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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를 읽노라면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여울물 소리는 전작 오래된 정원과 많은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단 한 사람을 향한 오래된 그리움과 기다림이 주된 소설이라는 점이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이를 오래도록 기다리는 한 여인이 주가 되는 이야기다. 그리움을 낳은 남자가 커다란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그렇다. '오래된 정원' 에선 남자가 광주 항쟁에 연루되어 있었다면 '여울물 소리'에서 남자는 동학 운동에 연루되어 있다. 한동안 함께 했던 그 짧았던 만남이 평생에 걸친 기다림을 낳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정원'에서 남자는 수배를 피해 여주인공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울물 소리'에서는 동학(소설에서는 굳이 '천지도'라 부르고 있다.) 교도 탄압을 피해 여주인공이 운영하던 주막에 지내다 결국 여주인공과 인연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존재하는 유사점을 보노라면 '여울물 소리'는 마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간 '오래된 정원'과 같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분명한 차이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화자의 이동이다. '오래된 정원'도 '여울물 소리'도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의, 주인공은 모르는, 삶의 궤적을 여러가지 간접적인 사실들로 복원해 가는 건 같지만 '오래된 정원'에서 주로 그 일을 했었던 것은 정작 기다리는 이에게 그리움을 심어주었던 남자였는데 '여울물 소리'에서는 정작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가 그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정원'이 그리움을 간직한 자의 내면을 더듬어 보려 한다면, '여울울 소리'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움으로만 남아있는 자의 내면을 더듬어 보려 한다. 아마도 이것이 두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여울물 소리'를 진정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런 차이를 가지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찾아내는데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비추어 보자면 흥미롭게 여겨지는 것이 하나있는데, 그건 바로 '오래된 정원'이나 '여울물 소리'가 나왔던 시점이다. 일단 '오래된 정원'은 동유럽과 구소련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공식적으로 이념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던 때에 나왔다. 그렇게 옛 이념은 지나가고 아직 새로운 이념은 찾아오지 않았던 그 때에 오래도록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그 이념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려 했던 것이 바로 '오래된 정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래된 정원'은 이념의 입장에서 그 이념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던 자의 내면을 더듬어갔던 것이었다. 반면 '여울물 소리'는 오히려 90년대 이후에 우리가 맞이한 이념의 폐허 위에서 오로지 돈으로만 환산 가능한 가치를 쫓아다니느라 온갖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다시금 사람들이 삶의 어떤 이정표로써 저마다 이념을 필요로 할 때 나왔다. 때문에 '여울물 소리'는 사라진 이념을 그리워하는 자의 입장에서 그 이념은 어떤 것인지 더듬어가는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다.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이야기꾼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의 이야기꾼들이 오늘의 문학 작가에 해당함을 본다면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그 시기 문학의 의미를 물어보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보자면 '여울물 소리'는 새삼 이념의 그리움이 생겨나고 소설 주인공 연옥이처럼 깊어진 요즘, 다른 매체에 밀려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문학이 거기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연옥은 다름아닌 황석영 자신의 분신이고 그녀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면서 그가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갔는지 알아내고 싶어하는 전기수 이신통은 그가 찾고 싶은 문학의 의미와 역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신통이 보여주는 궤적이 다름 아닌 지금 황석영 작가가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래서 새삼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장마다 달려있는 소제목들이다. 첫 시작을 여는 제목인 '이신통을 기다리며'는 그대로 지금 '여울물 소리'를 써 나가는 황석영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고, '세상 속으로' '백성과 나라' '여향'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다' 등의 제목들은 그가 앞으로 문학이란 바구니에 담고 싶은 가치나 방향으로 보인다. 사실 여기의 소제목들은 소설의 소제목으로써는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고 얼른 보기에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느낌마저 강하게 들게 하는데(사실 이런 제목들은 예전 우리나라 현실주의적 문학에 잘 나타나는 것들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제목들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등장시켰다는 것 자체가 그 때처럼 이념이 강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은연중에 드러내면서 이 소설이 사실은 이야기의 너머에서 한 때는 문학이 강렬히 추구하던 것이었으나 어느새 잃어버렸던 그러한 이념과 가치를 되찾고 싶어한다는 걸 드러내는 것 같다. 무엇보다 구한말 가장 강력한 이념이라 할 수 있었던 동학을 하필이면 소설의 주된 소재로 가져왔다는 것 역시 이를 증명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쓰였나 하는 것의 열쇠는 사실 이 동학에 있다. 읽으면서 우리는 왜 하필 동학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이야기의 추이를 잘 살펴보면 이 동학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실은 바로 우리 시대에 있었던 사건의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소설 속 동학이 바로 2008년에 있었던 촛불집회의 은유라는 것을 말이다.