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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은 후엔 침대맡 책탑에서 꺼내 서재에 갖다두는데.. 리뷰까지 끝난 책은 책탑에서 빼지는 순간 히스토리가 된다. 어떤 책은 좀 아쉽다.. 리뷰 등록을 여러번 할 수 있는 점을 시험해 볼 겸 책의 맨 끝 부분 스토리 하나를 더 올려본다.포스트로 올리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올리면 더 나을까.어쩔까. 프리츠 하버 (Fritz Haber 1868-1934)의 아내는 당시 독일에서 몇 안되는 박사학위를 가진 유능한 화학자였다. 클라라 임머바르 (Clara Immerwahr1870-1915). 하버는 유태인이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카이저 빌헬름 물라화학연구소 소장직에 있던 하버는 나찌를 위해 독가스를 만들었다. 이 때 만든 것이 염소 가스였다. 하버의 아내는 과학자들이 과학을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절망했다. 그녀는 독가스 살포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하버는 전쟁을 위한 대량생산무기의 연구이를 계속한다. 1916년 독일 육군 화학전 전담국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염소가스의 맹점을 극복한 강력한 독극물 포스젠과 이페리트를 개발했다. 노출된지 몇초만에 눈을 멀게하고 폐를 손상시키는 강한 독성을 가진 가스였다. 즉각 실전에 사용된 이 독가스는 프랑스군을 수천명을 그자리에서 몰살시켰다. 하버의 절친이었던 아인슈타인은 하버를 찾아가 독가스 개발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그는 과학자가 해야 할 일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1918년 하버는 노벨 화학상을 받는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의식이 마비되어 있던 사회였다. 전쟁의 광기가 노벨상 심사위원마저도 무감각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던, 과학자의 양심을 져버리고 아내의 죽음에서조차 초연했던 한 사내가 아내의 만류는 커녕 죽음에조차 의연하게 '조국' 편이었던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사랑한 '조국' 독일은 이제 유태인인 그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다. 곧 멸종의 역사 속으로 꺼져버릴 이 '조국 사랑' 과학자응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20년간 몸담았던 연구소에서 쫓겨나고 스위스에 망명중 초라한 호텔방에서 심장마비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하버의 아내를 생각했다. 그녀의 절망을 생각했다. 그가 자살한 진짜 이유가 단지 남편이 하는 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학이 전쟁광들의 노예가 되어 폭력과 대량학살의 무기가 되는 헌실에 대한 절망.. 이제까지 진화해온 과학의 힘이 궁극적으로 쓰여질 곳이 인류를 수분 내에 통채로 자멸시킬 수도 있을 신무기의 개발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한 여성 과학자가 평생을 함깨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기로 한 동반자는 바로 그 광기의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스스로 그 광기의 주인공이 된 남자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떨어뜨린 원자 폭탄의 힘을 예감했을까. 권총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절망 앞에서 숙연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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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세계사들을 읽다보면, 세계사가 아닌 서양사, 그것도 중세를 지나서는 거의 프랑스, 영국, 이태리 근처에 있는 나라들에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사도 마찬가지다. 문명의 시작은 여러 대륙에서 나타나지만 과학의 시초 역시 그리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본다. 그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게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를 캐내는 것이었기에 예술이든, 종교든, 철학이든 무엇이든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그리스 사상을 계승한 서구 세력이 최근 몇세기에 이르러 승자로서 결국 스스로 세계사의 주인공의 면류관을 쓰게 된 역사의 이면을 역사의 패자로서 혹은 좋은말로 후발주자로서 바라다보는 입장은 썩 편하지가 않다. 그런데, 이상타. 왜 그렇게 되었나. 로마 몰락 후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니 나타난 후까지도 유럽이 기독교 사상이 예술과 철학과 과학의 손발을 꽁꽁묶어 암흑같던 14C 가량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중국 이슬람 문화권은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과학혁명은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화약과, 종이와 나침반과 같은 인류 문명에 획을 그을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던 중국이나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과 십진법과 대수학을 일으키고 고대 그리스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있던 이슬람과 인도 문화권에서 일어나지 않고 서구에서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것이 참으로 궁금했었는데, 이 물음은 한마디로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 흠뻑 절은 우매한 질문이었다. 같은 의문을 가진 서양인이 조지프 니덤(1900~1995)이었다. 중국의 문명을 연구한 그는 14세기 이전의 중국의 과학기술에 매료되어 유럽인들의 지적 자만심이 비유럽 문명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으며 세계사를 유럽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에 대해 비판하며, 왜 과학혁명이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유럽에서만 일어났을까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은 수십년동안 논쟁을 일으켜왔다. 결론은 질문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다. 어느 집에 불이 나면 왜 불이 났는지를 질문할 수 있겠지만 불이나지 않은 집에 불이 왜 안났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불이 나는 것이 정상이라는 잘못된 세계관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 집에서 유독 어쩌다가 불이났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고, 불이 나지 않은 다른 모든 집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유럽중심의 세계사, 문명사, 과학사 등등에 대해 크게 할 말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중국에서 천문학이 그리 발달해서 혼천의와 같은 뛰어난 관측기구가 고대부터 존재했으면 뭘하겠으며 유럽에서는 존재조차도 부정되었던 초신성에 대한 기록을 가졌으면 뭘할 것인가. 거기서 이끌어낸 생각은 천자의 통치 이념일 뿐 그걸로 날씨라도 예측할 수 있었나, 결론적으로 현재 관점으로 볼 때는 한마디로 괜한 삽질이었는데 말이다. 다산에듀의 <보스포루스 과학사>에는 '동서양을 넘나드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다산에듀에서 야심차게 계획한 보스포루스 세계사 시리즈의 물꼬를 튼 첫번째 책이다. 미술사, 전쟁사, 영화사, 의학사, 여성사, 문학사, 철학사, 경제사까지 시리즈로 출간예정이어서 기대된다. 지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스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으로,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풍요롭게 했듯 동서양을 아우르는 인문학 세계사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시리즈 제목으로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사에서 유럽 이외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 결론은 책의 페이지 분량이 말해준다. 전체 400여페이지 중 유럽 이외의 부분에 대해 기술된 부분은 약 60쪽 정도에 불과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유럽이 암흑기였던 14C 이전까지의 과학 기술까지만 찬란했고 그 이후에는 예수회에서 보낸 유럽의 과학기술을 중국이 받아들여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계사의 관점에서 중국의 과학기술이 갖는 위치가 한 때의 영광 뿐인 이유를 꼭 유럽중심의 가치관이라는 비판적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평소 궁금했던 과학사의 핵심 지식들을 포괄적으로 대부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대순으로 배열된 세계사의 지식들인만큼 까마득한 옛날 학교에서 배운 것도 있고 안배운 것도 있고, 다른 과학책이나 세계사 인문서에서도 많이 접했던 내용도 있고, 처음 보는 내용도 있지만, 과학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건들과 이야기를 하나씩 다루어가면서 이야기의 과학적 디테일들을 생략하지 않고 쉬운 말로 잘 풀어서 설명한 것이라서 재미있게 읽힌다. 같은 맥락에서 두번째 특징으로 본다면 친절한 그림과 도표 사진 같은 시각자료들이 적재 적소에 배치된 점이다. 너무 과하지도 않으면서 본문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시각적 보충자료가 필요하겠다 싶은 부분이 나오면 반드시 뒷장이던 앞장이던 관련 그림들이 있다. 이 건 매우 중요하다. 말로만 한페이지 줄구장창 아무리 잘 설명해 놓아도 그림이 없으면 개념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음을 모두다 알고 있다. 그림을 안그리는 이유는 귀찮아서일거다. 그림을 적재적소에 넣어놓는 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다.
