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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그리고 노론 그들만의 나라..
"송시열, 그리고 노론 그들만의 나라.." 내용보기
송시열, 우리는 교과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배웠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의 삼전도 치욕을 설욕하고자, 효종때 당시 조선에 팽배해 있던 북벌론의 대표이며, 조선 중기 성리학을 발전시킨 대유학자로 말이다. 그런 한편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그는 당쟁의 한가운데서 비켜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조선왕조실록에 왕족이 아니면서도 3000번 이상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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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우리는 교과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배웠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의 삼전도 치욕을 설욕하고자, 효종때 당시 조선에 팽배해 있던 북벌론의 대표이며, 조선 중기 성리학을 발전시킨 대유학자로 말이다. 그런 한편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그는 당쟁의 한가운데서 비켜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조선왕조실록에 왕족이 아니면서도 3000번 이상 언급되었을까?

 

우암 송시열, 그가 세상을 떠난지 300년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역사에 남아 있는 하나의 신화라고 한다. 한국사 최대의 금기라는 송시열, 당쟁의 와중에서 사사된 그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은 인위적으로 거부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세월 동안 그는 성인과 악마 사이를 넘나들며 평가 받았지만, 문제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했던 당파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당이었고, 그의 후예들은 지금도 이 땅의 기득권층이라는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비록 83세의 나이에 노론의 수괴라는 이유로 사사 당했지만, 그의 사사 이후 노론이 재집권함에 따라 그는 성현으로 추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반대당파나 모든 사대부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닌 오직 노론만의 정치행위 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 속의 인물을 재평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 인물이 이전까지 위인으로 평가되어 왔다면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만 신화라는 가면 속에 숨겨져 있는 허구를 파헤쳐 오늘의 교훈으로 삼을수 있다면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한다. 주자, 공자, 맹자와 함께 성현으로 추앙되어 송자라 칭해졌던 송시열, 우리는 그에게서 이 땅의 수구집단의 뿌리깊은 역사를 알수 있다면 오산일까?

 

선조 40, 서기 1607년에 태어난 송시열은 어려서 부친에게 교육을 받는다. 그의 부친은 서인이었던 율곡과 조광조와 김시습을 추구해야 할 전범(典範)으로 삼아 그에게 교육 시킨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교육받은 송시열이 율곡의 학통을 이었다는 김장생과 김집으로 이어지는 학풍 속에서,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것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일인지도 모른다. 율곡 사상의 진수인 내적 정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껍데기 학맥을 이은 예학은, 한마디로 신분에 따른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으로, 사대부는 영원한 지배계급이고 농민은 영원한 피지배계급이라는 수구사상에 다름 아니었다.

 

당파적 이익에 사로잡힌 서인들이 벌인 인조반정은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정묘호란후 9년여 세월을 허송한 인조와 서인세력에게 병자호란의 치욕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출사길에 오른 송시열은 북벌을 주장하면서 시종일관 주희를 칭송하기에 바쁘다. 주희의 사상을 빌어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론이 그것이다. 주희와 송시열은 수천년의 시간과, 수천리의 거리가 있었음에도 기본사상은 똑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희는 남송이라는 자기중심적 사상이었으나, 송시열에게는 이미 망한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중심적 사상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병자호란시 우리가 당한 치욕보다도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더 슬프다고 구구절절이 말하는 그는 북벌론을 내세우면서도 군사적인 북벌은 반대하고, 방해하는 소위 입으로만 북벌을 떠벌린다. 나라는 임금 것이 아니라 천하의 것이라 주장하는 송시열에게 천하란 사대부를 뜻했다. 송시열의 관심은 주자가 주인이 되는 주자의 나라, 바로 그들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들은듯한 모습이 아닌가? 입으로는 나라를, 국민을 목 터져라 외치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면 국가고, 국민이고 안중에도 없는 이 땅의 수구 사대주의자들의 뿌리가 이렇게 깊었는지를 새삼 알려주는 것 같다.

 

