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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의 아침공기는 무척 서늘했다. 오전 10시. 시간도 얼려버릴 정도로 칼칼하고 매서운 바람 조각들이 얼굴을 스쳐간다. 이런 칼바람이 얼마만인지...나는 3년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아주 짧은 기간동안 내가 보낼 한국에서의 시간들을 계획하는 일이 비행하는 동안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오늘 아주 바쁠 예정이다 박 신영 작가의 세번째 책 [이 언니를 보라] 출간기념회가 바로 그 날, 내가 한국땅을 밟은 그 날 12월 6일 저녁시간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석하고 싶었다. 그녀의 첫 책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돌아다닐까]와 두번째 책인 [삐딱해도 괜찮아]를 받아 보았을 때 기분을 잊지 못한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감사할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 글쓰며 버티는 고독한 시간들의 결과인 그 아이들을 비행기 태워 보내는 사람이 있다니, 그도 자그마치 작가라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좀 촌스러울 것이다. 첫번째 그녀의 책 백마 탄 왕자...를 남편과 나누어 읽고 우리는 그녀의 팬이 되었다. 종종 책 이야기하면서 그녀 책을 이야기힐 때 그녀의 닉은 백마탄 작가로 통한다. 두번째 책을 읽고 나서 남편이 하는 말 이건 첫번째 책보다 약하네. 다음 책은 언제쯤? 그러면서 독일이나 근처 유럽에 올 기회가 있다면 우리집을 거쳐서 가라는 말 전해 달랜다. 맥주를 사랑하는 작가에게 독일과 유럽의 맥주맛을 선물하고 싶다고...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이미 채널예스 칼럼에 연재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세상에 불응한 여자들의 역사에 첫번째 소개된 언니는 미실! 한방에 쏠리는 제목, 그리고 센 언니 미실, 약간은 자극적인 표현에 마음이 가는 시대이니 나도 서슴없이 그녀를 센 언니라고 말한다. 좀 세긴 세! 연재된 칼럼들 중 어떤 것들은 많은 학습을 요한다. 역사속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웬만한 지식으로는 어렵다. 큰 틀의 총론적인 것으로도 혼돈하기 일수이고 내가 알고 있던 사실(?)조차 잘못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역사서를 자꾸 접하고 관련된 강의를 듣고 스스로의 학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그나마 따라 갈 수 있다. [이 언니를 보라] 나는 이 책이 위와 같은 이유로 어려운 책이라 생각한다. 박 신영 작가의 책은 한번 읽고 재미있어서 다음 번에 읽으면 재미가 반감되는 그런 책이 아니다. 지난 책들을 다시 읽기 하게 되면 내가 알던 고전 동화, 고전 문학의 시선이 한층 객관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발상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온다고 할까. 우리는 매번 패러다임의 변화를 몸으로 감지하고 바꿔가길 기대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한 시대를 살아온 언니들의 본모습을 접하게 하는 이 책은 세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언니는 두명이다. 이사벨라 버드와 헬렌 켈러. 나는 이 두 언니에 꽂히고 말았다. 이사벨라 버드 언니의 심리상태는 나의 어떤 점과 닮았다. 일상인으로 살면서 주어진 환경과 주변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껏 그것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들을 탓하며 내 위주로 합리화하는 법을 만들어왔다. 그러고나니 내가 바라본 내 모습은 좀 이상했다. 그 부분을 건드려준 언니가 바로 이사벨라 버드다. 평생 나와 갈등하며 나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국에서의 10년 생활동안 심적인 갈등과 나만의 모순에 사로잡힌 경우가 꽤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모든 부적정적인 요소들은 나를 키운, 나를 돌봐준, 그래서 나를 풍요롭게 한 동기가 되었다. 평생 나와 갈등하며 나를 극복하는 일은 죽는 날까지 계속될 일 아닌가. 다음은 헬렌 켈러! 내가 아는 헬렌 켈러의 삶은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그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로 끝이 나는 헬렌의 위인전이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다. 현재 나는 사회학을 공부중인데 이 책 속의 헬렌을 마주하면서 돋보기로 초점을 맞춰 미세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지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길 바라는 부분만 보여주는 세상에서 사실과 진실의 구분이 무척이나 묘연한 세상 아닌가. 출판기념회 저녁 나는 약속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한시간도 넘게 늦게 도착했다. 아날로그로만 생활하는, 컴퓨터의 자판만 겨우 누를 줄 아는 사람이니 길찾기가 보통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리도 모르고 바보처럼 헤매다 조그마한 카페에 들어가 검색해 달라고 부탁하고 물어물어 도착한 곳이다. 나를 위해 프리젠테이션을 늦췄다는 작가님의 말씀에도 황송했고 거기에 참석하셨던 이웃님들께 정식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도 못드려서 죄송했다. 한국 도착 첫날부터 헤메고 다니는 일에 경황이 없었지만 나의 짧은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고 풍요로운 추억으로 남게 했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이 언니를 보라] 심란한 내 맘의 파문을 서서히 안정시킨 책이다. 항상 고여있지 않기를, 불편한 마음으로 계속 흘러갈 것을, 흘러가면서 맞닥뜨릴 수많은 돌맹이들과 맞짱뜨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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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세계사가 거의 빵점이었다. 국사는 그런대로 알겠는데 세계사는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세계사여서 정말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는데 내 노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이해하기 보다 그저 암기하려고만 했으니까. 선생님도 설명보다는 그저 교과서만 읽고 그 이야기만 해주었다. 만약 그 선생님이 자신의 지식을 좀 더 쉽게 다른 이야기도 곁들여 주었다면 아마 나는 세계사가 좋아서 지금쯤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책 읽기를 알려주는 작가가 있다. 세계명작동화를 읽으며 왜 그렇지? 라고 생각하게 해주고, 너무 주어진 길로만 가려는 나에게 괜찮아 한번 쯤 삐딱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용기를 주더니 이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언니를 소개해준다. 채널예스에 연재된 11명의 언니들과 새롭게 3명의 언니들을 넣어서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미실을 시작으로 중복장애를 극복한 헬렌켈러까지) 14명의 언니와 원이엄마의 이야기를 넣었다. (리뷰: 명작동화의 숨은 역사 찾기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나의 10년을 생각하며 ‘삐딱해도 괜찮아’)