우리에겐 지식의 단편적 습득이 아닌 지식의 결합이 필요하다. 최근 읽은 몇 권의 과학관련 서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최근 읽은 몇권의 역사서들이 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과학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은 12월동안 빛의 물리학, 장하성의 과학철학을 말하다, 그리고 생명과학 및 과학 상식에 관련된 청소년 도서 몇권의 내용에서 다룬 내용이 이 책에서도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이란 것은 예를 들어 같은 과학적 내용, 같은 과학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글쓴이가 바라보는 각도가 조금조금씩 다르다는 뜻이다. 장하성의 과학 철학과 만나다에서는 과학사에 있어 토마스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설명하면서, 그 패러다임 변화를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 정인경님은 직접적으로 그런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사에서 하나하나 이루어간 과학적 혁명을 전체적인 진보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부분적으로 앞서 읽은 책에서 과학사의 패러다임 변화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후, 더 상세하고 세밀한 과학사의 개요를 읽으니 더 입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 같다. 파블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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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는 과학이란 과목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선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 어떤 현상에 의해 나타나는 걸 알아서 뭘 할 것이며, 안다고 달라질 게 없는데... 그걸 왜 공부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다만. 시험 점수를 위해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외우는 수준으로 공부했다고 할까? 그나마 외우는 방식의 공부 덕분에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부분이 생기는 정도로 과학을 알아갔던 것 같다. 하지만 큰 아이가 과학을 좋아하고 관련 서적을 사 달라고 하기 시작하자, 모르는 상태로 책을 골라 줄 수 없어 관련 책을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 책도 알게 되었다. 내가 읽기 보다는 아이에게 추천해 주고 싶었는데.. 솔직히 어렵다는 생각이 강하다. 보통 한번 책을 잡으면 끝까지 읽는 스타일인데 이 책은 한 번에 읽지 못했다. 생각나면 읽고, 어렵다 생각 되면 다른 책을 읽다 다시 이 책을 읽는 식으로 읽었다. 읽었다고 해서 이 책을 다 이해했냐 하면 아니다. 지금도 잘 모르겠고 아마 앞으로도 100% 이해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몇 개 있다. 우리가 공부한 과학이라는 것이 유럽 중심의 시각이었다는 것과 과학 발달이 정말 인류 행복에 이바지 했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도 그렇지만 과학사도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검증을 통해 그것을 인정하고 또 다른 발견을 시작해야 하는데 학문으로의 과학이나 역사는 상당히 보수적이란 생각이 든다. ‘서양의 과학사학자들은 비유럽권의 문명을 과소평가하고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 기술의 주도권은 늘 유럽이 가지고 있었다.’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 어쩜 이런 것들 때문에 동양 과학은 철저히 무시되어 온 것 같기도 하다. 나만해도 우리나라가 과학이 발달한 나라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다. 과학이 발달한 나라였다면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건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다기보다 과학을 천시했던 이유도 있었고, 왕이 주도했던 과학 기술은 궁정과학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 이란 작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제시한 의문이 참 인상적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과학 기술의 방향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켰는가? (172) 현대 사회의 과학 기술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인간의 안위와 생존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유는 환경 파괴를 비롯해 전쟁, 인구 증가, 경제 양극화 등 세계적 위기에 처해 있다. 과연 현대의 과학 기술이 이러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지속 가능한 행복을 선사할 수 있을까? (418) 어쩜 작가가 이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과학사를 설명하고 이야기 하는 근본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인류가 진화를 거듭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러는 과정에서 과학은 사회, 정치적 배경, 혹은 자본에 의해 발달해 왔다. 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과학이 발달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 과학은 많은 인류를 고통에 몰아넣기도 했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한 발명이고 발견인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 지금의 우리가 있기 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이 배출 되었다. 대단하다 말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가 발명한 것들이 어렵게 나열되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과학 기술이 우리를 현재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느냐 아닐까 과학 기술의 발달로 많은 나라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소멸되고 불행해졌다. 심지어 독가스를 만들어 실전에 사용한 하버에게 노벨화학상이 주어졌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세계 평화를 말하고 환경 파괴를 말한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어쩜 동서양 과학 발달의 과정을 통해 앞으로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것 아닐까? 이기적인 자본이나, 이기적인 개인에 의해 과학이 움직여져서는 안 된다. 앞으로 과학은 세계 인류를 지배할 엄청난 파워로 성장하게 될 테니까. 마지막에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과학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1)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역사의식이다. 2) 과학사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3) 과학 기술은 현재 인류가 처한 생태계의 파괴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419~420)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처질),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신채호) 라는 말처럼 과학사를 제대로 알아야 인류가 불행할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제동을 걸지 않을까? 인류는 행복해지고 편리해지자고 과학을 발달시켰고 많은 것을 발명했지만 지금 우리가 그에 비해 행복한지는... 생각해 볼일이다. 힘들고 어렵고 책을 읽었지만 과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권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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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다녀온 스페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같이 일하는 분들과 나누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꽃보다 할배>보다는 조금은 심각해 보이는 이유를 들어서 스페인을 구경하러 갔노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판구조론에 따른 지진발생현황자료에서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이 충돌하는 지중해주변에서 화산활동이 많고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자연스럽게 지중해를 둘러싸고 전개되어온 유럽의 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로 연결하였습니다. 