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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의 제목부터 쉽게 다가가기는 힘들었다. 파사주... 무슨 뜻일까 생각하게 한다. 한문을 보아야 그 뜻을 유추할 수 있다. 책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주제는 무엇일지 궁금해지게 한다. <파사주>는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탈출한 두 청소년, 유림과 해수의 이야기다. 8살과 12살부터 그곳에 갇혀 지낸 이들이 17살이 되어 마침내 벽돌집을 탈출하며 시작되는 여정을 통해 순례가 되는 과정을 이야히 한다. 보육원은 겉으로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보호시설이지만, 실상은 군대식 위계질서로 아이들을 통제하는 감옥과 다름없다. '아버지 선생님'으로 불리는 교주가 신도들과 원생들을 지배하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착취가 자행된다. 특히 의심 많고 반항적인 해수는 이런 체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가장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된다. 두 아이의 탈출 여정은 황천길과 명도로 표현되는 상징적 공간들을 거쳐간다.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난다. 해수는 사실 보육원에서 당한 폭력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고, 유림과 함께하는 여행은 애도와 치유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소설을 통해서 드러나는 진실에 있다.... 책의 제목인 파사주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파사주(破四柱)', 즉 주어진 운명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또한 파사주는 사주를 볼 때 쓰는 용어로서 나와 주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운명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이는 소설의 핵심 메시지와 정확히 부합한다. 해수의 "구원이란 누가 해주는 게 아니거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거지"라는 말은 운명론적 체념을 거부하고 자기 결정권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동시에 유림과 해수의 관계는 홀로서는 불가능한 구원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해짐을 보여준다. "둘이 아닌 혼자서는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는 유림의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말하기'와 '침묵'의 대조다. '하나의말씀'이라는 종교 단체명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그곳에서는 오직 교주의 '말씀'만이 허용되고, 아이들은 복창과 침묵만 강요당한다. "하나님은 말을 안 해, 말씀만 하시지"라며 판단을 금지하는 교주의 논리는 사고 자체를 마비시키려는 전형적인 세뇌 기법이다. 반면 해수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한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나?" "너희도 인간으로 살고 싶어?"와 같은 그의 물음들은 체제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한 말들이다. 그리고 이런 '말하기'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시작점이 된다. 소설 속 "이야기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라는 문장이 특히 울림을 준다. 침묵 속에서는 삶도 죽음도 아닌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기억하고, 증언해야만 진정한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다. 이 소설은 종교를 가장한 권력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고, 성폭력을 자행하면서도 종교적 수사로 포장하는 모습은 현실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소문은 호기심과 비겁함, 그리고 적극적인 침묵 속에서 몸집을 불린다" 이런 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방관과 침묵이 폭력의 공범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절망적 현실 고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유림과 해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적 연대의 가능성이다.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기억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관계야말로 가장 강력한 저항의 형태라는 것이다. 해수가 유림과 함께 여행하는 설정은 환상적이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며,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울면서 살 거야"라는 유림의 다짐은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소설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대화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서술, 그리고 복층적 의미를 담은 공간 설정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특히 각 장의 제목들(서, 물, 황천, 길, 명도, 들, 묘지, 뫼, 망산 숲, 신림, 늪, 윤해, 종)이 만들어내는 운율감과 함께 독자들로 하여금 잠시 멈춰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만이 그들의 집이자 길이었다"는 표현처럼, 작가는 관계의 본질을 시적 언어로 풀어낸다. 이런 서정적 문체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힘이 된다.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언제나 침묵을 강요하고,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고, 상처를 증언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치유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주는 것 같다. 