서문에서 말한 '흥미위주의 대중 역사서에서 자주 보이는 성녀, 악녀, 창녀, 효녀, 현모양처 등의 평가에 갇힌 여성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녀들의 진실을 다루려고 노력했다' 는 글을 읽으며 그녀가 이 한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고민을 했는지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내게도 고정관념으로 기억하는 언니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14명의 언니들 중 6명의 언니들이 마음에 남는다. 60대에 전성기를 맞은 늦깍이 여행자 -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게 관심이 갔다. 그녀가 알려주는 당시의 한국상황에 놀라웠지만,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는 시대에 서양여자가 혼자서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동양에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리뷰: 1890년대의 한국의 모습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빅토리아 시대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여성 여행가들이 다 건강한 젊은 아가씨들보다는 나이가 든 후에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노년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행 후 책을 써서 자신의 여행기를 알리며 돈을 벌기도 했다지만, 중요한 건 돈 보다는 자신이 뭘 잘 하는지 알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잘 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자신을 자신답게 살게 해주는지를, 평생 그렇게 살아오며 나이의 한계를 넘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 언니 정말 멋지다. 상처에서 날개가 돋게 하라 - 최초의 직업적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젤틸레스키' 그림에 재능이 있지만 미술학교 입학을 거절당하고, 화가 아버지가 소개해준 동료 화가 타시에게 강간을 당하여 '세기의 소송'이라 불리는 소송이 벌어진다. 세상은 아르테미시아의 말보다는 타시의 말을 더 믿고 피해자인 아르테미시아를 동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려 마음의 복수를 하고 (이건 내 생각이다) 집에 갇혀있지 않고 그녀를 부른 곳이면 어디는 가서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상처는 자신이 돌봐줘야 한다. 그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린 아르테미시아. 복수를 위해 전사가 된 공주 -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 내조로 보낸 10년을 뛰어넘다 - 대문호 루신의 아내 쉬광핑 아버지의 착한 딸로 살면 행복할까 - 작은 아씨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 그녀를 억압한 가장 최후의 장애 - 중복장애를 이겨낸 헬렌 켈러 박신영 작가는 주어진대로 평범하게 살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여 나약한 공주가 아닌 씩씩한 전사가 되어 스스로 유리한 상황을 만든 마틸다를, 자신을 잃지 않고 세상에 자신을 내보인 쉬광핑을, 누구의 딸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되어 자신의 삶을 산 루이자 메이 올컷을, 남 보기에 완벽한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완전한 사람인 헬렌 켈러를 말한다. 쓰지 못한 원이 엄마 이야기를 위해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원이 엄마의 편지를 만나고 미투리를 꼭 쥔 원이 엄마 동상이 있는 원이 엄마 공원에도 다녀온다. '언젠가는 이승의 사랑에 끝이 오는데 왜 우리는 인간이 만든 불평등한 모든 것에 얽매여 편안하게 사랑하며 주어진 시간을 누리지 못할까요.' 맺는말의 한 글에 울컥했다.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고, 남보다 자신에게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진정한 내가 되기를 말하는 박신영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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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학 4학년인 딸이 전화를 했다. 물어보는 말이 드라마 ‘미생’을 보냐는 거다. “아빠 미생보지?” “응. 매주 재미있게 보는데” “이번 주에 봤어?” “응” “실제로 회사에서 마 부장처럼 그렇게 여직원들을 무시하고 그래?” 딸의 얘기로는 미생에 나오는 마부장과 해당부서 직원들이 안영이라는 신입 여직원이 능력 있고 일을 잘함에도 불구하고, 여자란 이유로 무시하고 왕따 시키고, 성 추행적인 발언을 일삼는 것을 두고 물어보는 말이다. 난 이렇게 대답했다. “응. 실제로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지” “그래?? 나중에 직장생활 어떻게 하지” 라고 딸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물론 딸에게 드라마의 내용은 픽션이라고 얘기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야할 딸에게 현실을 외면한 포장된 말로 안심을 시키기는 싫었다. 조만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도 여직원들이 많다. 물론 일을 잘하는 직원도, 못하는 직원도, 여자라는 방패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직원도 있다. 대다수의 남자 직원들의 대화나 행동을 보면 성차별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여직원이 일을 잘하면 ‘여자인데 일을 잘하네’고, 일을 못하면 ‘여직원이니까 그렇지’라는 말들이 수시로 오고간다. 그냥 ‘일을 잘하네, 못하네’하면 되는데 그 앞에 필수적인 전치사인양 ‘여자가’라는 단어가 붙는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신입사원을 뽑을 땐 여성이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직장이라는 조직 내에서 여성이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며 남자들과 동등한 경쟁을 통한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직장여성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직장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남자보다 먼저 승진을 하며 잘나가는 여자들이 ‘독하다’라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사는 모양이다. 이렇듯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별은 존재한다.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그 모든 걸 덮으려 하지만 그건 말뿐이다. 우리나라는 동양 전래의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유독 더 심하다. 여자가 활동적이면 그건 나대는 거고, 여자가 아는 것이 많으면 그건 오지랖이 넓은 거고, 여자가 소신이 강하면 집안이 망하는 거다. 더불어 일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는 워킹맘은 독한거다. 남성위주 시각으로 바라본 여성은 그저 다소곳하고, 순종적이고, 나약해야 한다. 잘나가는, 잘 나갔던 여성에게 자신들의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들의 능력 없음을 변호하는 것은 일부 찌질한 남성들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가 배운 역사 속 여성의 모습도 이에 다르지 않다. 역사 속에 이름이 기억되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만 원 권의 모델인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신사임당은 아들인 이율곡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신라시대 여왕인 선덕여왕,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인 유관순 열사 등을 제외하고 우리가 쉽게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여성은 없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의 삶을 살다간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사 속에서 그들은 감춰지고 왜곡되었다. 이런 편협에서 비롯된 오류와 편견을 걷어내고 역사 속 여성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 있다. 남성들의 편견에 의해 각색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인지된, 그래서 지금의 남성우월주의의 근간을 만든 역사속의 감춰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물론 정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정사야 남성들만의 시각으로 쓰여진 것이니 오히려 정사가 왜곡일수도 있다. 박신영 작가의 세 번째 책인 『이 언니를 보라』는 이렇듯 역사 속에 기록된 여성들의 모습에서 왜곡과 편견을 걷어내고 그들의 삶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남성편향주의의 시선을 걷어내고 맨얼굴로 그들의 삶을 마주한다. ‘세상에 불응한 여자들의 역사’라는 부제보다는 ‘자신만의 소신대로 살다간 여자들의 역사’라고 표현하는게 더 맞을 듯하다. 이렇듯 이 책에는 남성들이 보기에는 불편한 여성들이지만 자신의 삶과 의지에 충실하며 세상의 편견을 딛고 살다간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미실, 엘레오노르, 이사벨라 버드, 마리 앙투아네트, 레이디 고바이바, 쿨레베의 안네, 아프테미시아 젠탈리스키, 토스카나의 마틸다, 김만덕, 쉬광핑, 루이자 메이 올컷, 왕소군, 헬렌 켈러, 그리고 맺는말 대신에 나온 원이 엄마 이야기까지 모두 14명의 역사 속 여성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이중 빈약한 역사 지식으로나마 이름이라도 들어본 여성은 최근에 드라마에 등장한 미실, 된장녀의 원조격으로 매도된 마리 앙투아네트, 제주도의 거상 김만덕, 루쉰의 부인이었던 쉬광핑, 흉노의 왕비가 된 왕소군, 그리고 중복장애를 이겨낸 헬렌 켈러 등이다. 이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이다. 