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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덤불속에 피어난 화엄의 찬란한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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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은 부처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으로서 여러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그 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적은 화엄경의 그 찬란한 세계를 보여주는데 있어 보다 채색이 곁들여진 소설형식을 빌어 쓴 것으로 언젠가 연극을 통해 화엄경 그러니까 이 책 내용이 원작이 되어 각본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렇게 눈으로 한 번 본 후
"가시덤불속에 피어난 화엄의 찬란한 꽃이여......" 내용보기
화엄경은 부처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으로서 여러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그 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적은 화엄경의 그 찬란한 세계를 보여주는데 있어 보다 채색이 곁들여진 소설형식을 빌어 쓴 것으로 언젠가 연극을 통해 화엄경 그러니까 이 책 내용이 원작이 되어 각본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렇게 눈으로 한 번 본 후에 다시 이 책을 펴 들고 일독을 해 보니 뭔가 의미가 진하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역시 부대상황적인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보고 읽고 하니깐 남은 잔영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재동자의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일대기가 그림처럼 펼쳐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대하는 듯하다. 갖가지 색깔의 꽃으로 장식된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는 화엄으로 표현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와 상대하는 선재동자의 대응양식이 인간의 본바탕에 잔잔히 부유하며 그냥 존재의 상태로만 남아 의식의 전편을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인간의 군상들만이 화엄의 장엄한 꽃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흐름도 바로 그 화엄 자체가 아닐까? 그렇게 우린 화엄의 세계속에 너무 깊숙히 들어와 있어 스스로 화엄의 등장인물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숱한 의문을 화두로 붙잡고 혼자 씨름을 하던 때, 그러니까 처음 일독을 하던 어느 때보다 진지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 당시의 고민도 알고 보면 하나의 화엄의 세계인 것을...!

[인상깊은구절]
나는 이 세상 욕계 중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보살의 방편을 써서 남자에게는 먼저 아리따운 여자의 몸을 나타내어 그의 마음에 들게 하여 애욕을 일으키게 하고, 그리고 나서 그 여자가 죽는 것을 보여서 몸이 썩어 새와 짐승들에게 뜯어먹히고, 한번 가까이 갔다가 삼 년이나 사년 동안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악취가 나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또 그 여인을 무서운 나찰 여자로 나타나게 하여 검은 구름 같은 몸통에 빨간 머리카락이 덮인 여자, 배가 처지고 이빨이 위로 뻗고 사람의 해골바가지로 몸을 꾸미고 손에 예리한 칼을 쥐고 욕설을 퍼붓고 험담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여자로 나타나서 그 남자로 하여금 다시는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 때 바로 그때 해탈의 길을 보여준다.
YES마니아 : 로얄 b*****7 2001.11.09.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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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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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의 책은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서 옮겨본다.  사람에 따라서는, 플롯이 강한 쪽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    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를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의 미래를 안다지만  작은 배는 아무 것도 몰라,  나는 작은 배  작은 배는 모든 것을 아는 강물에 떠내려갈 뿐이라네  작은 배여,  아는 것은 강물에 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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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취향의 책은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서 옮겨본다.

 사람에 따라서는, 플롯이 강한 쪽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

 

 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를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의 미래를 안다지만
 작은 배는 아무 것도 몰라,
 나는 작은 배
 작은 배는 모든 것을 아는 강물에 떠내려갈 뿐이라네
 작은 배여,
 아는 것은 강물에 던져주고
 나의 작은 배는 오직 강물에 떠내려가네.

a********r 2009.05.2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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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화엄경, 소설읽기의 지루함 혹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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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거짓이 없다. (....)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그것과 말할 수 있으며 넋의 교제가 가능하며 그것들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동화의 깊은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 없이는 얼마나 현실이 궁핍한가를 현실은 모르고 있다. 많은 고대의 현자들이 말해 준 신화는 실지로 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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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거짓이 없다. (....)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그것과 말할 수 있으며 넋의 교제가 가능하며 그것들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동화의 깊은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 없이는 얼마나 현실이 궁핍한가를 현실은 모르고 있다. 많은 고대의 현자들이 말해 준 신화는 실지로 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목격한 아주 커다란 태초의 현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호오(好惡)의 감정이 약간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와 고은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고은이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런 거냐고 정색하고 물어오면 그 답이 궁하긴 하지만 암튼 그렇다  

세상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어디 그렇게 한 두 마디로 똑 부러지게 설명이 되는 일이던가. 굳이 밝혀야 하는 자리라면 한 두 가지 챙겨서 말하지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 여기서 굳이 그런 무리까지 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나의 서가에는 고은의 책이 별로 없다. 3권이 있을 뿐이니, 그가 100 여 권이 넘는 책을 낸 것에 비한다면, 그리고 나의 상당한 책 수집벽에 비추어본다면 이건 사실 여간한 감정이 아니다. 지금껏 고은의 소설 [화엄경]을 읽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닌 것이다.  

