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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화사의 에이브 전집 중에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처럼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대상으로 한 책들을 88권 전집으로 묶은 에이브 전집은 1980년대 당시 그 시절을 살았던 초등학생들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그 중엔 상당한 이해 수준을 요구하거나 보통 어린 아이가 받아들이기에 충격적으로 닿아올 수 있는 내용의 책도 있었는데, 당시 내가 보기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그랬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도려내 버렸는지 이 책의 제목을 마주할 때마다 유대인의 이야기라는 것뿐 전체적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어린 시절 읽었던 이야기를 그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아이를 둘만한 성인의 나이에 다시 찾아 읽어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 어린애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지금처럼 알고 있을 리는 없고, 아마도 프리드리히가 이웃에게 모욕당하는 정도가 시간이 갈수록 뜬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심해지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자신이 '타고난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무기력하게 쓰러져가는 모습이, 아직 세상에 대한 기대가 실망보다 더 큰 그 어린 아이의 눈에는 너무나 충격이었을게다. 나약한 어린 아이에게 그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 어른들이 행한 폭력. 그 공포. 지금 생각하기에도,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기엔 좀 이른 소설인 것 같다. 동양애들보다 성숙이 빠른 독일에서도 7학년이 되어서야 보여준다고 하니까.
먼저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1925년에 태어난 독일인이다. 나치 당이 득세하고 집권하고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 3-40년대를 작가는 인생 초반에 겪었다. 히틀러 정권의 나치즘에 어렸을 때부터 노출되고 반유대주의 교육으로 '세뇌당한' 세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그 나이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소년단의 캠프 생활이나 깃발에 자부심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에겐 같은 해 일주일 사이로 같은 아파트 윗층집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라는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 이 소설이 반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막중한 전쟁 배상 책임으로 독일 전역에 살인적인 인플레가 돌았던 1925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틈을 비집고 탄생한 나치당과 그 나치 당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소년단을 모집하고 그 소년들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시키는 '유대인 신화', 그리고 그 속에서 알게 모르게 반유대주의로 세뇌되어 가는 아이들과 별 양심의 가책 없이 반유대주의를 선동하고 참여하는 '일반' 시민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냉철하게 털어놓는다.
한쪽에서는 독일인의 'Lebensraum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외부인(유대인)에 대한 적대심을 조장한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점점 그 자리를 차지해 나가는 '축제'를 벌이는 동안, 반대쪽에서는 그 축제의 제물이 되어 절망에 차서 울부짖는다. 절망에 차서 울부짖음, 그것밖에 그 시절을 사는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그마저도 전쟁 중반 즈음 가면 끊기고 만다. 시간이 갈수록 속수무책으로 그 폭풍 속에 휘말리고 접질러지고 쓰러졌던 유대인은 마침내는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전쟁 전엔 단란하고 화목했던, 그리고 신앙심이 깊고 경건했던 슈나이더 가족도 그 폭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빈에서는 크리스탈나이트 사건으로 잘 알려진, 1938년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폭동에서 제일 먼저 어머니가 죽고, 전쟁이 발발한 직후 아버지가 끌려가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까지 살았던 프리드리히마저도, 다른 독일인의 도움으로 은닉하던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마을이 폭격당해 목숨을 잃으면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프리드리히가 어린 시절엔 자신도 다른 소년들처럼 소년단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 히틀러 소년단 뱃지를 만들어 달았던 이야기는 아이러니하다기보다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 물론 그것도 프리드리히가 직접 모임에 참석해 소년단 전체에 퍼진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목격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 소속감은 느끼고 싶고 소외감은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은 인간이라면 모두 마찬가지로 하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반대로 소속감의 위험을 알아보고 과감히 물리쳐야 할 때도 있다.
폭격 중 방공호 입소를 거부당하다 죽었다는 에피소드가 일평생 무의식에 맴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유대인은 연합군이 소이탄으로 마을을 폭격하고 있는 동안, 방공호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복수극에 책임이 없었던 유대인이 오히려 그 생지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 글을 읽으면, 그때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서 유대인들이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는데, 프리드리히가 방공호에 들어가지 못한 게 당연했겠지-라고 '그냥' 생각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소시민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 똑같은 사람인데 그 똑같은 안전을 한 사람은 누릴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할까? 똑같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인데, 한 사람은 보호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 만약 그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람의 '확보'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면?