조선시대 3대 세법중 하나인 공납은 임금에게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이다. 족징, 인징으로 이미 그 폐해가 극에 달한 공납을 대신하기 위하여 대동법이 도입된다. 송시열은 방납의 폐단을 들어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이를 법제화 하려 하자 기를 쓰고 반대한다. 국가와 백성의 이익은 간곳없이 당파와 학연의 이익을 내세워 반대하는 그에게, 효종의 북벌추진에 대한 반대이유로 들었던 민생우선은 어디로 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도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과 너무나도 똑 같은 논리에 역사는 반복된다는 단순한 명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조선중기 현종때, 당쟁의 예로 예송논쟁을 들고 있다. 효종사후 계모 자의대비의 상복착용기간으로 촉발된 것이 1차 예송논쟁이고, 효종비 즉 현종의 어머니 사후 자의대비의 상복착용기간에 대한 논쟁이 2차 예송논쟁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사람이 상복을 입는 기간이 문제가 된 이 논쟁은 신분제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에 위기감을 느낀 사대부들이 수구적인 예론으로 지배질서를 유지하려는 수단에 다름 아니었고, 그 중심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예론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고,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정쟁의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실은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대립이라는 측면,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시각 차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군왕중심의 나라에서 그들은 군왕이 주인이 아닌 자신들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좋으련만, 그들의 안중에 백성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당파의 이익, 학연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숙종 때 인현왕후를 폐하려는 임금의 뜻이 송시열을 사사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그가 뿌려놓은 당쟁과 그리고 당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폐단은 극복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그 역사를 현재에 대한 거울로 삼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송시열 그가 경신환국후 정치보복을 끊을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정적들을 가혹하게 죽인 것이나, 국가나 백성의 이익보다는 자신이 속한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우선시한 것에서, 오늘이 잉태되었다고 한다면 터무니 없는 생각일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소현세자의 개방성과 합리성이 조선 중기를 다스렸다면,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k*****1 2011.02.09. 신고 공감 13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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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를 억압하던 시대의 산물이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정신세계를 억압하던 시대의 산물이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내용보기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것은 1990년대초였다. 지금은 땅과 친화적인 주거형태로 눈을 돌리는 추세이지만 당시만해도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이 로망으로 다가왔던 시기였다. 그나마 엄마의 성실함으로 마련한 아파트이기에 우리 자매들은 아주 기대가 되었다. 대학 졸업후에야 내 방의 개념을 가질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막상 이사를 하고 아파트 거실에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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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것은 1990년대초였다. 지금은 땅과 친화적인 주거형태로 눈을 돌리는 추세이지만 당시만해도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이 로망으로 다가왔던 시기였다. 그나마 엄마의 성실함으로 마련한 아파트이기에 우리 자매들은 아주 기대가 되었다. 대학 졸업후에야 내 방의 개념을 가질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막상 이사를 하고 아파트 거실에 첫발을 들여놓은 순간 거실밖 남모르는 무덤의 진상을 알고는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거실 바로 보이는 곳에 산이 있고 그 앞에 떠억 잘 꾸며진 묘와 호화로운 비석이 거실밖 조망이었다. 이를 어째하며 이 사실을 알고도 방치하신 아버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하며 그러저럭 살기로 했다. 음산한 분위기도 아니고 꽤 있는 집안 묘같았다. 알고보니 조선후기 노론 송씨가문의 후손되는 누구의 묘란다.

지금은 이장을 해서 그 이전의 묘자리는 찾아볼 수 없는 울창한 나무숲이 되었지만 송씨라는 말에 우암 송시열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했다. 역사학습이 수업시간표에만 국한되어 다양한 레퍼런스북이나 역사서에 눈돌릴 여력이 없던 경직된 학습기간을 떠나보내고 요즘에는 잘 구성된 역사서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어서 철들어 과거사에 눈뜨는 것 같아 다급하지만 차분하게 읽어본 책이 저자 이 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였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말 격변의 시기, 중세를 물리치고 근대로 발길을 돌려야 할 그 시점에 조선의 중심에는 송시열과 그가 부르짖었던 한물간 사상인 주자학이 버티고 있었다. 주자가 주자학을 만든 것은 남송에서 수전농업의 발달로 성장한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사대부 세력유지와 이익 추구를 위한 명분이 충분했던 한 시대 사상이 송시열 활동시기에는  그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세력 유지를 위한 마땅한 컨텐츠를 주자에만 국한하는 편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받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신분제 철폐를 외치는 민심의 방향을 돌리는 수법으로 예학을 받드는 수구세력의 원조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국가의 에너지를 예송논쟁에만 몰입시키는 위력을 보여준다. 왕가는 제1의 사대부에 지나지 않으며 사대부와 동격이라는 정신세계로 신분해방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양반중심의 중세 유학에서 양인과 일반 백성중심의 근세 유학으로 넘어가는 터닝포인트가 절실했던 그 시기에 맹목적인 아집과 추잡한 당쟁의 소용돌이는 계속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중용강의를 시청했던터라 유학의 본모습과 송시열이 대접받던 시기의 주자학이란 얼마나 편협되고 왜곡되었는지 골치아파하며 양쪽을 오가기도 했다. 서인, 노론세력의 이익을 위한 본관이 다른 동성간 혼인을 금지한 예는 송시열이 주창한 철저한 노론의 예론이며 이에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억압당해야 했다. 효종의 북벌론을 입으로만 찬양한 우암의 모습은 졸렬하기 그지없다. 탁상공론이란 말이 이처럼 적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왕이 수신해야만 치국평천하할 수 있다는 명분도 어찌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해석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신하가 따르지 않는 것을 왕 자신의 근본적 원인으로 돌리며 대의를 버리고 계급의 사사로운 이익만 따지는 당론정치의 극악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왕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당이 누릴 권세는 영원무구한 미래가 아닌가.

