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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갈 때마다 ‘이렇게 책이 많은데 또 다른 주제의 책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곧장 책을 내고픈 내 작은 소망에 강력한 카운트 펀치를 날린다. 이미 그런 책은 있는데 너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출판 업계도 힘들다고 난리인데 너까지 왜 그래?, 새로운 관점도 없잖아?,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써 놓았어? 뭐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떠오르면 이내 기가 팍 죽어버린다. 이런 측면에서 또 다른 설교집이 과연 필요할까? 도대체 다른 설교집과 차별성이 뭐냐? 더욱이 얇기라도 하면 몰라도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이렇게 두껍게 썼으니 종이 낭비 아냐? 그래서일까? 저자의 생각인지, 출판사의 의도인지 몰라도 “읽는 설교”라 명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제목이다. 물론 설교는 현장성이 중요하다. 똑같은 설교문이라도 누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시쳇말로 은혜가 다르다. 또한 설교는 특정한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이다. 하여 공동체가 가지는 정서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보편성을 생각 할 때 여러 가지 제약을 다 아우를 수 있게 ‘읽는 설교’라고 명한 것은 신의 한수다. 왜 또 다른 설교집이라 묻는다면 ‘읽는 설교’니까. 이렇게 말해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여러분”(지면에서 다 담아낼 수 없음을 이해하시라!)라는 특유의 음성 외에는 저자 화종부 목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모교에 개강집회 강사로 왔다기에 그때 설교를 잠시 슬쩍 들어보긴 했다. 가끔 극동방송 전파를 타고 운전할 때 잠시 들은 것이 전부다. 허나 이번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읽는 설교 시리즈가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다. 설교의 텍스트는 성경이다. 그러니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국교회의 강단이 다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너무 너무 은혜로운데 공공기관의 강연회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릴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의 설교는 오랫동안 잊어진 설교의 참 맛을 본 듯하여 너무 기쁘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1세기 갈라디아교회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저자가 가진 탁월한 은사요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로이드존스의 영향이리라. 둘째, 그의 설교는 현대적이다. 어릴 적 설교자를 꿈꾸면서 설교자에 대한 불만(?)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들의 설교는 매우 성경적이었다.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매우 지루했다. 옆을 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의 설교는 현장성도 잘 살렸다. 대부분의 적용을 부부사이의 관계적 측면으로 전개한 것은 살짝 아쉽지만, 1세기 갈라디아교회 성도와 현대 교회 성도들을 잘 연결했다. 그래서 그때의 메시지가 오늘의 도전임을 잘 드러냈다. 설교는 영광스러우면서도 고된 작업이다. 나와 같은 풋설교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자와 같은 좋은 설교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어떤 이는 설교집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꼼꼼히 잘 챙겨본다. 표절이 아니라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고 싶은 설교자가 하나 더 생겼다. 본문과 현장의 균형 잡힌 설교를 화종부 목사를 통해서 배웠다. 계속해서 읽는 설교가 출간되기를 고대하며 적극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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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갈라디아서가 이제 끝사랑이 되다 성경 가운데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는 한 권을 꼽으라면 갈라디아서를 꼽겠다. 스무 해 전, 말씀 읽기에 열심이었던 때 특히 갈라디아서를 초록, 주황 형광펜으로 죽죽 그어가며 은혜롭게 읽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갈라디아서를 다른 서신서에 비해 유독 사랑했던 까닭은 복음을 담백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기분으로 화종부 목사님이 들려주시는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책을 들었다. 비록 활자로 된 책을 읽어내려 가지만 화목사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다행히 서방님 결혼식 때 화목사님이 주례를 서 주셔서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신앙서적과 달리 설교집을 읽을 때면 마음에 큰 감동과 울림이 있다. 아마도 말씀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내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런 것 같다. 갈라디아서 전 권을 실었고 500쪽 가까이 되는 두꺼운 책이었지만 책을 읽는다기보다 바로 앞에서 강약을 실은 설교자의 목소리가 전해옴을 느낀다. 한 마디로 은혜로웠다. 사도 바울이 대부분 서신서에서 강조하는 ‘복음’, 그러니깐 거짓 복음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값없이 얻게 된 그 은혜의 복음을 갈라디아서에서 반복해서 만난다. 왜 한, 두 절에서 한 번 설명해도 될 복음을 여러 절, 여러 장에 걸쳐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처음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참 복음에 기뻐했다면, 이제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면서 더 깊은 복음의 진수를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리라. 영접할 때 잠시 입으로 고백하는 단회적인 복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복음의 진가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들에서 선포되는 말씀 속에는 왜 이 복음이 푸대접을 받고 있을까? 