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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 서남전쟁과 위구르 봉기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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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라는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일본과 옛 정복지를 다시 제국을 유지하려는 청.  근대화의 길목에서 '일국'을 건설하기 위한 두 국가의 승부수에 동아시아가 들썩인다!  - 책 표지 내용 中에서 -  [본격 한중일 세계사 11]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 사건들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그들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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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이라는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일본과 옛 정복지를 다시 제국을 유지하려는 청.

 근대화의 길목에서 '일국'을 건설하기 위한 두 국가의 승부수에 동아시아가 들썩인다!

 - 책 표지 내용 中에서 -


 [본격 한중일 세계사 11]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 사건들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그들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교과서(내가 배웠을 당시의 기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에 정식 역사로서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건은 어떻게 보면 우리와는 별개의 국지적인 그들 내부의 사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알게 모르게 현재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876년 3월, 일본은 '폐도령(廢刀令)'을 발령한다. 이름 그대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어서 1876년 10월, '질록처분'을 발표하는데 이는 그동안 사족에게 지급되던 녹봉을 채권화한 금록공채로 나눠준다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이 두 가지의 조치는 사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애초 막부를 몰아내고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것은 사쓰마와 조슈를 비롯한 각 번의 사족(사무라이)의 봉기로 인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과 신분제도 철폐에 의하여 사족이 설 자리와 특권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니 수백만에 달하는 사족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10권에서는 그러한 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정한론'과 같은 대외 정벌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폐도령'과 '질록처분'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폐도령'은 사족(사무라이)의 상징인 검을 휴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예 사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질록처분'은 사족의 경제력을 무너뜨리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더구나 막부를 몰아내고 현재 정부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 사족들에게는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 대한 분노는 증폭되었으며 급기야 곳곳에서 사족의 반란이 터져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부분은 개혁으로 인하여 소외되거나 특권을 빼앗기게 된 계층의 반응이다. 조선의 지배 계층은 소위 양반으로 불리우는 사대부였으며 일본은 바로 사무라이였다. 1895년 조선 역시 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 상투를 자르라는 지시인데, 이는 일본의 '폐도령'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에서 상투는 유교질서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되어 양반의 반발을 야기하였고, 일본은 칼의 휴대를 금지함으로써 사족이 들고 일어서게 된 것이었다. 다만 조선은 두 차례로 시행된 '단발령'이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배층인 양반 또는 사대부는 칼이 아닌 으로 상징되는 세력이었고 또한 유교적인 질서에서 반란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단발령'에 분노한 조선의 민중들이 당시 총리대신인 김홍집을 거리에서 몽둥이로 벌집을 만들어 죽이는 과격한 사건도 있었지만, 그 불만이 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만이 을미의병을 통한 항일 운동의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단발령'이 친일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기에 그 배후 세력을 일본으로 보고 그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반발 세력은 로 상징되는 사족들이었다. 당시 메이지 유신의 내각의 주요 인물들인 기도 다카요시(조슈 출신),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 출신)도 사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사족들의 반발을 예상하였음에도 그들은 사족의 신분 철폐와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의 양반과 사대부가 반발은 하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에 반하여 일본의 사족들은 그들의 상징인 칼을 뽑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질록처분'이 발표되자마자 구마모토에서는 사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과 현령(도지사)을 살해하였고, 정부 역시(정부의 요인들 역시 사족 출신이니)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한다. 이러한 반란은 이후 일본 곳곳에서 발생하는데, 조슈와 사쓰마에서 일어난 두 반란 사건은 각각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꽤 상세히 다루게 된다.

 

 먼저 조슈에서 발생한 '하기의 난'마에바라 잇세이가 주동이 된다. 그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출신으로서 인의를 중시하는 인물이었고, 참의로서 메이지 정권의 주요 멤버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 정책 중 하나인 징병제에 반대하였으며 이 와중에 벌어진 조슈 기병대 해산이 결정되자 기병대는 소요를 일으켰지만, 같은 조슈 출신인 기도 다카요시는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 93명을 모두 처형한다. 평소 인의를 중시하던 마에바라 잇세이는 그러한 기도의 처사에 항의하는 뜻으로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조슈로 귀향한다. 유신의 거물이자 쇼카손주쿠의 대선배였던 마에바라는 조슈의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그는 규슈의 사족 반란에 동참하여 '순국군'을 조직하여 거병하게 된다. 1876년 이들의 거병은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제압되고 12월 3일 마에바라는 사형을 선고받고 결국 참수당하게 된다. 또한 쇼카손주쿠 학생 다수와 요시다 쇼인 가문 사람들이 반란에 연루된 데 책임을 지고 교장이었던 다마키 분노신이 할복하게 된다.

 

 '하기의 난'의 주동자인 마에바라 잇세이가 쇼카손주쿠 출신이었다는 점과 이 사건으로 인한 쇼카손주쿠의 몰락은 현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산파 역할을 했던 요시다 쇼인과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의 실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저자 역시 쇼카손주쿠가 작은 동네 서당이며 요시다 쇼인 역시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현재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의 태동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사실 마에바라 잇세이 역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곳 출신이라는 유신의 인물들 역시 어떻게 보면 깊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쇼카손주쿠는 이후 내내 작은 서당과 같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기의 난' 이후에는 아예 폐교하게 된다. 하지만 이토와 야마가타로 대변되는 조슈 출신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미화로 '쇼카손주쿠'를 사적지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작은 시골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일본 우익 정치의 본가라는 위상을 견지하게 된다. 현재 이곳은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위치하는데, 현대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이곳을 성역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 역시 바로 이곳 야마구치현 출신이었고, 2015년에 '쇼카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면서 더욱 일본 우익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쇼카손주쿠'를 마치 근대화의 대명사로 긍정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분별력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기의 난'도 사족의 반란 중 제법 규모가 있었지만, 이 책의 부제인 '서남전쟁'은 사쓰마에서 일어난 사족의 반란이다. 이름에서 이미 '난(亂)'이 아닌 '전쟁'을 쓰고 있는 것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쓰마 지역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축으로 사족들이 굳건히 단결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873년 10월, 정한론파는 결국 내각에서 축출되며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고향인 사쓰마로 귀향하게 된다. 사이고의 영향력 때문인지 그가 낙향하자 600여 명의 사쓰마 출신 정부 관리와 장교 역시 사직하고 그를 따랐으며, 근위대 사령관과 근위대의 절반 병력 역시 함께 사직하게 된다. 가고시마로 귀향한 사이고는 사쓰마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사쓰마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 같은 사쓰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슈와 타협하여 사족을 압박한다고 평가를 받는 것에 반하여 사이고는 진정한 애국자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사이고 일파는 사쓰마 곳곳에 사학을 설립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정부에서 파견된 가고시마 현령마저 사이고에 동조하게 된다. 점점 세력을 규합하던 사이고는 사족들의 마지막 희망으로 자리하게 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이러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적어도 당시 사쓰마와 사족들에게는 그렇게 비춰졌을 것이다.(반대로 같은 사쓰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877년 2월 사이고는 거병을 하며 '서남전쟁'이 시작된다. 이들의 병력은 무려 1만 2천이었으니 그동안 발발한 사족의 반란과는 그 결이 달랐다. 이들은 가고시마에서 출병하여 구마모토를 점령하고 후쿠오카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적극적인 공세로 임하게 된다. 하지만 구마모토는 끝내 사이고에게 점령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사이고는 배후에 구마모토를 두고 후쿠오카에서 내려온 정부군과 결전을 벌이게 된다. 꽤 대등하게 싸웠지만, 결국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에 재정비를 마친 정부군에게 사쓰마군은 그대로 밀려나고 1877년 9월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하게 되고 그를 지지하던 많은 사족들이 전사 또는 자결로 그의 뒤를 따르면서 결국 1877년 9월 24일 '서남전쟁'은 종료된다. 이로써 사족들의 반란은 잦아들면서 일본은 좀 더 본격적으로 근대화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 1878년 내무경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나 가가번의 사족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사족들의 반란의 완벽한 종식은 좀 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서남전쟁'으로 대변되는 사족들의 반란은 개혁이라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지배층이 사족이었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이룬 것도 사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내분이 일어났으니 개혁은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가능함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폐지하고 몇몇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세도정치 세력과 일정 부분 연대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였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체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꼭 피를 불러야만 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득권층과 타협하면서 기존의 테두리 안에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개혁이 아니다. 혁신과 개혁을 내세우면서 기존 정권을 비판하고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는 현재 우리의 역사를 보면 개혁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픽요가 있다. 그러고보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에서 과연 '성공한 개혁'이라 불리울만한 것이 있었던가?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 불리우는 지역은 청나라 말기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수의 이슬람 민족과 세력들에 의하여 분할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의 좌종당은 이홍장과 '해방새방(海防塞防) 논쟁'을 벌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좌종당은 신강지역을 수복하여 육로로 유입되는 열강의 세력, 특히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새방(塞防)'을 주장하였고, 이홍장은 과거 열강이 강력한 함대로 중국에 진출하였으며 떠오르는 강국인 일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해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해방(海防)'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결국 좌종당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좌종당은 막대한 지원을 통하여 재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이홍장은 해군 증강에 차질을 빚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홍장의 입장에서 좌종당에 지원되는 자금이라면 당시 일본 해군의 3배에 해당되는 함선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그의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훗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결과로 나오게 된다. 