구원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스스로'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타인과의 연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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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베이비>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강성봉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파사주>가 출간되었다. 2022년에 <카지노 베이비>를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이번 소설 서평단에 신청했다. <파사주>는 첫 작품에 비해 읽기 쉽지 않았다. 제목의 의미도 그렇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번에 간파해내기 어려웠다. 박해진 문학 평론가의 발문과 작가의 말을 읽어보고 내가 북노트 해놓은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하나의말씀’이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운영하는 보육원 벽돌집 출신의 유림과 해수가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그들이 세상에서 겪는 불합리한 대우와 어떻게든 견뎌내 보려는 둘의 태도, 그 사이사이에 벽돌집의 비리와 아버지 선생님이라 불리는 자의 비리와 추악함이 그려진다. 열일곱에 벽돌집을 탈출한 둘의 상황은 자립청소년의 그것과 유사해보이고, 벽돌집은 형제복지원에 다름 아닌 것 같고, 아버지 선생님은 사이비교주 정명석이 오버랩 되었다. 특히 벽돌집 아이들의 얼굴이 비슷비슷 닮아있다는 서술에 이르러서는 오싹해지더니 개공장의 뜬창이 떠올랐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와 독자가 가닿은 지점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며,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독자의 해석과 감상이 매우 제각각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가 제목으로 정한 파사주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고 박혜진 평론가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파사주는 한자로 사주를 깨트린다는 뜻으로, 나의 궤적과 타인의 궤적이 섞여들며 구축되는 삶의 유동성과 복잡성, 이른바 관계성을 함의한다. 인간의 삶이란 타인들과의 연결, 즉 통로(파사주)를 통해 무한히 변화하는 가능성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보육원에서 나온 두 아이의 여로를 통해 세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읽었다. 보육원이나 사이비 종교 단체가 일삼는 착취가 특정 대상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유림과 해수가 사회에 나와 겪는 일들은 어른들의 부조리한 행동이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는 모양새다.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아이들이나 약자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유림과 해수가 당한 일들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싶다. 과연 착취가 아니고 보호를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이 맞긴 한가 p.251 아무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으니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혀 밑에 죄책감을 숨기고, 그 말이 병처럼 번질까 두려운 듯 어떤 문장을 발음하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처참하게 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고 세뇌당하는 위 서술에서 나는 몸서리쳤다. 아버지 선생님의 행동에 신도들이 눈 감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지만 현실로 가져오면 뭐 그리 다른가? 우리가 눈 감고 귀 막으면 잘못은 계속 되풀이 된다는 것으로 읽혔다. 우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잘못된 것들이 나와 직접적 상관이 없다며 외면하면 안 된다. 제목 파사주로 이어졌다. 타인과의 관계성을 기억하라고!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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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면 그 반대의 것이 온다는 것. 희망을 원하면 절망이 찾아오고 부를 원하면 가난이 닥쳐올지어다. 사랑을 갈구하면 할수록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지어다. 아이들 앞에 선 아버지 선생님은 영적 의지의 시험대였다. 218" '파사주'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모르겠다,였다. 그 뒤를 가장 자주 쫓아나온 것은 만약 내가 종교가 있었다면,과 이 둘은 정말 길을 떠나고 있는 게 맞나,였다.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듬더듬 읽어나가다보니 최근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읽은 책이 되었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는 감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말을 부풀려서 표현하자면 '파사주'만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낼까 궁금해지는 책은 또 없을 것이다. 하나의말씀 '신의 군대(61)'. 무려 일곱곳이나 된다는 벽돌집의 조직적인 체계와 사회 여러 계층의 비리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하나원의 모습은 단순한 사이비같은 종교시설을 넘어 군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종교시설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있고 거기서 사람들은 계약서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접대한다. 