특히 화엄경의 경우, 기왕의 싫은 감정에다 작가가 환속한 사람이고 이 소설이 그런 이에 의해 쓰인 '불가 소설'이라는 점에서 저 거부감의 다른 일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읽은 그의 [절을 찾아서]라는 책이 준 실망감 내지는 반감도 또다른 일조를 했고.

소설 [화엄경]의 광고 공세는 대단했다. 안 사보고는 못 보길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야 비로소 이 소설을 읽었다 바로 위에서 밝힌 몇 가지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것도 처음부터 책을 사서 읽은 것은 아니다. 그저 잠깐 읽고 치울 생각으로 책을 빌렸다. "'91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을 한 작품인데다, 일전에 읽은 [만인보]가 인상적이었다는 점도 일정 부분 작용했지만 직접적인 영향은 책의 뒷표지에 씌어 있는 이문열의 글 때문이었다.

이문열은 여기서 소설 [화엄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기독교 문학으로는 [천로역정]이 있고, 시적으로는 단테의 [신곡]이 있지만 솔직이 소설 [화엄경]이 주는 감동은 그 두 작품을 뛰어넘는다. 소설 [화엄경]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참됨의 아름다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다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과 잃어버림의 아름다움이 있고, 낯섬의 아름다움, 뒤틀림의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서는 자칫 잡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관능의 세계도 아름다움이고,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도 아름다움이다.


 

참 엄청시런 찬사다. 암튼, 이 소설을 완독했다(이런 책을 완독하다니..대단하다!) 근데 할 말이 없다. 뭐라고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가? 암튼 그 비슷한 기분이다
 

나는 저 남섬부주 사바세계에서 이곳으로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나는 많은 손님을 인도했어요. 그런데 그대처럼 이렇게 힘든 승천의 여행을 힘겨워하지도 않고 잘도 따라오는 손님은 처음이었어요. (....) 그대는 33천 에 닿을 만치 많은 공부를 했어요.
높이 높이 오를 수록 사바세계 사람들의 힘은 다하지요. 그래서 아무나 이곳으로 데려올 수 없어요. 데려오다가는 숨 막혀 죽거나 그가 살던 땅으로 추락하거나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마음대로 못하지요. 모든 일의 궁극은 자신에게만 있으니까요. 의존이란, 그리고 남의 힘이란 이 세계 어디에서도 지극히 허망한 것이지요.


소설에서 마야부인을 만나고 난 선재를 33천으로 안내하면서 그 안내를 맡은 하늘 여자가 선재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어쩌면 내겐 이 소설을 얘기할만한 힘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늘나라로 오르다 숨이 막혀 죽는 저 여행자처럼 말이다.

소설 한 권을 다 읽었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사람을 살짝 허탈하게 만든다.
 

이유를 함 찾아보고싶은 이가 있다면, 클릭!

이유를 함 찾아보자. 일차적인 이유는 뭐니 해도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건성으로 책을 읽은 터니 비록 완독을 했다고 해도 제대로 된 책읽기는 아니겠기 때문이다. 당근 할말이 없을 수밖에는.

사실이 그랬다. 눈만 글자를 따라가고 있었지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여러 번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진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소설 읽기가 지루했기 때문이다? 맞다. 솔직히 이 소설 엄청 지루하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근데 그건 또 왜일까? 왜 그렇게 지루해 했던 것일까.

몇 가지 답이 가능하다. 첫째는 지루함을 극복하지 못한 나의 안이함 탓이다. 둘째는 화엄경 원전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고은의 [화엄경]은 그래도 명색이 소설이고 소설은 어쨌거나 원전보다는 쉬이 읽히는 게 일반적이다. 원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소설 읽기가 불편하다거나 그러므로 원전 공부를 마친 다음 소설을 읽으라고 말하는 건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작가를 모독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 어렵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저 지루함이 원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읽기의 지루함은 구성상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강철수의 만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강철수라면 익히 알고 있듯이 전작 장편보다는 가벼운 터치의 연재 만화를 즐겨 그리는 만화가다. 사소한 주변의 이야기들을 아기자기한 삽화 형식으로 그려내는 데는 가히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다. 그의 만화는 일단 엄청 재밌다.