 

 어쨌든 좌종당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신강 원정 준비에만 몰두하게 된다. 당시 신강은 야쿱 벡이라는 인물이 이슬람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는데, 그는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권모술수로 신간 지역의 이슬람 세력을 차례로 정복한 상황에서 그는 러시아와 영국, 심지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받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 책에서는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당시의 역사를 보다 폭넓게 살펴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조선과 영국의 무력 분쟁으로 치닫지 않았고, 점령이라기 보다는 불법 주둔의 형태였으며 당시 영국은 의외로(?) 거문도 주민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의료 혜택도 제공하였으니 섬 주민과 영국 해군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사실 영국이 거문도를 점유한 이유는 그 타겟이 조선이 아니라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가 한반도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예 거문도를 점령하여 경고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19~20세기 초에 영국과 러시아는 전세계 곳곳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중앙아시아의 내륙 지배권을 놓고 다툰 것을 '그레이트 게임'이라 부른다. 

 

 영국은 러시아가 점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주요 식민지였던 인도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반대로 러시아 역시 인도에서 영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두 국가의 세력 다툼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던 것도 이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는데, 야쿱 벡의 신강 역시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령 인도에서 신강을 차지하자니 파미르 고원과 카라코람산맥 등 험난한 자연 지형 때문에 공격이 쉽지 않았고, 러시아 역시 청나라와 영국의 눈치 때문에 신강을 간단히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야쿱 벡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영국과 러시아에 등거리 외교를 제안하여 정권을 인정받았으며, 또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 받으면서 내부의 이슬람 세력 역시 단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좌종당은 야쿱 벡의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원래 그곳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었으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홍장과 논쟁까지 벌이면서 추진한 원정이었기에 그로서는 꼭 신강 지역을 차지해야 했다. 

 

 야쿱 벡은 청의 좌종당에 맞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에 화친을 요청한다. 즉, 청의 한 지방으로 복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역시 그러한 요청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지만, 좌종당은 중간에서 이러한 시도를 차단하며 무력으로 진압하게 된다.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따진다면 야쿱 벡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좌종당은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결국 무력으로 신강을 수복하게 된 것이다. 좌종당의 이러한 정벌은 신강 지역을 수복하면서 동시에 위구르 세력을 복속시켰지만, 문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애초 야쿱 벡 정권을 인정해 주었다면 러시아와 영국이 그 지역을 공략하지 않기로 한 이상 그곳으로 러시아가 청나라로 진출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비용을 이홍장의 주장대로 해군에 투자했다면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가 그리 간단히 전멸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에는 '정원호'와 '진원호'라는 거함이 있었고, 일본은 끝내 이들 전함을 격침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예산 문제로 인하여 이들 두 거함에 재대로 된 탄약조차 탑재하지 못하여 해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좌종당의 선택이 오히려 중국의 입장에서는 유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지역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자원은 현재 중국이 이곳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이루어질 정도로 눈독을 들일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에 있어서 꼭 필요한 지역이며 최근 미군이 철수한 아프간과도 맞닿아 있는 곳이니 좌종당이 이런 점까지 감안하였다면 혜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여파로 인하여 이후 중국이 일본과 치룬 전쟁에서 무수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는 그 시대는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살펴보아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낯선 역사이기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 특유의 만화로 이해하기 쉽게 다루면서 동시에 저자의 예리한 해석이 곁들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배우거나 접하는 역사에서는 쉽게 살펴볼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분명 유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g*******7 2021.08.22. 신고 공감 17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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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 임오군란과 통킹 위기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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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 임오군란과 통킹 위기]는 일리 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힘겨루기를 하게 된 청과 1882년에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1884년 베트남을 놓고 벌어진 청불전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애초 이 시리즈를 읽게 된 이유는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와 관련된 역사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저자 역시 비록 제목은 '한중일'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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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 임오군란과 통킹 위기]는 일리 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힘겨루기를 하게 된 청과 1882년에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1884년 베트남을 놓고 벌어진 청불전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애초 이 시리즈를 읽게 된 이유는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와 관련된 역사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저자 역시 비록 제목은 '한중일'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역사보다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 좀 더 많은 양을 할애하였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12번째 책에서는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과연 내가 이 시기의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임오군란'은 수박 겉핥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임오군란'을 신식군인인 '별기군'의 창설에 따른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 민씨 세력에 의한 세도 정치에 대한 불만, 흥선대원군의 정권 복귀에 대한 야심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해 왔다. 특히 2년 뒤인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과 비교되면서 수구세력 내지는 위정 척사파에 의한 사건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이 책의 13권에서 '갑신정변'을 다룰 예정인데, 이 시점에서 과연 개화파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갑신정변' 역시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종래의 그러한 '임오군란'의 원인과 배경을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적으로 다룸으로써 조선 후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임오군란'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읽는 이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하여 '임오군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후기 군대를 통한 조선의 자화상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면서 이전의 조선의 군대는 구식 군인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임오군란'을 단순히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과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먼저 당시 조선 후기 군대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하여 이 시기의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 시기의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한 5군영 체제의 조선 군인들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이들 군졸은 서울 자택에서 도성 각지 근무처로 출퇴근하는 도시 샐러리맨이었고, 군사 직무와 도성 경비 외에도 나라에서뭔가 사람 쓸 일이 있을 때마다 불려 나오는 만만한 인력이었습니다. 그리 빡세게 작업하는 군졸들의 급여는 관아 심부름꾼과 비슷한 수준. 

 So, 서울의 군졸들은 근무 외 시간에 각종 노가다나 도시 근교 농업을 부업 삼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중략) 군졸들은 나름 공무원 파워와 조직력, 머릿수를 갖췄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이 걸린 일이면 상당한 야료를 부릴 수 있었다.

 - p. 232 ~ 234 中에서 -


 

 위의 설명대로라면 조선 후기의 군인들은 그래도 서울 서민 체계에서 가장 위세 등등한 조직력을 과시하면서 도서의 밑바닥을 주름잡고 있는 세력이라 볼 수 있다.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라에서 급여가 지급되고 몇몇 이권 시장에도 개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쇄국정치의 시행에 따른 군사력 증강 정책으로 인하여 군인에 대한 대우는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구식 군인에 대한 대우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구식 군인들이 바로 흥선대원군 세력의 핵심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고종은 궁궐 경비 병력인 숙위군을 무위소로 개편해 국왕 친위대로 삼고, 진무영을 폐지하며 대원군이 늘려놓은 군 전력을 감축하여 친흥파 군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81년에는 5군영을 폐지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 체제로 중앙군을 개편하였으며 군 수뇌부는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일족이 장악하게 된다. 별기군 역시 근대화를 위한 신식군인의 창설로 볼 수 있지만, 이 역시 구식 군인에 대한 견제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구식 군대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는 상황에서 고종은 1873년 청전의 사용을 폐지하면서 극심한 재정 부족을 겪게 되었고(청전은 상평통보의 구리 함량이 1/3이었기에 흥선대원군이 들여와서 청전과 상평통보를 같이 유통시킴으로써 통화량을 확대하였지만, 고종은 청전을 폐지함으로써 통화량이 1/3으로 다시 축소됨) 이후 흉년이 지속되면서 조선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의 세금은 수로를 통한 조운선으로 운반되는 쌀이었는데, 조운선의 운항 역시 파행이 지속되면서 군대에 대한 급료 지급은 더욱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를 통하여 급여에 대한 구식 군대의 불만은 조선 후기의 열악한 경제적인 상황 역시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에 나눠 준 쌀의 태반이 모래와 겨가 들어있었으니 중간에서 이를 착취한 민씨 세력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게 된다. 

 

 2. 흥선대원군의 가세

 1873년 실간한 이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군인들의 반란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이전에도 정계 복귀를 노리던 대원군은 몇몇 음모를 진행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고종의 세력 강화에만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사실 고종으로서는 친정 이후에 여전히 위정척사파의 눈치를 보면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의 외교에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고종의 형이었던 이재선(이복형)을 복위에 올리고자 진행되었던 위정척사파의 음모가 탄로나면서 이제 고종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에게 역적이라는 주홍색 글씨를 새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킨 조선의 군대가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니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곧바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임오군란'은 단순한 구식 군인의 불만이 아닌 조선 후기의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이던 세력들의 대리전으로도 볼 수 있다. 

 

