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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능력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몸을 베고 찢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알아내고 싶은 진실이나 진심이란 게 있을까. 있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렸을 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모로 자발적으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 능력이다. 『절창』의 주인공인 ‘아가씨’는 바로 이 능력 때문에 문오언과 얽힌다. ‘아가씨’의 능력을 알아챈 오언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자신이 주도하는 불법적인 용무에 능력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 원하지 않는 일에 자신의 능력을 억지로 사용하느라 ‘아가씨’의 정신이 피폐해질 때 즈음, 이를 보다 못한 가사도우미 박실장의 제안으로 ‘아가씨’에게 가정교사가 붙는다. 소설은 ‘아가씨’의 가정교사로 고용된 ‘선생님’이 오언의 집으로 입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구병모 작가가 4년 만에 출간한 장편소설 『절창』은 이야기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상처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듣다’ ‘보다’ ‘만지다’ ‘접하다’ ‘느끼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음에도, 굳이 ‘읽다’를 선택한 것은 의도가 다분하다. 오언이 상황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점이나, ‘선생님’의 전담 분야가 독서 교육인 점 또한 이 작품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이 서술되는 방식이다. 소설은 ‘선생님’과 ‘아가씨’라는 두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이 구어체로 서술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화자가 겪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화자가 의도적으로 내용을 모호하게 흐리거나 감추는 양상까지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소설의 어느 대목에서는 말하기 싫으니 밝히지 않겠다며 화자가 대놓고 이야기를 숨기기도 한다. 이처럼 이야기란 화자가 자기의 입장과 감정에 따라 멋대로 가공하고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인지적 편향이 반드시 담긴다. 심지어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조차 “자기 감각과 인지라는 분광기를 통과한 해석의 문제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같은 현상을 두고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렇게 받아들인 각각의 사실을 저마다 왜곡된 형태로 발화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이야기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소설은 인물들이 처한 입장과 그들의 서사를 통해 이야기의 존재 이유와 진정한 소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서슴없이 밝힌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해가 아닌 오해로만 다가갈 수 있으며, 다른 입장을 짊어진 각각의 ‘나’가 다름에서 기인하는 고통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렇듯 극단적인 태도는 오히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긍정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하거나 읽는 행위에 이유를 찾을 수 없어도, 개인이 서로의 진심에 영원히 다가설 수 없어도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에서 우리의 관계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구병모 작가의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는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용기를 강조한다. 부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끝내 긍정하는 자세는 ‘관계와 소통’을 다룬 『절창』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수많은 왜곡과 오해가 오갈 수 있음을 전제하고서라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상처를 통해서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했던 ‘아가씨’가 그랬듯이. 다른 입장에 놓인 ‘아가씨’를 끝내 이해하기로 한 ‘선생님’이 그랬듯이.