좀 더 색다르고 신선한 말씀을 갈구하는 뭇 성도들과 나 또한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믿음을 갖게 된 지 오래된 성도의 한 사람으로 늘 갖는 고민은 ‘삶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좀 더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할까? 무기력해 보이기만 한 내 모습에 큰 좌절을 겪기도 한다. 너무 뻔한 답 같겠지만 이런 고민 또한 참 복음이 답이 됨을 갈라디아서 책에서 다시 한번 찾게 된다. 내 의지와 내 잘남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그 욕구부터 버려야 한다. 복음은 내 모습이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지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주시는 것이며 그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또 내 힘으로 살아가려하는 것이 문제가 됨을 느낀다. 오직 내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나를 이끄신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참 집요한 문제들 속에서 나는 많이 힘들다. 어쩌면 뻔한 답으로 내게 다가올 그 복음의 말씀이 더 이상 뻔하지 않게 다가와서 참 감사했다. 그래도 답은 복음이며 말씀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갈라디아서를 다시 찬찬히 읽게 되어 현재 내 삶을 조명하게 되니 참 기쁘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에서 새로운 것, 신선한 것, 마음을 뺏을 만한 것으로 가득 채운 복음 아닌 복음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된 복음이 날마다 선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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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특별하다. 서평단에 참석하면서 여느 때 같으면 오롯이 내게만 주어진 몫으로 책을 읽고 평을 기록해야 할텐데, 책이 도착하자 마자 아내가 먼저 읽어 버렸다. 저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갈라디아서에 대한 애정때문인지 모르지만 단숨에 읽고는 이렇게 글을 남겼다. 남편 앞으로 배달 된 책, 일단 표지가 너무 맘에 들었다. 깔끔하고 담백한 표지 디자인이 본문도 그러하다고 온 몸으로 소개하는듯 하다. 작년 봄 날의 어느 날, 남서울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을 했을 때, 간이 의자를 빼곡히 채운 본당에서 아주 전통적이며 조용하고 엄숙한 예배가 진행되었고, 그 날 화목사님은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셨는데 그 때의 목소리와 제스쳐가 한꺼번에 떠오르며 책을 펄떡이게 한다.갈라디아서를 통해 오늘 날 조국교회가 갖고 있는 아픔과 고통의 문제들을 직면하며 다시 한번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갈 것을 또한 촉구하고 있다. 죄인을 구원코자 이 땅에 오신 은혜의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 사랑과 은혜에 다시 한번 깊이 잠기는 성탄을 사모하는 이들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소개하는 글로서 이 정도면 거의 출판사의 광고용 카피 수준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씨름하면서 읽었다. 책이 어렵다기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어려웠다. 다른 많은 일이 우선의 이유요, 또 책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이유가 되었다. 책을 생각하면 몇가지 낱말이 남는다. 읽는 설교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구절 구절을 마치 그림을 보듯이 세밀하게 펼쳐 놓았다. 많은 내용이라 지레 겁을 먹을수 있지반 설교를 듣듯이 책은 술술 넘어간다. 내게 남은 세 낱말만 적어보자. 은혜, 복음과 다른 복음, 그리고 조국 교회이다. 앞의 단어들은 본문의 내용 대한 것이며, 마지막 단어는 청중에 대한 낱말이다. 세 낱말은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 중의 하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중심 본문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는 단어는 은혜였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은혜의 복음이었다. 수 많은 이유와 조건, 자격과 능력을 근거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울의 외침은 은혜다. 은혜의 복음이다. 하지만 자기 중심적이고 부패한 인생들은 이 은혜가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복음을 좇는다. 그것도 금방 말이다. 물타기에, 첨가물 넣기, 아니면 바람빼기 식으로 다른 복음을 만든다. 저자는 그런 모습에 대해서 바울만큼이나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은혜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된다. 저자는 기독교는 생각하게 만드는 종교라고 했다. 옳다. 무조건 덮어놓고 믿는 게 아니다. 알고, 듣고 생각하며 믿는 것이다. 기독교는 전인격적인 복음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영성을 함께 사용하여 믿는 것이다. 은혜의 복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믿으라고 하는게 아니다. 은혜는 그런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히 은혜의 복음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조국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분명 이 설교가 읽는 설교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할지라도 목회하고 있는 특정한 청중을 대상으로 행한 설교를 근거로 했을 터인데 조국교회라는 말은 어색하다. 하지만 설교를 들어야 하는 청중이 특정한 장소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대, 이 땅의 교회들이 들어야 하는 복음이기에 조국교회라고 말했을 거라 애써 이해를 해본다. 자기 중심의 부패한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외침이 눈앞에서 들리는 듯 하다. 다른 복음에 곁눈질하는 자들을 향하어 거침없는 저주의 외침이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목음으로 돌아와 참 자유와 생명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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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읽고 설교를 살고 화종부, 갈라디아서를 읽고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제목이 참 흥미로웠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인데 읽는다니. 참으로 생경하였다. 개인적으로 설교집은 거의 읽은 적이 없기에 더욱 머뭇거리기에 충분하였다.