 3. '임오군란'이 촉발한 국제정세

 '임오군란'은 청의 무력 개입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면서 진압된다. 일본 역시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이제 조선은 대놓고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바로 도성에 청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병자호란에서 청에게 패배한 이후에도 조선에 청의 군대가 배치된 적이 없었는데, 열강들로부터 잠식당하던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진압한 이후 아예 조선에 군을 배치한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조선을 청의 보호국임을 천명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은 아직 청과의 전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되어 조선에 대한 주도권 다툼에서 살짝 발을 빼게 되었으니 당분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공고히 되는 상황이었다. 이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세력들이 왜 일본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이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이러한 내용들은'임오군란'에 대한 내용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상황에 대한 상징 및 방향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내가 어렸을 적에 접했던 책들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내용들이기에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고정되어 있지만 어떻게 연구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사건이 달리 보여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연구가 그저 과거에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다각적으로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에서 '임오군란'에 대한 모든 해석과 설명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책에서 고종이 구식 군인에 대한 조직적인 숙청으로 불만을 야기하였다는 점을 논하고 있지만, 과연 조선 후기의 고종이 진행한 군 개혁이 꼭 대원군 세력에 대한 견제로만 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대원군 세력에 대한 견제만을 위한 것이라면 친흥파 군 수뇌부만 숙청해도 충분한 일이었기에 굳이 대대적인 군 조직에 대한 체제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또한 실록에도 급여를 받고 불만을 터뜨린 군에 대한 보고를 받은 고종은 오히려 구식 군대가 충분히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겠다고 옹호한 기록이 있었으니 고종의 친정 이후에 진행된 군에 대한 정책은 개혁의 측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임오군란'을 그저 2~3줄로 서술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사건 중 '임오군란'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리뷰를 쓸 수 있게 된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리뷰에서는 아예 다루지 않았지만 '임오군란'을 제외한 청나라와 베트남의 역사가 은연중에 당시 조선은 물론 오늘날의 외교 정세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들 역시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g*******7 2022.04.28. 신고 공감 16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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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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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다. 역사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러한 관계의 흐름으로 볼 수 있는데, 1894년에 벌어진 이 사건은 그러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선 정부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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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이다. 역사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러한 관계의 흐름으로 볼 수 있는데, 1894년에 벌어진 이 사건은 그러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선 정부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그리고 동학이라는 종교적 신념 등이 원인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였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고종의 성급한 결정으로 인하여 청과 일본이 조선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은 바로 이 사건들의 흐름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서술과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연구는 객관적인 자료와 사실을 통하여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역사관이 등장하고, 과거에는 정설로 여겨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뒤집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과거의 기록이 부족하거나 유실되는 경우라든지 팽팽한 대립으로 확실히 상대방을 납득시키지 못하여 현재까지도 논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역사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에서도 이런 부분은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김옥균을 이 시리즈에서는 친일파에 가깝게 묘사한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저자는 그 부분을 어떤 사료를 참고하였는지를 밝히면서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동시에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리뷰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시리즈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관계가 두 사건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 와중에 고종은 둘 사이의 파워 게임에서 그냥 묻어가는(?) 존재로 등장할 뿐이었다. 실제 [명성황후]라는 드라마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흥선대원군과 그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명성황후의 갈등이 주요 내용이었으며, 고종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원래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치밀한 계산에 의하여 왕이 되었다는 점을 감아난다면 고종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별다른 무리가 없어 보인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적장자인 이재면(고종이 왕으로 지목될 무렵에 19살) 대신에 차남인 이영복(훗날 고종)을 선택한 것도 당시 그가 12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왕의 나이가 어릴수록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다는 흥선대원군의 계산이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던 고종이 왕이 된 것이니 고종은 왕이었지만 아버지의 위세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개 숙인 고종을 옆에서 부추긴 인물이 바로 명성황후였고, 나중에 흥선대원군을 실각에 기여한 인물이 바로 그녀였기에 이후 벌어진 권력 투쟁의 주인공을 바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그러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고종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비록 흥선대원군의 계산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조선의 일인자는 엄연히 고종이었다. 점점 성장하면서 고종 역시 자신의 권력을 뒤찾고 이후 그것을 유지하는 집념의 인물로 이 시리즈에서는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명성황후의 비중이 그리 크게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종이 갑신정변 시기에는 정변을 통하여 민씨 세력을 척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싣고 있으며, 친정을 선포한 이후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을 권력의 라이벌로 철저히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임오군란 이후 청으로 압송된 흥선대원군을 청이 명성황후가 아닌 고종을 압박하는 수단(귀국시키겠다는 협박)으로 자주 언급되는 점(과거에 내가 읽었던 역사서에서는 오히려 명성황후가 청이 아닌 러시아를 가까이하자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겠다고 압박했던 것으로 서술)과 일본 역시 고종을 압박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과 그의 적장손(고조의 조카)인 이준용을 정계에 복귀 및 진출시킨 것 역시 고종이 왕권을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의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고종의 대처에 영향을 끼친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연이어 승전을 거듭하여 전주 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함락시키자 고종은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들이 기존의 민란 또는 동학이라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과 결탁된 정치적인 의도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과거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 생활을 한 것이나 동학농민운동 와중에 흥선대원군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소문이 고종을 자극한 것이었다. 비록 홍계훈을 대장으로 경군(수도병력)을 파견한 상태였지만, 지방군의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입성하여 흥선대원군을 옹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결국 해서는 안될 일로 이어지는데, 바로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엄밀히 농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고종의 그러한 결정은 성급한 것이었다. 비록 동학농민군이 전주성까지 점령하였지만, 이후 홍계훈이 지휘하는 전주성을 포위하여 전봉준을 압박하였고, 전봉준이 성밖으로 돌진하였지만 잘 무장된 홍계훈의 부대에게 큰 타격을 입고 오히려 전주성에 갇힌 상황이 되었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전봉준에 대한 지도력에 의문이 동학농민군 사이에서 생겨났으며, 농학농민운동은 곧 진압될 상항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불안감에 결국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사실 이 요청도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종이 요청한 것인지 아니면 민영휘와 같은 친청파 대신에 의하여 벌어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과거에는 후자에 가까웠지만, 최근에는 고종이 주도적으로 요청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를 뒤흔드는 단초가 이 시리즈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의식하여 왕권을 위협받던 고종이 성급히 청에 지원 요청을 한 것으로 서술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에게 점점 승기를 잡아가던 관군의 상황을 보면 확실히 고종의 결정은 성급했다. 결국 청나라가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자 일본은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병력을 파병한다. 

 

 1894년 동시에 조선으로 파병되었지만 청과 일본의 입장은 천양지차였다. 청은 조선의 요청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실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아산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 당시 전주성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군한다면 다음 목적지는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가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파병 목적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제물포에 상륙하여 한양에 병력을 주둔시킨다. 곧 벌어질 청일전쟁의 육상 전투가 왜 충청도의 성환(아산근처)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청과 일본의 병력이 파병되었지만, 정작 동학농민군과 조정은 1894년 6월 10일,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은 6월 11일, 전주성에서 출성한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조정에 폐정개혁안 12개조 제출) 결국 청과 일본은 실질적인 목표였던 동학농민군 진압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청은 일본에게 동시 철수를 요청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 파병을 이토 히로부미의 표현대로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면서 청을 자극한다. 조선의 궁궐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청의 동시 철수 요구를 거절하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양분하자고 제시한 것이다. 당연히 청으로서는 받아들일 가치가 없는 것이었기에 이홍장은 이러한 일본의 자극에 분노한다.

 

 노련한 인물인 이홍장은 이러한 일본의 도발에 대해서 쉽게 전쟁을 결정하지 못하지만, 젊은 황제였던 광서제에 의하여 개전을 선포하고 그대로 일본의 노림수에 걸려들게 된다. 일본은 이미 조선의 조정을 장악하였기에 조선에게 지원을 강요하면서 청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성환에 있던 청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의하여 쉽게 격파되었고, 이후 9월 15일에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여 청나라 육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된다. 이어 벌어진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는 동아시아 최강이라 평가받던 청의 북양함대가 일본과의 해전에서 타격을 입고 퇴각한다. 정원과 진원이라는 북양함대의 상징적인 두 거함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수병의 질적 차이에 의하여 퇴각한 이 전투는 일본 해군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것이다. 이로써 청일 전쟁의 전장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으로 변경된다. 

 

 이런 과정을 보면 동학농민운동은 많은 의미를 갖지만 대외적인 측면에서는 바로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대처 과정에서 고종을 포함한 조선 정부의 성급한 결정이 그 원인이다. 그동안 일본은 내부적으로 체제 강화 및 내실을 다지면서 명분을 얻고자 호시탐탐 조선의 상황을 주목하는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바로 그 명분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일본 학계에서는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이뤄지기도 하였다.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조선은 꼭 필요했다. 다만 오랜 기간 청나라의 영향권에 있던 조선이 그런 일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일본 역시 열강의 눈치를 보면서 쉽게 조선을 장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 체결된 텐진조약과 그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으로의 파병, 그리고 청을 자극하여 전쟁을 유도하였으니 이제 대륙으로의 무력 진출이 명분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서 다룬 이 두 사건은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쓰여진 내용도 무조건 모두 정설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과거에 정설이라 여겨지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쓰여졌고, 현재에는 그런 새로운 관점이 정설로 자리잡아가는 상황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우리의 역사는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사건임을 반증하고 있으니 이 책을 시작으로 이 사건들을 다룬 다른 역사서도 읽다보면 이 시기의 역사관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g*******7 2023.11.26. 신고 공감 1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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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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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은 두 번의 양요를 겪으면서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만약 그 당시에 쇄국이 아닌 문호 개방을 택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정하곤 한다. 그리고,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 성공하여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역시 이 시기의 역사를 접할 때마다 자연스레 등장한다.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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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은 두 번의 양요를 겪으면서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만약 그 당시에 쇄국이 아닌 문호 개방을 택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정하곤 한다. 그리고,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 성공하여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역시 이 시기의 역사를 접할 때마다 자연스레 등장한다. 과정과 그 속도가 달랐지만 중국과 일본이 각각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서 홀로 변화의 바람을 무시하던 당시 조선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대부분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젊은 급진 개화주의자들을 응원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이전에는 그랬다. '갑신정변'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혁을 통하여 발전을 꾀하자는 그들의 주장과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게 된다면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갑신정변'은 물론 그 사건을 주도했던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선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점은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하여 수많은 자료를 통하여 깊게 파고들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갑신정변'의 막전 막후를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1884년의 '갑신정변'을 그 이전의 청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수구 세력 강화의 단초가 된 1882년의 '임오군란'에 대한 반동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그것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83년 김옥균은 차관을 요청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다. 이미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류하던 김옥균은 조선 역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1883년의 일본 방문은 실제 그가 '갑신정변'의 결행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의 차관 요청은 물론 정변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국내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 추진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굳이 조선을 놓고 청과 대립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이러한 소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던 일본의 재야 세력은 김옥균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1882년 조선에서 터진 '임오군란'을 계기 삼아 국외 문제에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질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옥균과 같은 모험주의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국외의 큰 혼란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 재야 세력의 대표인 일본의 자유당 지도자 고토 쇼지로는 김옥균을 북돋우면서 온갖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지원은 구체적인 것은 없었고 두리뭉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갖고 거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김옥균이 단순히 일본의 지원만을 굳게 믿고 충동적으로 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정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 공사관에서 병력을 제공하였지만 그 병력은 대략 150명 정도의 소수였기에 그것만 믿고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화파의 국내에서 나름의 준비 과정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집권 세력인 친청 세력, 즉 민씨 일파에 맞서 군사력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사실 군권은 집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개화파가 그에 맞서 군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개화파에 속하던 윤웅렬(개화파 윤치호의 아버지)이 이끌던 함경도의 북청군 470명을 거사 2개월전인 1884년 10월에 입경케 하여 친군 후영에 속하게 됨으로써 얼추 사대당과 개화당의 군권의 상황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아래 표를 보면 사대당의 병력이 약간 많지만, 해방영은 서울 밖의 경기도에 주둔하는 병력이니 거의 균형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군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화파의 정변에 대한 국내에서의 치밀한 준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대당 병력(수구파) 개화당 병력(개화파)