유럽과 이슬람의 만남은 아무래도 도항(渡航)이 쉬운 보스포루스해협과 지브롤터해협을 통하여 주로 이루어져왔을 것입니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이 주로 전쟁이라는 파괴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지만 평화가 유지될 때는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발칸반도에서는 최근까지도 인종과 종교의 차이 때문에 충돌을 빚었습니다만, 또 다른 접점 이베리아반도에서는 1492년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왕국을 축출한 뒤로 아직까지는 대규모 충돌이 일어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서로에게 미친 영향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성품이 자연을 닮아 너그럽고 포용력이 컸던 까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스페인으로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대륙의 동쪽 끝에 사는 우리는 서쪽 끝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배운 지식에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최근까지 우리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친 사고체계 때문에 다양한 문명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중립적으로 판단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인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여행칼럼으로 풀어내면서[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 http://www.medicaltimes.com], 중세 무렵 이베리아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들을 찾아 읽으면서 생각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 저로서는 참 다행입니다.
마침 다산에듀에서 ‘동양과 서양의 장벽을 넘어 인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통합 교양서’라는 타이틀로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 <보스포루스 과학사>를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제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보스포루스해협은 좁은 곳이 200미터에 불과해서 한걸음에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에게 반한 제우스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을 헤라가 눈치를 채자 이오를 암소로 만들었는데, 헤라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이오가 이곳을 건너 도망쳤다고 해서 ‘소가 건넌 해협’이라는 의미를 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를 기획한 강응천 문사철대표는 ‘우리는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생각에 빠져 살아왔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유럽중심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불과하며 동과 서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오랜 옛날부터 수시로 교류하며 서로를 살찌워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만 유럽중심의 사고에 대한 반발로 아시아를 턱없이 높여 보려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동서양의 병진(竝進)과 교류를 과학, 미술, 문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살펴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철학에서 태동하여 발전해 나온 과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객관적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얻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우는 학문으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은 절대불변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관찰과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지면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변화해온 과정을 뒤쫓는 학문이 과학사입니다. 즉, ‘과학사(科學史)는 자연세계에서 인류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정의되는 것입니다.
<보스포루스 과학사>의 저자 정인경박사는 ‘과학은 인간이 만든 언어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구에 출현했을 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었는데, 그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과학을 창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럽문명이 그리스 철학에서 과학을 발전시켜온 것처럼 역사적으로 각 문명권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과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대들어 독보적인 발전을 이룩한 서양과학에 압도되어 개별 문명에서 발전시켜온 과학의 역사조차 도태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앎이 삶을 바꾼 수많은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자연에 부딪히면서 이해하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용된 과학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고, 기술은 실용적 목적으로 개발한 도구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근대 이후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기술문명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찼던 우리는 과학을 앎으로서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과학과 우리의 삶을 연결하여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얄팍한 우리의 과학사적 인식은 서양과학의 성취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 문제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흐름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꿰뚫고, 인간 스스로 세계를 앎으로서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는 통찰을 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과학사>는 각각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발흥’,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세의 과학과 기술’, ‘과학혁명, 유럽의 지식과 야망’, ‘인간을 닮은 현대 과학기술’이라는 제목으로 된,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발흥’에서는 고생물학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인류가 어떻게 지구상에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그리고 황허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출현한 4대 문명에 중앙아메리카의 마야문명과 남아메리카의 잉카문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각 문명이 독립적으로 문자를 고안해서 사용하였다는 것을 중요한 이유로 보았습니다. 지역적으로 씨앗이 뿌려진 고대문명이 어디에서는 대약진을 하고 어디에서는 소멸하고 말았는가 하는 점에서는 기술이 학문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그리스문명으로 전해지면서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발전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문명 역시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기술발전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문명의 자연철학이 우주의 근원물질로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물질을 제시한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물질이 아닌 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다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기술은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발명품이라고 하는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은 모두 고대 중국에서 발명되었는데, 종이제작 기술이 1500년 뒤에 유럽에 전해진 것을 비롯하여 지진계는 1700년이나 앞서고 대부분의 중국의 발명품은 유럽보다 1000년 이상 앞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문명과 아시아문명 사이의 엄청난 격차가 생기게 된 이유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세의 과학기술’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스 학자들에 의하여 도약한 다양한 학문들은 로마로 건너가게 되지만 그리스학문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로마가 국교로 삼은 기독교의 영향이 있습니다. 