해수와 유림의 불분명한 시선과 대화로 그 안에서 벌어지던 불온이 언뜻 들춰지다 감춰진다. 그 둘의 존재마저도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순간 그들의 증언도 함께 점멸한다. 정말 뒤뜰을 지켜보다 보면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지, 계단 아래에 있는 것은 연구소인지 수련당인지 혹은 감옥인지(230) 보고도 알 수 없고, 알아도 말할 수 없고, 알려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더욱더 생생해지는 것은 " 사람 하나 죽고 사는 게 말씀과 관련 있어, 없어? 사람 하나 다치고 상하는 게 말씀과 관련 있어, 없어? " 을러대던 소리였다. 가인과 아벨(17) (81)*'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은 자신의 첫 수확 농작물을 아벨은 자신의 가축 중 가장 처음 난 새끼를 제물로 바쳤다. 자신의 것이 아닌 아벨의 제물만 반겨하자 이를 시기한 카인은 아벨을 불러내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로인해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땅에서 버려져 유랑하며 살게 된다. [창세기 4:1-16]' 가인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해서 명확한 비유와 설명이 나오는데도 해수가 당당히 스스로를 가인이라고 부르는 통에 카인으로 대표되는 '악, 폭력, 탐욕'같은 키워드들이 흐려졌다. 해수가 가인이라면 대체 아이들을 착취하고, 서로를 감시하고 때리며 학대하고, 비리와 향락에 취한 벽돌집 안의 사람들은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숨겨진 의미가 더 있을지도 몰라 의심하며 읽었다. 역할은 누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뒤바뀌는 것이었다. 가인의 불신과 유랑은 해수와 유림으로 인해 긍정으로 바뀐다. 길을 떠나는 아이들 어디선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흘러들고, 자라나던 아이들이 소리없이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소리를 내려고, 모두가 아벨인 그 공간 안에서 스스로 가인의 이름을 가져온 아이들은 유랑 길에 오른다. 길과 벽돌집이, 과거와 현재가 어지러이 뒤섞이는 동안 그 안에서 믿음도 합쳐지고(122), 생존자(166)는 착취자가 되었다. 아이들의 여정이 현실감없는 환상처럼 보여져 산 자의 탈출인지 이미 죽은 자의 황천길을 따르는 것인지 헷갈렸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방향도 불분명한 길 위에서 해수와 유림은 못마땅히 건네진 사과를 받아든다.(21) 아마 이들은 더이상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과실을 먹어보라는 유혹 없이 오히려 마땅치 않다는 듯한 태도로 건네진 것이 아니었을까. 파사주 게임(200)이자 통로 그리고 궁합. 파사주라는 단어를 두고 사실 대형 쇼핑몰 같은 공간을 먼저 떠올렸다. 가장 일상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 때문에 '파사주'의 내용을 좀 더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배경일 것이라 잘못 짐작했었다. 책에서는 이를 두고 게임으로 풀어냈지만 나중에 읽어보니 사주팔자를 깨뜨린다는 뜻의 破四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운명을 풀어보는 궁합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인 유림과 물인 해수가 만나 함께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해 생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관계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제목이었다. 읽기 전보다 읽고 난 뒤에 훨씬 제목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 " - 우리 지-지금 어디로 가? 유림이 물었지만 해수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뒤를 돌아봐도 앞쪽과 똑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고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림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건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이 보일 터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걷다 보면 환한 빛을 마주하리라는 작은 희망이 유림의 발걸음을 앞으로 이끌었다. 171" 어둡고 질척이는 통로를 헤매는 것 같은 소설이었지만 그 안에 희망이 있어 그 희미한 것을 붙들고 같이 헤매며 읽어 내려간 기분이었다. 이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독자라면 아마 좀 더 수월하게 읽고 많은 것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을 여는 소설로 사람 사이의 관계과 운명을, 세상의 굴레와 저항을 음미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게시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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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1기 남녀 뿐만 아니라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부모와 형제, 스승과 제자, 친구와 적까지 인간 대 인간의 모든 관계를 망라하는 것. 나와 주변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운명을 함께 살펴보는 것. Passage. 길. 파사주는 주어진 운명을 깨뜨린다는 동시에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앞표지와 뒷표지를 잇는 책등을 살펴보면 영어로 Passage라고 써져 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파사주에는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인과 아벨] 등장인물인 유림과 해수. 이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낸다. 벽돌집은 그들이 살던 곳이자 어른들의 이기심이 가득한 공간이다. 