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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은 부처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으로서 여러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그 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적은 화엄경의 그 찬란한 세계를 보여주는데 있어 보다 채색이 곁들여진 소설형식을 빌어 쓴 것으로 언젠가 연극을 통해 화엄경 그러니까 이 책 내용이 원작이 되어 각본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렇게 눈으로 한 번 본 후에 다시 이 책을 펴 들고 일독을 해 보니 뭔가 의미가 진하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역시 부대상황적인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보고 읽고 하니깐 남은 잔영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재동자의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일대기가 그림처럼 펼쳐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대하는 듯하다.
갖가지 색깔의 꽃으로 장식된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는 화엄으로 표현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와 상대하는 선재동자의 대응양식이 인간의 본바탕에 잔잔히 부유하며 그냥 존재의 상태로만 남아 의식의 전편을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인간의 군상들만이 화엄의 장엄한 꽃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흐름도 바로 그 화엄 자체가 아닐까?
그렇게 우린 화엄의 세계속에 너무 깊숙히 들어와 있어 스스로 화엄의 등장인물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숱한 의문을 화두로 붙잡고 혼자 씨름을 하던 때, 그러니까 처음 일독을 하던 어느 때보다 진지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 당시의 고민도 알고 보면 하나의 화엄의 세계인 것을...! [인상깊은구절] 나는 이 세상 욕계 중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보살의 방편을 써서 남자에게는 먼저 아리따운 여자의 몸을 나타내어 그의 마음에 들게 하여 애욕을 일으키게 하고, 그리고 나서 그 여자가 죽는 것을 보여서 몸이 썩어 새와 짐승들에게 뜯어먹히고, 한번 가까이 갔다가 삼 년이나 사년 동안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악취가 나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또 그 여인을 무서운 나찰 여자로 나타나게 하여 검은 구름 같은 몸통에 빨간 머리카락이 덮인 여자, 배가 처지고 이빨이 위로 뻗고 사람의 해골바가지로 몸을 꾸미고 손에 예리한 칼을 쥐고 욕설을 퍼붓고 험담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여자로 나타나서 그 남자로 하여금 다시는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 때 바로 그때 해탈의 길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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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의 책은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서 옮겨본다. 사람에 따라서는, 플롯이 강한 쪽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
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안다지만 |
어린아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거짓이 없다. (....)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그것과 말할 수 있으며 넋의 교제가 가능하며 그것들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동화의 깊은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 없이는 얼마나 현실이 궁핍한가를 현실은 모르고 있다. 많은 고대의 현자들이 말해 준 신화는 실지로 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목격한 아주 커다란 태초의 현실이었다. 기독교 문학으로는 [천로역정]이 있고, 시적으로는 단테의 [신곡]이 있지만 솔직이 소설 [화엄경]이 주는 감동은 그 두 작품을 뛰어넘는다. 소설 [화엄경]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참됨의 아름다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다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과 잃어버림의 아름다움이 있고, 낯섬의 아름다움, 뒤틀림의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서는 자칫 잡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관능의 세계도 아름다움이고,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도 아름다움이다.
참 엄청시런 찬사다. 암튼, 이 소설을 완독했다(이런 책을 완독하다니..대단하다!) 근데 할 말이 없다. 뭐라고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가? 암튼 그 비슷한 기분이다
소설에서 마야부인을 만나고 난 선재를 33천으로 안내하면서 그 안내를 맡은 하늘 여자가 선재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어쩌면 내겐 이 소설을 얘기할만한 힘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늘나라로 오르다 숨이 막혀 죽는 저 여행자처럼 말이다. 소설 한 권을 다 읽었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사람을 살짝 허탈하게 만든다. 이유를 함 찾아보고싶은 이가 있다면, 클릭! 이유를 함 찾아보자. 일차적인 이유는 뭐니 해도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건성으로 책을 읽은 터니 비록 완독을 했다고 해도 제대로 된 책읽기는 아니겠기 때문이다. 당근 할말이 없을 수밖에는.