즉 과학의 발전은 기독교의 교리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학자들의 연구성과들이 멸실되거나 수도원의 비밀도서관에 숨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문명이 이룩한 빛나는 성과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에 인접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이슬람문명이 그리스문명을 계승하여 보전한 것은 물론, 인도와 중국에서 발전해온 성과들을 받아들여 진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슬람문명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근대에 들어 이룩한 과학혁명을 통하여 주도권을 쥐게 된 서양의 과학사학자들이 ‘과학기술의 주도권은 늘 유럽이 가지고 있었다’라는 유럽중심적 시각으로 세계과학사를 써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유럽이 고대 그리스학문을 계승하여 근대과학을 출현시킬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일부 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유럽의 중세를 암흑기가 아니라 고대의 문명으로부터 근대의 발전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기였다는 해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윤용수교수는 역사의 발전과정에는 잉태기와 성장기, 발전기와 쇠퇴기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당한 측면도 있겠으나, 인류문명의 발달은 어느 한 순간도 중단된 적이 없고, 유럽이 인류문명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인류문명의 주역은 아랍인이었으니, 이들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유럽문명이 암흑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지중해지역원 지음, 지중해 문명의 다중성 27쪽, 이담출판사, 2010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70031)
7세기 이후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문명은 동쪽으로는 인도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서쪽으로는 북부아프리카를 넘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하여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학문의 꽃을 피웠고,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편입시킨 다양한 문명들을 녹여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켜온 업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문명은 때마침 전해진 종이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유용한 지식을 모아 번역하고 출판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특히 그리스문헌의 가치를 알아본 칼리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를 대부분 아랍어로 번역하여 각 지역의 도서관에 소장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후기 우마이야왕조의 수도였던 코르도바에는 도서관이 70여 곳에 이르렀고, 수십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곳도 여러 곳이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과학문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문명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짚은 저자는 중국과 조선에서 일어났던 과학의 발전과정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세종조에 이룩한 천문, 과학, 의학, 언어 분야에서의 발전을 괄목할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과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세종의 통치행위의 하나로 주도한 과학기술이 궤도에 올라 사회가 안정되면서 그 동력이 사라진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랜 기간 암흑에 갇혀있는 유럽의 문명이 르네상스를 맞아 활기를 띄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전해진 종이, 화약, 나침반 등의 기술은 로마가 무너진 다음 할거하던 지방영주들 간의 전쟁을 통하여 빠르게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과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리스에서 시작한 자연의 탐구는 자연을 명상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결국 과학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음에도 동아시아에서는 반향이 크지 않았던 것은 유럽의 학문이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선별적으로 전달되면서 유럽 학문을 낮추어 보는 경향이 생겼던 것도 원인이 되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우주론과 자연인식체계에서는 무엇이 우주의 중심인가는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도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제국주의에 봉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기술이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답을 구하려면 과학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과학사 공부를 통하여,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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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과학사.
보스포루스?
이렇게 어려운 단어가 우리 과학에서 나왔었나?
음...
4쪽
"소가 건넌 해협"이라는 뜻을 가진 보스포루스 해협을 뜻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르는 바다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터키는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으로 나뉜다.
그래서, 저자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과학사를 논하기 위해서 "보스포루스"라는 뜻깊은 단어를 이 책의 제목에 붙인다.
과학사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 짐작하겠는가?
나는 참 어리석었던 것이 "과학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실험실에서 흰가운을 입고 실험하는 것만 생각이 난다.
아마도 대중매체에 의한 세뇌겠지만...
그런데, 저자는 인류의 탄생, 즉 구석기 시대부터 과학이 존재해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캐묻기 시작했고, 먹거리를 위해 사냥이나 수렵, 채집을 하다가 농사를 지으면서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과학이다.
(정확하게는 천문학에 들어간다.)
재미난 것은 인구의 증가와 여러가지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을 매칭할 수 있는데,
32쪽
지구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시점은 세 번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도구를 제작하는 인류가 출현한 뒤부터 20만년 전까지, 인구가 100만 명에 도달했을 때이다. 두 번째는 신석기혁명을 계기로 1만년 전에 5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7세기까지 5000만 명으로 늘어났던 때이다. 세 번째는 산업혁명이었다. 17세기 5000만 명이었던 인구가 오늘날 70억 명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처럼 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역사적 사건에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있었다.
(중략)
결국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며 동시에 자연을 파괴하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면서 인구의 증가가 일어나고, 그 후 정착하고 농경을 하게되어 인구가 또 증가하게 되고, 그것보다 더 짧게 걸려서는 공장에 기계가 들어왔던 산업혁명 즉,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우리는 과학을 어렵다고만 생각하는데, 인간의 안정적인 생활과 과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
37~38쪽
60이란 숫자는 약수의 개수가 많아 여러모로 유용했다. 60은 2,3,4,5,6으로 나누어 떨어질 뿐만 아니라, 10,12,15,20,30으로도 나누어떨어져, 곡물이나 토지를 나누어 줄 때 편리하게 쓸 수 있었다.
41~42쪽
바빌로니아인들은 달의 모양이 변하는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을 불길한 날로 생각하고 집에서 쉬었다. 7일을 일주일로 삼는 전통은 이때부터 생겨났고 로마시대에 이르러 휴일로 지정되었다. 일주일은 천문 주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임의로 정한 유일한 천문 단위이다.
52쪽
자연찰학자의 임무는 자연현상에 숨어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근원 물질'에 대한 질문을 처음 시도했던 것이 바로 과학의 시작이었다.
자, 여기서는 우리가 궁금했지만, 평소에는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이 나온다.
환갑도 60, 시간도 60초, 60분, 각도도 360도 등등... 또 무슨 60이 있을까?
무튼, 60은 이렇게 완벽한 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똑같이 나눌 때는 60이라는 숫자를 기본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려운 삼각함수 따위를 60에 근거해서 배워야했다. ㅋㅋㅋ 이런 썩을!)
그리고, 왜 일주일은 7일인지, 굳이 성경에 나오는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게으른 그녀는 그냥 궁금해만 했을 뿐, 그 가려운 곳을 이 책이 긁어줬으니,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모양이 변하는 7의 배수의 날을 불길하게 여겨 그 날은 쉬었다는 거다.