아버지 선생님, 그를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가스라이팅. 그 사이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형제 카인과 아벨이 틀림 없었다. 카인은 농부, 아벨은 목동이었다는 점이 가인과 아벨의 모티브가 된 존재가 카인과 아벨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벨은 하나님을 위해 양을 길렀고, 가인은 자신을 위해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지. (중략) 그게 바로 에고란 거다. 아벨은 온전히 자신을 희생했지만 ,가인은 희생하는 척만 했다는 는거지. 그래서 아벨은 죽었지만 영원히 살수 있었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 <파사주> 84p 中 파사주를 읽는 내내 거슬렸던 표현이 있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표현. 이 표현을 사용하는 어른인 아버지 선생님은 아이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말이 법이라는 듯,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곤 했다. 그리고 이가 실현되는 공간이 바로 벽돌집이었다. 해수가 죽은, 유림이가 탈출했던 그곳, 벽돌집. [벽돌집] 벽돌집은 해수와 유림에게 어떠한 곳이었을까. 어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곳. 어른의 생각대로 살아야만 하는 곳.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순간 생각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무너지는 곳. 아이들에게 벽돌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본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 자유가 억압된 공간.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통상적인 것, (이곳에서는 아버지 선생님의 생각)만을 따라야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림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볼 수 있는 구절이 책 곳곳에 등장했다. 예를 들자면, 믿음이 오히려 함정이 되었다. <파사주> 109p 中 어릴 적 유림은 돌 밑에 묻어두곤 했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 기억해서 안 되는 것들을. (중략) 악어뿐만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한숨과 찌푸린 표정 또한 돌 밑에 묻어두었다. 비웃음도, 낮춰 보는 시선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나 (생략) <파사주> 150p 中 저건 꽃이 아니라 뱀이에요. 바람에 흔들리는 뱀 대가리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하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 때문이 아니라 그 손가락질하는 행위 자체에서 죄책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움텄다. 마음속에 똬리를 튼 자신을 향한 혐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들. <파사주> 232p 中 이러한 문장들을 보면 벽돌집에서 살던 사람들의, 유림의 정신세계가 매우 무너졌음을 볼 수 있었다.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유림이 해수에게 과하게 기대게 된 계기도 이러한 것 아닐까. 괴리감을 계속해서 느끼면서도 유림이 벽돌집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속에 피어나는 작은 의구심을 해수가 계속 간지럽혔기 때문 아닐까. 이 책의 특이한 점은 목차다. 물, 황천 길, 명도 들, 묘지 뫼, 망산 숲, 신림 늪, 윤해 목차를 펴자마자 이렇게 작성된 목차를 보며 "대체 왜 이렇게 표시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에 대한 궁금증을 작중에 등장하는 굴댕이가 해결해주었다.파사주라는 게임을 언급하며 말이다. 또한 소제목이 적힌 페이지가 검은 이유도 다 이 게임에서 밝혀지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파사주>를 읽다보면 과거와 현재 사이의, 현실과 책 속의 장면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 선생님의 말에 휘말리기도 하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해수의 말.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해수의 말이 있다. 해수의 말을 보다보면 유림이 벽돌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듯, 책 속의 세상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 책 속에서 나오는 해수의 말은 현실의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처음 와봤잖아. 길을 안 잃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파사주> 87p 中 벽돌집으로부터의 탈출이 두려웠던 유림에게, 시도가 두려운 나에게 하는 듯한 이 말이. 네가 왜 질문을 못 하는지 알아? (중략) 그건 네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서야. 답 속에 갇혀서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파사주> 77p 中 질문을 던질 때마다 갈림길이 사라지지만 질문을 섣불리 못하는 유림에게,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하는 듯한 이 말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표현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파사주>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를 글에 담아 낸 이 부분이라고 말할 것 같다. 운명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걸 깨고 나아가야 진짜 네 길인거지. <파사주> 24p 中 주어진 운명을 깨뜨린다는 제목을 관통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오늘부터, 나는 운명을 깨고 나아갈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유림처럼 말이다. 