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엔 한 가지 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설교라는 게 기본적으로 현장이 중요하고, 그 현장에서 호흡함이 기본인데, 그런 게 전혀 없이 과연 설교가 내 맘에 어떤 감동일까 하는 기본적 의문이었다. 그렇게 망설이다 집어 든 책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우선 책이, 아니 설교가 쉬웠다.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게 저자의 장점인 듯 하다. 아, 물론 쉽다고 해서 내용이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내용이 빈약한 것을 쉬운 것으로 우기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풍성한 내용을, 어려운 교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해서 더욱 아쉬웠다. 저자의 설교 현장에 함께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갈라디아서를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아니 들려준다. 1세기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다른 복음, 즉 유대식 율법 준수 여부였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교회 안에 스멀스멀 파고 들었다. 바로 그 1세기의 현장에서 우물을 길어 오늘 우리의 삶을 적신다. 오늘 우리 시대의 거짓 가르침들을 주의하라고 외친다. 진짜 복음은 자격이 아니라 은총이며,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고 그것을 믿으라고 외친다.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아니 들으면서 한국교회의 심각한 현실적 왜곡들이 떠오른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자격이 아니라 하지만, 교회는 자격을 따진다. 따져도 너무 따진다. 공공연하게 석사 학위가 있어야 설교를 할 수 있고, 박사 학위가 있어야 담임목사가 될 수 있고, 책을 낼 수 있는 것처럼 만연해 있다. 사울이 그렇게 따르고 주장하던 것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요, 십자가의 공로임을 외쳐대는 부르짖음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퍼지듯, 오늘 우리들의 교회를 위해 퍼지기를 기도한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우선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쉽게 풀어써서 참 고맙고 감사했다. 반면 책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흘러가는 조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해서 이제 나라도 이 책을 더욱 읽고 책대로 살아내야 겠다. 아니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를 읽고 살아내는 것을 넘어 원전 갈라디아서를 내 목소리로 읽고 내 삶으로 살아내야겠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자 찬사가 아닐까? 그렇게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의 바른 복음을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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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변명 (화종부, 갈라디아서, 죠이 선교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설교는 물론이거니와 성경공부를 하거나 상담을 할때도 복음이 증거되어야합니다. 복음으로 복음을 위해 복음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시쳇말로 복음으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이 바로 목사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복음을 잘 알고, 복음과 가깝고, 복음을 누리며 살거라 생각합니다. 복음의 전문가, 복음의 전도자가 바로 목사라는거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목사는 세상과 구별되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과 단절된 교회라는 온실에서 삽니다. 때문에, 목사가 경험하는 복음은 실제이기보다는 이론에 가깝습니다. 간증이 기록된 신앙서적이나 학문적 내용의 신학 서적을 통해 복음을 접합니다. 복음을 글로 배웁니다. 간간히 심방을 하면서 접하게 되는 성도님의 간증은 설교의 좋은 예화로 사용할 뿐입니다. 때문에, 목사의 영적 내공은 세상이라는 치열한 야생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의 야성보다 더 약할지 모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남서울은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화종부 목사가 자신의 설교집 "갈라디아서"에서 한 말은 목사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행한 업적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예수의 공로만으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선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심장입니다."(30) 목사로서 굳이 변명을 하자면, 목사의 학위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맡은 부서의 양적 부흥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예수의 공로만으로 목사를 은혜 가운데 선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심장이라 합니다. 요약하자면, 부족하기 짝이 없고, 연약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르겠네요. 복음으로 인해 부족하고 연약한 자가 목사가 되었으니 목사에게는 배울것도, 얻을것도, 받을것도 없지 않을까? 목사에게서 무엇을 바라는게 어리석은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변명을 하나 더 해 볼까요? 저자의 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담고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그분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하고, 그분의 은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26) 목사의 말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의 삶이 은혜가 아닙니다. 바로 목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합니다. 글로 배운 복음으로 연명해가는 부족한 목사의 삶이지만, 그래서 남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자신도 변화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자가 목사이지만, 복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몸부림치는 목사의 삶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목사의 삶을 이끌어가는 복음이 은혜의 선물입니다. 