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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인 나로서는 이 책을 전반적으로 어떻다하고 이야기하기가 좀 겁난다. 하지만 읽어가는 와중에 마음에 와 꽂히는 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2장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란 장이다. 저자는 프로이트로부터 연원하여, 들뢰즈, 레비나스, 프루스트, 바르트, 퐁티 등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새로운 철학, 새로운 인간학을 멋지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자국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현대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필로소피, 즉 지에의 선한 의지, 혹은 정직한 추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 혹은 사유의 시작은 주체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외물의 타격과 그로인한 상처로 인해 화들짝 움직이면서 비롯된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 등의 연구사례를 통해 주체가 과거를 기억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과거-현재의 단선적이고 인과적인 과정이 아니다. 도장찍기 혹은 각인과도 같은 외물의 자극와 상처가 쌓이고 그런 상처들이 대체된 기호들을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상처는 표상을 동반하지 않는 흔적이며, 일종의 암호처럼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어서 분석자가 찾아내고 해독해야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프로이드의 사후성으로부터 철학의 발생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제시했다. 이외에도 라캉의 시니피에없는 시니피앙, 니체의 고통으로부터 산출되는 사유, 레비나스의 이기적 주체가 윤리적 주체로 태어나도록 하는 사유, 바르트의 푼크툼, 퐁티의 비가시적인 존재의 조직 등으로 모습을 바꾸며 얼굴을 드러낸다.
이들의 사유는 계몽적이기보다는 계시적이다. 칸트의 숭고미처럼 유아론의 껍데기 속에 갇힌 상황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모호한, 역설적 공존이 일어나는, 압도적인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한계로부터 어떤 각성에 이르며, 그 각성은 계몽의 경우처럼 세계를 감히 과학적이고 오성적인 질서 속에서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해답없어 보이는 곳에서 허우적거림이요, 바로 철학함의 갈 길이다. [인상깊은구절] 트라우마란 우연히 맞딱뜨린 자극으로서 기존의 주체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나타나 나를 후려친 상처이며, 또 그에 적합한 표상을 갖추지 않은 일종의 암호문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상처를 받은 자는 유대인의 예언가들처럼 그 암호가 숨기고 있는 계시와 맞닥뜨린 것이다. 즉 트라우마론은 배후에 계시의 이념을 숨기고 있다. 적합한 표상없이 주어지는 트라우마는 늘 참을 수 없는 상처의 고통과 더불어 그것이 계시하는 바를 추적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칸트에 의하면 계시를 기다리는 자들은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며 그저 신탁을 듣고 즐긴다.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계시의 이념은 자발적 지성의 노동의 이념에 대립한다. 그리하여 칸트가 완성한 이성의 시대는 철학에 있어서 모든 예언자들이 박해받던 시대,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기 위한 어떤한 통로도 찾을 수 없었던 시대, 저 혼자만이 체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고유한singular 상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철학자들은 노동을 버리고 신탁의 부름을 받아 떠나는 테베의 점성술사들이다. |
| 이 책은 특히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질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철학의 전부분을 개괄한다기 보다는 그의 파편화된 주체 개념, 혹은 본질적인 사유로서의 기호 개념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들뢰즈의 법과 예술에 대한 생각 또한 엿볼 수 있다. 현대 철학의 가장 최선봉에 서있다는 평가를 받는 들뢰즈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현대 철학 전반을 개괄할 수 있는 눈을 얻게 된다는 뜻이며, 아울러 현대 이전의 철학 역시 두루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저자의 업적에 놀라울 뿐이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친절한 서술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또 칸트나 니체, 스피노자, 프루스트 등 들뢰즈가 겪고 지나간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면서 들뢰즈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노력한 저자의 성실한 자세 또한 매우 돋보인다. 따라서 독자는 이런 저자의 노력으로 인해서 들뢰즈 철학에 손쉽게 입문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자신이 쓴 논문들을 엮어서 발간한 책이기 때문에 전체의 일관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은 지적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주요 개념들을 따로 모아서 부록으로 정리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또한 언급하겠다. 판이 거듭될 수록 더 좋은 책으로 발전하길 기원하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