그런데 이건 만화가 연재되는 때에 한해서의 얘기다. 만화가 단행본으로 묶이게 되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단행본으로 읽게 되는 그의 만화는 재미가 없다. 지루하다.

강철수 만화는 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이야기 방식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만화는 주로 단편적인 구성으로 짜여 있다. 여기서는 잦은 휴지기가 필수적이다. 예컨대 매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방식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건 대개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긴 이야기 속에서 이같은 잦은 휴지기는 이야기의 흐름만 끊게 된다. 그래서 대개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단편에서는 그렇게 효과적이던 충격도 긴 이야기 속에서는 전혀 어떤 기능도 하질 못한다. 잦은 휴지기는 오히려 단단조로움만을 더하게 할 뿐이다.
 
강철수 만화 보기가 지루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구성상의 단조로움, 곧 이야기의 반복적인 나열이 단조로움을 만들고 있다. 소설 [화엄경]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화엄경 읽기의 지루함이 이 단조로운 구성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얘기다.
 
1백 10개의 성을 돌며 53인의 스승을 찾아 다니는 선재 동자의 역정이 소설 화엄경의 기본 틀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저 구조상의 난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나의 소설에서 1백 10여개의 성에 대한 이야기라니.. 그게 그거같은 얘기의 반복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소설 읽기의 지루함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결국 강철수 만화를 보는 방식, 다시말해 뒤적뒤적이면서 대강만을 훑어보는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다. 다만 고무적인 것은 저런 구성상의 단조로움이 곧바로 소설 읽기의 지루함으로 연결되고 있진 않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갖는 특이한 언어 구사와 신선한 내용 때문이다. 초반부에서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각별하달 수가 있다. 소설 전체를 일관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일 뿐.

중반부로 들어서면서 그동안 독자를 사로잡아온 저 즐거움은 현저히 떨어진다. 작가의 언어 구사는 답답한 설명문의 그것을 닮아가고, 소설의 내용 또한 진부한 통속성으로 변해간다. 결국 남는 것은 소설 읽기의 지루함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사설이 길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소설에 대해 암말도 할 수 없는 건 일차적으로는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은 독서 태도에 있다. 이같은 독서 태도의 저간에는 소설 읽기의 지겨움이 있다. 그리고 이 지겨움은 구성상의 단조로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운운.

넘 장황했다. 이런 허접한 얘기로 인해 이 소설을 아예 외면하는 독자가 없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많은 이가 이 소설을 읽기 바란다. 잠시 빌려 읽기로 시작한 내가 책읽기를 시작한 다음 날 곧장 이 책을 사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소설 [화엄경]은 한 번 읽고 버려둘 수 없는 책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불교 경전의 하나인 화엄경 입법계품을 전거로 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화엄경은 부처님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오히려 법화경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그 중에서 입법계품은 가장 오래된 경전 성립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략)
이 화엄경 입법계품이 바로 선재의 구도이기도 하다.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구족하기 위하여 남인도 여행에 나서서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처음의 문수 보살과 마지막 보현 보살의 가르침으로 대단원을 이루어 그가 찾는 바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어느때는 불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녀, 신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드넓은 확신이 여기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입법계품-- 뿐만 아니라 화엄경 --의 세계는 인도 전체와 서역 일대 그리고 중국까지 아우르고 있다(이 문장은 요약된것임). 말하자면 이런 커다란 세계를 현실적인 무대로 해서 어린 선재의 순례를 그렇게 큰 무대의 제공으로 달성시킨 것이다.
진리는 무한하다는 암시와 함께 화엄경 입법계품의 세계는 실로 우렁찬 바 있다.
대교향악! 바로 그것이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은 바로 이 선재 동자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디까지가 원전에 근거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고은의 창작에 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좀 더 나은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건 비유컨대 이 소설 읽기에 순례지의 지도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선재의 여정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행의 경로를 알려주는 지도가 일면 유용하달 수 있겠지만 그러나 소설을 읽는 데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리어 우리의 (상상) 여행을 방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예컨대 강 위나 숲속이나 산정, 혹은 꿈속이나 하늘 나라를 여행하는데 그런 지도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필요하고도 중요한 건 소설 [화엄경]이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공간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1, 오히려 소설 [화엄경]이 소설로서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2

소설 [화엄경]은 성공적인 소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내가 꼽는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단연 작가의 화려 무쌍한 문장력이다. 가히 천의무봉이랄수 있는 문체와 그 대단한 울림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 읽기는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어서다.