 

숙종때 남인세력이 득세하고  희빈 장씨 소생 세자 책봉건으로 죽음을 맞이한 우암이 사사된 지 5년후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을 맞이하며 집권했던 남인세력은 무너지고 노론이 재집권을 시작하는데 이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일당체제로 지속된다. 무덤에 갇힌 송시열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영조 31년(1755)에는 유학자 최대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기까지 조선에는 진정한 그 무엇도 없었음을, 구태의연한 정신체계가 조선이란 사회를 갉아먹고 있었음을 가슴아파하며 읽어야 했다. 외세에 굴욕적으로 고개숙이고 다시는 그런 전적을 밟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사대주의에 목매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함이 없어보여서 정말 걱정되는 시대이다. 봉림대군이 아니라 청이라는 나라의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컨텐츠를 배우려했던 소현세자가 자리를 이었더라면 세상은 또 어떠했을까. 발전할 수 없는 상상도 금물이다. 누가 그 자리에 앉더라도 권력의 흐름이 알량한 한 세력의 중심에 있는 한, 집중되는 정신의 에너지가 흐름을 방해하고 억압되는 한 그 시대는 진정으로 후퇴할 것이다.

 



b*******e 2011.11.21. 신고 공감 10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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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후회하지 않은 책, 조선의 당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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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뭐 조선 시대 어디메쯤 살단 간 양반이겠지, 시큰둥하게 넘어갈려다가도 '당쟁의 대가'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현대의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없다. 아, 정치의 신! 거침없이 정적을 물어뜯고 물 흐르듯 처신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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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뭐 조선 시대 어디메쯤 살단 간 양반이겠지, 시큰둥하게 넘어갈려다가도 '당쟁의 대가'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현대의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없다. 아, 정치의 신! 거침없이 정적을 물어뜯고 물 흐르듯 처신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겠다. 굶고 싶지 않다면 바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로 말할 것 같으면, 인조를 거쳐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네 명의 임금을 섬기며 수 십년간 조정의 거두로 머물렀음에도 처세와는 거리가 먼 뻣뻣한 인물이었다. 그는 싸움을 알아도 물러섬은 몰랐다. 그는 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도리어 왕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든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왕보다 높은 신하였다.



동인과 서인


조선의 당쟁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분열의 시초,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동인과 서인의 기원이 바로 이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천원짜리에 그려진 할아버지) 학문을 중심으로 뭉친 당파가 바로 동인이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 데 임진왜란 때 다수의 의병장을(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등) 배출해 정권을 장악한 북인이 인조 반정(영화 '광해')으로 대거 사형당한 탓에 동인은 서애 유성룡(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역임하며 이순신을 추천한 정치인)을 종주로 하는 남인만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서인은 율곡 이이의(오천원짜리 할아버지) 학문을 바탕으로 한 당파였다. 이들은 쿠데타에(인조 반정) 성공한 이후 비록 중간 중간 부침이 있긴 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은 무소불위의 집권 여당이었다. 송시열은 이 집권 여당의 우두머리였다(나중에 서인은 송시열파와 반송시열파의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다).


송시열이 서인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정통으로 이은 자였고 둘째, 성리학에 관한한 조선에서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의 대학자였다. 정통성이 있기에 그의 발언엔 구태여 힘들이지 않아도 무거운 권위가 실렸고 대학자였기에 시열은 그 누구와의 논쟁에서도 지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투는 무리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한 성공의 조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는 이미 말로써 정의를 다투는 시대가 아니었다. 조선의 비극은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는 시대에 말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와 송시열의 예학


성리학을 탄생시킨 주자와 버금갈 정도였다는 대학자 율곡 이이는, 그러나 성리학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고루한 인물이 아니었다. 율곡은 서자와 천인에게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고(전방 자원 입대자에게 부여) 공납의 폐해를 시정할 정책을 주장하는 등(대공수미법) 사회적, 경제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혁신가였다.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 또한 '무'보다 '문'을 중시하는 조선의 주류 정치계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발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송시열에 이르러 성리학은 사대부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그것을 영속화하려는 '예학'으로 변질되고 만다. '예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었다.(p.37)


같은 차이는 송시열의 주자학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의 극심한 변화를 야기한 대사건이었지만 그 중 최고는 대궐을 비우고 쥐새끼처럼 달아난 지배층에 분노한 백성들이 텅텅빈 관청에 침입해 노비 문서를 불태운 사건이었다. 지배계급에 대한 혐오가 극단에 치달은 데다가 양, 천의 구분이 모호해져 신분제마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사대부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진면목이다. 



