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스티븐 윌트셔(Stephen Wiltshire)는 한번 본 장면을 머리 속에 그대로 복사하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런던 시를 돌아다닌 후, 몇 시간 후 집에 돌아와 자신이 본 런던 시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데 실제와 완벽할 정도로 똑같다고 합니다. 건물과 도로, 가로수, 신호등, 건널목의 위치와 모습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계의 분침 위치, 각 건물의 창문 수까지 정확히 기억해 그려낸다고 합니다. 놀랍지요?
그런데 월트셔에게는 치명적인 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창의력이 없다는 것입니다.(야후 웹진 '구냥' 제2호에서 발췌)
사물과 똑같이 옮겨 놓을 수는 있어서 자신의 생각을 그림에 담을 수 없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그가 그린 그림은 그냥 사물을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This is 시리즈를 보면서 얼마 전에 봤던 이 스티븐 윌트셔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은 아마도 윌트셔와는 정반대로 여러 도시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두드러지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체코 출신의 '미로스랄프 사세크(M.SASEK/1960~1980)'는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특유의 재치있는 시각과 유머러스한 감각으로 여러 도시를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국내에는 런던(This is London), 파리(This is Paris), 뉴욕(This is New York) 세 도시만 출간이 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로마, 비엔나, 샌프란시스코, 이스라엘, 홍콩, 그리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나라를 그렸습니다.
이 책들이 나온 때가 1960~1970년대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여행 정보나 지금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실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다른 정보도 있습니다. 현재의 정보는 책의 뒷부분에 별도로 실렸으니 참고하면서 보면 됩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요.
그러나 여행을 하면서 작가가 바라 본 관점을 쫓아간다는 생각으로 책을 보다면 정말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머러스하게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이나 일반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고 사소한 부분들에 대한 재해석, 위트 넘치는 따뜻한 시선은 단순히 도시에 대한 안내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의 수상록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글솜씨도 빼어납니다. 간결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콕 찝어서 하는...그의 그림만큼 특징을 잘 잡아내고 있습니다.
그럼 뉴욕으로 가볼까요? 이 책은 먼저 가장 먼저
"아, 알겠어요. 시계를 하나 더 얹어드리죠."
하며, 네덜란드인 피터 미누이트가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 맨해튼 섬을 24달러에 사들인 미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거래로 기록되었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지금이라면 최소한 '80억 달러'는 더 얹어 주어야 할 것이라는 상인들의 말을 빌어 날강도 같은 이 거래를 은근히 비꼬고 있습니다.
이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뉴욕이 작가에게는 그다지 이뻐보이지 않나 봅니다. 작가는 크고 화려한 것과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뉴욕에서 두드러지게 느낀 빈부의 차에 주목합니다.
"파크애비뉴는 뉴욕에서 가장 세련된 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할렘에서 바라본 파크애비뉴는 이렇습니다."
라며 다리로 가려진 그늘진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장면은 뉴욕의 소화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사람과 건물이 많은 만큼 뉴욕에는 불도 자주 납니다. 그래서 화재 경보가 거의 6분 마다 울리고(오늘 날에는 30초마다 울린답니다), 비상구와 소화전도 많지요. 건물밖으로 그려진 거미줄 같은 비상구가 인상적이네요(이걸 본 순간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리차드 기어가 이런 비상구를 타고 올라가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소화전은 자그마치 9만개나 있다고 합니다...현재는요...11만개랍니다.
이 소화전은 불을 끄는 데도 사용하지만 토니라는 소년이 구두닦이로 사업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는 관점이 재미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림을 보셔야 알 것 같네요.
작가는 또 비꼽니다...미국인들이 열광하는 미식축구를 소개하면서
"미국에서는 모든 것이 멋있게 돋보이도록 포장됩니다.
미식축구 선수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라며 미식 축구 유니폼을 빗대어 겉모습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는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지요.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미국의 어두운 면만 봤다는 느낌은 결코 들지 않습니다.
밝은 사람들의 표정과 경쾌한 도시의 모습은 밝고 어두운 면을 함께 보면서 진짜 뉴욕을 보고 왔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진지하면서도 재미를 즐길 줄 아는 작가라는 평이 꼭 맞는 그런 책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실래요?
[인상깊은구절] "파크애비뉴는 뉴욕에서 가장 세련된 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할렘에서 바라본 파크애비뉴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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