ㅠㅡㅠ 5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ㅡ,.ㅡ ㅋㅋㅋ
무튼 우리가 숫자와 관련되어 오래오래오래 내려오고 있는 어떤 법칙들은 당연히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바빌로니아인들의 미신도 달의 변화가 있으니 과학이라고 귀엽게 봐주도록 하자. ㅋ) 생겨난거지 절대로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 이제 여기서 또 우리가 원망해야할 또 한 사람이 나온다.
중 3 때.
수학시간만 되면, 선생님이 호명하는 번호대로 일어나서 그렇게 외워댔던 공리.
썩을!
이게 다 유클리드 때문이다.
77쪽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에서 먼저 용어를 '정의'했다.
(중략)
그다음에는 직관적으로 명백한 사실, 즉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공리'라고 하고 5개를 채택했다.
그렇게 유클리드가 만든 5개의 정의와 5개의 공리와 5개의 법칙을 우리는 죽어라 그렇게 외워야했던 것이다. OTL
유클리드 나빠요~!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 인도로부터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게 된다.
인류는 그 전에는 복잡한 상형문자를 사용했으나, 전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숫자를 사용하여 간결하고 정확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놀라워하라!
경배하라!
우리에게 0이라는 멋진 숫자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얼레리꼴레리~ 유럽에서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생각하고도 관념적으로 거부하는 전통 때문에 0에 대한 "처음"이라는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ㅋ
117쪽
더 놀라운 것은 알콰리즈미가 인도로부터 아라비아 숫자를 최초로 도입한 사실이다. 0의 발견은 이류 지성사에서 획기적 성과로 꼽힐 만큼 중요한 사건이다.
(중략)
유럽에서는 1000년이 넘도록 숫자 체계에서 0을 생각지 못했는데 그것은 0과 무관의 관념을 거부하는 그리스의 전통 때문이었다.
틀에 갇힌 바보들~
그런데, 자... 우리 생각해보자.
과학이 유럽에서만 발전했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종이도 만들고 화약도 만들고, 하늘과 관찰했는데, 그건 다 어떻게 되었나?
여기서 이 책의 뛰어남과 탁월함이 발현된다.
이 책은 보스포루스라는 제목을 거저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의 동서양의 과학 발전을 나란히 보여준다.
예를들어, 초신성이 발견된 내용은 유럽의 과학 기록보다는 중국의 과학 기록이 더 정확하고 믿을만하다고 한다.
아니, 유럽에서는 초신성에 대한 자료가 초기에는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
왜 일까?
130쪽 중세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 따라 하늘은 완전하고 불변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초신성과 같은 새로운 별의 출현을 인정할 수 없었고 당연히 기록하지도 않았다. 반면 중국인들은 하늘의 천문 현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기록하는 관행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혜성에 관한 관측도 중세 유럽보다 중국의 기록이 더 믿을만하다.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유럽에서는 "신(神)"이라는 이 한 단어 때문에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는 약간은 어리석음을 보인다.
그렇게 슬슬 동서양의 과학이 서로 융합될 기미를 보인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은 여러 세계의 문명을 착취하는데 사용되게 된다.
172쪽
세계 여러 문명의 조우는 불행하게도 평화적이기보다는 대개 폭력적이었다.
이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자, 이제 근대과학으로 넘어가자.
237쪽
이렇게 자연 세계를 수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물리학이라는 근대과학이 되었다.
즉, 여러가지 수많은 현상이 일어나는 자연의 세계를 숫자라는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함으로써, 더 넓고 깊은 사고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63쪽
뉴턴은 천재였다. 평범한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뉴턴은 죽은 뒤 이상적인 과학자의 모델이 되었지만 이것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파마머리 사과를 깨문 뉴턴아저씨는,
이렇게도 권력을 무자비로 휘두른 나쁜 아저씨였다.
나의 순진한 믿음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다. ㅠㅡㅠ
267쪽
이렇게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단순한 에피소드로 만들어 버린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뉴턴이 살았던 시대, 즉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반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다.
274~275쪽
18세기 유럽인들은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계를 점점 더 지배해 갔다. 유럽의 과학과 기술은 공격적으로 자연을 파괴하며 지구 전체를 수탈해 갔다. 유럽인들은 근대과학이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라 자부했지 그 안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가치 중립적인 과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더 많다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뉴턴 과학과 계몽사상은 유럽인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되었다.
과학이란! 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단순한 에피소드로 만들다닛~!
그러다가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대륙에서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일관성 없는 기록을 비웃는다.
그러나, 자신들도 비웃음거리가 되고 마는데, 적극적으로 도전하지 않고 주는 것만 받아먹다가 결국은 서양의 과학사에 뒤쳐지게 되버렸다.
284쪽
18세기 중국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역법의 틀 안에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책에서 나오는 일관성이 없는 우주론을 비웃고 무시했다. 중국문화가 세계 최고라는 오만함은 서양 천문학을 낮게 평가했고 공들여서 배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서양 언어를 배워서 직접 서양 과학 책들을 읽으려는 중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써 준 책들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채, 중국 제국이 영원할 거라 믿고 있었다.
짜잔~!
그러다가 드디어~!
산업혁명을 이끈 위대한 발명품이 나타난다.
자동차의 역사에서도 빠지지 않는, 바로바로~
증!기!기!관!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녀석인고!
304쪽
산업화의 상징인 증기기관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311쪽
증기기관을 만드는 데 복잡하고 어려운 과학 이론이 응용되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기술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경험과 단순한 원리 그리고 번뜩이는 착상과 시행착오, 우연적 행운이 뒤섞여 증기기관이라는 발명품이 나왔다.
그렇다.
증기기관을 만드는데는 어려운 수학이나 과학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경험과 착상과 시행착오 및 세렌디피티가 뒤섞여 이 멋지고 귀여운 녀석이 탄생한다.
궁디 팍팍!