2차대전 중 유대인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에게 세뇌된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니었다. 홀로코스트와 절멸수용소로 특히 부각된 유대인 박해는 그 이전에 '반유대주의'라는 상당히 긴 역사를 거쳐왔다. 심지어 전쟁 전 유대인들을 점점 고립시키고 그 목을 죄어드는 독일 시민 사회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닮아 있다. 독일을 지배한 반유대주의의 시작이, 지금 브렉시트로부터 불거진 '고립주의'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현재도 자신의 'Lebensraum' 확보를 위해 적대적인 고립주의 노선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난민사태와 계속 전 유럽을 뒤흔드는 테러 때문에 그 속에 숨어 있는 '고립주의'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도 그랬다. 인플레이션과 전쟁 배상 책임 때문에 독일 사람들 눈에도 그 배타적인 '확보'가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자신의 '삶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확보하는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하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고 자타 공인하는 시민들이었다. 크리스탈나이트 폭동을 벌이는 순간에도, 그들이 '인간적(?)임'이 느껴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소름끼치는 부분이었다. 정부의 지시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밖으로 내던지는데 열을 올리는 독일 시민들의 행동은, 그들이 딱히 누구를 겨냥하고 누구를 개인적으로 혐오해서 그런 일을 한다기보다는, '때려 부시는 것'에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며 희열을 느끼는 행동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정부는 반유대주의를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하지만, 사실 시민들이 더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반유대주의' 행위의 실제적 실시보다는 정부가 그들이 스트레스를 풀어낼 대상을 만들어주어 그 대상을 만나 '합법적으로' '죄를 지으며' 자신의 힘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득이나 어려운 살림이었던 만큼 정부의 도움으로 상대의 재산을 그들의 것으로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파를 창밖으로 내던지면서, 한 시민은 심지어 프리드리히 친구인 주인공에게 소파를 내다버릴 수 있도록 힘 좀 보태달라고 말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스스로 속을지 모를 일이다. 스스로의 잘못된 행동을 우리 사회의 '전체적 이익'을 위한 행위로 합리화하고, 아주 나중에서야 우리가 전체적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폭동에 참여하는 속에서도 '인간적'인 '연대 아닌 연대'를 서로에게 느낀다! 엇나간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주인공 소년은 유대인 친구를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연대의식' 때문에 그 폭동에 자기도 모르는 새 가담하고, 자신이 가해자로 참여한 폭동에서 각각 어머니와 부인을 잃은 프리드리히와 슈나이더 씨를 보며, 그 위험 속에서도 프리드리히 가족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양심적인 독일인인 어머니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당시를 살았던 독일 사람들의 경우, 정부가 주입시킨 '유대인 비화'때문에 유대인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했을지 몰라도, 그건 말 그대로 생각이었을 뿐, 정말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행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친위대와 게쉬타포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은 모두 패닉 상태로 빠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 정부도 강제수용소에 대한 사실을 그들의 국민들에게 감추었던 것이고, 전쟁 말기엔 시민들이 점점 독일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배만 불리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자기기만에 빠진 것이다. 물론 그건 독일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 시절 독일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독일인들이 저지른 치명적 실수에서 그 실수를 다시 역사 속에 반복하지 말아야 할 교훈을 보아야 하리라. 그 환경에 똑같이 놓여 있었다면 우리라면 그들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 확신이 있는가?