벽은 언제든지 문이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문을 통로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을 뿐. * 본 리뷰는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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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집을 빠져나온 두 아이는 가까스로 생존한다. 탈출 후에도 회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 벽돌집이 결코 한 곳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절망은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걸어간다. 탈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주어진 운명을 넘어 자신들만의 삶을 개척하는 여정은 이제 막 열리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벽돌집은 겉으로는 보육원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은폐된 공간이다. ‘아버지 선생님’이라 불리는 교주는 아이들에게 죄를 고백하게 만들고, 회개와 용서를 반복시키며 지배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두려움과 굴종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반항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정답은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의 제목과도 맞닿아 있었다. 바로 '파사주'라는 단어다. 이 뜻은 주어진 운명을 깨뜨린다는 듯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운명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의미로 소설 전체 서사를 꿰뚫는다. 이 슬픈 사연과 가혹한 운명에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떻게 더 희망을 품으라는 것인지, 그 허무맹랑한 믿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고 숨겨진 이야기가 밝혀질수록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소설에서 가장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부분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기관의 모습에서였다. 선함을 표방하지만, 이들을 단순히 ‘이용 가치’로만 취급하며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드러낸다. 벽돌집에서 아이들은 교리와 규율에 따라 존재가 아니라 도구로 살아간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아이들은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고통에 짓눌리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선택하고, 서로의 눈빛을 통해 버틸 힘을 찾는다. 그 과정은 경험하지 못한 세상과 마주하는 일이자,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발걸음이 된다. 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는가?”라는 물음에 답해줄 이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 답은 아이들 스스로 찾아야 하며, 고통을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려야 한다. 만약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면, 그들의 얼굴은 어떤 표정으로 바뀌게 될까. 존재 이유를 묻는 말의 답은 뚜렷하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에 왠지 울컥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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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없이 사람이 될 수 있어, 없어. 바깥은 지옥이고 여기만이 살 길이야, 아니야. 내 말이 옳아, 틀려. 네까짓 것 죽어봤자 누가 알기나 해, 아니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순종을 해야겠어, 말아야겠어. 대답해. 죄가 있으라 하니 죄인이 되었다. 벽돌집 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도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신 위의 신, 세상 너머의 세상. 아버지선생님에 그저 순종하는 머리통에 믿습니다 울부짖는 그 입만 있으면 족했다. 알지도 못하는 약을 한주먹씩 삼키고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든, 벽에 머리를 처박든,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지든. 거 봐. 네가 말씀 없이 살 수 있어, 없어. p.18 해수는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벽돌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럼 인간이 아니고 뭐냐 되물으면 해수가 답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가인이야. 허락할 가, 사람 인, 인간임을 허락받아야 하는 존재. p.46 벽돌집 아이들은 자책하고 회개하고, 자책하고 회개하기를 되풀이하며 수렁으로 한 발씩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의 약한 마음을 움켜잡는 회개의 의식은 벽돌집이 돌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믿음이 있으니 아무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곳, 타락한 세상에 맞서 사람이 될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 아버지선생님 말씀만 따르며 눈 감고 입 막으면 족한 곳. 두려워할 것은 오직 말씀 뿐이니. 네까짓 게 사람이야, 아니야.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서도 죽어야겠어, 아니겠어. 벽돌집, 말씀의 성전,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다. 있으되 보이지 않았다. 