하나의 문장 안에서도 전혀 자유로운 주술 관계나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제멋대로의 시제 표현들이 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다른 소설에서라면 금방 눈에 띄고 당장 글의 흐름을 방해하게 될 그런 불일치의 문장이 여기에서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의 격식을 갖춘 문장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거침없이 전개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의 울림으로 글 읽는 즐거움을 실컷 맛보게 하고 있다.

여기서는 격식을 갖춘 문장을 되려 답답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류의 문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런 활달함과 장쾌함이 있다.3  문체상의 아름다움을 떠나서도 이 소설은 읽을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정말 많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끝없는 진리행의 길을 나선 어린 나그네 선재의 까마득한 역정을 그리고 있다. 잠시 그 여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고은의 소설 화엄경


 

소아강의 새벽에 문수 보살을 만나 시작되는 어린 나그네 선재의 길은 강나루를 지나고 산을 넘어 바다와 호수와 안개와 저자거리와 승원으로 이어진다. 광야와 사막을 건너고 골짜기와 들녘을 지난다. 그리하여 다시 강으로 산으로 하늘로 이어져간다
 
진리는 아무데도 없어. 그러나 진리를 찾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진리와 함께 있어. 진리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흐르는 물이나 그대와 같은 길손의 마음에 들어 있어.


이 길에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마치 부서지는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됨의 아름다움에다 거룩함의 아름다움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 비어있음의 아름다움 잃어버림의 아름다움 낯섬의 아름다움 틀림의 아름다움 관능 세계의 아름다움,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의 아름다움까지가 이 길에는 있다
 

어린 선재는 길에서 살고 길만이 그의 참다운 집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행복에도 머무르지 않고 진리를 찾아서 끝없이 걸어가는 자의 길에만 익숙하고 있었다.

지나가거라 나그네여, 나그네여. 지나가거라, 나그네여.
모든 길은 지나가기 위하여 이루어졌구나.
모든 길은 지나가며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벋어 있구나.


이 길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사랑과 우정이 있고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눈물이 있다.
꿈과 현실이 윤회와 환생이 허무와 희망이 슬픔과 행복이 또한 외로움이 그리움이 괴로움이 고독이 고통이 법열이 있다. 황홀함과 무상함이 있고 장엄함과 고요함과 안락함이 있다. 한 알의 모래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있고 나그네의 여수가 있다
 

멀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먼 곳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깨워서 모든 사람의 고독과 고민으로부터 건져지게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먼 곳이 없다면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저 먼 곳에 해탈한 존자가 있다. 어린 나그네는 먼 곳을 위해서 한 군데의 사랑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아까웁도다. 도련님이여
그 사랑을 등지고
머나먼 남쪽으로
구름 밑을 걸어가는도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만이 진리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아무런 자아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 있던 선재 자신은 이제 없는 것이다. 그는 세계를 세계 자체로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한 곳에서 선재는 멀어져서 마침내 한 점이 된다. 그리고 그 점이 없어진다.

이 세계에서 만나는 일은
아무리 이름없는 일일지라도
어느 날 헤어지는 일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아무리 이름없는 헤어짐일지라도
어느 날 어느 달밤 만났으므로 헤어지나니
바야흐로 헤어진 이들은 만났으며
아아, 바람과 때는 흐르나니
어느 만남이나 다시 헤어지나니 ....


이 길에는 아리따운 소녀와 지혜로운 소년과 행상 나그네와 늙은 사냥꾼과 동굴 속 은자와 강나루의 사공과 고기잡이 어부와 산속의 농부와 재물이 많은 부자와 자애로운 의사와 술 취한 방랑자와 승원의 수행자와 악한 성주와 춤추는 무희와 미친 노인과 몸을 파는 창녀와 눈썹이 빠진 문둥이와 사랑스러운 부인이 있다.
이 길에는 또한 첫사랑 소녀와의 안타까운 이별이 있고 늙은 장님의 슬픈 노래와 그녀가 본 마지막 만월이 있다.
 