나치즘의 광기에 점점 물들어가며 소시민의 의식이 잔인하게 변해가는 사회를 냉정하게 그려내는 이 소설에서도 살짝 숨통이 트이는 부분이 나오는데, 노이둘프라는 선생이 당에서 지령이 내려온 '유대인에 대해 알려주라는 교육'을 그의 반 아이들에게 실시하는 장면에서였다. 당에서 가르치라고 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알려주고, 유대인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당으로부터 이용당하도록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들의 역사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설파하는 노이둘프 선생의 모습에서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해를 받으면 답답하지만, 오해를 이렇게 속시원히 풀어주는 말을 들으면 그 답답함이 순식간에 풀린다. 물론 그 시절은 답답함이 풀리는 것으로만 끝날 시절은 아니었지만. 이 부분은 유대인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부분이다. 한스 리히터의 이 소설이 독일 교과서에 등장하며 7학년 필독도서로 선정된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민족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한 인격체로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행위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대목이다. 특정 민족과 종교가 이쪽 저쪽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프리드리히가 '절망에 차서 울부짖었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밖에 그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가 살았던 '내일'은 절망에 울부짖었던 '오늘'보다 더 사태가 나빠졌으니까. 아이는 계속 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자신이 보고 있는 앞에서 자신의 집을 거리낌없이 파괴시키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충격으로 발작을 일으키다 사망한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방공호 앞에서, 그는 너무 무섭다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아이의 절박한 갈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이 지경을 보기 전에 차라리 그때 돌아가신 게 다행이었다고 말하는, 한때 해맑은 미소와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던 프리드리히. 한 사회가 이 아이에게서 차례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가고, 기어코는 그의 목숨마저 내동댕이치고 마는 것이 한 독일인의 시선으로 하나씩 실제 했던 사실로 드러난다. 누가 프리드리히를 이렇게 만들었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어느 때였을까...... 아니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환경 안에서도 노이둘프 선생님처럼 소외된 약자의 처지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나와 지역 사회의 이익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다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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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주일이라는 시간차이를 갖고 태어난 나와 프리드리히는 이웃에서 가까운 사이로 성장해 간다. 힘겨운 상황의 것을 제외한다면 결코 남다르지 않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조금 더 나은 환경과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려 하지만 현실의 것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함께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히틀러와 나치의 우월적인 이념으로해서 유대인이라는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가해의 것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임에도 역사적 오명과도 같은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편견과 무시는 물론 차별과 격리의 것은 삶의 의미마저도 상실케 하는 위험한 것으로 그들을 위협한다. 의식적인 주입과 강요를 통해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고 그러한 것에 반발하는 이들에 대한 징계와 억압을 가해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가다니...., 그야말로 관계의 단절과 고립을 통해 어디서도 정착해 갈 수 없는 상실의 삶으로 내몰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핍박의 것을 이겨내고 살아와야 했던 과거의 삶에 대한 경험과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버텨가는데......
횡포와도 같은 무차별의 폭력과 파괴는 조심스럽게 행복을 키워 가던 프리드리히의 가정을 흔들게 되고 그러한 슬픔의 것은 그들만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되어간다. 막연한 공포와 슬픔의 것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서로에 대한 경계를 일삼는 이들의 마음 또한 편안하지만은 않은데 억지스런 행동을 하거나 무시하고 외면해야 하는 현실의 것은 더욱 프리드리히와 슈나이더 씨를 힘겹게 만든다. 부당한 해고와 탄압으로 해서 삶의 것이 뒤엉켜 버리게 되면서 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의 것을 잃어 가게만 된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위협에서 또 다른 존재를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러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긴박한 사정의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고난과 역경이 급습해 온다.
귀찮은 임차인을 떨궈내게 되었다고 표현하며 그들의 것을 탐하는 레쉬 씨와 같은 이들이 그들만의 것을 공유하고 독차지 하려 유대인이라는 존재의 이들을 그토록 억울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거리의 고아로 내몰리게 된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부모 사진을 얻고자 찾아오게 되지만 잠시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될뿐 어이없는 슬픔의 모습으로 기억되게 된다. 공포의 순간에서도 외면되고 제외될 수 밖에 없는 유대인으로 그 모든 참혹함을 바라보고 느끼며 죽어가야만 했었기에 더욱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절규하는 아이를 위한 조금의 배려나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이들의 마음 또한 그만큼의 고통이 쌓여 가게 되었을테니......