만찬 앞의 굶주림으로, 밀실로 불려가는 앳된 얼굴로, 난장판의 용역꾼으로, 환호도 승리도 없이 얻어맞는 사람만 있는 '공놀이'의 밤으로, 비명과 울음을 구분할 수 없는 회개의 낙원으로. p.140 그 기도문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온몸을 흔드는 떨림만이 있었고, 그것은 아버지 선생님이 베푸신 은혜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우리는 여기 있다! 그 강렬한 감정에 아이들은 먹혀버렸다. p.153 그날 벽돌집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벽돌집 너머에 진을 치고 있지도 않았고, 텔레비전에는 벽돌집에 대한 뉴스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 아이들이 아이들을 고발하고,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렸다.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리고 또 때렸다. 참지 못한 아이들이 울음과 회개를 토해냈다. 그런 때 유림과 해수는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수의 죽음은 사유 없는 순종의 결실이자 인간성의 죽음이다. 그런 이유로, 뒤섞이는 기억, 갈라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해수와 유림의 여정은 나와 타자, 내가 버린 선택의 결과를, 뒤늦은 애도를 마주하기 위한 여정이다. 연약하고 투명했던, 어리고 작았던 너를 기억해.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아. 우리는 이미 죽었어. 태어났을 때, 사람이기를 허락받아야 했을 때. '말씀'에 순종할 때마다, 사람이기를 포기할 때마다. 너희도 죽었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을 때, 고통에 눈감았을 때, 그 애들이 홀로 죽어버리는 걸 외면했을 때. 우리는 모두 죽었어. 죽고도 죽은 줄을 모를 때마다, 죽기도 전에 죽었어. 내 얼굴을 봐. 똑바로, 끝까지, 제대로 봐. 혼자 죽게 하지 마.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믿지 마. p.249 -너희도 다 알잖아.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누가 우리 아버지인지. 그걸… 그걸 인정하면…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린, 그냥 계속 속이고 사는 거야! (...) 인간으로 살고 싶어? 그럼 내 얼굴을 봐! 똑바로! 끝까지... 제대로 봐! p.252 그 순간, 유림이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단 하나였다. 해수가 또다시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 고통 속에 해수를 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것. 가인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였고, 해수는 그런 가인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림은 이제 알았다. 자신이 말씀의 가인이 아니라, 해수의 가인이라는 것을. 긴 애도의 끝은 마침내 물음에 도달한다. 상처입은 세계, 부서진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긴 어둠을 지나 마주한 빛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부어터진 발, 눈물로 얼룩진 얼굴, 넘을 수 없는 벽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은, 끝내 파, 부수고 뛰쳐나가는 힘은 무엇에 있는가. 그 이름을, 오직, 연약함이라 말하고 싶다. 작고 어리고 연약한 것이 몸부림칠 때, 함께 울고 길을 잃고, 그곳에 네가 있었음을 기억할 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때,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것이 선택이라면, 어둠의 끝은 빛이니. 구원은 작고 약한 품에 있다고, 깊숙이 파고드는 너의 뼈를 힘껏 끌어안는 바로 그에 있다고. p.254 그 순간, 신은 콘크리트 성전이 아니라 숲 안에 있었다. 십자가와 제단이 아니라 나무뿌리에, 가지 안에, 작은 잎사귀 안에 있었다. p.280 스스로를 너무도 세게 끌어안은 나머지 팔과 어깨가 몸속으로 파고든 것만 같았다. 해수가 이토록 연약한 뼈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슬픔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 잃어버린 시간들이 산기슭 너머에서 이곳으로, 죽기 전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향해 고요히 행진해 오고 있었다. 유림은 손을 뻗어, 제 몸 깊숙이 파고든 해수의 두 날개를 꼭 붙들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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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破四柱) : 사주를 깨트린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사주를 깨트린다는 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 개척해 간다는 것일까. 두 소년이 그려진 표지와 제목은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을 일깨운다. 소설 『카지노 베이비』로 제2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두 아이의 성장 소설을 새롭게 선보였다. 한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던 보육원에서 나온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기대보다 힘들고 거칠었다. 주인공인 유림과 해수는 '하나의말씀'이라는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벽돌집에서 자란다. 일명 벽돌집이라 불리는 이곳은 보통의 보육원과는 달리 신앙을 강제하고 권위적이며 강압적인 공간이다. 두 아이는 17세가 되자 벽돌집을 탈출하게 된다. 순응적이며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유림과 반항적이며 의심이 많은 해수는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깨뜨리고 숲과 산, 그리고 바다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이어간다. 그 모습은 마치 순례길을 떠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과 자기 인식이 동반되는 성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소설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예상치 못한 진실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닌지, 두 소년의 대화에서 어긋났던 부분은 없었는지 찾아보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우울하다. 