제목인 절창(切創)은 ‘끊어질 절’, ‘다칠 창’이 조합된 말로 ‘베인 상처’를 뜻한다. 그러나 ‘다칠 창’(創)이라는 글자는 창작(創作), 창조(創造), 창시(創始) 등 ‘만들다’ ‘비롯하다’의 뜻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끊어지고 다친 곳에서만 만들어지는 관계. 인간이 인간에게 가닿는 기적은 그렇게 비롯된다. |
| 구병모 작가의 작품 중 처음으로 접한 소설이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라, 이야기와 읽기에 대한 첫머리가 이야기의 입구이자 실마리인가 싶어서 여러 번 되돌아가며 곱씹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책장을 덮고 나서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문장을 살펴보았더니, 작가는 일종의 #스포일러 라는 태그를 이런 식으로 적어놓았구나, 싶어서 미소가 떠올랐다. 소설가는 왜 이야기를 하는가, 인간은 왜 읽는가. 평생의 질문을 특유의 이야기로 펼쳐낸 그녀의 글은 그 자체로 '왜 읽는가'에 대한 정답 없는 답이기도 했다.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읽는 이에 따라 여러 장르에 걸친 이야기가 된다. 악인에게는 서사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철학 때문인지, 이야기의 주인공 격인 오언에게는 행위의 이유나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부와 아주 단편적인 배경, 행위나 대사는 등장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서사는 없다. 그럼에도 시각에 따라서는 또다른 주인공인 '아가씨'와의 연애 서사로 읽히는 대목이 있다. 오언에 대한 외모에 대한 묘사는 없으나 그는 외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보스'이고, 젊은 나이에 고급스러운 취향을 걸친 '아가씨'와는 인연이 얽히고 설키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경계일지도 모를 감정 묘사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를 이룬다. 오언과 아가씨의 집에서 '나'가 목격하는 일들은 첫 장면부터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하는데, 이후에 하나씩 벗겨지는 베일을 따라가다보면 마지막에는 극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한낱 범죄소설도 아니고, 반전이 중요한 스릴러도 아니고, 결국 인간은 왜 읽고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준비한 일종의 장치가 아닐까 싶었다. "책 속에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인간이라는 텍스트가 얼마나 복잡하며 해결 불가능한 문제와 총체적인 모순으로 빚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 이 소설 뿐만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끝없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이상한 건 그들이 아니라 사실 내가 아닐까, 이상하지 않다는 건 과연 뭘까 싶을 정도로 세상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며 온갖 층위의 복잡한 삶이 얽혀있고 그걸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삶이란 조금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작가도 그런 점에서, 읽는다는 것이 텍스트에 국한되지 않고 텍스트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삶과 세상이기에, '읽기'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읽어야 하는가를 그토록 강조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 소설을 읽는 독자가 이야기의 인물에 몰입하는 경험은, 아가씨가 상처를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자신의 것처럼 체화하고 느끼며 '읽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읽히는 텍스트였지만 내게는 소설가와 독자가 왜 존재하는가를 고찰한 텍스트로 다가왔다. 왜 읽어야 하는가, 를 묻는다면 뻔한 얘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이 책을 대신 내미는 편이 더 와닿는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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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은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를 의미한다. 그리고 책표지를 보면 가느다란 틈 사이로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 책 뿐이 아니라 활자화 되어 있는 것을 읽는다. 때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읽음을 모두 다 이해하면서 읽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 이해했다는 정답은 과연 있는 것일까.
그저 읽고 내 나름대로 해석한다.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읽는데서 시작한다. 그 문제의 의미를 잘 읽고 이해해야지만 정답에 도달할 수 있기때문에. 그러나 정답이 없는 것들을 읽고 해석하는데는 지극히 내 주관이 개입하기에 어찌보면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이 책의 소개글에 나온 문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군가의 깊은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의 소녀가 있었다. 우연히 그녀의 능력을 알아본 사업가 문오언(烏焉).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을 주고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숨긴다. 차갑고 타인들에게는 잔인한 그이지만 그녀에게 보여준 호의만큼은 진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세상과 고립되었기에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집에 가득한 책을을 읽는 것이었고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선생님을 구하게 되어 이 이야기의 화자인 선생님이 등장한다. 선생님이 누군가에게 이 모든 사실들을 진술(?) 하는 듯한 싯점과 아가씨라로 호칭되는 그녀의 고백을 들어주는 선생님의 싯점으로 이야기는 나열된다.
여기서도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읽힘이 보여진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과 들은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 과연 그 행위에 진심의 가운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피가 나는 상처를 만지면 누군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그 능력을 사용하는 조폭같은 사업가가 있고 ,폐쇄된 공간에 종사하는 실장(?)들이 있고, 그것을 파헤치려는 제3자인 선생님이 있고.. 무슨 스릴러 영화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상대방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오만함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도 그것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며 이해와 오해의 줄다리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의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문오언을 제외하면 오언이라는 이름도 한자로 보면 그 글자가 그 글자 같아 오역할 수 있는 이름들이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이름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우리이기에 말이다.
