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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exbris/222901901321 원상아라는 우상이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이념이란 게 혹시 현실을 초월한 오인주의 ‘꿈’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연에서 본원하였으되 인간의 세계에서는 절멸된 것으로 전해지는 그 꿈을 '진짜 마녀' 오인주는 자신이 아직까지 무한의 세계에 속해있음을 증명하며 체념없이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경유한 야만의 시대에 공존이라는 꿈이 작은 희망으로조차 상상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복제자의 영속성이 개체 유지를 압도한다는 진화생물학의 성과를 접했다면 실낱같더라도 초월적 이성이 자기 유지를 넘어설 수도 있겠다는 논리적 희망 정도는 품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문화산업이 《작은 아씨들》를 통해 원상아와 오인주의 신화적 대립과 초월적 이성의 승리를 그리는 모습을 감상하며, 간절하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특정한 부정’을 포착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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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exbris/222897756718 2부 4장 “부연설명 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에서 저자들은 합리적 이성의 극단이 역설적으로 난잡함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보이고 있다. 칸트의 이성적 자아는 초월적인 자아와 경험적인 자아로 구분되며 경험적 자아의 측면에서 이성은 자기 유지를 목적으로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자기 유지는 개별적이므로 자기 유지를 위한 합목적적 행위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념을 지향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 유지와 이에 복무하는 경험적 이성은 정언 명령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들은 사드의 소설 속 줄리엣이 섹스, 살인과 테러를 통해 추구하는 향락을 조절된 계몽적 향락으로 범주화한다.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금기들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화되며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 초연한 무감동 상태로 쳬계적이고 기계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계몽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적 향락은 개연적일 수는 있을망정 그다지 철저해 보이지는 않는다. 개별의 자기 유지를 위해 작동하는 이성의 합리성은 그저 개별적일 뿐이다. 즉, 초일관적이지 못한 것이다. 나만을 위해 작동하는 합리성보다는 모두를 위해 작동하는 합리성이 더 합리적이며 일관적이다. 분명한 건 나만을 위해 작동하는 도구적 합리성은 종국에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살인이라는 격률이 일관되게 보편적으로 지켜진다면 살인이라는 격률은 곧장 붕괴될 것이다. 죽일 사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근본적으로 공존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다만 경험적인 자아에게 도덕 법칙 지향의 의무가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들은 자연과 분리되면서 유한자로서 겪게 되는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조절된 향락이 요구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때 줄리엣이 보여 주는 초연한 무감동 역시 위장에 불과한 것 아닐까? 어째서 계몽은 조절된 향락은 정당화하면서 초월적 이성을 지향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이 단념될까? 어째서 물자체와의 거리두기가 물자체와의 단절로 비약되는 것일까?
2부 6장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에서 저자들은 반유대주의를 계몽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필요했던 이디오진크라지(특정대상에 대한 과민한 거부반응)로 분석한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자연과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것은 무한으로부터 무한을 제거해야 하는 일이므로 가능하지 않다. 저자들은 자연과의 미메시스를 끊어내기 위해 계몽은 희생 제물을 선택했다고 본다. 이를테면 “노동을 찬양했던 철학을 제공했던 시민계급은 노동이 착취의 근원이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착취의 근원에 대한 가상이 필요했고, 유통에 종사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로 자신들의 착취와 몰락을 설명해 주는 가상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p.256).
저자들은 계몽을 철저하게 자기 동일성을 위해 폐쇄된 되먹임 회로에 가둔다. 이 회로 속에 계몽된 인간은 유한자이면서 무한자를 망상하는 편집증적 환자이다. 이 회로 밖에서 등장하는 타자는 MBTI와 같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체계에 분류되어 파악되어야 한다. 내 인식의 밖에서 벗어나 파악될 수 없는 타자는 내게 두려움과 공포의 이디오진크라지로 출현한다. 그러나 과연 이 야만의 회로에서 벗어날 방도란 없는 걸까? 그럴 방도 따위가 없다면 이성과 합리성이 이 닫힌 회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유한자이면서 무한자를 망상하는 편집증적 환자를 계몽된 인간의 필연으로 선언하는 저자들에게 쉽게 설복되지 않는다. 유한자임을 수용하면서 유한자를 성찰하면서 무한자를 지향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내 인식의 틀에 틈입해 오는 상처로서 타자를 무수히 경험한다. 대부분 그것들을 배제하고 자기 동일성의 구둣발로 짓밟아버리기 일쑤지만 때론 그 틈입에 속절없이 매혹당하며 금지된 미메시스를 강력하게 호명할 찰나들이 있다. 그 타자는 때론 연인의 존재로, 자식의 존재로, 혹은 예술 작품의 존재로도 출현하며 무조건적이며 무저항적인 환대와 수용으로 경험된다. 나는 또한 이것 역시 초월적 이성을 향한 계몽의 범주라고 믿는다. |
| 사서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꼭 사두는 책들이 있다. 들뢰즈, 데리다, 벤야민, 아도르노가 그 작가군에 속한다. 하지만 이 책은 줄이거나 요약할 수 없는 아도르노의 사상을 비교적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 평전과 주석서, 해설서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성격인데다가 독일의 근대사를 함께 다루어 아도르노의 사상 배경을 설명해준다. 특히 5장 문화산업,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에 대한 주석은 이 시대, 이 공간을 통찰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도르노가 너무 어렵다고 느껴지거나 그럼에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책을 읽어내길 원한다면 이 책이 처음 시작하기에 적격일 듯. 참고로, 이 책을 펴낸 노명우 선생의 초기작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문학과 지성사)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