신라시대 색공을 이용하여 최고의 권력을 구사한 미실은 악녀로 각인되었고, 드라마에도 그런 면모가 부각되어 소개되었다. 하지만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과 권력에의 욕망은 남녀의 구분이 없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덕목(색공)을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고 거기에 사랑까지 얻어 아름다운 여생을 보낸 미실의 삶에 악행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권력과 사랑 모두를 쟁취했을 뿐이다. 여성들의 염문 -그녀의 행보를 염문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는 단순히 현대인의 시각일 뿐이다 -은 그들의 미모를 탐한 남성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된장녀의 대표 주자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문제였다. 프랑스 국민들과 오스트리아와 불편한 정치적 관계로 인해 그녀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왜곡되어 그려졌다. 그녀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은 그녀를 음해하고 그녀의 처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혁명군이 지어낸 말일뿐이다. 저자는 명품족, 된장녀, 김치녀로 대변되는 현대의 젊은 여성들에 대한 공격 또한 또래의 젊은 여성들을 소수의 부유층에 빼앗기는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의 표출이라고 한다. 이는 이러한 지탄이 결혼한 여성들이 아닌 미혼의 젊은 여성들만을 향하는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듯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전체적인 문제를 한 개인이나 계층의 잘못인 것처럼 매도하는 남성들의 시각이 불러오는 문제가 그대로 역사 속에 정설로 받아들여져 기록되고 그러한 기록들이 그 시대의 여성상으로 굳어진 것이다.
제주도의 거상이었던 김만덕의 이야기는 사극 등을 통해 조금씩 그 면모가 드러나는 여성이다. 단순히 거상으로 평가받기에는 그녀의 행보는 남다르다. 그녀는 평생을 걸쳐 이른 부를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구호미를 마련하여 제주도 백성들을 흉년에서 구해냈다. 만덕은 단순히 거상이 되고, 공덕을 쌓은 것으로만 알려졌지만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세 가지 악조건을 이기고 인간승리를 이룬 사람이다. 그녀는 신분, 성별, 변방 출신이라는 악조건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성취를 이뤘다. 단순히 거상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녀는 평하기에는 그녀가 이룬 성취는 너무도 크다. TV광고에도 등장하고, 중복 장애를 이겨낸 헬렌켈레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떠올리면 그녀의 장애극복의 이야기만 보인다. 하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학위를 받은 것은 그녀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장애를 이겨낸 이후의 삶이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사회주의자가 되고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등 꾸준한 사회참여활동을 한 그녀의 생은 거의 베일에 감춰져 있다. 거기에 그녀의 사랑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그녀의 장애극복에만 주목했을 뿐, 그 이후의 이야기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편했기에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이럴진대 우리가 존재자체를 모르는 이들은 얼마나 편협된 사관 속에서 기록되고 왜곡되었을까.
이처럼 역사속의 여성이던, 현대의 여성이던 여성의 모습은 편협으로 얼룩져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한 역사 속 여성을 찾아내고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 그녀들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저자의 노력이 놀랍다. 역사나 전래 동화 속 이야기를 소재로 그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를 찾아 들려주는 저자의 해박한 역사지식이 그저 부럽다. 이전에 출간된 그의 작품도 역사를 기본으로 했지만, 깊이있는 소재가 분량의 한계로 인해 깊이있게 다뤄지지 못해 느꼈던 허전함이 이 책에서는 해소된 느낌이다. 저자의 오랜 기간 끊임없는 독서와 공부를 통해 이룩한 내공이 갖는 서양사에 관한 지식에 그저 경이감이 앞설 뿐이다. 한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가 어떤 성취를 가져오는지 그 본을 저자는 보여준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그건 저자의 과한 의욕과 욕심이다. 너무 많은 욕심을 내다보니 읽는 이의 감동까지 욕심을 냈다. 여백이 주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독자의 느낌이 스며들 여유가 없다. 좋은 책은 생각의 꺼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생각의 여백이 없으면 책은 그냥 쉽게 읽힌다. 하지만 읽고 나서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줄어든다. 이는 작가의 성격일 듯하다. 완벽을 추구하는 작가의 글쓰기가 가져온 단점이 아닐까 한다. 각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요약을 하여 ‘이 언니를 보라’는 시를 담은 글로 작가의 감성을 담기보다는 그 부분을 그냥 독자의 몫으로 남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달라진다. 그런 부분들이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든 이들에게는 세월의 연륜만큼 굳어진 스스로의 판단력이 침해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분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도 그 사건을 보도한 뉴스기사와 그 사건의 실상이 다른 경우들이 많다. 이 경우는 그 사건을 전하는 뉴스가 특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왜곡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이럴진대 하물며 오랜 시간이 지난 역사속의 기록들도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기술한다면 그 진실이 왜곡되고 감춰질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진다. 일 잘하는 여자를 보고 능력 있다고 평하기보다는 독하다고 표현하는 현대의 남성들의 시각과 마찬가지다. 이 책은 편협으로 얼룩진 역사 속 여성들의 모습을 올곧이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진실의 위대함은 그 진실을 대하는 이들에게 용기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저자의 역사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한 다음 책들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속의 이야기를 보고 사회로 나가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세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과 급여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세상. 그러한 모든 것이 찌질한 남성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할 때 이 책은 여성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평가를 내리는 근본적인 사고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로 작용 될 수 있다. 그런 계기들이 모아져 역사 속 여성뿐만 아니라 현대의 여성이 바른 시선으로 평가될 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딸의 질문에 “그건 그냥 픽션일 뿐이야. 요즘은 자신의 능력으로 평가받지, 여성이냐 남성이냐로 평가받지 않는단다”라고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는 때가 도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머지않아 세상으로 나가 사회적인 편견에 부대끼며 살아야 딸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세상의 편협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다간 ‘이 언니를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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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3녀인 우리 집에서 나는 과히 기분 좋은 위치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는 ‘언니는 맏딸이라 사랑받고, 오빠는 하나 뿐인 아들이라 사랑받고, 여동생은 막내라서 사랑받는데 너는 어떡하니? 