함께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실의 것, 기회의 박탈, 정당함에 대한 비판, 공개적인 위협의 것등등, 아픔의 것을 경험하고 무수한 상처를 겪어야만 했던 프리드리히의 운명이 너무도 많은 아픔을 안겨 주고 있다는 것을 그의 친구를 통해 이야기하며 반성케 된다. 어느 누구도 그 죄를 덜어낼 수 없음에 더한 반성과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노력하지도 않는 회피를 한다면 더한 문제의 것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염려를 해보게 된다. 분명 우리는 서로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그만의 것을 이해하면서 존중해야 할 필요를 알면서도 그 중요성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다. 잔혹했던 역사적 오류를 통해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이 그러한 중요성을 더불어 반성해 가며 개선하고자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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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만행에 대해 간단하게 들어본 적(배운 적)이 있다. 유대인 학살, 그것뿐이었다. 유대인이 어떠한 박해와 모욕, 폭행을 당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처음 책 제목만 봤을 땐, 순수소설 정도인 줄 알았는데, 참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 슈나이더씨와 그의 부인, 아들인 프리드리히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 독일인에게 멸시를 받고, 심지어 그들은 건물(집)도 부순다.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편견-유대인은 여호와-(이 사람이 곧 하느님이라 알고 있는데)-, 기독교는 예수를 섬긴다고 알고 있는데, 또 여호와의 아들이 예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이들이라니 좀 복잡하다. 그런데 유대인도 여기저기 쫓기는 입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불안감에서의 선택이었다는 것은 lt;선생님gt; 편에서 독일인 노이도르프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노이도르프는 독일인 중에서도 저항적이지는 않으면서 양심적, 지식인인 인물의 유형으로서, 모든 독일인이 아닌 대부분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박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독일인들의 박해는 결국 인간의 인도라는 종교적 선(善)의 가치에 모순되는, 변질적인 행위로, 현재의 북한 사회처럼 히틀러의 반 유대사상교육·정치란 것은 그토록 반윤리적이면서 참혹한 것이었다. lt;박해gt;편에서는 '나'가 다른 독일인들, 앞장서는 여성과 함께 유대인의 견습공 기숙사를 마구 파괴한다. 무의식 중에 '나'는 그것을 즐긴다. 이것은 사상교육에 세뇌당한 무비판적인 독일인들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듯한데, '나'는 사회적 분위기에 깔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에 삽화처럼 끼워진 lt;살로몬gt;편은 유대인 박해의 속성을 보여주고, 다음에의 프리드리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의 분위기의 발화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능욕당하고, 즐거움도 빼앗기고, 사랑도 이룰 수 없던 프리드리히. 매정한 레쉬로 인한 그의 죽음은 잊을 수 없는 비극의 절정이자 역사 속에서의 과정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죽는 때의 직전 내용인 공습 때 대피소 문앞을 지키고 있던 레쉬는 프리드리히의 간청에도, 유대인을 멸시하던 독일인들마저도 들여보내라 하는데 끝내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레쉬는 히틀러의 사상에 완전히 뒤집어씌인 인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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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그 이전'은 이 책 첫 장의 제목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나'와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고 그 이전이란 어른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같은 건물 위 아래층에 우리 부모님들은 세 들어 살고 있었고, 거기서 우리는 일주일 간격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독일인인 나와 유대인인 프리드리히 사이에는 이미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이들이 어떻게 읽어낼까? 하는 궁금함과 아이들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할까? 하는 곤욕스러움이었다. 히틀러, 나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등 떠오르는 단어가 여러 개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역사 교과서나 책, 그리고 영화에서 본 이미지가 전부일 뿐이다. 나치나 히틀러의 잔인함에 우리의 역사가 오버랩 되면서, 가해자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과 가스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유대인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느낀 적은 있다.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그들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위아래 집에서 살면서 우리는 가장 친한 사이이다. 어디든지 함께 다닌다. 하지만 어른들은 나와 프리드리히를 같은 시선으로 대하지 않는다. 소년단원에도 프리드리히는 들어갈 수 없다. 수영장에서도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다. 결국엔 학교도 함께 다니지 못한다. 유대인은 유대인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뒤바뀐다. 실업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사회주의당에 입당하면서 직장을 얻게 되고 프리드리히 아버지는 실업자가 된다. 프리드리히 가족의 비극은 계속 된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말이다. 결국 프리드리히 어머니는 폭도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 말고는.