실패한 보수의 성공적 지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다소 논쟁이 있으나 왜란을 수습하고 당시 중원의 대세로 떠오른 후금과의 실리 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는 등 여러모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왕이었다. 이 왕이 서인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된다. 사특한 것을 바로 잡은 고귀한 신하들은 실리 대신 군신의 예를 되찾았고(배금숭명) 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야기해 자신의 왕으로 하여금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게 했으며(삼궤구복) 청으로(후금) 끌려간 아낙을 '환향녀(還鄕女)'로 그들이 낳은 자식을 '호로자(湖奴子)'로 만들었다.


무참한 현실을 압도적 무기력으로 대처했음에도 서인 정권은 버림받지 않았다. 그것은 왕권의 한계였다. 왕은 스스로의 힘으로 즉위한 게 아니라 서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했기에 결코 서인을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올바른 방법으로 승계되지 못한 권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사특한 것을 바로 잡는다 했으나 사실은 권력욕에 다름 아니었고, 군신의 예를 다한다했으나 결국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렸던 서인들의 모순은 효종의 북벌론을 맞아 더 큰 모순을 드러낸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강력한 북벌의지를 내세워 군대를 양성했으나 서인의 반대에 부딪혀 마음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따지고보면 청을 몰아내고 명을 다시 세운다는 효종의 북벌론이야말로 이른바 예학이 말하는 진정한 군신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집권층인 사대부 중 누구하나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 볼 때 당시 사대부들이 말하는 '예'란 결국 자기 안위와 부귀를 지키려는 껍데기뿐인 사변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송시열도 이런 모순을 알고 있었으나 효종의 급서(암살로 추정)로 인해 그는 아무런 정치적 타격없이 진퇴양난의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송논쟁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송시열은 조선 당쟁사상 가장 치열했던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예송논쟁이란 쉽게 말해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당시 예법상 부모는 장자의 상에 3년 복을 입고 이하 중자(衆子)의 상에는 1년 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므로(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한지 두 달만에 독살당한다. 소현세자는 아들을 남겼기에 당연 그 아들이 왕세자가 되야 했으나 소현세자 일가를 극도로 혐오한 인조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예법상 1년복이 맞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의 주장은 얼핏 예법에 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조금만 돌려 보면 효종은 서자 불과하며 따라서 그의 왕위 계승에도 정통성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주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적이었던 남인 학자들이 예송논쟁에 불을 지폈고 송시열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현종이 남인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인 세력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현종의 급서로 위기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마니, 이 또한 송시열의 복이라면 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시열의 최후


단 한 번도 왕 밑에 서본 적 없는 신하. 이 위태로운 지위를 갖고 어찌 그토록 긴 세월을 살았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83세에 정읍에서 사사당한다. 반란죄가 아닌 이상 대신이 사형은 커녕 국문조차 받지 않았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송시열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이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왕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면서 동시에 대단히 감정적이어야 했다. 둘 모두를 갖춘 왕은 그 유명한 여인, 장희빈에 빠져 있던 숙종이었다. 이후 숙종은 유례없이 강한 왕권을 누리며 다양한 업적을 세웠으니 다소 감정적으로 처리한 송시열의 사사가 결론적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송시열은 성리학의 대가이긴 했으나 주자를 신성화한 나머지 일체의 반론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몰아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는 우를 범했다. 그는 남인이 정권을 잡아 귀양살이를 할 때도 그것을 자신의 불관용이 초래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사파가 정파에게 가하는 박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전형적인 광신도의 심리상태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도 그것이 교조화되어 자유로운 반론을 억압할 때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랬고 주자의 성리학이 그랬다. 송시열은 유학의 대가이면서도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깨우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p.398)


군자는 역시 많이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s*******r 2014.09.28.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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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을 정치에 이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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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논어 위정편에는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가지지 않더라도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라면 변화의 흐름을 간파하고 열린 자세로 세상을 해석해야 한다   p395 주희가 주자학을 만든 것을 南宋에서 수전농업의 발달로 성장한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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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논어 위정편에는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가지지 않더라도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라면 변화의 흐름을 간파하고 열린 자세로 세상을 해석해야 한다