사랑받지 못해서...’ 정말이지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은 이야기 인데... 실제 우리 부모님이 이 말씀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셨다면 좋았을 것을.. 우리 부모님은 이 말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실천하신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내가 조금은(?) 아니 실제로는 많이 삐딱하게 생각하며 자랐고, 한 번도 부모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으니까. 사춘기 때는 그래서 부모님과 마찰이 많았다. ‘어째 저것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건지...’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으셨으니까. 근데 가끔 생각한다. 그때 부모님 말씀대로 살았다면 나는 왠지 내 인생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렇다고 내 인생이 뭔가 대단했느냐... 그건 아니다. 평범함 속에서 내가 원하는 인생으로 편집하려 노력했을 뿐...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다른 길로 접어들려 해도 이런 저런 일들이 나를 잡고 늘어지는데 그 옛날.. 여자임에도 세상의 모든 편견과 제약에 맞선 이 언니들은 도대체 어떤 강심장이었을까 이런 언니들의 역사적 서술은 별로 좋지 않다. 당연하겠지. 그 역사를 기술한 사람들이 남자일 테니까. 때론 남자보다 더 남자답고, 남자보다 더 용감하고, 남자보다 더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그녀들을 남자 입장에서 곱게 볼 수 없었을 테니. 그러거나 말거나,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는 이 언니들이 그래서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여자는 남자의 테두리 안에서 조신하고 아름답고 내조를 잘하는 남자의 인형 같은 존재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 언니들은 그 테두리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편안한 길을 이 언니들은 과감히 버리고 있다. ‘나를 가두지 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용감하게 살 수 있으니까.’ 이렇게 외치고 있으니까. 존재에 대한 많은 의문이 드는 신라 최고의 악녀 미실, 유럽 최고의 미녀이자 왕비가 된 엘리오노르(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여성 최고의 탐험가라 말할 수 있는 이사벨라 버드, 빵과 케익을 이야기 하다 원조 된장녀가 된 유명한 앙투아네트, 나체 시위의 선두 주자 고다이바, 남편(헨리 8세)의 변덕에서 영리하게 살아남은 클레베의 안네, 성폭력을 이겨내고 화가가 된 아르테미시아, 굴욕을 복수한 토스카나의 마틸다,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개척한 김만덕, 루쉰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10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지만 그 단절을 뛰어 넘은 쉬광핑, 무능력한 아버지 대신 생계를 이어간 루이자 메이 올컷, 흉노의 왕비가 된 왕소군, 암울하고 어두운 세상의 편견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 중세 여성, 그리고 헬렌 켈러까지.. 그들에게 여자라는 타이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자이기에 물론 피해를 입었던 적도 있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만약...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고들 하지만 만약 이 언니들이 21세기에 살아 돌아온다면... 이 언니들은 이 세상을 또 어떻게 만들어 나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극복해야 할 일들이 많다. 이 언니들의 삶이 모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 언니들의 삶을 보며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지 혹은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먼저 살다 간 언니들의 인생에서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하고자하는 인생을 살아가라고.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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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니를 보라 박신영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다. 직접 출판 기념회까지 다녀오면서 작가의 입을 통해 스포일러를 받은 상태에서 찬찬히 읽다보니 쏙쏙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왜곡’이었다. 역사란 게 사실을 기반으로 씌여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성이란 관점에서 혹은 지배층, 권력을 거머쥔 자들에 의한 기록물이다보니 여성이나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점을 파헤치고 들어간 이가 바로 박신영 작가이다. 총14편을 소개하고 있는 데, 동서고금을 통해 익히 알려진 유명인들의 정설로 알려진 내용과 그 이면에 숨겨진 사실까지 덧붙여 양성평등, 차별없는 사실 관계, 불편함이 없는 세상을 원하는 동반자적 관계 설정을 원하는 작가의 외침을 고스란히 보게된다. 화랑세기를 통해 알려진 미실궁주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의 시선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헨리2세의 부인이자, 루이7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왕비의 삶에선 남성 중심의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되었기에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으며 타인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60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늦깎이 여행자인 이사벨라 버드는 비록 뒤늦게나마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였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도도하게 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자라는 핸디캡과 젊지 않다는 편견을 벗어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란 된장녀로 전락한 마리 앙트와네트는 절대왕정, 구제도에 대한 근본공격의 희생양이었으며 현실을 깨닫고 성숙한 처세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원조 나체 시위로 알려진 레이디 고다이바는 이민족인 바이킹족의 가혹한 지배정책에 항의 목적으로 벌였으며, 그릇된 현실,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을 도발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며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어떤 이익도 계산하는 것 없이 순수하게 맨 몸으로 주장만 한다는 시위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데 나체 시위만큼 힘이 센 시위도 없다(P.103)는 걸 보여준다. 헨리8세의 넷째부인인 클레베의 안네는 ‘플랜더즈의 암말’과 ‘암내’난다는 이유로 버림받았으나 지혜로운 처신을 통해 스스로 체스판에서 뛰어내린 퀸 이었기에 자유를 얻었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강간의 충격에서 벗어나 최초의 직업화가로 이름을 떨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아고스티노 타시에 의해 강간 당했으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리면서 홀로페르네스 얼굴을 타시로, 유디트를 자신의 얼굴로 바꿔 철저한 복수를 통해 상처를 극복하고 날개를 달 수 있었다. 또한 재혼을 통해 강간의 상처에서 헤메기보단 치유책을 찾았다는 데 더욱 의의가 깊다. 교황과 황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교황의 전사로 ‘카놋사의 굴욕’을 이끌어 낸 토스카나 여 백작 마틸다의 삶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복수의 화신 그자체다. 제주 거상 김만덕의 삶은 신분을 극복하고 여성이란 어려움을 헤쳐 나가 꿈을 이루었을 뿐아니라 출륙금지령을 극복했을뿐더러 자신의 미천한 운명을 극복하여 위인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자 세상의 한계를 몸소 뛰어넘은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다. 