자, 이제는 우리가 쪼갤 수 없다고 생각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들어가자.
나의 영원한 우상!
아인슈타인 형을 만나보자~!
320쪽
라부아지에의 '질량 보존의 법칙'은 산소의 발견보다 과학사에서 의미가 더 큰 업적이었다.
381쪽
E=mc2은 에너지가 질량으로도 바뀔 수 있으며, 질량이 에너지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질량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하나로 통합시킨 것이었다.
(중략)
c2은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제곱이라는 엄청나게 큰 숫자로, 이렇게 큰 숫자를 곱한 질량은 아주 작은 양일지라도 대단히 큰 값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과학을 좋아하고, 공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난 E=mc2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멋진책이다!)
그냥, 학교에서는 단순하게 E=mc2이라고만 배운다.
그리고, 이게 에너지방정식이라고만 배우고.
등식을 찬찬히 뜯어보면, 에너지는 빛의속도의 제곱에 질량을 곱한 값과 같다는 게 뻔히 보인다.
(근데 왜 난 ㅠㅡㅠ 이제 알았을까 ㅡ,.ㅡ)
즉, 빛의 속도의 제곱이라는 숫자가 곱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질량을 통해서라도 폭발적으로 에너지를 생성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식이 안타깝게도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쓰이게 된다. ㅠㅡㅠ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각하게 된다.
그 옛날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이 과학을 하던 그 시대에서는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과학자들의 과학이 전쟁과 손을 잡게 된다.
그 말은 즉, 과학이 인간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게 되지만, 그와 더불어 과학들의 갈등도 커지게 된다.
406쪽
과학자들은 과학이 전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원칙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은 과학의 발전을 촉진했고 사회적으로 과학자의 지위는 올라갔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말 그대로 거대과학이 된 것이다. 과학기술은 정부(군부), 산업, 대학의 견고한 '군산학 복합체'로 결속되었다.
413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원자폭탄은 인류의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인간의 창조성이 낳은 순수 과학이 이토록 공포스러운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모두 경악했다. 과학자들은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 주요 논제로 떠올랐지만 과학자 몇몇의 노력으로 현대 산업자본과 권력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과학도 순수하게 자연을 관찰하는 학문이지만, 결국에는 권력과 손잡으면서 타락하게 되고,
그 기술이 인류를 살상하는데도 영향을 끼치게 되며,
결국은 우주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ㅠㅡㅠ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앞으로의 과학은 어떤 길로 가야하는 걸까?
415~416쪽
인간은 왜 원자폭탄을 만들었을까? 당연히 알고 있는 무서운 사실인데, 원자폭탄은 인간을 살상하기 위해 만든 무기이다. 그러면 어떻게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과학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알아낸 것이다. 중력과 전자기력, 핵력이 차례차례 밝혀지면서 산업혁명에서 과학과 기술의 융합 그리고 원자폭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떤 물리학자는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주를 지배하는 힘들의 작동 원리를 밝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연 세계를 탐구해, 인간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도구를 만들었다.
418쪽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419쪽
과학기술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묻고 그다음에 과학기술의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자 이우]라는 책을 보면, 흥선대원군의 아들이었던 이우 왕자는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에 피폭으로 사망한다.
과학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과학자들의 양심과 생명에 관한 의식은 어떠해야하는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정말 잘 만들어진 책이다.
이과를 나와 공대를 간 나에게는 특히 정말로 재미나게 읽힌 책이다.
그렇지만, 문과를 나온 학생들에게도 어렵지 않고 술술 이 책이 재미나게 읽힐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학의 한 분야만 다룬 것이 아니라, 천문학, 지구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의 역사를 동서양을 융합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윤리와 철학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진다.
우리는 어떤길로 가야할까?
강추강추강추!
요근래 진심으로 강추하는 책이다.
잘 모셔놨다가 울아들이 얼른 크면 읽으라고 하고 싶은 그런 좋은 책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속에 인용하고 있는 책의 목록을 따로 빼주면 나중에 추가로 독서를 하는데 더 용이하지 않을까하는 그 점이 조금은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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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장벽이라도 있다는 생각에 빠져 살아왔다. 그리고 늙은 아시아는 오로지 유럽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만 생존해 나갈 수 있으며 ‘아시아적인 것’은 돌아볼 가치도 없다는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왔다. 하지만 동과 서의 역사와 문화는 오랜 옛날부터 수시로 교류하며 서로를 살찌워 왔다.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동서양은, 늘 활기찬 주고받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9쪽) 과학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과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과학 관련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내용의 대부분이 서양 과학사 일변도라서 “동양의 과학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아니 과연 존재하기는 했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초등학교 이후 배워온 학문, 예술, 종교 등은 하나같이 서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과학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근대 이후 세계의 질서가 서양 중심으로 재편되다 보니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서양적인 것은 보편이고, 기준이며, 모법이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이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듯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가 동양과 서양이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음을 깨닫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과학은 인간이 만든 언어다. 인간은 지구에 출현했을 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다. 낮과 밤이 생기고 계절이 변하는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달력을 만든 것처럼 인간은 자연스럽게 과학이라는 언어를 창조했다. (9쪽) 이 책은 인류의 탄생부터 현대의 과학기술까지 과학사의 발전을 4개의 장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제1장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발흥에서는 인류의 출현과 농업혁명, 문명의 탄생과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대해 살피고 있다. 제2장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세의 과학과 기술에서는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시대에 찬란한 과학의 발전을 이룬 이슬람 문명과 중국 그리고 조선 세종대의 발전을 살핀 뒤, 중세를 무너뜨린 유럽의 화학혁명을 다루고 있다. 제3장 과학혁명, 유럽의 지식과 야망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갈릴레오의 역학과 천문학 혁명, 과학혁명을 완성한 뉴턴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럽이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과학혁명의 의미는 무엇인지 탐색하고 있다. 제4장 인간을 닮은 현대 과학기술에서는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탐구, 다윈의 진화론, 원자의 탐구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벌어진 식민지 쟁탈 경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 각각의 장들마다 ‘우리는 누구인가?’. ‘세계 과학사에서 중세시대는 진정 암흑기였는가?’, ‘과학을 모르는 자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 ‘역사적으로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나?’라는 질문을 통해 단순한 과학적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말하고, 유럽 중심으로 중세시대 과학 발전을 살펴보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왔고 우리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앎은 삶을 바꾼다’라는 프롤로그와 ‘사람이 중심이다’라는 에필로그를 통해 인간 스스로 세계를 앎으로써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어 왔다는 것과 과학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글을 맺고 있다. 