 중심'은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에게 있었기에 일본의 무사집단은 일제히 쇼군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이중적인 행태'가 일본의 개항을 맞아 대혼란의 빌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의 위협에 막부가 오금을 지리며 무력하게 개항 조약을 맺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의 자존심'이 짓밟혔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무력한 막부를 탓하고 못난 짓을 서슴지 않는 쇼군을 타도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단숨에 '일왕파'와 '막부파'로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갈라서게 된 셈이다. 여기에 '막부파'는 쇼군자리를 놓고 '개혁파'와 '구세력'으로 갈라져 권력승계 다툼을 벌이게 되니, 개항조약에 사인을 받으러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이 찾아올 날짜는 다가오는데, 일본 내부에서는 혼란만 가중되어 해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질 않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실질적인 힘도 '막부'에게만 있는 상황이고 보니, 문명개화가 덜 된 일본은 '닥치고 막부에 충성'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허나 서양의 힘을 제대로 알기는커녕 대충이라도 가늠할 줄 모르던 '일왕'과 '존왕양이 지사들'은 이 기회에 막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막부 흔들기'에 열중했던 것이다. 서양의 강력한 힘을 감지하고 '당장'은 납작 엎드려서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실천중이던 막부로서는 답답할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그 와중에 권력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쇼군'이 병약하고 무능한 어린아이들로 명맥을 이어나갔다는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본은 '막부의 나라'였기에 막부는 '내우외환'을 맞아 어찌어찌 버틸 뿐이었다.

 

  한편, 서양은 왜 일본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을까? 아직 영국은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을 치르며 청나라를 요리하기에 바빠 일본까지 넘볼(?)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 사이에 미국과 러시아가 먼저 일본을 선점하려 했는데, 미국은 '고래잡이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러시아는 영국의 눈을 피해 '부동항'을 차지하려고 각각 일본을 최적의 장소로 손꼽았던 것이다. 당시 '고래기름'은 석유가 나오기 전까지 '산업의 에너지원이자 윤활유'였던 탓에 태평양에서 원활한 고래잡이를 하기 위해선 일본에 안전한 정박지를 만들어놓는 것이 미국에게 절실했던 것이다. 반면에 러시아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정신이 없는 청나라를 대신해서 '연해주 일대'를 러시아가 다스리겠다면서, 어차피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빼앗길(?) 바에야 오랜 친분(?) 관계에 있는 러시아가 대신 차지하는 것이 청나라에게도 이득이 아니겠냐는 해괴한 논리를 펴서, 그토록 염원이었던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 러시아는 만주를 비롯해서 사할린과 그 아래에 있는 여러 섬들을 차지함과 동시에 일본의 항구를 기착지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약을 맺길 원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은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것으로 시작해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도 '최혜국대우'를 포함한 불평등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된다. 이후에 펼쳐질 내우외환의 깊은 내막이 곧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에 앞서 4권에서는 '태평천국, 그 이후'가 펼쳐진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2.07.19.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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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9.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변모하는 동북아 3국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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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를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신정부에 의해 '근대화(명치유신)'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은 어찌어찌 '북양함대'를 추진하며 군제를 서양식으로 개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아니, 조선은 대원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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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대를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신정부에 의해 '근대화(명치유신)'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은 어찌어찌 '북양함대'를 추진하며 군제를 서양식으로 개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아니, 조선은 대원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관계로 '개항'이 아닌 '쇄국'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로써 동북아시아 삼국은 서로를 향해 잠시 숨을 돌릴 틈을 각자 갖게 되지만, 속내는 그러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보불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북독일연방(프로이센)'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려는 형국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독일민족 통일이라는 명분에 더욱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독일 4개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가 패배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프로이센에게 기울어진 상황에서 '흡수통일'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를 가로막고 '통일 독일'을 막아선 나라가 프랑스였다. 왜냐면 '남독일 지역'은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매우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빌헬름 1세(독일 황제)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막아선 전례가 있었기에 '프로이센' 처지에서는 '간섭'으로 볼 수밖에 없어서 결코 곱게 볼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런 프랑스가 '남독일 4개국'과의 통일전선을 막아서니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선택한다. 시작은 치열한 '언론전'이었지만, 언론끼리의 자존심 싸움은 두 국가의 국민들의 감정을 서로 상하게 하였고, 끝내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 또는 프프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시작은 프랑스가 우세를 점하며 시작하였으나, 보급물자는 프로이센이 훨씬 더 빠르게 조달할 수 있었고, 화력의 우세함이나 전술운영의 우월함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의 승리는 '프로이센'에게 돌아갔고, 파리의 개선문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고 돌아가는 등 프랑스로서는 패배의 치욕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유대인)에 의해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대노한 흥선대원군은 '통상거부(쇄국)정책'을 더욱 굳게 밀어붙이게 된다. 여기에 미국의 함대가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강화도로 쳐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신미양요'다.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을 공격한 미함대는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애초에 목적으로 삼은 힘에 의한 '수호통상조약'은 맺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마는데, 어찌 되었든 조선에 또 한 번의 승리를 안겨주게 되었다. 승리의 비결은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인해 태평양 건너의 전쟁에 충분한 힘을 보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고, 대원군시대의 외교가 '근시안적'이었고,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의 안이한 태도로 인한 것이었으니,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조선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진 못했다.