친군 우영 : 600명

친군 좌영 : 800명

해방영 : 1100명

보부상

친군 전영 : 560명

친군 후영 : 500명

유학파 장교단 : 14명

충의계 : 50명

 

 하지만 서울에 주도하고 있던 원세개의 청군이 문제였다. 김옥균이 믿는 것은 일본 공사관의 지원 병력은 150명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리 국내의 병력 숫자를 맞춰도 청군이 개입한다면 거사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왜 이 책이 '갑신정변'을 '청불전쟁'과 제목으로 묶여있는지 보여준다. '청불전쟁'은 베트남의 주도권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주요 전장은 청나라와 베트남의 접경 지역과 대만이었으니 조선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 전쟁이 1884년 8월에 시작되어 1885년 4월에 종료되었기에 '갑신정변'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갑신정변'의 시작과 끝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의 병력을 1500명만 남기고 철수시킨다. 김옥균의 입장에서 이는 정변을 일으킬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1500명의 청군도 무시할 수 없지만,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조선에서 일본군과의 충돌은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청군의 개입이 어려우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 '청불전쟁' 당시 프랑스는 일본에게 물밑으로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었으니 청나라로서는 조선에서 쉽게 병력을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청불전쟁'의 개전은 김옥균의 개화당 세력에게 정변의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심지어 수구세력은 개화당의 군사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윤웅렬의 북청군을 다시 함경도로 복귀시키는 조치를 취하자 결국 개화당은 1884년 12월에 거사를 감행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거사에 지침하지 말라는 입장이었기에 일본 공사관은 소극적으로 임했지만, 일본 공사는 정부와 일본의 재야 세력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김옥균의 강력한 설득과 고종의 밀지를 명분으로 공사관 병력을 거사에 제공함으로써 우정국 낙성식에 맞춰 진행된 거사는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청불전쟁'의 시작이 김옥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전쟁의 정황은 결국 김옥균에게 패착이 된다. 프랑스의 우세로 진행되던 전쟁이 점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원세개는 조선에서 일본군과 충돌하더라도 청과 일본의 대규모 확전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과감히 병력을 동원하여 거사의 진압에 개입함으로써 결국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면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순식간에 역적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하여 '갑신정변'의 막전막후를 알게 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의 생각과는 큰 괴리감이 생겨났다. 젊은 엘리트들에 의한 개혁의 상징이라 여겼던 '갑신정변'은 그 과정에서 다수의 문제점을 보여주었기에 그 목적이 정말 구한말의 개혁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인 점과 정변 후 세조가 그랬던 것처럼 수구파의 고위 관료를 살해한 점 등은 그들의 거사를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거사에 성공한 이후 12월 6일 그들이 발표한 [혁신정강]에서 '대원군의 조속 귀환'이라는 내용이 조항에 포함된 부분도 이들의 거사가 마냥 젊은 엘리트들의 구국을 위한 결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무리하게 권력 장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의 거사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부분에서 정책 추진을 위한 권력 장악은 필요한 것이고, 비록 실패하여 제대로 그들의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지만, [혁신정강]의 내용을 본다면 적어도 당시 조선에서 개혁을 통한 구습의 타파를 실행으로 옮기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본다면 그들의 거사가 성공하였더라도 그 혁신이 이루어졌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혁신정강]

- 대원군의 조속 귀환과 조공 폐지                - 탐관오리 징벌

- 만민평등. 양반 문벌 폐지                          - 지조 개혁

- 내시부 폐지                                             - 지방 환곡 모두 폐지

- 규장각 폐지                                             - 경찰 제도 도입

- 해상공국 폐지                                          - 각종 옥사를 재조사하여 억울한 자들 방면

- 친군 전후좌우 4개 영을 1개 영으로 통합   - 국가 예산 관리는 모두 호조로 통합

- 6조의 대신, 참찬들의 국무회의가 내각으로서 국사 총괄

- 6조 외의 번다한 중앙 부처는 모두 폐지


 

 이 책은 '갑신정변'의 과정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면서 흥미로운 가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바로 거사를 고종이 묵인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에 조선이 비록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국왕이 존재하는 전제국가였기에 김옥균 세력이 나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고 하더라도 고종의 허락 내지는 묵인이 없었다면 거사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가설을 언급한다. 즉, 고종은 개화당을 이용하여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씨 세력을 제거하는 이른바 차도살인(借刀殺人)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실제 거사의 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일족은 거사 다음날 고종을 만나려다가 개화당에 의하여 살해되거나 정권에서 축출당하였으니 마냥 허무맹랑한 가설은 아니다. 실제 고종은 성인이 되어 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견제하고 훗날 청나라에 억류되는 것을 방관하였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은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던 '청불전쟁'이 어떻게 '갑신정변'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이 사건들에 대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더불어 역사가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어떻게 아우르면서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를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간 '3일천하'라는 표현 때문에 '갑신정변'을 상당히 드라마틱한 사건으로만 이해했지만, 그 배경과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치밀한 전개에 의한 역사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한 또 하나의 수확이었던 것 같다. 

g*******7 2023.09.21. 신고 공감 1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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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 - 굽시니스트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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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려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중국을 굴복시키고, 일본과는 나중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일동맹(이 조약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인 이익을 인정한다는 것)'을 맺으면서 동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만 그 사이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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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려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중국을 굴복시키고, 일본과는 나중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일동맹(이 조약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인 이익을 인정한다는 것)'을 맺으면서 동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조선은 딱히 영국과 그다지 큰 접점이 없었는데, 이는 영국의 입장에서 조선이 청에 비하여 경제적인 이점이 없었으며, 일본에 비하여 정치, 군사적인 협력을 맺을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청의 주선으로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긴 하였지만, 영국은 조선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영국이 1885년 느닷없이 조선의 섬을 점령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거문도 점령 사건'이었다. 

 

 도대체 영국은 갑자기 왜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었을까?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은 이 사건을 당시 고종의 '인아거청(引俄拒淸 : 러시아를 끌어 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정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서술한다. 조선은 1884년 7월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수교하였는데, 1884년 12월 '갑신정변' 이후 이를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고종은 1885년 서상우와 묄렌도르프를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하여 주일 러시아 공사와 만나 러시아 훈련 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하여 협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시점에 러시아는 이런 조선의 요청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당시 곳곳에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러시아의 입장에서 조선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영국은 이러한 흐름을 인지하고 러시아의 조선을 통한 극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하여 바로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은 영국의 입장에서는 침략이 아닌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 과정은 악랄한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는 거리가 멀었다.(사실 영국을 누가 그런 명칭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신사의 나라'로 이미지 세탁을 한 것이지, 그들이 식민지에서 벌인 행위를 안다면 결코 '신사'와는 거리가 먼 '불한당'에 가까웠다.) 거문도의 섬 주민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였고, 민가의 여자들과는 일부러 마주치지 않도록 훈령까지 내리면서 민폐를 끼치지 않아서 오히려 섬 주민 입장에서는 영국 해군을 반기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문도의 속사정과는 달리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국에 대하여 불법적인 섬 점령에 대하여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물론 영국은 그러한 조선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섬에서 철수하지 않겠다고 주장하였다.(훗날 영국은 점령 후 22개월만인 1887년 2월에 철수한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뒤늦게 조선에 주일 공사관의 스페이에르를 조선에 파견한다. 하지만 이제 조선은 영국은 물론 청과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기에 앞서 러시아 교관 파견과 영흥만 조차를 통한 러시아의 밀약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조선은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보해야 했고, 고종의 '인아거청'의 일환으로 러시아와의 협력을 꾀하던 묄렌도르프는 1885년 7월 청의 압력에 의하여 물러나게 된다. 결국 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발로 추진되었던 '인아거청'에 따른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은 '거문도 사건'을 촉발하면서 조선이 세계 열강의 분쟁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영국과 러시아는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대립하는 상황이었는데, 조선도 그러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을 끌어들였던 청은 물론 훗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일본마저도 영국의 행보에 불안감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이런 조선의 상황은 외교를 잘 활용한다면 중립국 내지는 세력 균형을 통하여 독립을 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만, 결론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지 못했다.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외교가 통하는 것이지 조선은 이전부터 청의 영향력에 놓여 있었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해외 진출을 위하여 조선 점령이 필수였기 때문에 그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의 태국은 동쪽으로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인도차이나를 석권한 프랑스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인도와 미얀마를 점령한 영국이 있었는데, 단순히 이들 강대국의 사이에 있어서 독립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태국 역시 캄보디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대하여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힘이 있었기에 결국 그것을 상실하였지만, 어느 정도 힘이 있었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인정을 받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그럴 힘이 없었기에 청과 일본, 러시아가 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자 하였고,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게 각각 인도와 필리핀 지배를 서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고종의 '인아거청'은 오히려 열강에 이용만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빌미로 조선에 오히려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하였지만, 청의 원세개와 주 조선 영국 총영사의 '제2차 조러밀약사건'에 대한 폭로(사실 이는 실체가 없었다고 한다)로 인하여 당장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영국과의 대립에 부담을 느껴서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훗날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이후 극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다시 조선에 접근하고 이는 '러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거문도 사건'은 외교를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조선의 미약함을 보여주면서 세계 열강에게 조선을 주목(결코 좋을 것이 없는 주목)받게 한 사건이었다. 