대문호 루신의 아내 쉬광핑의 삶은 내조 10년을 극복한 예로 들고 있는 데 잃어버린 세월 10년을 뛰어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낸 여성으로 평가하고 있다. ‘작은 아씨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삶은 표면상으론 착한 소녀인 루이자가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꾸려가는 아름다운 삶을 그려내지만 실은 악녀들이 욕망을 달성해 가는 선정소설의 작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지 말 것과 남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장점을 버리지 말라(P.214)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중국의 4대 미인인 왕소군의 삶은 세상의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울 걸 주문한다. 표면적으로는 흉노의 왕비가 된 한나라 궁녀인 왕소군이 불쌍한 존재로 기록되고 있지만 오히려 불리한 현실에 적응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왕소군 자신으로서는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대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단지 한나라 입장에서 볼게 아닌 흉노 입장에서 보면 당당할 수 있다. 중세 여성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 데 제4신분으로 여성을 대두시키지만 실은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속한 시대마다 다르기(P.246)에 일면만 보고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밝힌다. 장님 헬렌 켈러의 삶은 장애인이란 이유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내용만 다루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아간 여성으로 다뤄야 한다. 사회주의자이자 철저한 정치적 의견이 배제된 채 ‘꽃을 바라보는 여성’이 전부로 치부되어선 곤란하며 대중의 유명 여성인에 대한 편견(P.265)을 이겨낸 이로 바라보고 있다. 원이 엄마 이야기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언급한다. 양성 평등이 그당시 존재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시대 분위기로 봐선 전형적인 조선중기에 해당하며 유교 질서하에 놓여 남녀 차별이 극심하던 때였기에 당연 ‘하소체’는 상상도 못할 노릇이었으나 원이 엄마 편지에선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실록이나 역사적 기록으로서 접해온 진실이란 게 실은 철저히 왜곡되었거나 여성이 배제된 채 남성 혹은 권력자 중심으로 전해져 왔기에 그러하다고 단정지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과거가 따로 없고 현재가 다를 수 없는 세상에서 남녀 차별은 존재하고 이는 단지 상황에 따른 설정일 뿐 결코 중세나 근세, 조선 할 거 없이 여성의 삶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놓여 있기에, 앞으로의 양성평등과 동반자적 관계 설정에 미래 비젼도 함께 란 사실을 직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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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같은 책, 작가의 세번째 책을 드디어 만났다. 채널 예스에서 연재를 했기에 대부분 읽어본 이야기이다. 책을 받아들고 당시에 연재 안된 이야기 찾아서 먼저 읽어볼 생각이었지만 서문읽고 다음 페이지 넘기다보니 모니터로 보던 느낌과 너무 달라서 결국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보니 끝까지 다 읽었다. 새벽 3시. 요즘은 거의 종이책을 안읽었었는데 남아있는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어찌나 아깝던지. 그러고보니 어떤 글이 연재되었던 거고 어떤 글이 연재되지않았던 글인지 구분을 못하겠다. 언제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때문이었을까? 워낙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읽을 때마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내 머리탓일까?
이 책을 역사 에세이라고 했던가. 이런 책을 써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언제부터인지 내게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예전에는 글자로 찍혀있는 것을 철썩같이 믿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제는 어떤 글을 읽을 때, 과연 이 글은 누가 어떻게 무슨 의도로 썼는가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본다고 훤하게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관련 자료 찾아 파헤치는 노력을 매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 한구석에 밀어놓기 일쑤다. 저자가 이렇게 궁금한 거 찾아서 재미있게 이야기해주니 어찌 고맙지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저자가 생각하는 관심과 내 관심이 동일하지않을 때도 많다. 전체적인 내용이 책의 부제처럼 '세상에 불응한 여자들의 역사'인데 불응이라고하는 것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나오는 미실같은 경우도 내가 궁금했던 부분과 저자가 이야기하는 부분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내 궁금증도 풀어지고 다른 문제의식을 엿보게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지않는 역사 속 장면들의 앞 뒤 이야기가 저자의 손끝에서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니 그저 읽기만해도 머릿속이 환해진다. 물론 나는 이 이후로도 여러번 들쳐봐야하겠지만. 저자의 전작들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제대로 모르고 있는 여러 사실들. 그걸 콕콕 집어내 "그게 사실 이런거야"라고 말하듯 들려주는 것이 제일 매력적이다. 이번에는 관련 사진이나 궁금한 그림까지 아주 보기좋게 첨부되어있어서 더 좋았다. 책 말미에 '도움받은 책들'이라는 참고문헌까지 정리해줘서 더욱더 좋았다.
굳이 아쉬운 점을 이야기한다면 마치 자기계발서같은 문구를 내세운 앞뒤 표지때문에 독자폭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하는 점이다. 그냥 서점에 꽂혀있는 책이었다면 난 이 책을 골라 읽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이지만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외모로 평가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착한 여자를 연기하겠는가, 여자인 것이 싫기는 커녕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반절인 남자 독자들은 어떻게 하나? 이 책을 읽는데 남녀구분은 전혀 필요없는데말이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있으니 그렇게 재밌냐며 아들이 슬쩍 몇 페이지를 넘겨보더니 "이거 아주 대박이겠는데요."라고 한마디 한다. 다 읽고 아들에게 책을 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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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이란 뭘까? 중고등학교때 엄마의 잔소리가 불편했다. 그밖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들은 불청객처럼 왔다 가거나 계절이 바뀌듯 주기적으로 찾아오곤 했다. 나는 불편함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심한 감기처럼 나를 괴롭히며 지나간 불편함이 나를 성장시켜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지금은 확실히 알고있다. '불편함을 환영해야 한다'는 것을.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꼈다(특히 초반 부분). 그것은 외부의 무엇에 의해 나에게 생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던 것이 외부의 무엇에 의해 확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로 태어났고 남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안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런 생각은 위험하다).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사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나는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세상을 조금 알게 되었고 내 짐작에 '많은 오류들'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같은 시대와 같은 장소에 살아도 입장과 환경에 따라서 서로 다른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평행세계와는 다른). 