 

  하지만 눈여겨 볼 대목은 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후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나름의 방법대로 서양과 (조만간 일본과도) 손을 잡고 '조선의 개화(근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북학파의 계승자'들이 어찌어찌 '매국노'가 되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점을 다시금 살펴볼 일이다. 이들은 시대를 앞선 지식인들이기도 했으나 '권력'과는 인연이 없던 관계로 늘 '아웃사이더'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정책으로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외세'만 끌어들이는 결과만 내놓았으니, 중앙정부는 정부대로,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따로따로' 조선의 안위와 안녕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백성은 고달파지기만 했고 말이다. 과연, 조선의 백성을 구할 위인은 없었단 말인가?

 

  다시,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명치시절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활약을 펼쳤더랬다. 이들은 서구열강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선진제도와 문물'을 일본의 신정부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중차대한 임무를 떠안고 세계유람을 떠났더랬다. 그 결과, 새로운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얼추 정리해보면, 미국에서는 '행정제도'를, 영국에서 '정치제도'를, 프랑스에서 '사법제도'를, 그리고 독일에서는 '군사제도'를 받아들여, 신일본의 멋진 시작을 뽐내려 했으나, 그보다는 일본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소요로 인해 시작부터 삐그덕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서양식 제도'를 도입해 근대화 국가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의 민중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봉건시대의 사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폐번치현'과 '사민평등'을 시작했지만, 갑자기 하루 아침에 시골촌놈이 서울깍쟁이로 바뀔 수 없는 것처럼 일본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하루도 편할 날이 없도록 훽훽 돌변하는 '동북아 3국'의 바쁜 일상은 다음 권에 계속된다. 커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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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8. 명치유신, 일본의 오랜 잠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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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장황한 서론을 끝내고 '일본의 부흥'을 알리는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이신)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부흥은 '막부의 종말'을 뜻하기도 하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유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시작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다시 '일왕제'로 되돌아가야 했기에 '또 다른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지사'들이 막부의 권력을 찬탈해서 '정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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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장황한 서론을 끝내고 '일본의 부흥'을 알리는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이신)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부흥은 '막부의 종말'을 뜻하기도 하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유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시작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다시 '일왕제'로 되돌아가야 했기에 '또 다른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지사'들이 막부의 권력을 찬탈해서 '정당한 권력'으로 되돌려놓은 곳이 하필이면 전근대적인 중앙집권제 방식인 '왕정복고'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왕은 전통적으로 '신의 아들'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일왕이 다스리는 일본은 '인간신(현신, 또는 천손)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였던 것이다. 일본의 부흥을 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근대화'가 왕정복고에, 신의 나라라니...고대의 건국신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어쨌든, 일본인들은 명치유신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소설을 꽤나 좋아한다. 일본의 국운이 하늘을 찌르고 뭐든 했다하면 통하는 기세가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비록, 1945년에 패망하긴 했지만, 60년부터 90년대까지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루며 미국 다음으로 '경제대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일본은 최고의 20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허나 그때 쓴 운빨이 다한 것인지, 1991년부터 버블이 사그라들면서 시작한 '잃어버린 30년'째를 맞은 현재에는 영락없이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을 면치 못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새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찾을 것인가? 모쪼록 그 발판이 '우리'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그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인데...

 