학교 선생님은 프리드리히가 학교를 떠나는 날 아이들에게 독일인이 왜 유대인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준다. 이 부분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을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비교적 자세히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너희들이 오늘날이나 혹은 미래에, 어떻게든 유대인을 경멸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더라도,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해라. 유대인들도 인간이라는 것,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p.96
선생님은 이 작품에서 몇 명되지 않는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또 한명의 양심을 가진 인물은 집주인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프리드리히 가족에게 집을 비워주지 않아도 되도록 판결을 내린 판사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글을 읽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목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한 남자는 …… 그리고 나한테도 망치 하나를 주었다. 처음에는 망치만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망치가 어딘가에 부딪쳤고, 그 바람에 유리 한 장이 박살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어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 재미있었다. …… 의자 다리, 쓰러진 장롱, 유리컵 할 것 없이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뭐든 쳐서 앞으로 밀쳤다.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자니 내가 무척이나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 나는 칠판을 향해 망치를 던졌다. …… 망치 자루가 마치 옷걸이 못처럼 검은 칠판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갑자기 피곤해 지면서 구역질이 났다, 나는 집으로 달려갔다. p.135-136
유대인 견습공 기숙사를 습격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서 그 곳에 들어간‘나’가 폭력을 목격하고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사람들에 휩쓸려 그들이 하는 대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유대인들의 집과 재산을 파괴한다. 심지어 재미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강해진 것 같다는 우월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끔찍한 일이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일이라도 그 것이 계속 반복되고 강요되어진다면 약하디 약한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상황에 길들여진다. 어린아이까지도 폭력에 길들여지고 잔인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어떠한 경우라도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폭력은 반복할수록 위해를 저지른다는 감각이 무뎌진다, 또한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금방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만약 이러한 상황이 또 다시 반복된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의 부모 역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위험에 처한 프리드리히 가족을 도와주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어떠할 지 잘 아는 ‘나’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에게 떠날 것을 권유한다. 아주 괴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 가족은 떠나지 못한다. 몰래 랍비를 숨겨주었던 아버지는 잡혀가고 프리드리히만 혼자 남게 된다. 혼자가 된 프리드리히, 그에게 세상은 무섭고 두려운 곳 일뿐 의지할 데라고는 아무 곳도 없다. 가족사진을 찾기 위해 몰래 집으로 온 프리드리히를 ‘나’의 어머니는 목욕을 시키고 음식을 먹인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이다. 그들은 곧 있을 공습을 피하기 위해 지하 대피소로 가지만 프리드리히는 데리고 가지 않는다. 폭격 속에 혼자 견딜 수 없었던 프리드리히가 대피소 문을 필사적으로 두들기지만 그들은 그를 들여보내지 못한다. 그들의 목숨을 유대인 아이 하나로 모두 잃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프리드리히는 있었다. 폭격 속에 난장이 폴리카르트의 모자 꼭지가 날아가 버린 우리 집 입구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기절한 것처럼 죽어 있었다. 프리드리히에게 달려가는 엄마를 아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고만 있다. 집 주인 레쉬 씨는 정원을 지켜주는 돌덩이의 모자가 날아가 버린 것만이 아쉬울 뿐이다. 프리드리히 거기에 있는데도 말이다.
레쉬 씨는 프리드리히를 걷어찼다. 프리드리히는 기대고 있던 현관에서 포석 위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가시가 돋친 장미 덩굴을 경련이 날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요런 꼴로 죽는 것도 다 제 놈 팔자지.” 레쉬 씨가 말했다. p.201(이 글의 마지막 장면)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풀어 가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어떨 땐 딱딱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 한편이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러한 사실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역사책은 사건을 담아낼 뿐이지만 소설 속에는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야기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 누구도 ‘명성황후는 일본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다.’ 라는 문장보다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어느 배우의 비장한 대사 한마디에 잠잠했던 애국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독일인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유대인 아이 프리드리히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역사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이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역시 이야기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초월한 그 이상의 것을 느낄 것이다. 동갑내기 친구를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잃어버리고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 ‘나’의 마음을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강요하면서 읽게 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역사를 가르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유대인이 왜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했는지, 히틀러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밝혀진 홀로코스트에 대한 진실이 모두 맞는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이 이야기와 상관없다. 대신 아이들과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워 보자.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증오에 대해, 정의를 위해 자신의 나약함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나 이겨내야 하는 이유를 함께 이야기해보자.