니덤은 “과학혁명이 왜 유럽에서만 일어났을까?” 동시에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니덤의 이 질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사 학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마침내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을 중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36쪽) 그렇다면 19세기 이전 동아시아 과학사에는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없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서양 과학사와 다르게 전개되었을 뿐입니다.(294쪽)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중심의 과학사(또는 세계사)는 18C 후반 중국을 제치고 세계의 패권을 잡은 유럽이 만들어내고, 그러한 유럽에게 처참할 정도로 당한 아시아와 다른 대륙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16C 이전의 유럽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었고, 실제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과학 부문에서 현재와 같은 우열 관계가 현성된 것은 근대를 거치면서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해 과학사를 바라보고 있고, 그럼으로써 유럽과는 다른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친 아시아 과학 발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중심으로 볼 때 중세시대는 암흑기에 불과하지만, 세계로 눈을 돌리면 이슬람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을 계승해 발전시켰고, 중국은 과학과 문화 전반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모습을 이룩했으며, 조선은 세종대에 이르러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현재의 유럽을 있게 한 과학혁명이 유럽에서만 일어나고 왜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문화적 우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과 상대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5세기 유럽의 화학혁명, 다시 말해 유럽의 과학기술적 혁신을 진보라 간주할 수 있을까? 유럽인들은 대포와 범선을 개발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든 것을 ‘발견의 시대’ 또는 ‘탐구의 시대’라고 자평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착취와 수탈의 시대’, ‘인종 학살의 시대’라 불러야 옳다.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과학기술의 방향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켰는가? (172쪽)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켰는가? 이 질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의 발전=인류의 행복’이라는 공식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유럽의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뒷받침했고,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산업화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며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가스를 만든 독일 과학자 하버의 재판에서 과학자들은 살상 무기를 만든 과학자가 사악한 것은 아니고 전쟁이 사악할 뿐이라고 말하며 그를 옹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 하버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를 통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과학의 역사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전쟁에서 과학기술은 인간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킨 만큼, 불행도 증대시켰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418쪽)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는 유럽 중심의 과학사가 아니라 동서양을 아우르는 과학사를 지향하고 있고, 과학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으며, 왜 우리가 과학사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끝으로 이 책의 좋은 점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여러 도서를 소개하고, 그 책에서 저자의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을 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른 책으로 독서를 확장해 간다면 지식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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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저자 정인경 | 다산에듀 | 2014.12.08 | 페이지 432 | ISBN 9791130604329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 첫 번째 <보스포루스 과학사>. 보스포루스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이라고 합니다. 고대로부터 이 좁은 해협을 두고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은 만큼 인간과 문화의 새 지평을 여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나드는 의미로 보스포루스 이름을 붙인 인문학 시리즈가 나왔습니다. 앞으로 미술사, 전쟁사, 영화사, 의학사, 여성사, 문학사, 철학사, 경제사 등이 출간 예정에다가 인문기획집단 문사철에서 기획한 시리즈여서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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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자연 세계의 사실을 말하고 인간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하고 가치판단을 해 왔던 것(p11)으로 사실을 아는 앎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합니다. 과학의 역사는 근대사회로의 변혁은 물론 과학기술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진정 삶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있느냐고 <보스포루스 과학사>는 질문합니다. 우리는 과학사를 통해 인간 스스로 세계를 앎으로써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는 통찰을 얻어야 한다 해요.
과학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현재는 인간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류의 역사를 재구성해 넓은 숲을 바라보는 책입니다. 고백하자면 우리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하빌리스 시대가 바로 석기시대라는 연대 흐름도 이 나이 되어서야 이해할 정도로 학창시절 찔끔거리며 배웠던 역사를 이번에 정리한 기분이었어요.
![]() ▲ 사진 자료도 풍부하고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도서들도 많이 소개하고 있어 좋더라고요.
서양과학사를 살펴보니 피타고라스, 탈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과학사, 수학사, 철학사 등 이곳저곳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참 많더군요. 자연철학자들은 인간의 사유를 통해 진리를 얻는 방법을 탐구했기에 서양과학의 연구, 방법론이 철학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학사 타이틀을 단 책이지만 철학, 수학 등 다양한 주제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게다가 근대 유럽 과학 혁명만이 세계사 보편적 기준으로 군림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 시각인 서양과학사에서 소외된 이슬람 과학도 짚어줍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학자라면 꼭 배워야 할 국제어가 이제는 아랍어라고 하네요.
『 15세기 유럽의 화학 혁명, 다시 말해 유럽의 과학 기술적 혁신을 진보로 간주할 수 있을까? 유럽인들은 대포와 범선을 개발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든 것을 '발견의 시대' 또는 '탐구의 시대'라고 자평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착취와 수탈의 시대', '인종학살의 시대'라고 불러야 옳다.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과학기술의 방향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켰는가? 』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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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동양과학사는 제대로 접하지 못했던 터라 특히 집중해서 읽었어요. 흔히 알고 있는 기, 음양오행이란 개념이 동양과학 전통에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고요. 서양과학과 비교하면 단순하고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던 동양과학의 새로운 발견~ 특히 세계 4대 발명품인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모두 고대 중국에서 발명해 이후 세계사 흐름이 크게 변하게 된 상관관계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조선 세종시대의 과학 기술 성과도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슬람과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세종시대 업적. 하지만 왕이 주도했던 궁정과학의 한계로 결국 세종 이후 우리나라 과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단편적 사실을 파헤치는 것은 물론 각종 과학혁명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를 보여주고, 유럽중심주의 시각으로만 접했던 과학사를 되짚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책 <보스포루스 과학사>.