 

 '인아거청'과 '조러 밀약설'과 더불어 이 책에서 다루는 '방곡령'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과거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수탈에 대한 개념으로 '방곡령'을 이해하였는데, 최초 '방곡령'이 실행된 1889년은 아직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거나 일방적으로 수탈을 당하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거기에 담긴 의미를 설명한 이 책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쌀과 콩과 같은 곡물을 수입하였는데, 일본 상인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곡물이 일본산에 비하여 최대 3배까지 저렴하였기에 조선에서 수입하여 자국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물가 폭등이라는 부작용이 있었고, 흉년에는 곡식이 부족하게 된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방곡령'을 쓸 수 있었는데, 이는 지역내의 곡물을 관외 반출을 금할 수 있는 것이었다. 1889년 5월과 9월에 각각 황해도와 함경도 관찰사는 방곡령을 선포한다. 그 해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지역의 곡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포되었다. 

 

 문제는 '방곡령'으로 인하여 일본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면서 발생한다. 일본 상인은 입도선매 형식으로 미리 값을 치룬 상황에서 나중에 곡물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그 시점에 곡물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게 되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에 손해를 보면서 다시 되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방곡령'을 시행하기 이전에 미리 일본에 통보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선포하여 일본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어서 그것을 조선이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란은 쉽게 합의를 보지 못하여 두고두고 조선과 일본의 외교적인 분쟁으로 남게 된다. 또한 '방곡령'이 곡물 부족에 의한 조치가 아닌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즉, '방곡령' 선포에 따라 어쩔 수없이 조선에 싼 가격으로 일본 상인이 되판 곡물을 관아에서 매입하여 다시 비싼 가격으로 시중에 풀었다는 것이다. 1889년 함경도에서 '방곡령'을 선포한 관리가 탐관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그런 의도가 다분히 있어 보이지만, 그 해에 흉년이 있었기에 이런 의견은 공식화되지 않고 10년 후에 신문에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로 나오게 된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은 전공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교과서로만 간단히 접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거문도 사건'으로 드러난 조선의 무력한 상황과 반대로 이 시점에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제 열강과 점차 대등한 조약을 체결하며 성장하는 일본의 상황은 장차 조선의 앞날에 먹구름이 다가올 것임을 예상할 수 있어서 암울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암울함이 과연 이 시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조선 후기와 마찬가지로 같은 강대국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이들 사이에서 정교한 외교를 통한 국익의 극대화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따라 감정적인 외교 정책으로 인하여 국익과 국격 모두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g*******7 2023.11.12. 신고 공감 1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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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평가,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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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 / 위즈덤하우스 33번째 리뷰] 고종에 대한 평가는 어찌 해야 할까? 망국의 임금으로서 '나름' 열심히 일한 성군으로 추켜세워야 할까? 아니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왕권회복'에만 혈안이 된 암군으로 매도해도 될까? 객관적인 평가만 놓고 본다면 '나름' 열심히 일한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세계정세'를 볼 수 있는 혜안이 없어서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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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 / 위즈덤하우스 33번째 리뷰] 고종에 대한 평가는 어찌 해야 할까? 망국의 임금으로서 '나름' 열심히 일한 성군으로 추켜세워야 할까? 아니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왕권회복'에만 혈안이 된 암군으로 매도해도 될까? 객관적인 평가만 놓고 본다면 '나름' 열심히 일한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세계정세'를 볼 수 있는 혜안이 없어서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인데도 '제 잇속(왕권)'만은 놓치지 않으려 부던히도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허나 주관적인 평가를 한다면, 그래도 내 나라 임금인데 미워할 수만 있겠느냔 말이다. 비록 '조선왕조의 백성'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종을 평가한다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안목을 읽어내지 못해 결국 '망국의 길'을 제 발로 걸어들어간 암군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 단추는 '흥선대원군'이 잘못 끼웠다. 어린 임금(고종)을 대신해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바로 잡고 '왕조의 기틀'을 회복하여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했다는 점에선 높은 점수를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서구열강의 야욕과 침탈까지 적절히 읽어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은 뼈 아프다. 더구나 어린 고종이 '어른 고종'이 되었을 때 자연스레 권력을 이양하고 사심 없이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임오군란'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임금과 '권력다툼'을 했다는 것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주범이라 할 것이다.

그 다음엔 '민비'의 섣부른 정치 훈수였다. 을미사변 이후에 '명성황후'로 추증되나 살아있을 땐 고종의 아내인 '민씨 성을 가진 왕비'였다. 그리고 조선은 '왕비(여자)의 정치참여'를 용인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섭정이 임금(명종)의 권력보다 강할 때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임금의 어머니'였었다. 왕의 부인인 '왕비'가 권력의 축이 된 적은 조선시대에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민비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다툼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민씨의 천하'를 만들 정도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고종의 왕권회복'을 위해서만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그나마 높이 평가해줄 수 있겠으나, 딴에는 '고종의 권위'보다 우월함을 점거하며 독단적인 전횡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를 넘었다 하겠다. 더구나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타는) 개화파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은 추진력은 고종의 든든한 파트너로 대원군과 '왕권다툼'을 벌일 때도 있었으나, 공공연히 고종보다 더 강력한 리더십으로 '권력행사'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는 점에서 국정농단(외척의 간섭)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종의 줏대를 발휘해서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했더라면 조선은 위기 속에서도 살길을 찾는 행보로 나아갔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청의 개입'을 두 차례나 용인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때에도, 갑신정변 때에도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지 않고 '청군 원병'을 요청해서 국가의 주권을 크게 훼손시켰다. 더구나 을미사변(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하게(?)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한 것이다. 아무리 일본의 강압적 태도에 놀라고 신변의 위협으로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외국공사관에 몸을 의탁하고서 러시아의 보호(?)를 꾀하느냔 말이다. 이 역시 '청군의 개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군의 개입'을 종용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국가를 어지럽히는 자충수를 둔 셈이다. 그리고 청군의 개입으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러시아군의 개입을 빌미로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니 조선은 '다른 나라의 전쟁'에 전쟁터를 제공하는 어리석은 짓을 벌인 셈이다. 물론, 결과가 좋았으면 '신의 한 수'라면서 고종을 칭송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그런데 결과까지 안 좋았으니 고종은 더욱더 비난만 받게 될 뿐이었다.

딴에는 '약소국의 비애'를 감안하여 다른 열강의 힘을 빌어 '이이제이(오랑캐의 힘으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를 하려는 고종의 비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는 '일본제국의 야욕' 앞에 청의 힘을 빌어 일제를 제압하려 했고, 미국의 힘을 빌어 일제를 저지하려 했으며,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제를 호령하려 하는 것이 슬기로운 지혜라 하지 않을 수 있겠냔 말이다. 허나 조선에게 시급한 것은 '근대화'였다. 그 때문에 뒤늦게나마 '개화파의 손'을 들어주며 조선을 개혁하려 들고 근대화에 앞장 서려 했으나 손발이 맞지 않아 번번히 실패한 탓도 있겠다. 먼저 근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국력'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데, 국력의 근본이랄 수 있는 '경제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으니 서구열강 앞의 먹잇감 밖에 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선 '백성들부터 근대교육'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자금도 부족했고, 열의도 없었다. 그저 양반의 자제들 몇몇 만이 소위 '외국물'을 먹고 왔을 뿐이며, 그들이 맛보고 온 '선진문물'에 대해 옥석을 가릴 줄 아는 이가 얼마 없었으니, 그나마도 아무 소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망해가는 나라에 빛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 빛마저 고종은 자신의 '전제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제 발로 차버린 셈이 되었다. 그리고서 꿋꿋하게 밀어붙인 것이 '대한제국 황제가 되는 길'이었으니, 한 치 앞도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은 임금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이런 전제왕권의 끝을 잡고 허우적거리던 것이 어디 '고종' 하나 뿐이었겠는가? 청나라 황실이 그랬고, 러시아 로마노프 황제가 그랬으며, 프로이센을 비롯해서 유럽 곳곳의 왕조가 모두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더랬다. 그럼에도 그네들은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난 반면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 결정적 차이다. 이렇게 종합적인 평가를 매겨도 고종은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