이것이 곧 이 책을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방법이자 소통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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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2차세계대전 전후소설 중 최고였습니다. 감히 평생을 가까이 두고 싶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아직은 이웃으로 지내던 어느 날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때 '프리드리히'가 있었습니다. 이 작은 유대인 꼬마의 성장은 사회의 퇴화와 걸음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독일이 권력과 폭력, 광기에 뒤덮일수록 '프리드리히'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가볍게 읽히는 소설인데, 문학적 상징과 비유가 잘 녹아내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것들입니다.
난장이 눈사람- 작품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며, 무기력한 유대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후에 '프리드리히'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화자인 '나'의 망치놀이- 집단의 권력이 갖는 광기에 대한 상징이며, 그것이 '프리드리히'라는 개인적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레쉬의 슈나이더 유품 도둑질- 죽은 사람의 물건을 훔침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대인 박해를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이것 말고도 더 풍부한 내용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게 가장 깊이 남게 될 장면은 바로 사람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사회가 폭력적일수록 인간은 더 아름다워지나 봅니다. '아브라함의 가게에서 고집부리며 물건을 사간 노파', '옳은 판결을 해 준 멋진 판사', '프리드리히를 사랑한 헬가'...... 아무래도 이 비극적인 책은 저에게 수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로,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모양입니다. |
|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우선 엄청난 규모부터가 놀랍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살된 유태인의 수는 500만에서 60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대인 학살 책임자 가운데 한 명인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만 250만 명이 직접 살해되었고, 50만 명 정도는 기아로 사망했답니다. 아우슈비츠는 많은 수용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이외의 여러 소수민족이나 장애인, 반체제인사까지 피해자를 넓히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더불어 놀라운 또 한 가지는 학살의 잔인함입니다. 독가스를 이용한 살해 방법이나 시체를 이용해 비누를 만드는 과정 같은 기록은 읽어나갈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만행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러한 만행이 나치에 한정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만행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러한 만행을 저지르게 하는 시대 상황이나 내 마음속의 폭력을 살펴보게 됩니다. 나는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놀라갔다. 슈나이더 씨 집 문이 활짝 열린 채 덜렁거리고, 문의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입술이 새파래진 슈나이더 부인이 겨우 숨을 쉬며 부엌 바닥에 누워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이마에는 혹이 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자기 엄마 위에 몸을 숙이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남자가 슈나이더 부인의 발을 밟고 지나가더니, 커다란 수저통을 창문 너머로 쏟아 버렸다. 어떤 여자는 거실에서 도자기 그릇들을 부쉈다. “마이쓰너 도자기다!” 그 여자는 나를 보고 고급 고자기에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다른 여자는 슈나이더 씨의 서한용 칼로 집 안에 걸린 그림들을 다 찢고 다녔다. 슈나이더 씨의 책장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의 거인 같은 남자는 책장에서 책을 한 권씩 한 권씩 꺼냈다. (137 - 138쪽) 일반 독일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가족에게 행패를 부리는 장면입니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때로는 나치에 동조해서, 때로는 따돌림 당하기 싫어서, 또 때로는 쉽게 이득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인 프리드리히 가족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 황당한 일을 당한 슈나이더 씨 부인은 충격을 받고 끝내 죽음에까지 이르는데 일반인들의 이러한 행동은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줍니다. 우리가 당시를 살았으면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지,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다른 약소 민족들에게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물론 나치가 횡행하는 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이 부당한 나치의 행동에 저항하며 진실의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너무나 미약하였기에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역사는 나치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살벌한 나치 시대에 죽어간 프리드리히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깊은 고통과 성찰을 요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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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안네의 일기를 읽었었다 많은 대화들이 이야기를 주도해나가선지 꼭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낙천적이고 밝았던 소년 프리드리히가 주위환경이 암울하게 변해감에 따라 급격히 달라져가는 모습들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린 소년이 의지할 데 한 곳 없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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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적 중산층으로 행복한 가정과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고 노후를 대비해 저축도 어느 정도 해놓은 상태이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고 집에오면 아내가 해놓은 따뜻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웃들과도 어려움없이 잘 지내고 있다."