왜 다시 첫 장을 펼치게 되는지 알 것 같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천천히 꾹꾹 누르며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무언가를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물며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를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p. 14)'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p. 63)'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 p. 302)'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p.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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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님의 신작일 뿐더러 선공개 문장이 너무 좋아서 예약판매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호평이 많길래 저 또한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구병모 작가님의 특유한 담백한 문체는 참 좋았습니다. 간혹 인생 공부를 하는 느낌이 들어서 필사도 여럿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오언과 아가씨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묶는 후기를 많이 보았는데, 어떻게 보면 아가씨에겐 가해자인 문오언을 독자들이 옹호하고 애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건 스톡홀롬 증후군 아닐까요 .. 제가 절창이라는 제목과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라는 선공개 문장을 보고 기대한 전개는, 적어도 이런 전개는 아니었습니다. 망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스톡홀롬 증후군일지도 모르는 서사에서 쓰이는 단어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문오언이라는 이 인물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칭해도 괜찮은 걸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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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마.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마. 나도 모르게 속으로 부르짖게 되던 말. 내가 예상하던 내용이 아니라 재밌었고 예상 밖으로 로맨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재밌어서 한 장 한 장 읽어 없어지는 게 너무 아깝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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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병모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라는 의미심장한 메모를 이 책 앞에 남겨 놓았다. 더구나 자필로 쓴 메모라니. 이상하게도 마음을 설레게 하여 고민하게 한다.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읽도록 강요한다 싶다. 왜 그러할까? 이 작품의 전개가 비극과 희극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보다는, 그건 아마 어떤 뜻을 매우 깊게 담은 것인가를, 소설가의 마음쯤을 한번 읽어보라는 건 아닐까? 즉 읽는다는 행위를 쓴, 읽기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러는 거겠지. 이브는 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는지, 판도라는 열지 말라는 상자를 왜 여는지, 프시케는 보지 말라는 얼굴을 굳이 어둠 속에 등불을 밝혀가면서까지 들여다보는지, 하지 말라는 걸 해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이치를 한번 살펴보라는 거겠지. 그러므로 접촉을 통해, 아니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일, 그렇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여자가 있다. 그녀다. 아가씨다. 좋고 싫고 같은 것 말고 생각을 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과 판단과 응용. 또는 작가는 왜 인물의 감정을 안 보여주고 인물이 바라보는 풍경만 실컷 펼쳐놓고 지나가 버릴까 하는 것들을 읽는 일이다. 그 아가씨를 극진히 살피는 듯 보이는 한 남자 문오언, 보스인 그는 그녀 아가씨가 한번은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등장하는 입주 독서 교사인 나는 그 둘의 관계를 의심 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품은 채 살펴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사정이 좀 있어서 육 년 전부터 데리고 있는 아이로, 역시 사정이 좀 있어서 바깥과 소통이 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지내는, 취업 활동 역시 사정 때문에 중단하게 됐다는 설명이 와닿진 않음에도. 그 아이, 아니 그 아가씨에게 뭔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거였다.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이해 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르지.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르는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으니. 그런데 아가씨 상태가 달라졌거든. 