이제 조선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이미 그 역사를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 까닭은 '한국사'라는 우물 속에서만 굴러가는 역사를 공부한 탓이다. 이 책이 훌륭한 까닭은 '한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 정세'를 아울러 '세계 정세'까지 역사적 흐름에 발맞춰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깨알같은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놓치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러일전쟁'이 펼쳐질 참이다. 그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어떤 정세가 숨겨져 있었는지 속시원히 알아보고자 소망한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4.09.02.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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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13. 갑신정변, 누구를 위한 개혁이었나?
"Think 13. 갑신정변, 누구를 위한 개혁이었나?" 내용보기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일제식민통치'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였다. 허나 이는 '일본제국'을 위한 것이었을뿐, 우리를 위한 근대화는 아니었으니 말할 건덕지도 없다. 그런 탓에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은 '해방 이후'로 잡고 있으나, 그마저도 친일독재, 군사독재, 반민족적인 독재정권 들이 연이어 들어서는 바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21세기 초반에야 겨우 '근대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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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일제식민통치'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였다. 허나 이는 '일본제국'을 위한 것이었을뿐, 우리를 위한 근대화는 아니었으니 말할 건덕지도 없다. 그런 탓에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은 '해방 이후'로 잡고 있으나, 그마저도 친일독재, 군사독재, 반민족적인 독재정권 들이 연이어 들어서는 바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21세기 초반에야 겨우 '근대화의 틀'이 잡혀나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정 '조선의 근대화'는 허상일 뿐이었고,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던가? 이번 편에서 '갑신정변'에 대해 풀어놓았으니 살펴볼 일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시작을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보고 있는 시각이 참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그 이전까지 '세도정치'로 지배계층이 뿌리까지 썪어 문드러져 있었으니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들이 뒤늦기는 했지만, 눈여겨볼 만한 탓이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 개혁세력들이 타격을 입고, '동학혁명'으로 새나라를 꿈꿨으나, 뒤이어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모든 시도와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온국토와 백성들이 쑥대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결국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있었다면 그건, '민중봉기'로 싹튼 '민주국가에 대한 열망'이었고, '항일의거'로 보여준 '우리 민족의 불굴의 의지'였으며, 훗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틀'을 바로 세운 것이 전부였다. 뼈아픈 근현대사는 이렇듯 물적으로도, 인적으로도 '절대적인 자원부족' 상태에서 다시 세워 나아간 것이다.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기적을 이뤄냈고, 어떤이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끌어간 주역은 누구라고 보아야 할까?

 

  조선후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겠다. 흔히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적인 세계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사대부)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들이다. 꽤나 개방적인 사상을 갖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엄연한 '유학자'들일 뿐이었다. 유교라는 큰틀 안에서 '조그만 창'을 내어 세상밖을 살펴볼 뿐, 조선이라는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개혁가들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가를 꼽자면,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주목한 '롤 모델'은 일본의 '명치유신(메이지유신)'이었다. 일본의 개화가 성공적으로 보였던 이들은 일본과 손잡고 '조선의 근대화'를 서두르려 하였고, 나아가 서구열강들의 침탈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일본을 파트너로 삼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내부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일본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외향적 분출(침략전쟁)'을 일삼던 나라라는 것을 이들은 잊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후쿠자와 유키치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김옥균과 그 일당들'의 철저한 오판이었던 것일까? 암튼 '갑신정변'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조선의 민중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지도부의 교체(?)만으로 개혁이 성공하리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으며, 조선의 개혁을 은근히 바라는 서구열강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돕기 위해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라 믿었고, 가장 큰 오판은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위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성공 이후, 개혁세력들이 정치적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일본정부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퍼줄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무려 '청나라'를 상대로 말이다.

 

  그렇다. 고종임금이 다스리고 있던 그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이 너무나도 심했던 시절이었다. 가뜩이나 조선을 '청의 속국'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서구열강들의 의심스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민씨일파들은 '임오군란'이라는 위기를 맞아 너무나도 쉽사리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이는 졸속적이고 졸렬한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조선정부를 향해 막대한 보상금과 피해재발을 막을 수 있는 선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이렇게 고종과 민왕후는 '청의 간섭'으로도 모자라 '일본의 간섭'까지 받게 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거기다 구세력(친청)과 신세력(친일)간의 마찰은 더욱 심화되어만 갔다. 애초에 임오군란의 원인이 이 둘의 갈등이었는데, '구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뒤에 제대로 해소되지도 못하고 '청나라의 간섭'만 더욱 심해진 꼴이 되었으니 나라꼴이 엉망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신세력들은 나라꼴을 우습게 만든 세력이 볼짱사납게도 '재집권'을 하게 된 상황이 더욱 눈꼴 시린 것도 말할 것 없고 말이다. 이에 '갑신정변'이라는 새판을 짜기 위해 물밑작업을 시작했고, 결행의 시기까지 무리하게 앞당겼던 것이다. 그렇게 무리하게 결행한 결과가 고작 '삼일천하'였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이렇게 구세력도 별볼일 없었고, 신세력도 변변찮으니 나라꼴이 점점 우습게 된 것도 '당연지사'였으리라.

 

  이런 판국에 '갑신정변'의 진행과정부터 결과까지 '청과 일본의 대결' 양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양새는 더욱 빠지게 되고 말았다. 만약 '프랑스'라는 변수만 없었더라면,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곧바로 시작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응우옌 정권'을 독차지 하려다 청의 간섭을 받자, 곧장 '청불전쟁'을 시작했더랬다. 그렇게 프랑스와 청이 대판 싸우자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에 '청과 일본' 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꺼렸던 탓이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날 당시, 청나라는 청불전쟁에서 발을 빼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고, 일본은 청불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가 확실히 이길 거라는 보장도 없었기에 깊숙이 간섭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래서 '갑신정변'으로 청군 3명 사망, 일본군 2명 사망이라는 나름의 성적표(?)를 가지고 치열한 협상을 벌인 끝에 양국군 모두 조선에서 철군하기로 '텐진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갑신정변'이후 개화세력(민씨척족) 제거와 동시에 외국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이런 결과를 가장 반긴 이는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모처럼 '아버지 눈치'도 보지 않고, '아내의 간섭'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는데,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철수해버렸으니,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해 '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외교관계'를 바라마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청나라와 일본과 한판 붙어도 결코 쫄지 않는 '새로운 힘'과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고종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고종은 조선백성의 주인이면서도 백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겠다는 '자주국방'이라는 기본조차 망각한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봄을 맞이한 기간이 너무나도 짧아 무슨 노력을 기울였어도 달콤한 결과를 맛보기 힘들었겠으나, 겨우 맞이한 봄이 무색할 정도로 곧바로 겨울을 불러들이는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 권에서 다룰 내용이겠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혁세력(친일)들이 모두 사라진 때에 '구세력(친청)들'만으로 무슨 기회를 엿볼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전통적인 구세력들이 믿을구석이라고 해봤자, 결국 '또다시 청나라'에 굽신거리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노력을 하긴 했었는데, 다름 아니라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인 것이다. 그간 러시아가 보여준 저력은 엄청난 영토확장과 더불어 '대영제국'과도 과감히 맞짱을 뜨는 힘, 청나라를 상대로 만주와 연해주를 뜯어내는 힘, 태평양을 넘어 미국까지 경계하게 만드는 저력, 그리고 일본을 상대로도 말 한마디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공함에 고종은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리라. 허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머나먼 왕국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아직 '시베리아철도'가 개통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와중이라 러시아의 육군과 해군이 '조선'에 다다르기 위해선 얼어붙은 시베리아땅을 뚫어야 하고, 영국의 견제를 피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끝에서 끝까지 종단과 횡단해야만 했기에 조선이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을 하더라도 '당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이 급변하면서 조선에 '러시아'와 '영국'이 발을 들이게 된다. 그로 인해 '거문도 점령'이라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니, 다음 권에서 펼쳐질 내용이다.

 

  정리하면,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첫째, 소수일망정 개혁세력을 깡끄리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자주적인 근대화'는 물 건너갔다. 둘째, 무리한 개혁이었을망정 구세력(친청 사대부)들에게 감동과 각성을 주는 계기로 작용했어야 하는데, 되려 '개혁의 필요성'마저 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비호감만 전해주었을 뿐이다. 셋째, 일시적이나마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그 절호의 기회를 맞아 '뭔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조차 없이 그저 '헤프닝'에 불과한 사건으로 일단락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나 아무런 영감도 불어넣어주지 못할 '정변'을 왜 했던 것일까? 아니 '누구'를 위한 개혁이었단 말인가? 단지 '불만표출'에 그칠 요량이면, 도끼를 매고서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의 행위를 따르고 말 일이지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3.06.11. 신고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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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14. 연이은 고종의 헛발질로 인해 조선이 주권국이라는 사실마저 의심받게 되는데
"Think 14. 연이은 고종의 헛발질로 인해 조선이 주권국이라는 사실마저 의심받게 되는데" 내용보기
지난 리뷰에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리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였다. 딱히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만 탓할 것은 못 된다. 왜냐면 당시 '개화세력'이 너무나도 소수였고, 그나마도 다수 백성들의 지지도 없이 걍 '소수의 엘리트(지식인)들'만으로 시도 되었고, 급조한 정변이었기에 '외부세력(일본)'에 크게 의지한 모양새도 '플랜B'를 마련하며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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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리뷰에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리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였다. 딱히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만 탓할 것은 못 된다. 왜냐면 당시 '개화세력'이 너무나도 소수였고, 그나마도 다수 백성들의 지지도 없이 걍 '소수의 엘리트(지식인)들'만으로 시도 되었고, 급조한 정변이었기에 '외부세력(일본)'에 크게 의지한 모양새도 '플랜B'를 마련하며 실패할 확률을 줄여나가는 현명함도 없었으며, 당시 정권의 핵심이었던 '고종과 민씨세력'이 개화세력의 의견을 받아들일 정도로 개화되거나 국력도 뒷받침이 되지 않았으니, '실패한 정변'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렇게 얻을 것도 없는 정변을 왜 무리하게 시도했느냐는 역사적 논란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무모한 정변의 실패로 인해, 이땅에 건전한 개화세력까지 깡끄리 사라지면서 남은 것은 훗날 '친일개화파(매국파)'만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고종을 위시한 '수구보수의 꼴통'만 득실거리는 정국에 '방곡령'과 '동학농민혁명'이란 굵직한 사건이 터지게 되니 이에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헛발만 일삼다. 끝내 일제의 침략만 수월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14권의 내용이 바로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사이에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며, 한중일 삼국 사이에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역사현장'이 세계사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 시작은 '거문도 점령'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이 그 원인인 사건인데, 단순히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영국의 조치로 흘러가지 않고, '청국의 개입'이 눈에 띄게 펼쳐지면서 끝내 '거문도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지만, 종국에는 '청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사건으로 결말을 짓게 되었다. 까닭인 즉슨, 영국과 러시아 양국에게 '조선'은 머나먼 극동의 나라였던 탓이 컸고, 그로 인해 '전면전'을 벌이기에도 부담스러웠으며, 조선의 영토를 무단점령하였는데도 영국과 러시아 각국은 '조선정부'와 외교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청의 조선에 대한 종속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까닭 역시, 영국과 러시아 양국 모두 '조선정부'를 개무시하고, 청의 눈치만 살폈다는 점이다. 이렇게 조선은 아무런 '외교력'을 발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조선개입불가'만 확인하는 게기가 되었고, 청의 종속국이란 점만 다시 한 번 재확인하고 말았다. 이로써 고종의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청나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책은 실패로 끝맺고 말았다.