 

p395 주희가 주자학을 만든 것을 南宋에서 수전농업의 발달로 성장한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주자학의 성립에는 사대부 계급의 성장과 이익추구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주자학을 송시열은 정치에 이용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조선 전체를 당쟁의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는 정치사에 그의 영향력은 피의 정치로 점철되고 피로하고 끊임없이 지루한 논쟁의 場을 만들었고, 벤자민 버튼처럼 조선역사를 역행시켰다. 하지만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중,고교 교과서에서나 여타 다른 곳에서 성리학의 대가, 북벌정책을 지지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런 송시열에 대한 평가에 대해 여러책을 치밀하게 파헤쳐서 오도되고 있는 역사기록을 바로잡고자 노력한 작가의 열정이 돋보인다.

 

조선은 청나라의 강화 사절로 가짜 왕자와 가짜 대신을 보냈다가 말썽이 되었는데 소현세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의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청의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면서 변화의 흐름을 간파한 소현세자는 개방적인 사고로 변해있었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소현을 세우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한다.

 

불행히도 귀국 두달만에 급서하게 되는 소현세자..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은 당쟁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가 바로 조선에서는 주자학이라는 사상적 이데올로기로 죽이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도대체 ‘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의 상복은?’ 1년복이냐? 3년복이냐를 놓고, 정치공작과 칼부림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수십년동안..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논쟁이라면 오죽 존경스럽겠는가 .. 이것이 바로 주자학을 외치던 위정자들의 편벽한 사고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정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살얼음판 정치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목숨과 바꾸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은 반듯이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f*********5 2010.04.04. 신고 공감 3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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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와 시열이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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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이덕일 작가의 초기 작품에 해당하며 다분이 논쟁적인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서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있다.얼마전에 안 사실인데 (이덕일,한홍구 등의 책을 통해 접한 사실들)  '해방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도그마가 묵시적으로 인정되는 데 바로 한국현대사는 객관성 문제 때문에 연구를 금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인식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현대사에 국한해서 이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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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이덕일 작가의 초기 작품에 해당하며 다분이 논쟁적인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서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얼마전에 안 사실인데 (이덕일,한홍구 등의 책을 통해 접한 사실들) 

'해방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도그마가 묵시적으로 인정되는 데 바로 한국현대사는 객관성 문제 때문에 연구를 금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인식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현대사에 국한해서 이럴 수 있다 치더라도 송시열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벌써 세월의 흐름이 꽤 지나 연구대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종교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평가를 내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굳이 송시열이라고 고이 역사속에 모셔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과연 송시열은 어떤 사람인가?
소중화의식, 만동묘 등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세력이 했던 것은 당시 청나라가 맹주였던 동아시아 흐름에 어긋났다고 보인다. 송시열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학자로서 사림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또한 교조주의의 모습을 간직해 조금은 부담스런 인물로 보인다. 사전적 의미로 교조주의란 원리,원칙에만 얽매어 융통성이 없는 사고를 일컫는 말이다. 무비판적인 '독단주의'의 다른표현이기도 하다.
 
교조주의의 수혜자는 당연히 노론 일당으로 대표되는 사대부들이고, 교조주의의 피해자는 일반 백성들이라 생각한다. 당시, 사대부들이 보인 소중화의식 및 유교의 교조화는 왕권을 무력하게 하고 사대부들의 터전인 조선을 점점 무력하게 하였다.

 