사람은 대부분 태어날 때 부모, 성별, 국적, 시대 등을 선택하지 못한다.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경우도 있겠지만, 고아가 되거나 장애아가 된 경우도 있고 폭력적인 가정이나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들은 본인의 자유가 많이 제한되는(불편함, 부당함, 강요가 많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여성으로 태어난 경우를 이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바뀐다. 이 책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부당함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간 언니들이 있다.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강요당한 것을 짊어지며 책임을 다했던(주어진 범위내에게 자유를 추구했던) 언니들도 있다(이 책을 읽다보니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졌으니 양해바랍니다). 저자는 마치 숨겨진 유적을 발굴하듯이 그런 언니들에 대한 기록을 꼼꼼하게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과거의 그 언니들은 새롭게 살아난다(더 균형적이고 공평한 시각으로). 단지 전해지는 (남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서 보다 저자의 추측과 (근거있는) 논리로 되살아난 언니들이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작은 아씨들'에 보통 사람들의 고뇌와 실수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듯이, 저자는 세상의 편견과 부당함에 저항한 언니들의 위대함 뿐만 아니라 이중성, 한계를 보여줘서 이 책의 언니들이 평범한 여성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려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또다른 면에서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건 '결코'와 '절대'라는 단어였다. '결코 시간은 멈추어질 수 없다 요' 라는 노래 가사가 있지만, 가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좀 진지해지면, 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은 '의미없다'라고 결론났다). 나는 '결코', '절대', '무조건' 같은 단어를 좋아하지 않고, 이런 단어가 있는 말과 글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의지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 근처의 서유럽의 분위기를 파악했고 그 부분이 흥미로웠다. 예전에 '백마 탄 왕자는 왜 그렇게 떠돌아 다닐까'를 읽을 때, 백마 탄 왕자가 불쌍한 처지일 수 있다는 것만 알았지, 왜 왕자들과 공주들이 고생하고 곤란한 처지가 될 수 있는지 잘 몰랐다. 그 당시에는 국가의 구분보다 가문의 경계가 더 중요했다는 것(가문끼리의 결혼으로 영지가 넓어지고 세력이 달라진다, 왕족의 혈연이 중요했던 것, 왕족의 결혼은 그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행사, '겨울왕국'에서 한스왕자가 처음 본 안나공주를 왜 그렇게 꼬시려고 했는지, 사람들이 공주의 대관식에 왜 그리 관심이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황제와 교황은 힘겨루기 하고 있었다는 것, 영지를 상속받은 외동딸을 노리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 외동딸(예, 엘레오노르)은 서둘러 결혼해야 했고 체스의 말과 같은 (환경에 의해 운명이 정해지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로 알았다. 공주와 왕자, 그리고 왕족과 귀족이라고 해서 무지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중세시대가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그건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왜곡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조선시대에 남편을 아내(원이 엄마)가 '자네'라고 불렀던 걸보니 조선시대는(임진왜란 이전)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여성이 아주 살기 힘든 시기가 아닐 수 있다. 하긴, 2014년 대한민국에서 양성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생각해보면 의문스러운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단, 같은 일을 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보수를 적게 받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아직도 남성 우월주의가 남아있다는 증거다. 난 고다이바가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던 것이 실화인 줄 알았다. 난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 대신 케이크를 먹어라'라고 말한 줄 알았다. 하지만 둘 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왜곡된 소문이었다(기록은 그 시대의 기준과 시각이 묻어있다). 기록이나 책은 100% 믿을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미실이나 엘레오노르, 마틸다는 정말 멋지게 살다간 언니들이다. 이사벨라 버드, 아르테미시아, 클레베의 안네, 쉬광핑과 헬렌 켈러는 최대한 자신의 꿈을 펼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카노사의 굴욕' 그림에서 교황인 줄 알았던 사람이 여성(마틸다)이었다는 건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올컷에 대한 내용은 또 다른 (인간적인 반전)소설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느 순간 법정에서 변호사의 반론을 듣는 기분이었다. 각 언니들의 끝부분에 '이 언니를 보라'가 등장한다. 이 부분들을 읽으며 나는 '살풀이'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 책에 언급된 언니들은 현재 살아있지 않지만, 그 언니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차별과 부당함을 저자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저자는 그 언니들의 삶을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면서 현재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힘내라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저자는 적어도 자신의 꿈과 자유를 억누르면서까지 '착한 딸'은 되지 말라고 말하는 듯 하다. 종이질이 좋고 칼라 사진(또는 그림)이 선명하다. --------------------- 어떤가? 미실의 성 편력 부분보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노년과 죽음 부분이 더 낯설지 않은가? (23쪽) -> 난 낯설지 않았다(남자라서 그런가보다). 이 다음 부분을 읽은 후에야 이 문장을 이해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든 아니든, 그 속에 그려진 우리의 고대 신라사와 미실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 바로 거기에 민족사와 여성을 보는 우리의 편견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자인 우리가 느끼는 세상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역시 존재한다. (24쪽) 인터넷에서 '된장녀', '김치녀'에 대해 '남자 대 여자'로 댓글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 모습과 달리, 이는 실제로 남자 대 여자의 갈등이 아니다. 핑크빛 키티 가방(진품 키티 가방은 꽤 비싸다!)을 들고 다니는 어린 소녀나, 명품 핸드백보다 열 배 백 배 비싼 외제차 타고 다니는 중년 사모님은 그런 공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공격은 젊은 미혼 여성에게 집중된다. 이는 자신과 정신적,육체적 사랑을 나눌 또래 젊은 여성들을 소수의 부유한 상위 계급 남성들에게 빼앗기는 현실에 대해 분노한 일부 젊은 남성들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85쪽) 그러나 그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직접 보고 들은 후에 기록한 문서라고 다 옳은 기록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각각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그녀들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사적인 생각을 말하고 썼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런 편파적인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이럴 경우에 작가의 바람직한, 약간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간 서술이 오히려 더 정확한 서술인 것 같다. (107~108쪽) 그녀는 고드프리 4세와 이혼한 후 벨프 집안의 어린 소년과 한 번 더 결혼한다(마틸다가 결혼한 이 '벨프' 가문의 이름에서 교황파를 의미하는 '구엘프'가 유래했다). (160쪽) 잔인한 정복과 학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영주들은 모두 그랬다. 