빈 하늘 빈 길을 누가 비었다고 하랴.
빈 것은 비지 않고 가득하므로
가득한 소마주 술잔에 넘치는 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하므로
저문 날 먼 곳의 숲도 하늘도 빈 어둠으로 가득하여라.


이 길에는 안개가 있고 흐르는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새벽강의 모래톱이 하릴없는 나룻배가 시끄러운 저자 거리가 그리고 떠가는 흰 구름이 있다.
불모의 광야와 열사의 사막과 하얀 눈의 고원과 바람부는 산정과 불의 골짜기와 지하의 호수와 푸른 초원과 저문 들녘과 천상의 하늘이 있다.
 

오랜 남녘땅 나그네 길이 이제
북녘땅을 향하는구나
배고플 때 바라보던 남십자성
환한 별빛을 등지고
억만겁 무량겁 과거를 등지고
가노니 보살의 길
억만겁 무량겁의 내일에 이어졌구나
문수의 지혜 만난 이래
온갖 스승 찾아 떠돌았건만
아직도 찾을 스승의 얼굴이여
풀 끝의 이슬이여
풀 끝의 이슬이여
흐린 날 구름 사이의 조각조각
푸른 하늘이여

버리기 어려운 것 버린 일 없이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찾을 수 없음이여, 법이여
빈 물에 뜬 물결이여
집을 짓는 자 물결에 지어라
나라 세우는 자 물결에 세워라
그때 비로소 8만 4천의 괴로움 사라지리라


허두에서 적었듯이 이 소설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도 그 뭔가의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릴없는 이야기만을 더하게 하고 있다. 내 중언부언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안타까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60개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다루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쉰세 분의 스승의 행복이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장을 찾아다닌 행복이여
이제 그 행복 다하여
나 스스로 가야 할 길의 행복이여


저 도저한 구도의 길에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일 수 있겠지만 보다는 저 많은 이야기들을, 거기에 담겨 있는 그 치열한 아름다움과 행복한 깨달음을 하나하나 풀어서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더 근본적인 이유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소설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자에게 직접 읽어보랄 수 밖에는 없는 일일 터다.

모쪼록 이 글이 누군가에게 한 가닥의 그리움으로 남아 언젠가 이 소설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믿음과 서원으로 다아가 책읽기의 지겨움을 견뎌갈 수 있게 하기를 기대해본다.
 

그리움 없이
어찌 이 세계에
한 송이 꽃을 피겠는가
그리움 없이
어찌 이 세계에
한 송이 꽃 피고 지겠는가

그리움 없이
그리움 없이
어찌 나에게
찾아갈 곳 있겠는가


만약 그대 깊은 서원과 믿음이 없었던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 그 멀고 먼 역정의 시련을 감당하여 여러 남쪽나라 스승을
찾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자못 고달픔에 겨워 어디선가 홱
돌아서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도다.
아니 몇 번 찾아 다닌 것으로 작은 열매를 딴 것으로 만족하여
더 큰 열매들이 있는 산을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도다.


위쪽에 있는 시는 선재 동자가 보현 보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고 아래쪽 글은 문수 보살이 어렵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선재 동자에게 보내고 있는 찬가의 일부다.
소설 [화엄경]을 읽는 일은 어쩌면 선재 동자의 여행에 못지 않게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선재 동자의 그리움과 서원과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은 틀림없이 기꺼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때로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이, 또 때로는 이야기의 진부함이 독자를 한없는 지루함과 무감각에로 이끌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작가의 쾌한 문장과 깊이있는 성찰들이 이내 씻어줄 것이고 그리하여 아린 사랑의 이야기와 진리를 찾는 즐거움으로 독자를 안내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선재 동자의 그리움과 믿음과 서원을 가슴에 안고서, 이제 가라 소설 [화엄경]에의 길을. 진리에의 길을.
 

가라. 한 나뭇가지가 길을 가리키지 않느냐.
나무는 지난 날을 알고 바람에 흔들리며
또한 한 사람이 갈 길을 알고 가지를 뻗는구나.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단호한 이별이어야 한다'.
광야를 알고 세계를 알고 싶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가야 한다.
'끝없는 길에 끝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니 가라. 선재 동자의 길을 좇아서. 그 길을 넘어서. 삼매의 노래를 들으며.
 

내 삶이 길 위에 있을진대
내가 어느 스승을 찾으랴
길이 내 어버이, 길이 내 스승이매
이 길 위에서 나고 죽어서
길이여 길이여 내 길이여




 

 

 

 

h*****e 2009.02.07.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