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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인생에는 16세 연하의 소피아 베르스와의 결혼과 50세 즈음에서 찾아 온 가슴 속 ‘회심’이라는 두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이 책은 그를 인생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그 때 씌어졌다. 그는 ‘인생의 길’이란 에세이와 함께 이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특히 그가 쓴 ‘참회록’은 누가 보아도 부러울 만한 그의 인생이 매우 잘못된 삶이었다고 반성하고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공포와 혐오와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는 이 시절을 돌이켜 볼 수 없다. 나는 전쟁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다. 살인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결투도 신청했다. 도박으로 크게 돈을 잃은 적도 있다. 농민들의 노고의 결실을 헛되이 먹고는 그들을 처벌했다. 간음을 했고, 사람을 속이기도 했다. 기만∙절도∙온갖 종류의 간음∙만취∙폭행∙살인 등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악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인생론의 첫 서두는 어느 물레방아를 돌리는 사나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물레방아를 잘 돌리기 위한 생각을 넘어 강의 근본에 대한 사색까지 이른다. “어떤 물레방아일지라도, 물이 없으면 가루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물레방아를 알기 위해서는 물이 어떻게 흐르는가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흐르는 힘과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물레방아를 알려면, 강 그 자체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라고 힐난한다. 그의 목적은 좋은 가루를 생산해 내는 것에 있는 것이지, 목적을 잃고서는 아무리 훌륭하고 논리적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하다라고 꼬집는다. 톨스토이는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이었기에 그 어떤 귀중한 연구라도 목적과 전혀 상관이 없는 주제로 변하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생명을 과학적으로 물리적이고 피상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물레방아 주인의 생각과 같은 것이며, 생명의 본질을 세포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탐구하는 근본을 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죽어서 뼈만 남고 구더기가 들끓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본성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본론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는 죽음을 많이 경험한 삶을 살았다. 형제들의 죽음을 보았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 글을 59살에 적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삶의 회의를 느끼고 그 많은 지식들조차 자신이 찾는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더욱 좌절했던 그는, 자살의 충동을 수없이 느꼈다고 고백한다. 과학은 자신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수많은 대답을 주었지만 생존의 의의를 알려주진 않았고, 수많은 철학자들도 결국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만 발견을 뿐이다. 솔론몬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란 말만 가슴에 맴돌았다. 지식을 더하는 것은 근심만 더하는 것이 되었고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와 쇼펜하우어와 솔로몬과 같은 현인들도 자신과 같은 번민에 시달렸던 것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때 그의 결론은 삶으로부터의 탈각이었다. 그는 공자, 바라문교도, 석가모니, 노자, 유대의 현인,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인생에 대해 정의한 말들을 나열한다. 인생의 목적이 ‘개인의 행복이다’란 말은 허깨비 같은 쾌락의 추구라고 말한다. 그가 추종한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과학과 예술 또한 그들이 인생의 지루함을 덜어 내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행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 자체의 의미를 연구하지 않는 과학이나 사회학은 모두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그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윌 듀란트는 그의 유명한 저서 ‘철학이야기’에서 행복을 고민하는 브라만의 이웃에 사는 갠지스 강의 노파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첫 번 째의 길은 이러한 번민을 느껴보지도 못하는 무지, 무식의 길이다. 그리고 쾌락에 빠져 드는 길과 이에 강력하게 맞서는 방법으로 단숨에 생을 절멸시키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경우에 그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런 고민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나약함의 길이었다. 톨스토이는 서로 개인적 행복을 위해 살아가려 한다면, 치열한 생존경쟁과, 낭비와 포만과 고통으로 인도하는 향락의 기만과, 끊임없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개인의 생존적 행복은 불가능한 것이며, 동물적 개성의 행복 이외에 더욱 뛰어난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마침내 그가 이른 결론은 사랑하는 삶이었다. 그가 말하는 참된 삶은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며, 비록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모순투성이지만 신앙이 있는 삶이야말로 자신이 찾은 해답이라고 결론 짓는다. 어릴 적의 맹목적인 신앙을 부끄럽게 여겨 내팽겨친 적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다시 신앙인의 삶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그는 목숨이 다하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였다. 그것을 반대한 그의 아내는 – 그의 글에는 비록 ‘사랑하는 아내와’라고 하였지만, 그와 아내는 평생 동안 싸웠다고 전해진다 - 세간에 악녀로 비쳐졌다. 그는 가출을 하여 외딴 기차역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인생의 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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