 

  한편, 조선에서 버라이어티한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일본은 잠잠했는데, 그 까닭은 '내부문제'를 해결하고, '실력행사'를 할 수 있을만큼 근대적 개혁을 마무리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천황제를 골자로 하는 일본의 입헌정치(헌정)가 완성되고, 초대 총리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올라서는 일이 착착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등박문의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끝내 일제가 '군국주의국가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준 꼴이 되었다. 서구열강처럼 '민주주의국가'로 발돋움하려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모양새'만 그럴싸하게 탈바꿈하였을 뿐, 일본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인 의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정치의 요람이 '바로 이때' 시작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깊이 올인하다보니 '군부의 핵심'인 육군의 장성이 천황의 명령 하나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천황제 군국주의국가'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회의 총리'조차 일본시민들의 투표가 아닌 천황의 임명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어 버린 일본은 입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형태의 근대국가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런 기형적인 '군국주의국가' 일본제국이 가장 먼저 탐욕의 본색을 드러낸 국가가 '조선'이었다는 점이다. 또다시 내부문제 '일본의 연이은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는 판국에 이웃나라 조선에도 흉년이 들었는데도 일본내부의 '쌀부족 문제'를 조선의 쌀을 싹쓸이(!)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들었던 것이 '방곡령 사건'의 시작이었다. 조선 안의 쌀이 일본상인들의 싹쓸이 수매로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우려한 조선의 고을 수령들이 '방곡령'을 선포해 조선밖으로 쌀을 내보내지 못하게 하는 지극히 정당하고 합법적인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는 '조선 백성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일본의 쌀부족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일본정부'는 실력행사를 통해서라도 조선정부를 압박해서 쌀부족사태를 해결하려 든 것이다. 이에 한 발 물러선 조선정부는 '방곡령'을 해제하고, 쌀 수출(?)을 허가하며 무마하려 들었지만, 그 사이 일본상인들의 손실을 빌미로 삼아 조선정부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모양새로 일관하는 '일본정부의 무도함'을 아주 잘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 조선에 무슨 빌미만 생기면 바로 힘으로 제압해 해결하려는 못된 실력행사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농민군에게 호되게 당한 고종과 민씨세력은 청의 종속국임을 스스로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청군'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제 조선에 '일본군'이 들어올 수 있는 빌미가 제공되었는데, 과연 합법적으로 조선에 출병할 수 있게 된 일본군의 행보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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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12. 임오군란, 숲을 바라보면서 나무를 분석하는 안목으로 꿰뚫어 보라
"Think 12. 임오군란, 숲을 바라보면서 나무를 분석하는 안목으로 꿰뚫어 보라" 내용보기
다시 한 번, 이 책이 갖고 있는 의미를 더듬어 보련다. 그동안 '한국사'를 읊은 책들은 많지만 이 책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다시금 엿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반도 안에서만 '원인'을 찾고 섣불리 '결말'을 지으려고 했고, 그런 까닭에 '한국사연표'를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Think 12. 임오군란, 숲을 바라보면서 나무를 분석하는 안목으로 꿰뚫어 보라" 내용보기

  다시 한 번, 이 책이 갖고 있는 의미를 더듬어 보련다. 그동안 '한국사'를 읊은 책들은 많지만 이 책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다시금 엿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반도 안에서만 '원인'을 찾고 섣불리 '결말'을 지으려고 했고, 그런 까닭에 '한국사연표'를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투성이였다. 특히, 근현대사는 고대사와는 달리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사건들이 전세계적으로 뻥뻥 터지던 시기였다. 그런 세계적인 사건들이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만 '유효'한 사건이었을리 만무하며,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한국사'가 한둘이 아니었건 것이다.

 

  또한, 구한말이 되면 조선은 더 이상 '은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청과 일본에 비해 서구열강의 침탈을 덜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에는 조선도 열강들과 조약을 맺고 '근대화'의 기지개를 펴는 등 발빠르게 변모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근현대 한국사'를 어찌 '한반도'만으로 축소해서 파악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당연히 '한국(조선)'을 중심에 두고 가까운 이웃나라의 움직임부터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며, 멀지만 기세가 남달리 뿜뿜하던 서구 강대국들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다 파악해야 '한국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이 '본격적'으로 한줄일의 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암튼, 이번의 주제는 '임오군란'이다. 흔히 '임오군란'의 원인을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의 차별에서 비롯되었으며, 결정적인 사건은 13개월이나 밀린 월급 가운데 '한달치 쌀'을 주었는데, 그 쌀에 절반 이상이나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으며 나머지 쌀조차 반쯤 썩어있었던 것이 빌미가 되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임오군란'의 결과로 일본공사관을 불지르고 일본측 관원을 죽였으며 흥선대원군을 재집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사책이 이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임오군란의 원인과 결과'라는 단원에서 중요한 사건이니 달달 외우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구식군대가 왜 하필이면 폭동을 일으켜 '일본공사관'을 다 때려부수고, 권력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데 앞장 섰느냔 말이다. 신식군대가 '일본군 장교'에 의해 조련되고 있어서 '반일감정'이 컸다고는 해도 화풀이 대상을 삼으려면 '외교적 문제'가 커지는 '일본공사관'이 아니라 '신식군대(별기군)'에게 풀어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이 '구식군대(훈련도감)'의 사람들을 편들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자칫 외국과의 전쟁에 휩싸일 수 있는 '공사관 파괴'를 지시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며, 막상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쿠데타의 기치를 '위정척사'로 내세워 '옛날식으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이는 구식군대에게도 그닥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껏 군대를 강화하겠다며 고종과 민왕비가 애를 쓰고 있었는데, 이를 다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옛것으로 되돌리겠다니 '군대강화'도 물 건너 가버리는 셈이 된다. 그러면 신식군대만 없애버리고 말겠는가? 구식군대도 대거 축출되고 임금 삭감도 피치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말이다. 그러니 '한반도 안에서 벌어진 사건'만 파고 들어서는 '임오군란의 진면목'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볼 땐, '망원경'과 '현미경'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속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해야 하지만, 멀리 내다보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숲을 분석할 때에 '한 그루의 나무'만 보고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숲, 전체'를 살피며 어떤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어느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숲속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인지 면면히 살펴보아야 진정으로 '숲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다시 '임오군란'을 보다 넓게 살펴보자.

 

  고종은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에 벌어진 국내의 사태를 보면서 '청과 일본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크게 두 가지를 고민하게 된다. 하나는 청과 일본이 호되게 당할 정도로 '서양의 힘'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게 호되게 당한 뒤에 청과 일본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개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화를 반대하는 세력이 건재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인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고종은 아버지와 척을 지면서까지 아내인 '민왕비'와 손을 잡고 개화를 서둘렀다.

 