소위 점괘가 틀리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어. 뜰채에 구멍이 나서, 상처 입은 사람의 머릿속 내용물을 잘못 건져내곤 했다는 얘기야. 뇌리에 중간중간 삽입된 다른 장면들로 인해–사람은 타인의 이야기를 눈앞에서 보고 듣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곤 하지, 나라면 이랬겠지, 저랬을까, 실제 발생한 일이 아니더라도 순간적으로 자신을 대입하고 상상 하며 이미지화하곤 해- 몇 가지 포인트만 제외하면 더는 알았다고 하기도 어렵게 됐어. 오독을 전제하지 않고는 결코 타인을 읽을 수 없다는 것. 필연적으로 왜곡을 발생시켰어. 그러니 그들의 사이가 어떻든 간에 보스는 아가씨에게 시키는 그 불결하며 불길한 일을, 읽는다는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니. 책을 읽는 일과 머릿속을 읽는 일 중 뭐가 더 흥미로울까? 둘 다 힘들겠지. 그래도 사람의 머릿속을 읽을 때보다는 책을 읽는 편이, 그냥 눈앞의 글자를 읽는 행위에 불과하더라도 한결 살 것 같을 거야. 사용되는 동사는 같은데도. 한 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 뒤에 존재하지 않는 속편을 나름대로 생각 해보게 되는 재미가 잠깐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그만두었어. 내 이야기 또한 속편이 없어야 마땅하니까. 당연하니까. 당연한 게 뭔데. 당신의 세상에서. 일반 상식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선에서. 무슨 당연함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지극한,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보다는, 그 애는 나의……질문이다. 아가씨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는지 정확한 시기와 출처를 모른다. 무언가 머릿속에, 피어난 거야. 흘러들어왔다고 해야 할지. 터졌다는 쪽에 가까우려나. 찰나에 불과한 사이에 쏟아진 감각과 언어 정보를 압축 변형해서, 이른바 ’읽어낸‘ 거, 그자의 무언가를. 차라리 어스름 가운데 숲에 다름 아닌 정원을 거닐며 풀이 제 잎마다 이슬을 모으는 부산함 움직임을 구경하면서, 나뭇잎들의 하품을 들으면서, 자연을 읽어내는 일이었다면, 아가씨는 더욱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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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에는 상처를 '읽는다'는 설정이 글을 읽는다는것과 맞물려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읽는다는 설정은 이용당한것이었다 그저 파과처럼 영화화가 되기를 원하고 쓴 작품인가? 보스가 나오고 총이 나오고 거기에 붙집힌 아.가.씨... 철지난 영화 한편 본 기분ㅠㅠ 읽는다는 설정을 빼고서라도 내용이 탄탄하고 재밌어야되는데 계속 뭔가 보여주다만느낌 전작들을 재밌게 본 터라 더욱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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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와 아가씨라니 소재부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빨리 읽고싶어서 전전긍긍했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애증의 애증에 관한 애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언과 아가씨가 서로 대화를 터놓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복잡해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오언이 아가씨한테 상처읽기를 시키기로 한 이상 건강한 대화는 성립하지 않았을거같네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상처읽기를 시키기 전 서로의 감정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둘의 관계가 건강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이렇게 if를 가정하는건 의미가 없지만 이 둘의 망해버린 러브스토리가 안타까워서 자꾸 해결책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가씨는 오언의 상처에서 뭘 읽었을까요? 선생님은 아가씨에게 오언의 질문이 뭔지 얘기해주었을까요? 주요 등장인물 3명의 애증관계를 바라보는게 재미있었습니다. 구병모 작가님의 책은 언제나 제 취향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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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너무 기대되는 책이다 제목부터 절창이라.. 처음에는 절창의 과연 무슨 의미일지 사실은 감도 잘 잡히지 않았다 절창: 베인 상처 라는 의미로 상처에 접촉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한 여성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나역시 이 속에서도 수많은 감정을 느끼고 치유하길 바란다 |
| 구병모 작가의 책 <위저드 베이커리>로 사실상 소설에 입문했고, 청소년 문학에 입문했고, 구병모라는 작가에 입문했다. 중학교 시절, 그 책을 읽으면서 문학이란 게 이런 거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로부터 구병모 작가님이 많은 책을 내주셨다. 읽은 것 반, 아직 안 읽은 것 반인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을 때 느꼈던 희열을 매번 경험하고 있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절반은 아직 못 읽었다. 변명하자면 아껴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절창>은.. 다시 그때 그 희열을 느끼기 위해 신작 소식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매했다. 오로지 기대된다. 이제 실망할 단계는 아니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