(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동학 운동이 실패하고 그 폐허 위에서 신념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 신념과 희망 때문에 처벌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촛불집회 이후에 우리가 바로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그 광경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떤 이들은 희생당했고 어떤 이들은 좌절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러한 와중에서도 여전히 신념과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오히려 바깥으로 퍼다 나르는데 힘을 썼다. '여울물 소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인 것이다. 그걸 황석영은, 구한말 그 때의 현실을 무명의 작가들이 방각본 혹은 전기수로서 이야기의 형식을 빌어 담았듯이, '여울물 소리'에 담겨진 이야기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스스로 찾은 것을 바로 이신통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신통이 그토록 방랑을 거듭하며 찾고자 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주인공 연옥은 이신통이 그토록 헤매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한 때 이신통과 인연을 가졌던 여인, 백화를 통해 듣게 된다. 그건 바로 '여향'이었다. 그 뜻을 쉽게 말하자면 '남은 향기'쯤 되려나? 그렇게 정작 존재는 남아있지 않으나 그 향기로 여전히 그 존재를 전하는 '여향'을 이신통은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향은 사실 그 흔적일 뿐이니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향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 그 여향을 전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미 잃어버린 꿈, 신념이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그 향기가 되어 그것이 있었음을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아가 언젠가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임을 알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 자체로 희망이 되는 것이다. 즉 여향은 희망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희망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무리 절망과 침묵을 강요하는 어둔 밤이더라도 누군가는 듣고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둥둥 북소리를 계속해서 울리겠다는 그런 의지의 선언이다. 황석영은 결국 문학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방향과 가치가 광막한 시대의 어둠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올바른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들으려는 자는 언제든 시대의 침묵을 뚫고 들을 수 있는 여울물 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목의 '여울물 소리'는 이러한 여정 끝에 결국 다다르게 된 결론이다. 그 결론은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선연하게 선포되고 있다.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가 얼마나 잤는지 문득 깨었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 감고 있었을 때에는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다가 눈을 뜨면 멀찍이 물러가서 아주 작아졌다. 가만히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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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책을 작가님이 자음과 모음에서 출판하시고 판매중지를 시키셨을 때 어렵게 중고로 구해 읽었었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주막 하는 여인의 딸이죠. 인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못 쓰는 점 이해해주세요. 이 여인은 이신통이라는 사내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데 끝내는 신통의 유골을 안고 돌아오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신통은 전기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팔도를 유랑하는데 허나 그가 실제 하는 일은 천지도라는 종교단체의 간부죠. 책을 읽다보면 천지도라는 종교단체가 동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내가 하눌님이다.』라는 동학의 교리가 저에게는 “내가변해야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말로 들려 참으로 가슴에 남더군요. 그리고 여인이 신통을 찾기 위해 팔도를 돌며 신통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속에 속해 있는 실제인물들은 보는 재미가 꽤 큽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실제 이름과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아마 누가 누구를 의미한다는 건 눈에 다 들어오실 겁니다. 제가 느낀 이 소설은 세상을 바꾸고자한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한 한 여인의 사랑얘기이자 참으로 암울했던 시기이지만 그 세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여울물소리도 아마 우리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겠죠. 책을 읽는 내내 책을 구입하느라 허비했던 노력이 아깝지 않던 보석 같은 시간 이였습니다.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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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는 유명하나 그의 책은 처음으로 읽어 본다. 수업 시간에만 들었던 동학혁명의 이야기.. 이렇게 어렵고 힘든 역사가 있었구나 또 한번 느끼게 한다.. 이야기꾼 이신통을 찾아나선 연옥이의 이야기가 펼쳐져진다. 그들의 태생..신분..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그 세세함까지 다 헤아릴순 없으나 책을 읽으면서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생적 근대화운동의 절정이 동학혁명이란다. 그 역사 속에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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