그들은 관료를 두고 문화 통치에 나서는 태평성대의 군주가 아니라 실질적 무력으로 영토를 다스리는 일종의 군벌들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이기에 유독 그녀의 잔혹함이 더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161쪽) 한때 존경받던 인물이 자기가 평생 이룩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계속 영향력 있는 인물임을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년에 의롭지 못한 세력과 타협하고 추하게 변절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이는 꼭 유명인이나 위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자연스레 어느 정도 이룬 것, 가진 것이 조금은 있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결국 어떤 인물이 위인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우리가 평생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성장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된다. (175쪽) 다시 말하지만, 조는 루이자의 분신이다. 루이자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문학 독신녀'로 살았다. 문학 독신녀란, 결혼하지 않고 작가 생활을 하며 살았던 19세기의 독립적 미혼 여성을 일컫는 용어다. (206쪽) 교회법은 여성이 남성보다 늦게 창조되었다는 점, 사탄인 뱀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에게 원죄를 짓게 했다는 점에 여성 차별의 근거를 두었다.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최고이자 유일한 가치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개적으로 규정지었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대단히 현실적인 억압이었다. (239쪽) 어차피 역사란 완전히 객관적인 기록물이 될 수 없다. 후대에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현실적 입장이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에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역사서가 더 객관적이고 훌륭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243쪽)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위인은, 특히 여성 위인은 늘 밝고 순수한 역할만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면모, 세상에 대한 비판적 발언과 과격하게 보이는 행동, 자신의 성과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가려진다.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 아니, 그런 모습들이 다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면서 자신답게 살 권리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헬렌 켈러를 억압한 가장 큰 장애는 대중의 유명 여성인에 대한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264~265쪽) <의문> 1) 그리고 서리에 병자와 가난한 자, 노인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43쪽) -> '서리'가 뭘까? 2) 소설 속 마치 집안의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가정 형편과 10대 자매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희로애락, 실수를 통한 성장을 서술한 이야기는 독자의 감정 이입을 쉽게 해 준다.(197쪽) -> '마치 집안의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단어> 1) 신산한: 남편들이 계속 힌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64쪽) 신산하다 -> 힘들고 고생스럽다. 2) 시월드: 예나 지금이나, 시월드에서 친정 운운하는 말을 듣는 것은 한 여자에게 너무 가혹한 법이다.(77쪽) 시월드 -> 남편의 집안 3) 판연히: 안네와 앤, 둘은 이름도 같다. 하지만 인생의 끝은 판연히 다르다.(119쪽) 판연히 -> 드러난 것이 아주 뚜렷하게. 4) 해시시: 하지만 악녀와 해시시와 정신병자들이 등장하고 자신의 욕망을 대놓고 추구하는 성격 강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선정적 대중소설 작가였던 그녀.(210쪽) 해시시 -> 인도대마가 결실을 맺는 초기의 이삭이나 잎. 5) 시가: 심지어 드라마에 빠진 현대 여성들과 중세의 궁정풍 연애담과 로맨스 시가에 빠진 중세 여성들도 거의 같아 보인다!(242쪽) 시가(詩歌) -> 시와 노래를 아울러 이르는 말. --------------------- 아래는 '이 언니를 보라' 출판기념회(2014-12-06, 에이트리갤러리)때 찍은 사진들이다. ![]() ![]() ![]() 팝업카드 경매행사. ![]() ![]() 모든 역사가 다 기록되지는 않는다. 기록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취사선택 주의! 원하는 시점까지만 기록한다. ... (책을 읽으며 강연회가 종종 떠올랐다. 그림들과 함께 이 문장들이) ![]() ![]() 책을 내기 전 인생은 '전생'이었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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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음악 연주회로 말하자면 '주옥 같은 레파토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기 전에, 등장하는 언니들의 이름만 봐도 호화 출연진이다. 탑 스타에서 덜 알려진 실력파까지 짱짱하다. 어떤 인물은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는가 의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은 이름도 처음 듣는데 들을 얘기가 뭘까 궁금하기도 하다. 여러시대의 다양한 여성들, 그녀들의 이야기-너무나 유명한 그러나 잘못 알려진 얘기, 몰라서 몰랐던 얘기, 진짜 중요한 얘기가 그녀들 인생의 굴곡과 반전의 파도를 타고 마음을 두드리고, 울리고, 그러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결국....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놀라고 감탄하고 감동한다. 아, 훌륭하구나! 똑똑하구나! 용감하구나!...그러다 그 성취보다 굴레와 상처가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점은 나보다 더 큰 굴레와 더 큰 상처가 있었다는 거다.
나는 나의 사랑이나 욕망을 억누르고 성처녀나 수퍼우먼이 되려는 강박이 있었다(-미실을 보며). 타인의 평가에 자유롭지 못해 체면 때문에 내 것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보았고(-엘레오노르를 보며), 나이 드니 할 게 없다고 집에 앉아 한탄하고(-이사벨라 버드를 보며), 아직도 채 성숙되지 못해 나이든 된장녀 기질을 버리지 못한다(마리 앙트와네트를 보며). 젊지 않은 나의 몸은 가치가 덜하다고 생각하고(레이디 고다이바를 보며), 사랑에서 나 스스로 약자의 자리에 위치했다(-클레베의 안네를 보며). 오래전에 당한 성추행에 아무말도 못하고 그러나 아직도 생각날 때마다 수치스러워 하고 있고(-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보며), 부모의 능력이 모자라 내가 더 성공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불평한다(-토스카나의 마틸다를 보며).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 하나도 놓지 못하면서 위선자로 살며(-김만덕을 보며), 일을 그만두고 육아와 내조로 보낸 10년을 잃어버린 십년이라 생각하고(-쉬광핑을 보며), 착한딸 컴플렉스를 벗지 못해 오늘도 부모에 대한 애증에 괴로워하고(-루이자메이 올컷을 보며), 내 못난 점에 스스로 움츠러들어 솔직히 세상을 대할 용기가 없다(-헬렌 켈러를 보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가, 이제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책 속의 그녀들이 내게 묻는다. 자신의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며 나를 찬찬히 다시 보라고 따뜻이 위로한다. 나는 나를 돌아보며 그녀들에게 위로 받고, 나의 남은 시간들을 위해 좀 더 용기를 내야한다고 그녀들에게 격려 받는다.