때문에, 목사는 복음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누구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목사질(?)을 목사답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처절하게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목사는 복음을 경험하고 은혜를 누립니다. 비록,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서 술과 담배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폼나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교회 구석진 언저리에서 모양 빠지고 볼품 없게 목사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쪽팔리냐구요? 은혜의 원천은 다르지 않습니다. 부끄럽냐구요? 복음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내일도 목사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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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많이 아쉽다. 그의 설교를 글로 보는 게 반갑지만 많이 아쉽다. 화종부 목사의 설교는 글보다 사실 직접 들어야 한다. 묵직한 중저음에 가슴 끓는 조국 사랑과 성도들을 향한 애끓은 마음이 담겨 있는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 10년 동안 들어온 화종부 목사 설교의 특징은 무엇보다 중간 중간에 자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며 진심을 담아 부르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그 소리에 가슴 떨려 오고, 수 없이 “조국 교회!”를 반복해 외칠 때면 한국교회를 향한 안타까운 절규로 가슴이 저밀어 온다. 그래서 설교를 먼저 듣고 책을 읽으면 글이 더 살아있을 것이다. 소위, 뜨는 목사 되면 책 한 권 나올 법 한데 설익은 글은 내 놓을 수 없다고 저자는 오래 동안 소신처럼 말해왔다. 때가 되면 좋은 책 한 두 권 남기면 좋겠다고 하신적인 있었기에 저자의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가 반가운 이유다.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는 본질에 집중한다. 바울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다른 복음’을 향해 오직 구원은 ‘은혜’로만 가능함을 설명한다. 그리고 화종부 목사는 갓 부임한 남서울 교회의 두 번째 시리즈 설교로 갈라디아서를 택하여 ‘교회다운 교회, 복음과 내용에 충실한 기독교’(p.12)로의 전환을 선포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칭의의 구원을 오래 동안 외쳐왔다. 그럼에도 아직 그 복음의 능력과는 멀어진 한국교회를 보며 세상은 아우성이다. 율법주의와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값싼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 갔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다른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와 같은 책이 더욱 작금의 시대에 읽혀져야 하는 책인 것이다. 3부, 26장에 걸친 이 책은 사실 단숨에 읽혀져야 할 책이라기보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매 주 한 편의 설교처럼 읽어나가면 좋겠다. 6개월에 걸친 시간동안 갈라디아서 한 권 앞에 서야 한다.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은 내게 어떤 효력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또 구원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인지 거울 앞에 서듯 나의 구원을 정직하게 묻고 들여다봐야 한다. <읽는 설교, 갈리디아서>는 그 만큼 쉽지만 어려운 주제인 행위 대 구원, 율법 대 은혜, 육체의 소욕 대 성령의 열매 등을 쉽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토록 잘 다루고 있다. 때로 진리의 날카로운 칼로 베이는 아픔이 있겠지만 그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복음을 경험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제대로 모르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 진정 무엇인지 저자의 설교 앞에 서기를 주저 없이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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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다시 해석 되는 삶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를 읽고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만약에 복음을 잘 안다고 한다면 그 복음은 현재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복음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잠깐 꺼내고 집어넣는 신분증 같은 것이 아니다. 복음은 피상적으로 안다 모른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은 내 삶의 실체가 되어야한다. 복음이 실제적으로 내 삶에서 구현되어져야한다. 그러므로 삶의 가시적인 변화 없이 복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사실 그리 큰 기대 없이 읽어가기 시작했다. 설교집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두의 한 문장이 읽는 내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에 대한 감각‘의 부재에 대한 지적이다.<30쪽> 복음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기에 당연히 다른 이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은혜의 DNA 즉, 은혜에 대한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감각이 점점 마비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결과 은혜가 아닌 조건과 자격이 왕노릇하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지지하기 위해서는 이 은혜에 대한 감각이 필수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흔히 복음을 이야기할 때 구원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접근이 약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예수님을 만나고 믿는다는 것에 대한 탁월한 삶의 해석이 눈에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과거가 다르게 해석되고, 우리 삶이 다시 해석 되는 것이다.’