사실이 그랬다. 눈만 글자를 따라가고 있었지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여러 번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진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소설 읽기가 지루했기 때문이다? 맞다. 솔직히 이 소설 엄청 지루하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근데 그건 또 왜일까? 왜 그렇게 지루해 했던 것일까. 몇 가지 답이 가능하다. 첫째는 지루함을 극복하지 못한 나의 안이함 탓이다. 둘째는 화엄경 원전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고은의 [화엄경]은 그래도 명색이 소설이고 소설은 어쨌거나 원전보다는 쉬이 읽히는 게 일반적이다. 원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소설 읽기가 불편하다거나 그러므로 원전 공부를 마친 다음 소설을 읽으라고 말하는 건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작가를 모독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 어렵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저 지루함이 원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읽기의 지루함은 구성상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강철수의 만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강철수라면 익히 알고 있듯이 전작 장편보다는 가벼운 터치의 연재 만화를 즐겨 그리는 만화가다. 사소한 주변의 이야기들을 아기자기한 삽화 형식으로 그려내는 데는 가히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다. 그의 만화는 일단 엄청 재밌다. 그런데 이건 만화가 연재되는 때에 한해서의 얘기다. 만화가 단행본으로 묶이게 되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단행본으로 읽게 되는 그의 만화는 재미가 없다. 지루하다. 강철수 만화는 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이야기 방식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만화는 주로 단편적인 구성으로 짜여 있다. 여기서는 잦은 휴지기가 필수적이다. 예컨대 매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방식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건 대개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긴 이야기 속에서 이같은 잦은 휴지기는 이야기의 흐름만 끊게 된다. 그래서 대개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단편에서는 그렇게 효과적이던 충격도 긴 이야기 속에서는 전혀 어떤 기능도 하질 못한다. 잦은 휴지기는 오히려 단단조로움만을 더하게 할 뿐이다. 강철수 만화 보기가 지루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구성상의 단조로움, 곧 이야기의 반복적인 나열이 단조로움을 만들고 있다. 소설 [화엄경]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화엄경 읽기의 지루함이 이 단조로운 구성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얘기다. 1백 10개의 성을 돌며 53인의 스승을 찾아 다니는 선재 동자의 역정이 소설 화엄경의 기본 틀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저 구조상의 난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나의 소설에서 1백 10여개의 성에 대한 이야기라니.. 그게 그거같은 얘기의 반복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소설 읽기의 지루함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결국 강철수 만화를 보는 방식, 다시말해 뒤적뒤적이면서 대강만을 훑어보는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다. 다만 고무적인 것은 저런 구성상의 단조로움이 곧바로 소설 읽기의 지루함으로 연결되고 있진 않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갖는 특이한 언어 구사와 신선한 내용 때문이다. 초반부에서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각별하달 수가 있다. 소설 전체를 일관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일 뿐. 중반부로 들어서면서 그동안 독자를 사로잡아온 저 즐거움은 현저히 떨어진다. 작가의 언어 구사는 답답한 설명문의 그것을 닮아가고, 소설의 내용 또한 진부한 통속성으로 변해간다. 결국 남는 것은 소설 읽기의 지루함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사설이 길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소설에 대해 암말도 할 수 없는 건 일차적으로는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은 독서 태도에 있다. 이같은 독서 태도의 저간에는 소설 읽기의 지겨움이 있다. 그리고 이 지겨움은 구성상의 단조로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운운. 넘 장황했다. 이런 허접한 얘기로 인해 이 소설을 아예 외면하는 독자가 없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많은 이가 이 소설을 읽기 바란다. 잠시 빌려 읽기로 시작한 내가 책읽기를 시작한 다음 날 곧장 이 책을 사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소설 [화엄경]은 한 번 읽고 버려둘 수 없는 책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불교 경전의 하나인 화엄경 입법계품을 전거로 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화엄경은 부처님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오히려 법화경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그 중에서 입법계품은 가장 오래된 경전 성립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략) 이 화엄경 입법계품이 바로 선재의 구도이기도 하다.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구족하기 위하여 남인도 여행에 나서서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처음의 문수 보살과 마지막 보현 보살의 가르침으로 대단원을 이루어 그가 찾는 바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어느때는 불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녀, 신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드넓은 확신이 여기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입법계품-- 뿐만 아니라 화엄경 --의 세계는 인도 전체와 서역 일대 그리고 중국까지 아우르고 있다(이 문장은 요약된것임). 