작가는 종교 단체의 권력과 통제라는 배경하에 아동 복지 제도의 씁쓸한 이면을 드러낸다.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한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가 걱정되는 건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의문이다. 유림이 해수의 두 날개를 꼭 붙들어 매는 순간을 구원받았다 여길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소설이다. #파사주 #도서리뷰 #서평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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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걸 깨고 나아가야 진짜 네 길인 거지. 한번 쓰러진 나무가 다시 서긴 어려운 법이지만, 너는 물을 끌어올 방법을 알고 있다.” 벽돌집이라는 그들만의 왕국. 그곳은 아이들의 보호처가 아닌 잔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간이었어요...사이비 집단에서 해방되고 싶은 해수와 유림의 기억은 소외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른은 곧 선생이었고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으며, 세뇌된 아이들은 그저 받아들이는 게 다 였어요. “식당에 놓고 온 우산처럼 잊어버리고 다시 찾으러 오지 않았다. 벽돌집 아이들은 자신을 버린 엄마 아빠가 없는 고아로 여기며 자랐다. 하나의말씀에 따르자면 육신으로 낳은 자식은 가인이었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야 아벨이 될 수 있었다.” 읽다 보니 아직 어린 아이들이 겪기엔 너무 벅찬 순간들이 계속 나와서 마음이 무거웠음... 세상이 다 밝고 따뜻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꺾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힘을 믿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해수야, 죽은 사람은 다-다시 살아, 살아, 살아, 돌아올 수 없어.” 진짜 화나고 슬프고 내가 다 억울하고 그러네... #도서제공 #파사주 #강성봉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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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봉 작가의 책은 처음 읽습니다. 『카지노 베이비』라는 소설로 제2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파사주』는 그의 두 번째 장편 소설입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무슨 뜻일까? 책의 표지와 책등에는 '파사주(破四柱)'라는 한자와 함께 영문 'Passage'가 병기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발문과 강성봉 소설가의 작가의 말을 읽으며, '파사주(破四柱)'는 말 그대로 사주, 즉 주어진 운명을 깨뜨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궤적과 타인의 궤적이 섞여들며 구축되는 삶의 유동성과 복잡성, 이른바 관계성을 함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녀의 관계를 가늠하는 전통적인 개념인 '궁합(宮合)'과는 달리, 남녀뿐 아니라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부모와 형제, 스승과 제자, 친구와 적까지 인간 대 인간의 모든 관계를 망라함으로써, 나의 사주만으로 운명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주변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그 운명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죠. 한편 '파사주(Passage)'는 프랑스어에서 '통로', '통행', '길' 등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는 19세기 파리에서 유행했던 지붕 덮인 실내 쇼핑 아케이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요. 오늘날에는 '인생의 길'이나 '행로'와 같은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며, '지붕이 덮인 통로'라는 원의에서 파생되어 건물을 통과하는 길이나 공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변화하는 것이 운명(破四柱)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삶이란 타인들과의 연결, 즉 통로(Passage)를 통해 무한히 변화하는 가능성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니 두 파사주는 분명 그 뜻이 서로 닿아있는 듯합니다. 책장을 덮으며, 개인적으로 쉬운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머리말 격의 '서序'로 시작해 여섯 장을 거쳐 맺음말 격의 '종終'으로 끝납니다. 여섯 장의 제목들 또한 아래처럼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어요. '물, 황천黃泉', '길, 명도冥途', '들, 묘지墓地', '묘, 망산邙山', '숲, 신림神林', '늪, 윤해輪海' 책은 '하나의말씀'이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음울한 보육원 중 하나인 '벽돌집'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자란 '유림'과 '해수'는 불행으로 가득 찬 과거를 뒤로하고 험난한 세상 속으로 함께 탈출을 감행하는데요. 아무런 계획도, 돌아갈 곳도 없이 '벽돌집'을 탈출한 두 아이의 여정은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를 보는 듯 신비롭고 때로는 위태롭게 펼쳐집니다. 한편, '벽돌집'에 대한 설명과 묘사를 읽으며, 넷플릭스 시리즈 〈나는 생존자다〉에서 다루어진 '형제복지원'이 계속 떠올랐어요. ![]()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에서 운영된 강제 수용소인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교화 시설이라는 명분 아래 3천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강제로 감금하고 강제노역, 폭행·살인 등을 저질렀다고 해요. 