송시열의 최후가 가히 씁쓸한 데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사사 당했을 정도이니 요즘 말로는 정치적 타살을 당한 셈이다. 이 부분에서 후에 복권돼 '송자'로 일컬어지며 지금까지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내가 얻는 유익은 표현이 조금은 속되지만 '개길 때 개기더라도 상대방을 보고 하는 것'이 어떤가란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송시열 눈에 당시 왕인 숙종이 조금은 가볍게(?) 보여도 왕이었으니 넘지 못할 선은 가지 말아야 하지 않았나란 생각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속담으로 내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m*****e 2009.11.2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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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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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서 특히 이덕일 교수의 역사서를 읽기전에 조선후기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한적이 없습니다.  어릴때 TV 사극을 보면 인현왕후 와 장희빈의 궁중생활을 보면서 선과 악의 명확함을 보면서 악을 미워했죠.  그리고 이후에 본책이 1992년 출판된 '목민심서'  - 저자 황인경 - 소설입니다. 이때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죽음에 주변사람이 보기에는 청승맞을지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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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역사서 특히 이덕일 교수의 역사서를 읽기전에 조선후기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한적이 없습니다.  어릴때 TV 사극을 보면 인현왕후 와 장희빈의 궁중생활을 보면서 선과 악의 명확함을 보면서 악을 미워했죠.  그리고 이후에 본책이 1992년 출판된 '목민심서'  - 저자 황인경 - 소설입니다. 이때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죽음에 주변사람이 보기에는 청승맞을지도 모르지만 한없이 울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사람들을 악하게 만드는가..   그러면서 시간은 지나갔고 최근에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을 읽었으며, 그 반대편에 선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어 이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책을 읽어다고 송시열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책을 쓰면서  비난의 논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이사회에는 송시열의 영향이 굉장히 강하다는 인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조선'은 양대 전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에 대한 반성보다 피지배계층에 대한 통치권 강화로 예학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유학자들은 주자에 대한 연구 공부가 활발하게 되면서 송시열이 이분야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됩니다.  지금의 법령이 있듯이 그시대는 예학이 거의 법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효종 및 왕비의 죽음에 대비의 복제를 가지고 장장 15년이상 서로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이론을 확신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이책에는 효종의 북벌론에 대해 서인들의 반대가 나옵니다. 우리 역사교과서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효정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실제는 반대합니다. 백성들의 납세와 병역에 대한 의무가 중첩되어 삶이 고단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서인 김육이 주장하는 대동법 확산에는 반대를 함니다. 그당시 대동법은 백성들의 공납에 대한 폐단을 줄일 수있는 획기적인 법안이었으나, 그들의 이익에 반한 법은 철저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왕조시대에 절대적인 권력은 왕이 아니라 그들만의 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은 그 시대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당시 백성들을 위해서 라는 말은  현재의 정치인들의 국민을 위해서 하는 말과 너무 유사하여 실소하게 만듭니다.  임금 광해를 내몰면서 정권을 잡은 서인 그리고 정권을 찾으려고 한 남인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쟁취다툼은 백성들의 삶과 동떨어지면서 그들만의 총칼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백성들을 위한 대동법은 광해군부터 숙종까지 약 100여년만에 전국에 확산 시행되었습니다.

  이책은 송시열이 사약을 먹고 죽음으로 끝맺음됩니다.  그의 죽움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어떻게 평할까요?   도가 떨어진 세상에 이를 재정립한 위대한 유학자?  이는 세상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겁니다.

 4월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 권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참으로 우울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었습니다.  혹시 이 리뷰를 보시는 부모님들께서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1800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십시요. 그리고 1800년 이후 100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려주십시요.  그리고 조선의 멸망과 일제시대의 암흑의 시기 그리고 현대사를 알려주십시요. 정말로 앞으로 되풀이되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이기에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하며,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d*****b 2011.04.25.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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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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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로서는 기록적인 나이(83세)에 사사(賜死: 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당한 조선의 정치가이자 학자.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 넘게 언급된 인물. 사사당한 후 공자와 함께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인물. 노론의 수괴(首魁: 실제로 그는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우암 송시열(1607 - 1689)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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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로서는 기록적인 나이(83세)에 사사(賜死: 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당한 조선의 정치가이자 학자.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 넘게 언급된 인물. 사사당한 후 공자와 함께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인물. 노론의 수괴(首魁: 실제로 그는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우암 송시열(1607 - 1689)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송시열에 대한 지극한 반감을 전제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는다.  

서인(노론이 속한)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은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 사건이었다. 쫓겨난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 실리 외교로 많은 업적을 남긴 현군(賢君)이었다. 서인들은 임진왜란 때 명이 구원군을 파견한 덕에 조선이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명의 군대 파견은 명(明) 정벌(征伐)을 기치로 내건 왜군과의 전쟁터를 한반도로 국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서인의 숭명 또는 친명 정책은 정묘호란 등 숱한 비극의 씨앗이었다.  

인조반정은 정권 장악에 눈이 먼 서인들의 명분 없는 쿠데타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은 본국에서조차 쇠퇴해가던 성리학과 명분론을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었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상이 저자가 전제로 내건 주요 사안들이다. 송시열은 지극한 교조주의자였다. 주자(주희)가 이미 밝혀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책을 저술할 필요가 없으며 주자에 대해 의심한 바가 없고 (명분적) 북벌론을 주장하는 글에서조차 주자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송시열은 대학자는커녕 그냥 학자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다.  

송시열의 행적은 학자가 아니라 교조적 종교인의 그것이었다. (실질적) 북벌정책을 내건 효종에게 송시열이 한 말들은 성리학 강의에 불과했다. 그것은 시대 상황을 도외시하고 현실을 이론에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견강부회일 뿐이었다. 송시열은 효종에 극렬히 반대했다. 최근 나온 ’윤휴와 침묵의 제국‘의 주인공인 윤휴는 송시열의 주요 정적으로서 학문이나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은 유연한 인물이었다.  