말하자면 이런 커다란 세계를 현실적인 무대로 해서 어린 선재의 순례를 그렇게 큰 무대의 제공으로 달성시킨 것이다. 진리는 무한하다는 암시와 함께 화엄경 입법계품의 세계는 실로 우렁찬 바 있다. 대교향악! 바로 그것이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은 바로 이 선재 동자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디까지가 원전에 근거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고은의 창작에 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좀 더 나은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건 비유컨대 이 소설 읽기에 순례지의 지도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선재의 여정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행의 경로를 알려주는 지도가 일면 유용하달 수 있겠지만 그러나 소설을 읽는 데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리어 우리의 (상상) 여행을 방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예컨대 강 위나 숲속이나 산정, 혹은 꿈속이나 하늘 나라를 여행하는데 그런 지도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필요하고도 중요한 건 소설 [화엄경]이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공간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1, 오히려 소설 [화엄경]이 소설로서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2 소설 [화엄경]은 성공적인 소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내가 꼽는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단연 작가의 화려 무쌍한 문장력이다. 가히 천의무봉이랄수 있는 문체와 그 대단한 울림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 읽기는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어서다. 하나의 문장 안에서도 전혀 자유로운 주술 관계나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제멋대로의 시제 표현들이 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다른 소설에서라면 금방 눈에 띄고 당장 글의 흐름을 방해하게 될 그런 불일치의 문장이 여기에서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의 격식을 갖춘 문장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거침없이 전개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의 울림으로 글 읽는 즐거움을 실컷 맛보게 하고 있다. 여기서는 격식을 갖춘 문장을 되려 답답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류의 문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런 활달함과 장쾌함이 있다.3 문체상의 아름다움을 떠나서도 이 소설은 읽을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정말 많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끝없는 진리행의 길을 나선 어린 나그네 선재의 까마득한 역정을 그리고 있다. 잠시 그 여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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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강의 새벽에 문수 보살을 만나 시작되는 어린 나그네 선재의 길은 강나루를 지나고 산을 넘어 바다와 호수와 안개와 저자거리와 승원으로 이어진다. 광야와 사막을 건너고 골짜기와 들녘을 지난다. 그리하여 다시 강으로 산으로 하늘로 이어져간다
이 길에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마치 부서지는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됨의 아름다움에다 거룩함의 아름다움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 비어있음의 아름다움 잃어버림의 아름다움 낯섬의 아름다움 틀림의 아름다움 관능 세계의 아름다움,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의 아름다움까지가 이 길에는 있다
이 길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사랑과 우정이 있고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눈물이 있다.
이 길에는 아리따운 소녀와 지혜로운 소년과 행상 나그네와 늙은 사냥꾼과 동굴 속 은자와 강나루의 사공과 고기잡이 어부와 산속의 농부와 재물이 많은 부자와 자애로운 의사와 술 취한 방랑자와 승원의 수행자와 악한 성주와 춤추는 무희와 미친 노인과 몸을 파는 창녀와 눈썹이 빠진 문둥이와 사랑스러운 부인이 있다.
이 길에는 안개가 있고 흐르는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새벽강의 모래톱이 하릴없는 나룻배가 시끄러운 저자 거리가 그리고 떠가는 흰 구름이 있다.
허두에서 적었듯이 이 소설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도 그 뭔가의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릴없는 이야기만을 더하게 하고 있다. 내 중언부언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안타까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60개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다루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저 도저한 구도의 길에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일 수 있겠지만 보다는 저 많은 이야기들을, 거기에 담겨 있는 그 치열한 아름다움과 행복한 깨달음을 하나하나 풀어서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더 근본적인 이유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위쪽에 있는 시는 선재 동자가 보현 보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고 아래쪽 글은 문수 보살이 어렵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선재 동자에게 보내고 있는 찬가의 일부다.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단호한 이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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