처음 이 책을 보고 주변의 가까운 20대 아가씨들에게 책을 보내주었다. 이 책을 읽고, 이 언니들을 보고 우리의(나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기를 바라서였다. 젊은 그녀들만은 더 용감하고 야무지게 세상을 살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야기들이 이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 여성들에게만 필요한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지나간 과오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하는 것 만큼이나 나 자신과의 화해가 필요하다. 이사벨라 버드 처럼 떠날 수 있고, 클레베의 안네처럼 여자도 사랑만이 다가 아닐 수 있고, 헬렌 켈러처럼 장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이제 나는 나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고 인정한다. 한걸음 나아간다, 언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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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언니를 보라 [박신영 저 / 한빛비즈]
우선 이 책의 지은 이가 여자이고 읽는 이도 여자라 그런지 참 재미있고 유익했다. 저자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온 이들을 언니라고 부르며 언니들의 삶과 일생을 이야기하며 그녀들에게서 교훈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을 선사한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언니들은 우리나라의 언니들 중에는 우리 역사 속에서 정말 쎈 여성으로 대표되는 한 명의 언니 미실과 현재 5만 원 신권 지폐에 여성 위인의 초상을 도안에 사용하기로 했을 때 신사임당과 유관순, 선덕여왕과 함께 후보에 올랐던 제주도의 언니 김만덕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외국의 언니들 중에는 프랑스의 왕비였고 영국의 왕비였던 엘레로노르, 늦은 나이에 세계를 여행하며 책을 통해 세상을 공유하고 자신의 삶을 살았던 이사벨라 버드, 사치와 성숙하지 못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유명하며 결국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마리 앙투아네트, 귀족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위해 나체로 시위했던 레이디 고다이바, 헨리 8세의 부인들 중 추녀 취급을 받으며 유일하게 탈출하고 살아남은 클레베의 안네, 당시 성폭행이라는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세기의 소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주변의 멸시를 묵묵히 꿋꿋히 극복해내어 최초의 여성 화가가 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어릴적 부모의 복수를 하기 위해 황제가 아닌 교황의 편이 되어 공주가 아닌 전사의 삶을 살며 끝까지 싸웠던 마틸다, 대문호 루쉰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루쉰의 곁에서 조용히 뒷받침 해주다 루쉰이 죽고나서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중국 최고위급 인사가 된 쉬광핑, 소설 작은 아씨들의 작가이자 착한 딸의 삶을 살았던 루이자 메이 올컷, 공주를 대신하여 흉노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중복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을 향해 전 생애를 바친 세계의 위대한 여성 헬렌 켈러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상깊은 언니들이 많았는데 그녀의 사치와 낭비가 심해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항상 거론되는 마리 앙투아네트. 그런데 그녀는 단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였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사실과 다른 나쁜 루머들이 근거없이 더 심하게 떠돌았고 그로 인해 뒤늦게 성숙한 여왕의 업적은 묻혀버렸다는 것, 일반인이었다면 그냥 허점 많은 여자로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한 나라의 왕비로는 그런 철부지 행동이 용납되지 않았고 결과는 너무 가혹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지금도 이런식으로 근거없는 루머들을 더욱더 부풀려 떠드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로 인해 상처받고 피해보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란 생각에, 나는 루머에 쉽게 현혹되어 너무 가볍게 떠드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유명 화가의 딸로 어려서부터 미술을 배웠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처녀의 순결이 중시되던 시대에 18살의 그녀는 화가 아버지의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미술을 배우면서 성폭행을 당했고 타시가 결혼하겠다는 말을 믿고 그녀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이 둘의 관계는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 아버지 오라치오가 알게 되었고 장장 아홉 달에 걸친 소송을 하였지만 세상은 이미 유명 화가에 빽 있는 타시의 편을 들었고 사람들도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문을 망신시켰다는 아버지에게도 상처를 받고 떠난다. 결혼을 하지만 처음엔 잠시 행복했지만 결국엔 남편에게서도 좋지 않은 취급을 받고 결국 사치스러운 남편은 떠난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살기위해 그림을 그렸고 <유디트>라는 명작을 그려낸다. 그 후 궁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고 25년 만에 아버지와 화해한 셈이다. 그리고 1년 후 아버지가 사망했기에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이루어진 화해였던 것이다. 그녀는 억울하고 너무도 힘들었을 상황에서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묵묵히 그림에 매진하며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했다. 예전에 비하면 현재는 여성들이 살기 많이 좋아진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차별이 존재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성폭행의 피해자인 여성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여성은 자신의 잘못인양 아무렇게나 말하고 따갑게 던지는 시선을 받아야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없었을까. 아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며 사소한 일에서도 전혀 합당하지 못한 일들이 허다했고 그런 일을 극복해 낸 여성들이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에게 말한다. 각자 나름의 입장에서 처한 안타까운 사정들이 있다고, 당시 남성 입장 위주로 쓰여진 기록과 현실 속에서 이 언니들의 삶을 제대로 보고 이 언니가 선택한 길을 보라고. 그 속에서 여성의 현실적이고 충실한 삶에 대한 교훈과 지혜를 배우고 희망을 가지라며 이 언니를 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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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혹은 글이) 좋은가 어쩐가 그런 판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읽는 책이 있다. 공부를 하겠다는 학문적 열의로 따지려 한다거나 나랑 입장이 달라서 비교 분석을 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그런 독서가 아니기 때문에 읽는 자체가 기쁨이 되는 독서다. 작가의 의도는 잠시 미루어 두고 읽는 내가 좋아서, 그저 '응응' 하는 심정으로 듣고 있는 것만 해도 좋은 마음이어서, 이런 작가의 글을 알게 된 것에 고마워하며 읽는 것이다.
작가에 대해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쪽에서는 얼마만큼은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 글을 읽고 있자니, 글보다는 이 글을 쓴 작가쪽으로 내 관심이 더 쏠리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주제로 책을 내게 되기까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 왔을 것인가, 이 책 속의 '언니'들을 만나고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언니들을 오랜 기간 만났을 것인가, 그때 그 나이 때 작가는 그 언니들 때문에 얼마나 분하고 속상하고 애태우고 좌절하고 감탄하고 다짐했을 것인가, 그 모든 '언니'들보다 그 '언니'들을 향한 작가의 마음쓰임이 어렴풋이 잡히는 듯하여 한 줄의 글도 놓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의 삶을 보는 눈에도 능력이 있을 것이다. 나처럼 무심한 성격으로는, 특히 선입견에 잘 사로잡히는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 작가처럼 사람을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쪽의 시야가 특히 모자란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 볼 줄 모른다는 평도 자주 듣는 편이고, 남의 평을 또 쉽게 믿는 편이고, 내가 찾은 근거에는 자신감이 없는 편이고, 그러니 훌륭하다 그러면 훌륭한 줄 알고 나쁘다 그러면 나쁘다고 여기는 형편이었는데, 이 책을 보니 작가가 독자 대상으로 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뛰어난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그릇된 평가들을 어찌 그리도 고스란히 믿고 살아 왔던 것인지.(나는 나의 이런 면을 고지식한 성격에다 교육을 너무 잘 받은 탓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편이고, 여자에 대한 차별과 불공평함을 은근히 이용하면서 편리를 취할 정도로 비겁한 면을 굳이 버리자는 입장이 아니므로 이 작가만큼 노여워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할 때의 그 적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자라오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더러 부딪히고 꺾이고 실패하는 동안 더 굳건해지는 쪽보다 굽히고 접고 포기하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나 스스로의 한계와 변명을 인정하고 있으므로.(이런 변명은 얼마나 편리하고 무책임한가.)
그래서 그 미안함에, 이렇게 호감을 보내는 것만으로 일말의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응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님은 계속 이렇게, 고단하시더라도 생각하고 선택하고 취해서 이런 글을 써 주세요, 저는 지금처럼 맹하고 수월하게 넙죽 받아서 읽기만 할게요, 하면서.
이 책은 여자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말할 수 있겠다. 여자를 차별할수록, 여자의 능력을 폄하할수록, 여자에게 기회를 덜 줄수록, 여자를 구박할수록, 남자의 삶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남자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지 이 책을 읽으면 몰랐던 남자들도 알 수 있게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