<87쪽> 이전까지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해석하던 인생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내 자신이 다르게 그리고 다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으로 새롭게 해석된 우리의 인생과 삶의 방향성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다. 새롭게 해석이 되었다면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새롭게 해석된 것이 아니다. 저자는 복음이 만들어내고 해석된 우리의 인생에 이웃을 섬기고 사람을 살리는 실천적 영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를 향해 세상은 부르짖습니다. 복음이 진짜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204쪽> 본서를 읽으며 두 가지 은혜를 모두 경험했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예수의 공로로 우리 안에 주신 복음의 은혜이다.<30쪽>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 구원을 깨달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은혜이다.<427쪽> 이 은혜는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그분의 뜻대로 존귀하게 살게 하는 은혜이다.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는 복음이 변질되고 이에 따라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가르침이 가득한 이 시대에 분명하고 정확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기꺼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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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그 사람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사람의 마음과 결을 드러내고 사상과 문제의식을 숨길 수 없게 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목사이며 말씀사역자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된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 겸손하게 엎드러진 사람이며, 자기부정의 사람이다. 주님의 복음만을 붙들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설교문장들 속 빼곡히 담겨있다. 설교집의 내용을 읽어가니 설교자의 모습도 함께 읽힌다. 본받고 싶은 진솔함과 따뜻한 말씀사역자다. 날 세우던 젊은 시절을 지나오며,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미덕과 너그러움을 품은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빚어놓았다. 타자(他者)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긍휼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주께서 우리를 향하 인내하고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자비의 마음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대하고자 하는 사랑이 비친다.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벼루고 다듬어 가신 것을 본다. 좋은 설교자에게서 좋은 설교가 나오는 법이다. 본서는 교회의 현실과 우리 삶의 자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말씀에서 멀리 떠나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음으로 복음의 능력과 자유를 상실한 조국교회에 대해 애타한다. 그의 설교는 미사여구나 화려한 단어들이 없다. 담백하게 성경을 충실하게 해설해 나간다. 본문에서 담지하고 있는 말씀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음의 능력과 자유를 선명하게 밝혀낸다. 복음은 성도에게 자유를 준다. 복음은 능력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하갈의 자식이 아니라 사라의 아들로 자유자가 되게 한다. 그 자유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사랑으로 살게 하는 권능이다. 저자는 <갈라디아서>에서 전하는 자유의 복음을 선명하게 풀어낸다. 자녀에게 주신 복음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말한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 몸담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쉽게 하고 싶어 합니다. 어려움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기독교 본질 자체가 그런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교회 가서 위로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성도가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오셨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입니다.(301) 나는 저자의 설교가 마음에 든다. 가독성 좋은 구어체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 따뜻하고 깊이 있게 <갈라디아서>를 읽어낸 느낌이다. 중간 중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내게 주신 복음의 은혜에 감사했다. 받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여러 번 결심도 서게 한다. 책을 받기가 무섭게 3일을 빠져 지냈다. 이제 아내가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내 다음은 딸아이(중3)이가 읽어갈 예정이다. ‘자유의 헌장’으로 불리는 <갈라디아서>가 담지 한 복음의 진수를 알기 원하는가?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강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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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495페이지. 하지만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다. 