이렇게 장담하던 당신에게 어느 날 엄청난 일이 닥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집주인은 집을 비워달라는 통지를 보내고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한다. 당신의 아이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고 거리를 지날때마다 손가락질 당하고 출입금지를 당하는 장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급기야는 친하게 지낸다고 했던 이웃들에게 집을 습격당하고 그 충격으로 아내가 죽게 된다. 이후 영문도 모른채 나는 경찰에게 붙잡혀간다.
도대체 왜?! 이유는 단 한가지. 나와 내 가족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수도 없이 들어왔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독일인의 시선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와 프리드리히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갑내기 친구이다. 위아래층에 나란히 살기도 하고 부모님이 모두 친하기 때문에 늘 같이 붙어지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인하르트는 프리드리히네 가족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좋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라인하르트는 독일민족 소년단에 가입하게 되고 라인하르트의 아빠도 당원이 된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독일민족 소년단에 가입하고 당원이 되는 것이 프리드리히 가족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의 장점이 여기에 있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아무것도 모르는 독일 소년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그리고 그 학살의 대상을 프리드리히라는 동갑내기 친구 가족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오히려 독일인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결국 '나', 라인하르트는 프리드리히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 프리드리히 아빠가 독일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도 보게 되고, 마지막으로 친구 프리드리히가 폭탄이 떨어지는 대피소 밖으로 쫓겨나게 되고 폭격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 프리드리히를 목격함으써 독자들이 느끼는 독일인에 대한 비난의 시선은 최고조에 달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가족을 사랑했지만 현실에 굴복할 수 없었던 라인하르트 가족의 모습이나 대피소에서 프리드리히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던 한 독일 육군 장교의 소극적인 저항등에서 우리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죄값이 모든 독일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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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는 나와 같은 집 3층에 세들어사는 내 친구에요. 우리아빠는 오랫동안 실직자였던 반면 프리드리히의 아버지는 우체국 공무원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우정을 나누는 만큼 우리 가족과 프리드리히네 가족은 서로에게 다정한 이웃이었어요. 프리드리히네 아버지는 우리 부모님이 부끄러워 하지 않을 만큼의 추억을 만들어주시고, 배려해주었어요.
모든 것이 프리드리히네가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이었어요... 나는 프리드리히네가 차츰차츰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보고만 있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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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이의 담담한 어조가 감정이 고조된 어른의 어조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사실적으로 들릴때가 있지요.
안네의 일기와 버금가는 책이라고 평가되는 짧은 '어른용 동화 책'은 그냥 아주 담담하게 내가 프리드리히라는 친구가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 지켜보고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집단적 광기가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잔인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유대인을 배척하는 것은 독일이라는 국가와 정부일 뿐이지, 사람들은 아니다' '나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독일 사람이다. 내가 어디를 가겠는가' 라고 말하던 프리드리히 아버지의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은 바람앞의 촛불처럼 하찮기 그지 없을 뿐이에요.
얼마전 소동을 일으킨 '요코 이야기'를 저는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요코이야기를 읽고나서 그것을 쓴 작가는 그저 얼마나 전쟁이 잔인한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을 뿐인거라고, 나쁘다는 탓을 하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교과서로 그런 이야기를 가르치도록 채택한 미국 정부가 더 나쁘다라고 글을 쓴 거를 읽었어요.
물론 일본작가의 피해의식이 우리 눈에 거슬릴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아직 인정하지 않은채 자신들이 피해자인양 어떤 면죄부를 바라는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은 따져야 될거구요.
그렇지만, 우리들이 피해자라는 것을 잊지 않음과 동시에 우리역시 한 인간집단으로서 가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어쩌면 팔레스타인에서 또다른 프리드리히가 핍박받고 고통받고 있을지도... 아니 고통받고 있을겁니다. 예전에 핍박받던 프리드리히에 의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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