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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다 읽었다. 상당히 우울한 소설이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해석했을 지도. 실은 가끔은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때론 한없이 게으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램지 부인을 통해, 혹은 다른 화자들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한다. 의식의 흐름이란, 실은 현실 세계의 무의미함, 가치없음을 인물의 의식을 훑어가면서 드러내는 표현기법은 아닐까. 도대체 이 소설에서 의미있는 것이라곤 의미를 찾아가는 일련의 행동, 즉 등대를 찾아가는 것 이외엔 없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심지어 시간을 건너뛰어 몇 명의 인물들이 죽고(심지어 램지부인까지) 나이가 든 채 뒤늦게 등대로 향한다. 그림자 하나가 페이지 위에 드리워지자 그녀는 올려다보았다. 오거스터스 카마이클이 발을 질질 끌면서 지나가고 있었고, 인간 관계라는 것이 완벽할 수 없고 가장 완벽한 관계에도 틈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순간에, 남편을 사랑하지만, 진실에 대한 본능 때문에 지금 그녀가 계속하던 고찰들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고개를 들어올린 바로 이 순간에,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확신으로 고통스러운 이 순간에, 진실을 숨기려고 이런 거짓말 저런 거짓말로 과장까지 해가며 둘러대느라 아내다운 노릇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드는 바로 이 순간에, 계속 흥분되던 좋은 기분이 사라지고 우울하고 초조한 기분이 드는 바로 이 순간에, 카마이클 씨가 노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어서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아진 그녀는 그가 지나갈 때 한마디 툭 내던졌다. "안으로 들어오실려고요, 카마이클씨" (61쪽)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삶 속에서 우리가 진정 행복해 하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 그걸 시간으로 모으면, 일주일 정도는 될까? 반대로 힘들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모으면? 아마 몇 달, 심하면 몇 년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는 걸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어쩌면 램지 부인은 이런 생각들 앞에서 아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두 아이가 지금처럼 영원히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악당과 기쁨을 주는 천사들인 아이로만 계속 있게 하고 싶었고, 자라서 다리가 긴 악마로 변하는 걸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잃어버리는 것을 보상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막 제임스에게 "그리고 케틀드럼고 트럼펫을 가진 수많은 군인들이 있었어요"라고 읽어주었을 때 제임스의 눈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왜 자라야만 할까? 자라면서 왜 이 모든 것을 잃어야만 할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87쪽) 아이 시절의 행복함, 순수함, 천진난만함이 어른이 된 지금, 그것이 행복일까 하고 생각하면, 딱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덜 불행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작은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 ... 그래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남편에게 말했다. 왜 아이들은 자라야만 하고 자란 뒤엔 왜 모든 것을 잃어야만 할까? 아이들 모두가 두 번 다시 이렇게 행복하진 못할 거예요. 그런 말을 하면 남편은 화를 냈다. 왜 그렇게 우울한 인생관을 가진거야? 그가 말했다. (88쪽) 결국 삶이란, 나이가 드는 과정이란, 무언가 - 작은 보물 - 를 잃어버리는 과정일 뿐이다. 이 얼마나 우울한 전망이고 통찰인가. 이 소설을 지배하는 건 이러한 분위기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걸 드러내기 위한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이 나무란 만큼 그녀도 그렇게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삶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 그녀의 오십 년 세월이 후딱 지나간 게 그녀의 눈에 보였다. 저기 그녀의 앞에 말이다. - 삶이, 삶이란 하고 숙고하던 그녀는 그런 생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삶을 들여다보니 현실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 속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지만 그런 것을 아이들이나 남편과 절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거래가 그녀와 삶 사이에서 계속 오갔고, 거래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이쪽에 있었고 삶은 저쪽에 있었고, 거래가 그녀의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그러면서도 삶과 그녀는 가끔 대화를 나누었고(그녀가 혼자 앉아 있을 때면), 대단한 화해를 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상할 정도로 그녀가 삶이라고 부른 이것이 무섭고 적대적이고 행동이 민첩해서 기회만 있으면 그녀에게 잽싸게 덥벼든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89쪽) 원하지 않았던 삶,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 그 삶 앞에서 삶과 싸우고 거친 삶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견딜 수 없는 우울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패배자가 되며, 삶이라는 경주에서 낙오하며 남편, 혹은 아내의 비난과 무시, 아이들의 차가운 시선과 경멸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니, 램지부인은, 버지니아 울프는,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저 적대적인 삶과 거래를 하며, 이 끔찍한 삶의 순간을 유예시켜야만 한다. 어떻게?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결코 맛보지 못한 휴식이 체험을(여기서 그녀는 뜨개질바늘로 능숙하게 무언가를 완성했다) 통해 어둠이라는 쐐기에서는 가능했다. 개성을 벗어던지자 그녀의 분노와 성급함과 동요가 사라졌고, 그래서 모든 것이 이런 평화, 이런 휴식, 이런 영원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녀의 입가에는 삶을 이겼다는 감탄이 흘러나왔고, 잠시 쉬면서 등대에서 비치는 불빛 중 길게 꾸준히 나오는 불빛의 세 번째인 마지막 불빛을 보기 위해 밖을 내다보았고, 그러면 그 불빛은 바로 그녀의 불빛으로 이런 시간에 이런 분위기에서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면 항상 바라보는 것과 하나가 되는 자기 자신을 느꼈고, 그래서 이런 것, 길게 꾸준히 비치는 불빛은 바로 그녀의 불빛이었다. 종종 그녀는 손에 일감을 든 채 앉아서 바라보고, 앉아서 바라보고, 그래서 그녀가 바라보는 것과 - 예를 들어 등대의 불빛 -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될 때까지 앉아서 바라보고, 앉아서 바라보고를 되풀이 했다. (93 ~ 94쪽) 이 소설에서 '등대'는 일종의 희망의 메타포같은 역할을 하지만, 결국 '등대'로 가는 건 램지 부인이 아니라 살아남은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노처녀 화가 릴리 뿐이다. 이게 무슨 희망일까 싶기도 하지만, 이 차갑고 건조하며 비관적이고 슬픈 전망(결말)로 인해 이 소설은 위대한 걸작이 된다. 올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을 차례대로 읽을 계획인데, 쉽지 않겠다.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 그리고 상당히 고통스러운 독서였다. 가끔 감미롭고 우아한 표현들이 등장하지만, 그건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아름답게 포장된 위선으로 읽혔다. 아리따운 소녀와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한 편의 시로, 소설로 근사하게 포장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짓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왜 아름다운가?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선 결코 등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버지니아 울프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다 라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게 정답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으며, 감동받는다. 자고로 끔찍한 진실이 거짓된 위안보다 나은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