  다시, 명치유신으로 되돌아 간다. '조슈정벌'이 한창이던 때, 쇼군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정벌은 흐지부지 끝나고 막부는 다시금 움츠러들어 버렸다. 때를 같이 해, 일왕도 승하하게 되니, 왕위를 승계 받은 이가 바로 '명치 일왕', 다시 말해, '메이지 일왕'이다. 막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유신지사'들은 모든 권력을 일왕에게 되돌리는 '대정봉환' 계책을 막부에게 들이미니, 당장 손을 쓸 수 없는 막부는 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받아들여 '왕정복고'를 성사시킨다. 이로써 일본은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명치유신'은 서서히 발효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명치유신'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성사된 것은 아니다. 친막부세력과 반막부세력의 힘겨루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반막부세력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랜 갈등이 한순간에 쏟아지며 '신정부군'과 '반정부군'으로 나뉘어 '무진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며, 서양의 신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이 막부 사무라이로 구성된 '반정부군'을 토벌하고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고, 전쟁 양상은 서남 방면의 신정부군과 동북 방면의 친막부 동맹군의 대결로 이어졌으나 신정부군의 최신무기와 서양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손쉽게 전쟁을 끝맺으니, 이른바 '막부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치유신'은 막부가 종말된 이후에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막부가 종식을 고하기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치유신'은 일본에게 무엇을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겉모습만 달라진 걸까? 속마음까지 싹 개조한 것일까? 겉으로 보여지기엔 일본의 겉과 속이 모두 싹 바뀐 듯이 보인다. 서구의 근대화에 발맞춰 일본의 사회와 문화까지 빠르게 변하고, 정신까지 '개조'하여 동양적 사고관이 아닌 서양의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허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뀐 것은 '일본의 겉모습'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본의 야만성은 전통 사무라이 복장을 하던, 서양의 신식군복을 입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전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전통적인 동양의 예법을 따르던 시절엔 '도리'와 '예법'을 그나마 따르던 것이 서양의 '이기주의'를 맛본 뒤엔 '무법천지'로 바꾸고,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몰염치한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 얌생이로 완전히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본은 철저히 깔아뭉개야 말을 듣는 족속들이다. 애매한 '판정승'으로 일본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순 없다.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야 겨우 패배를 인정하고,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다시는 고개를 빳빳히 쳐들지 않는 '굴종의 심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을 향해 '겸양'을 떨거나 '겸손한 예법'으로 염치와 도리를 가르치려 들면 주인의 등에 칼을 꼿는 배은망덕한 일을 자랑스럽게 저지르고 말 종자들인 까닭에 버릇을 고치려 들땐, 가차없고 단호하게 매를 들고, 당근을 줄 땐 '절대복종의 서약'을 맺은 뒤에 줘야 한다. 우리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날 정도로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웃나라에 이런 족속이 살고 있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본의 야만성이 '명치유신'이라는 국뽕을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허나 그러기까지 세세하고 조목조목 알아둘 필요는 있다. 역사공부의 진정한 힘은 '디테일'에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분량의 역사공부를 위해서 처음엔 두루뭉술하지만 '맥락의 흐름'을 파악할 정도로 가볍게 시작하더라도, '맥락 파악'이 끝나면 중요한 사건별로 '인과관계'를 세세히 따져가면서 '미세한 흐름'까지 이해해야 진면목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제격이다. 비록 '만화형식'이라 그 세세함이 띄엄띄엄 나타날지라도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상식'보다는 더욱 세분화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그리고 '세계사'를 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편년체 방식의 서술과 더불어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전세계사적인 스펙트럼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기에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사'라고 소개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중역사책 가운데 이 책처럼, 청왕조의 멸망을 일찌감치 부르고 신해혁명의 프로토타입이었던 '태평천국 운동'을 자세히 펼쳐보이고, '막부의 종말부터 명치유신까지' 일본의 변천을 펼쳐보이며, 조선후기 세도정치 이후의 양상을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풀어낸 책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바란다. 단언컨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왜냐면 그만큼 동북아시아 삼국의 근현대사가 엄청나게 방대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새롭고 중대한 사건이 뻥뻥 터지는 통에 이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사책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 시리즈는 과감히 손을 댔고, 그것도 '만화형식'으로 쉽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역사서술 관점이 '균형잡혀 있느냐'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저 '완간'이 되기까지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면 어떻게 해서든 다뤄져야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또 다른 역사책'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두손 두발을 들며 이 시리즈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삼천포에 잠시 갔다왔는데, 암튼, '명치유신'을 통과한 일본은 새롭게 '신일본'으로 거듭났다. 아니, 이제부터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제국'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서구열강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게 되었지만, 그 열강으로부터 신문물을 발빠르게 도입해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실력을 쌓은 일본은 '일본제국'으로 거듭나면서 거침없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여기까지는 '같은 문화권'을 갖고 있는 동질적인 관점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허나 '일본제국'은 첫 수부터 악수를 놓았다. 그것이 초반에는 일본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대국 전체로 보았을 때, '패착'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패착'이란 바둑에서 그 돌을 놓음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된 나쁜 수를 말한다. 일본이 아시아국가 가운데 가장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한 것까지는 '아시아의 자랑'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자랑이 끝내 서구열강 뺨칠 정도로 악랄한 침략과 약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패착의 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대한민국'의 막판 대역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초반에 펼쳐놓은 대마는 '잃어버린 30년'과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형국인 탓이다. 안타깝게도 그 역전극이 이 시리즈에 담기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못난 모습을 거울로 삼기에 딱 좋은 소재이니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당장은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일본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빠르게 치고 오르는 모습도 눈여겨 볼 일이다. 능력이 실력으로 확인된 다음에 그 힘을 어떻게 써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지 말이다. 적어도 일본이 간 길은 옳지 못했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2.08.20. 신고 공감 5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