책장 넘어가는 기쁨과 함께 ‘복음과 구원’에 대해, ‘성령을 통한 성결’에 대해 곡진하면서도 뜨겁게 와 닿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래에 한국인 목사님이 오직 복음에 대해 이렇게 집요하고 정성스럽게 파고드는 모습을 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복음과 구원” 공로가 아닌 십자가로,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은 자격과 조건을 갖춘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너무 쉽게 넘어가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하나님의 친자이기보다는 왠지 데려온 양자처럼 느껴지고, 마음은 불편하고 뭔가를 좀 더 해서 그 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만 할 것 같은 눈치가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아직도 온전히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바울 사도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복음을 기뻐하며 뜨겁게 받아들였지만, 예루살렘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할례와 율법 준수의 강요 앞에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무너져서 ‘다른 복음’을 따라 갔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복음은 인간의 자격과 조건을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부터 선행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택하심,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주심- 를 믿고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임을 온전히 명료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거듭 읽을수록 고개는 끄덕여지고, 그만큼 마음깊이 은혜의 복음이 정립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뿌듯했다. 긴 호흡을 가지고 복음에 대해 풀어간 저자의 열정과 복음에 대한 수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특히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을 “자유”라는 관점 위에서 “성령을 통한 성결”의 삶으로 풀어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은혜의 복음을 통해 주신 선물이 율법과 자아,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섬김을 위한 자유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내면의 회복과 동시에 시원함을 주는 책이었다. 바르게 예수 믿음에 대해, 믿음으로 사는 바른 삶에 대해 자주 묻게 되는 이 혼란한 시절에 꼭 필요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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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意)만 잘 내려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많은 갈등과 왜곡이 같은 단어를 다르게 정의하거나 오해하여 생긴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조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도 “복음과 그 본질”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 진단하고, 조국 교회를 향한 사회적 지탄을 “교회다운 교회, 복음과 내용에 충실한 기독교로 전환하라”는 뜻으로 읽는다고 밝힌다(12). 이에 대한 저자의 처방이 갈라디아서다. 율법과 행위로 회귀하려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바른 복음 선언을 오늘 현대 교회가 제대로 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로 왜곡된 교회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저자의 생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설교의 현장성을 중시한다는 저자는, 가급적 설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읽는 설교”라는 독특한 제목과 함께 거의 500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볼륨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인지, 설교를 읽는 내내 강대상 앞으로 불려가 오롯이 앉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짧지 않은 매 설교마다 예화를 배제하고 본문의 의미를 충실히 강해해 나가는 방식은 설교에 대한 저자의 곡진한 열심을 반영한다. 갈라디아서 설교를 통해 저자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은혜로 주어진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세속적 종교성으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한국교회가 “선행이나 성화를 덜 강조해서 성도들의 삶에 행실이 모자란다”는 진단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은혜를 통한 구원에 충실해야 참된 행실을 하게 된다고 진단한다(139). 인간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복음이기에 은혜이며, 바른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결국 “자유와 사랑”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기 마련이다(336). 저자는 이렇게 복음의 원래 넓이와 깊이를 복기하여 풍성한 은혜의 샘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한다. 한편,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의 연장선으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복과 상급’에 대한 설명은 다소 혼선이 있어 보인다. 저자는 흔히 생각하는 ‘상급이나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는 생각에 제동을 걸고(134, 186),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누리는 부요와 풍요를 강조한다(199-202). 이는 아마도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겨냥한 표현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면서도 저자는 세속적인 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것이 되었다는 주장까지도 하여(237, 457, 470)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생각 같아서는 ‘복음과 복’에 대해 하나의 설교를 할애하여 논쟁해주길 기대했지만, 산발적인 선언에 그칠 뿐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아 다소 아쉽다. 저자의 주장처럼,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며(484), 복과 상급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믿음의 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본질적인 추적은 교회됨의 시금석이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는 교회가 다시 귀담아 들어야 할 복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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