반면 송시열은 ’논어‘나 ’맹자‘ 등의 사서에 대해 주희가 해놓은 해설인 ’중용집주‘를 경전으로 섬겼다. 송시열은 주희의 ’중용집주‘를 개작하여 자신의 견해로 주석을 달겠다고 나선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며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주셨으니 참으로 만세의 도통이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一理)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一書)도 명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 속 억지를 늘어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문난적이란 사문 즉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적자(賊子)라는 뜻이다.  

윤휴는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느냐. 이제 주자는 그만 덮어두고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 주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저자는 윤휴의 사상을 고대 경전 즉 공자나 맹자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라 표현했다. 이는 “학계는 대체로 다산(茶山)을 탈주자학자, 반주자학자로 부른다. 그의 경학적 성과는 의심할 바 없이 새로운 유학인 주자학의 발상과 체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오래된 학문인 원시 공맹의 사유로의 회귀로 일관하고 있다.”는 한형조 고수의 주장을 연상하게 한다.(’조선유학의 거장들’ 참조)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이란 책을 보면 다산이 곳곳에서 주희의 논의를 논박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주희적인 숙명론을 거부한다. 중요한 것은 본연지성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실천을 통해 사회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글을 보라.(‘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 또한 “다산만큼 방대한 경학 작업에 착수해 담론사를 뿌리로부터 재사유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는 글을 보라.(‘인간의 얼굴’ 161, 162 페이지)  

그러나 “다산은 전통사회 내에서의 경험적 인식을 강조했을 뿐 전통사회 자체의 초극을 꿈꾸지는 않았다.”는 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인간의 얼굴’ 171 페이지) 이점에서 다산을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천재가 아니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최근 나는 다산이 “유교적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했던 사람”이기에 천재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 글을 읽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천재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며 시대정신과 비전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정의했다.) 각설하고 송시열은 고향에 은거할 때조차 서인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은 성리학에 수구적으로 매달렸다. 역사의 반동을 자처한 것이다. 송시열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대부의 계급 이익과 서인과 노론의 당의 이익이었다. 송시열이 그토록 주자를 내세웠으나 주자를 내세워 사대부 및 자당(自黨)의 이익을 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송시열은 스승(김장생)을 잘못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송시열은 자신에 대한 숙종의 탄압을 도통(道統)에 대한 탄압 즉 정(正)에 대한 사(邪)의 탄압으로 인식했다.(주자학 절대주의에 대해서라면 송시열 뿐 아니라 남인도 별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있는 실정이다.)  

사실 어려운 책이었다.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인물들간의 얽히고 설킨 갈등과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나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더 좋은 기회에 더 많은 관련 자료들을 가지고 송시열과 주자학, 당쟁의 관계에 대해 해명해 보고 싶다. 조선사회연구회가 펴낸 ‘조선사회 이렇게 본다’를 읽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대부란 무엇인가, 당쟁의 어제와 오늘, 조선시대 선비는 누구인가, 사대부의 의례와 제사, 정치 이데올로기, 주자학 등의 챕터가 내 관심사와 겹치기 때문이다.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392864

http://blog.aladin.co.kr/745224125/5081525

http://www.texter.co.kr/04_review/review2_board_view.php?no=10959&book_no=8438&id=texter

 

이달의 사락 m******1 2011.09.16.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곰씸어 읽어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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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당시에 너무 가볍게 읽었다는 생각이 들게할 정도로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의 당쟁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민족적 원죄로 받아 들일 만큼이나 응어리로 맺혀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당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저자는 당쟁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당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한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당쟁 '명분'을 이해하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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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당시에 너무 가볍게 읽었다는 생각이 들게할 정도로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의 당쟁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민족적 원죄로 받아 들일 만큼이나 응어리로 맺혀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당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저자는 당쟁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당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한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당쟁 '명분'을 이해하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덮는 순간 독자는 글쓴이의 해박함과 세밀하고도 방대한 연구에 찬사를 보낼 것으로 믿습니다. 단 이 책을 정독했을 경우에 한합니다. 사대부들의 권력을 향한 암투와 정의와 명분에 대한 갈증, 그리고 그들간의 논쟁에서 은근한 조롱과 비유 은유 등은 가히 일품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윤휴 윤증과 송시열의 논쟁은 가히 일품이며, 일말의 전율까지도 느낄 수 있을것입니다. 곰씹어면서 읽어야 제맛인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l****m 2004.06.0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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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진리가 아니라 사실의 종합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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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가 TV에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드라마와 관련된 여러 가지 책들도 많이 팔리는 걸로 알고 있다. 역시 대중매체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역사드라마는 팩트(fact) 라는 기본 요소 위에 재미라는 상상력을 덧붙이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역사적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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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가 TV에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드라마와 관련된 여러 가지 책들도 많이 팔리는 걸로 알고 있다. 역시 대중매체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역사드라마는 팩트(fact) 라는 기본 요소 위에 재미라는 상상력을 덧붙이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것을 접한 시청자들은 잘못된 역사적 인식을 가질 개연성도 높을 것이다. 물론 대중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인 공적은 인정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덕일 선생님의 책은 정말 좋은 역사서 인 것 같다. 무엇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한 진실에 가까운 팩트와 다소 지루해지거나 어려울 수 있는 용어에 대한 설명과 흥미로운 글의 전개는 역사드라마와 비교해 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좋은 오락이다. 이것이 이덕일선생님의 역사서에 계속 손이 가는 이유이다. 