  하지만 권력을 되찾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왜냐면 당시 조선은 심각한 재정고갈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화도조약으로 '일본과 무관세 협정'을 맺은 관계로 조선 경제의 주축인 쌀이 일본에 헐값에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조선의 쌀값은 점점 더 오르고 전체 물가까지 덩달아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심각한 굶주림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 개방'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왕실의 재정난은 관원들의 녹봉 지급에도 차질을 빗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구식군대'에 임금체불이 일어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권불십년'에 뒷방 늙은이로 밀려난 뒤에도 재집권을 위해 필사적이었다. 마침맞게 일어난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은 대원군에게 뒤늦은 호재였다. 고종과 민왕비의 개화정책이 유생들의 입맛에 영 맞지 않아 벌어진 운동이 대원군에게 얼마나 반가웠겠냔 말이다. 하지만 유생은 유생일 뿐이었다. 정작 쿠데타에 필요한 '군대'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붓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런 차에 '구식군대'들이 알아서 찾아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대원군에겐 '재집권'만이 중요한 것이었고, '구식군대의 처우개선'은 나중 문제였다. 그래서 일단 '구식군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세력을 일순간에 몰아내고 경복궁에 다시 환궁하는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고종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찾은 '권력'인데, 아버지에게 순순히 내놓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청 조정에서도 이를 수락해 '청 군대'가 출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일본군'이 찾아와 고종을 향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죽는 등 일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렇게 함부로 들어온 외국군대가 쉽사리 돌아갈 리는 만무했다.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청은 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에 얻을 것을 톡톡히 얻어내고야 만다. 먼저 일본은 '일본공사관'에 일본군을 주둔시킬 빌미를 얻어냈다. 이는 훗날 조선 침략에 톡톡히 재미를 본 사안이었고, 더불어 '정한론'이 일본내에서 대세가 된 사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본국민들의 눈에도 '조선'따위가 감히 일본인을 죽인 것에 대한 응당한 보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청은 이 참에 아예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 도장을 찍었다. 그동안엔 대외적으로 조선을 청의 속국이라 말은 했어도 '간섭'은 할 수 없었지만, 임오군란 이후에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것을 새로 맺고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아예 못박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종은 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위험요소(?)'였던 아버지를 청나라로 효도관광 시켜버린다. 이로써 조선은 다시금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비록 느리고 또 한참 늦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까지 파병을 해놓고 확실한 '찜'을 찍지 않았던 것일까? 기왕 보낸 김에 '전쟁'까지 불사하고 결판을 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훗날 '청일전쟁'을 조선을 무대로 삼아 벌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건 청도 일본도 아직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국내사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신정부가 전쟁을 벌일 정도로 여유가 없었고, 청나라도 '임오군란' 즈음에 벌어진 '월남(베트남 통킹)사건'이 벌어져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질 뻔 했으며, 이로 인해 나중에는 진짜로 '청불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또한, 임오군란 한참 전에는 러시아와 '신장지역'의 일리 땅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청나라의 내부사정도 바람 잘 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또또한, 러시아도 '오스만투르크'와 오랜 힘겨루기 끝에 전쟁을 벌이르나 정신이 없어 청나라와 전면전은 피하는 등 세계사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오군란'은 단순히 구식군대의 불만이 팽배해져서 벌어진 헤프닝으로 손쉽게 정리해버리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근현대사'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역사적 이해도 근시안적이게 되어 '엉뚱한 결론'을 내고 '잘못된 해석'을 내리는 등 제대로 된 역사공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교육을 너무 편협하게 해왔다. <한국사>와 <세계사>로 단순구분하고 그 범주를 '한반도 안과 밖'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다.

 

  역사는 '나누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 흐름이 '함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날 저 먼곳에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 보기만 할 수 없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러시아라는 강대국이 벌인 단순한 '영토확장의 야욕'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고, 약소국인 우크라이나가 쉽사리 항복하지도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자원전쟁'으로 번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전세계 국가를 향해 러시아의 푸틴이 '천연가스 등 온갖 자원의 수출'을 전면 금지시키는 졸렬한 행동을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고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당장 원유가격 상승으로 인해 휘발유 등 '물가상승'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치경제 및 사회적 이슈가 연일 터지는 등 밀접한 영향을 받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가 대한민국을 향한 불만과 보복을 노골적으로 터뜨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래도 '한국사'는 '한반도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들로 해석하려 들 것인가. 우리의 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다시 풀어보는 이 책에 더욱 관심이 가는 까닭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2.09.17.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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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마냥 흔들리는데, '고종'은 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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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II / 위즈덤하우스 32번째 리뷰]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조선에선 '동학도'들의 막바지 항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 당한 뒤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도리어 일본군의 뒷배를 믿고 '동학도'들을 토벌하러 내려오는 '경군(조선군)'은 막강한 화력으로 쓸어버리고 만다. 이렇게나 막강한(?) 화력으로 애초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경군'을 보내 해산을 시켰더라면 일본군에 의해 그리 전쟁에 휘말리는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경군'을 보내지 않고 '청나라 원병'을 요청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흥선대원군'이 호시탐탐 경복궁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으로서는 '임오군란'의 참담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흥선대원군'이 정말로 실력행사를 할 정도로 힘을 갖췄을까?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흥선군의 적손자인 '이용준'이 있었기에 고종으로서는 '경복궁 수비'를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동학도 토벌을 위해 경군을 내려보냈다면 흥선군은 보란듯이 '쿠데타'를 일으켜 경복궁을 포위했을 것이고, 고종의 반대세력(개화파)과 연합한 흥선군은 또다시 고종을 괴롭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흥선군은 '동학도'들과도 접선을 하며 고종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증거도 있었단다. 그렇기에 고종의 '청병 요청'은 피치 못할 호구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멍청함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외세의 힘'을 빌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도 예측하지 못하고, 그저 '왕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이는 향후 '고종의 행보'를 보아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시점에서도 일본군에 순순히 붙잡히는 쪽을 '선택'했고, '삼국간섭'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화'하려는 시도가 무산될 때에도 자신의 왕권이 보장만 된다면 '러시아의 간섭'조차 큰 문제가 없다고 본 듯 싶다. 어디 이뿐인가. 대한제국 시절 '만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국 논의가 공공연하게 진행되자 '보부상'에 힘을 실어줘서 집회방해를 일삼았고, 끝내 '독립협회'까지 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을 겪고 난리블루스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오직 '왕권 욕심'에만 매몰되어 다른 사안은 등한시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전제군주국가였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파멸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상황을 뻔히 지켜보면서도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저 '외세의 힘'에 의지해서 권력의 끈을 놓치 않으려는 모습만 보여주었으니 실망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왕실의 무능'을 지켜보았던 덕분일까? 3·1만세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대한사람들은 '왕정복귀'가 아니라 '공화국 건설'로 마음을 모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일단락이 되고, 청나라는 패전국이 되어 치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러 일본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돌발상황이 펼쳐진다. 패전으로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청나라에 요구하는 일본군부를 향해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청일전쟁을 '종전'시키지 말고 이참에 청나라 패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이다. 3차례의 전쟁양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맛본 일본국민들은 아주 그냥 제대로 취한 것이다. 그래서 '만주'를 넘어 '요동' 찍고, '대만'까지 후루룩 말아잡숩고서 '북경'까지 진격을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숙원이었던 대륙정벌도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겨우 조약으로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시도를 원천차단 시키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까지 보태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일본국민들은 '일본정부'나 '군부'에 대해 마뜩찮게 보고 무슨 일이든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것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전환된 것이다. 그만큼 '청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자부심으로 작용했고, 이는 '문명국 일본'이 '야만국 지나(중국을 낮잡아 이르는 명칭)'를 상대로 단단히 혼쭐 내주었다는 뿌듯함까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패전회담을 마치고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러 온 이홍장을 향해 한 일본청년이 총탄 저격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이홍장은 총알을 비껴 맞았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문명국'이라 자랑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야만스런 짓을 하고 말았으니, 조약은 애초에 일본에 유리하게 작성되어야 했으나, 이로 인해 청나라가 '패전 조약'에 서명하길 거부하고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일본이 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 '난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 된다면 일본측에 유리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조약조차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되고, 청나라의 결사항전에 대해 더 많은 전쟁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일본의 처지에서도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이홍장'에게 심심한 위로와 함께 쾌유를 비는 일본국민들의 염원까지 선보여야 했다. 그렇게 이홍장은 죽지 않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성사시키고 귀국했다. 이렇게 '청일전쟁'은 일본측이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할양(요동과 대만)을 받는 선에서 일단락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일본은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경험하게 된다.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차츰차츰 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홍장이 '시모노세키'로 떠나기 전에 러시아측 대표와 밀약을 주고 받았는데, 일본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요동반도'를 일본이 뱉어내게 만드는 묘수였던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다. 러시아는 연해주까지 영토를 넓히고서 '시베리아 철도'를 준공하며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로 '요동의 뤼순'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를 돕는 척하면서 '요동'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으로 계획을 진행 시킨 것이다. 어차피 청나라로서는 일본에 내어주나, 러시아에 내어주나 피해를 보는 것을 매한가지지만, 이를 통해 '이이제이', 즉,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과 갈등관계를 일으켜 '어부지리'라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자 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청나라의 속셈은 애초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한편,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요동 뤼순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두 곳도 '일년 내내' 드나들 수 있는 항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반도'는 러시아가 놓칠 수 없는 이익이었다. 만약 조선 남쪽에 위치한 '거제도'에 러시아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만 있다면 일본을 견제하는 것을 넘어 태평양까지 언제라도 넘나들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게 되니, 러시아로서는 조선이 우호적인 것이 한없이 반갑기만 한 것이었다.

  또다시 한편, 조선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군국기무처'를 통해서 강제로 개혁조치가 선행되었고, 이를 통해 '갑오개혁'과 '제1차 김홍집내각(갑오파)'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더욱더 자신들의 입김이 통하길 원했기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철종의 사위, 갑신파)를 내세워 견제와 간섭을 동시에 시전하였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근대화 정책이었던 '갑오경장'은 일본의 영향력을 크게 받으면서 '강제'로 간섭받기 시작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히 '고종'이다. 이에 고종은 자신들의 측근을 내세워 '왕권회복'을 꾀했으니, 이들이 바로 '정동파'다. 특히, 친러파와 친미파로 구성된 '정동파'는 러시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점점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때마침 '삼국간섭'으로 일본조차 러시아의 힘에 밀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새를 보자, 고종과 민왕후(훗날 명성황후)는 러시아공사관의 '손탁 부인'과 날마다 회동을 하며 일본의 앞잡이들을 러시아의 힘으로 밀어내는 일에 착수하고, 성공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부는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있었음에도 '러시아의 간섭'을 두려워(?)하여 고종과 민왕후의 '행동'에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하고 수수방관만 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친러관계를 내세워 '자주국'임을 내세우려 했으나, 열강들이 순순히 약소국의 이익을 챙겨줄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왜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이 애초부터 '보호국'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야심이 컸는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턱이 없다는 사실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일본은 조선을 마음대로 후릴 새로운 인물을 내세웠으니, 그가 바로 '미우라 고로'다. 본격적인 '여우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4.04.06. 신고 공감 5 댓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