국가 권력이 나서서 국민의 아이들을 유괴한 것이죠. 작가는 '하나의말씀'의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 선생님'을 비롯해 '벽돌집 원장'까지,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어른들의 위선과 잔인함을 날카롭게 그려내는 동시에, 그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좇습니다. 책에는 성경 속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자주 등장해요(이 책에서 '카인'은 '가인'으로 바뀌어 명명됩니다). 마침 얼마 전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정여울 작가의 『데미안 프로젝트』를 읽으며, '카인과 아벨'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등장해 반가웠어요. 물론, 카인과 아벨에 대해 묘사된 내용은 무척 다릅니다. 데미안은 '카인'의 긍정적인 면도 봤다면, 벽돌집에서는 '가인'을 악으로, '아벨'은 선으로 가르칩니다.
한편, 해수는 마치 데미안처럼, 벽돌집에서 배우는 가인을 전혀 다르게 정의합니다. 벽돌집의 가인이 말씀과 분리되어 에고에 갇힌 인간이었다면, 해수의 가인은 프로젝트 연구소인 '벽돌집'의 메뉴얼에 따라 만들어진 복제 인간이었어요. 벽돌집의 위선과 만행을 견디지 못한 해수는 유림과 함께 벽돌집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소설 각 장의 제목이기도 한 황천, 명도, 묘지… 등의 공간들을 거쳐 가죠.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충격적인 사실이 등장하는데, 사실 해수는 이미 벽돌집에서 당한 폭력으로 죽었습니다. 즉, 같이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은 모두 유림의 상상 속에 등장한 해수였던 거예요. 이 사실이 밝혀진 뒤, 소설 후반부에 유림이 던지는 질문이 더욱 처절하게 느껴집니다. 죽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할 수 있어? 앞에서 말했듯, 이 책의 제목인 '파사주'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어요. 첫째는 주어진 운명(사주)을 깨뜨린다는 뜻의 '파사주(破四柱)'입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여겨졌던 벽돌집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유림과 해수의 모습을 상징하죠.
소설의 발문을 쓴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아이들은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현실의 벽을 문으로 삼아 나아갑니다. 소설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Passage)'을 뭉클하게 그려냅니다. 저는 이를 파사주의 두 번째 의미로 보았어요.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두 아이의 긴 여정이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지, 그 과정과 끝을 책에서 직접 확인하며, 우리 각자의 '파사주'는 무엇일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합니다. 🖤 *이 후기는 하니포터 11기로서 한겨레출판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솔직히 적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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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제27회 한겨레 문학상을 받은 작가 강성봉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파사주>라는 제목을 보았을 땐 어떤 내용의 책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파사주는 한자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해석이 가능하다. 사주를 깨뜨린다는 뜻의 破四柱, 길이라는 뜻에서 passage. 둘은 의미는 다르지만 난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주를 깨뜨리기 위해선 길을 나서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유림과 해수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런 점에서 제목이 적절하고, 인상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림과 해수가 지냈던 보육원, 보육원을 가장한 사이비 집단의 민낯을 보고 있으려니 답답하고 열이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버지 선생님이라는 자 앞에서 물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다. 아버지 선생님은 본인을 구원자라고 칭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진정한 구원자는 유일하게 목소리를 낸 해수이다. 해수는 유림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 둘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깨우치게 만든 사람과 깨어난 사람. 해수와 유림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난 이 둘의 관계에 저절로 몰입하게 되었다. 둘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마치 내가 두 주인공이 된 거처럼 마음이 아팠다. 결말부에 다다라서는 먹먹한 감정도 느껴졌다. 210쪽 "- 여기로 가. 말로는 아무리 설명해봤자 모를 거야. 네 질문의 답은 직접 깨닫는 수밖에 없어. - 어 - 어떻게 가 - 가는데? - 올라가야지, 저 위로!"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설에서 전하는 바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직접 깨닫는 것. 스스로 길을 나서는 것. 완전한 해피엔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유림이가 성장하는 모습이 잘 드러났기에 충분히 의미 있는 결말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유림이는 누군가의 해수가 되어 계속해서 길을 나아갈 것이라 믿는다. 나 역시 세상 모든 유림과 해수를 응원할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