 

 ‘1+1=2‘다 라는 것은 세상 누구나 진리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과는 사과이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서는 사과이지만, 영어로는 apple, 프랑스어로는 pomme 이다. 당연히 문화와 사회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점이 바로 이것이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 시키면서 한 말에서 잘 나타나듯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내셨으니 참으로 만세의 도통이다. 주자이후로는 일리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도 명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속의 억지를 늘어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이다.” 중국의 주자가 제창한 주자학을 여느 시대 여느 나라나 통하는 만고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주자가 바른 것이고, 이 외의 것은 틀린 것이라는 이런 생각이 송시열이 조선을 이끈 그들의 나라인 것이다.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서인들의 최고 학문적 계보를 잇는 인물이라는 점과 인조의 둘째아들 효종의 스승이었으나,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후에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 인해 당대의 큰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소중화 사상을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송시열에게는 조선의 왕보다는 주자를 받드는 것이 백성의 이익보다는 사대부와 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 예로 효종의 북벌정책에 대해 실질적인 대책보다는 효종의 덕이 문제라는 발언, 방납의 폐단을 막을 방법으로 제시된 대동법에 대한 반대, 예송논쟁의 중심이라는 점, 그리고 경신환국, 무엇보다 주자의 사상에 대해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윤휴를 사문난적한 점은 아무리 높은 지식과 인망을 받고 있더라도 조선왕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사고는 즉, ‘모 아니면 도’ 라는 생각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와의 대립의 원인 중 하나의 원인이 된다. 둘 다 일신교라는 이유 때문에 타협의 접점을 찾을 수 없으며, 결국은 ‘나는 선, 너는 악’ 으로 변한 것이다. 현대의 우리정치에서도 이런 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색깔론이다. 조금이라도 당론과 어긋난다면 상대방을 좌파, 우파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변함없는 우리 정치의 애물단지로 존재해 오고 있다.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으면서 역사(인물, 사상 등을 포함)는 진리일 수 없으며, 사실의 종합서이며, 이 참고서를 통해 과거에 겪은 시행착오를 간접 경험함으로써 현재의 문제에 대한 정답은 아니지만, 현답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l*******g 2012.02.0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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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면에서 이덕일 선생의 여러 저작 중 으뜸에 들만하다.
"여러 면에서 이덕일 선생의 여러 저작 중 으뜸에 들만하다." 내용보기
오래 전 출간된 책이고, 오래 전부터 읽고싶었다. 이제야 접하게 된 이유는 소수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전기류보다 이야기식으로 전개되는 통사류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덕일 선생이 단일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아마 류성룡, 송시열, 이회영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중 이회영에 관한 책은 절판이 돼버려 끝내 읽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들의 이야기는 전기이면서도 결
"여러 면에서 이덕일 선생의 여러 저작 중 으뜸에 들만하다." 내용보기

오래 전 출간된 책이고, 오래 전부터 읽고싶었다.

이제야 접하게 된 이유는 소수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전기류보다 이야기식으로 전개되는 통사류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덕일 선생이 단일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아마 류성룡, 송시열, 이회영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중 이회영에 관한 책은 절판이 돼버려 끝내 읽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들의 이야기는 전기이면서도 결국은 그 시대 전체를 조명하는 시대사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송시열이 살았던 시대, 즉 인조, 효종, 현종, 숙종조의 시대상과 정치사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국토와 백성들은 피폐한 상태이고, 그후 이어지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정치와 사상이 극도로 어지러웠던 시대였던만큼 이 책은 한장한장이 흥미진진하다.

송시열로부터 시작된 서인노론이 후세와 현대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도 큰 수확이다.

여러 면에서 이덕일 선생의 여러 저작 중 으뜸에 들만하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u 2009.12.0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