인간의 역사는 물론 지구, 우주의 역사는 대부분 과학사에 해당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더욱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과학은 이제 생명윤리문제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과학기술로 인간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 이용된 사례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역사의식과 문제의식, 그리고 인간이 우주와 자연을 해석하고 물리적 지배력까지 획득하게 된 과정을 다룬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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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인문학 시리즈(미술사, 전쟁사, 영화사, 의학사, 여성사, 문학사,철학사, 경제사 출간예정)중에서 첫번째로 과학사를 만나게 되었다. 과학에 대한 다양하나 에피소드위주보다는 깊이 있게 과학에 접근한 집약판 서적이다. 학교 다닐때 그나마 과학 점수가 좀 좋았던 기억이 난다. 과학하면 어렵다는 인식부터 떠오르지만 아무튼, 학창시절에 과학점수가 왜 그런지 좋았다. 과학 하면 발명이나 설험실이 떠오르지만, 과학분야는 인류의 기원과 삶을 다루는 철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 불을 사용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배경도 과학적인 해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인류가 농삭를 짓기 시작한 배경은 기후가 변하면서 수렵, 채집의 한계가 오자 선택이 아니라 농사는 필수의 생존요건이 된 것이다. {‘보스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르는 세계에서 가장 좁은 터키의 해협으로,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많은 문물이 교류되었던 곳이다. 330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연안에 수도를 세운 뒤 기독교와 이슬람의 수많은 제국들이 이곳을 통해 전쟁과 교류를 반복했고,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현재도 많은 동서양의 문물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나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의 발전은 서양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걸로 알고 있지만 중국을 비롯한 동양도 과학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과학의 발원지다.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의 과학을 눈부시게 발전시킨 분이시다. 과학은 단순히 발명을 한다는 단원적인 의미를 떠나서 인류의 생성과 살아야하는 본질적인 문제와도 연결이 되면서 다방면으로 넓고 고르게 발을 뻗히고 있다. 과학을 알면 우리 인생을 좀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나아가서 삶의 본질의 의미도 성찰해 볼 수 있다. 전문적이고 스케일이 큰 과학서적이다.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정보가 담겨 있으며 한 권으로 많은 과학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그 동안 과학에 대해서 단순히 하나의 과목정도로 인식한 나의 안목에 큰 파장을 던진다. 루시라고, 이번에 스칼렛 요한슨, 최민식 주연의 영화제목인데 아마도 그 영화 제목도 루시(유인원)에서 인용한 듯 하다. 코페르니쿠스, 뉴턴, 갈릴레이등의 유명한 과학자에 대한 삶과 업적도 다루고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완벽한 존재이기전에 한 사람의 사림이었다. 과학은 기계문명이라는 개념을 뛰어 넘어 인간답게 사는법, 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성찰할 수 있는 실존적인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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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우선 이 책의 기회 의도부터 읽어야 한다. 이 책은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 중의 하나이며, ‘보르포루스’라고 하는 그렇게 낯이 익지 않은 간판을 달고 있어서다. 기획 의도는 책날개에도 적혀 있고, ‘기획의 글’이라고 두 페이지를 할애하고도 있다. “보르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이다.
이 해협을 통해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풍요롭게 했듯이, ‘보스포루스
인문학’은 인문학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인간과 문화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나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문학’의 책이며, 어떤 경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잇고, 그 사이를 넘나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쓴 책이란 얘기다. 우선, 과학사를
‘인문학’의 분야에 넣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인문학은 굉장히 애매한 상황 같은데, 도서
시장에서는 유행 같은 분위기를 타고 있지만 현실의 학문에서는 여전히 찬 기운만 돌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사가 인문학이라는 것은, 당연히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어쩌면
유행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지이지는 않더라도 인문학의 지평이 내 근처까지 온 거라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경계를 넘나든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경계가 무엇인지 기획 의도의 글만을 가지고는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다. 동서양이라는
경계인지(보스포루스 해협처럼), 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two culture) 사이의 경계인지, 아니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인지, 상식과 진실 사이의 경계인지... ‘기획의 글’을 보면 그 경계가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경계를 의미하는 듯 써 있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으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책을 읽으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혹은 그 경계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학사에서
동양의 과학사를 서양의 과학사만큼 풍부하게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동양, 그러니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이슬람을 포함하는 지역의 과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유럽의 과학보다 훨씬 앞선 수준을 보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술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앞선 과학 수준을 지니고 있었더라도 얼마만큼 그것이 연구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서술의 수준과 양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동양과 서양의 과학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인식을 바꾸고자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연구라는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그 관계는 기울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니 과학사를 서술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목적, 서양 과학 발달의 의미를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우리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와는 전혀 방향성이 다른 과학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을 가진 책의 입장에서는 무척 불리한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현재
과학(science)라고 불리는 학문이 우리, 혹은 동양의
입장에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역사에 정의되어 우리에게 이식된 것이다 보니 처음부터 조건이 다르다. 그러다보니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과학혁명, 현대의 급격한 과학의 발전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서양의 것부터
쓸 수 밖에 없으며 동양의 것은 어쩔 수 없이 부록처럼 들어가는 수 밖에 없어져 버렸다. – 이 책의
서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연구의 수준이 그렇고 상황이 그렇다. 저자도 서양의 과학혁명이 중국에서 왜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질문 자체가 굉장히 서양중심적인 질문이라고 쓰고 있다. 서로 다른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것을 같은 기준에서 평가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잣대는 하나로 통일되어버렸기 때문에 몹시 불공평해진
것이다.
저자의 애로는 서양의 과학의 발달을 얘기할 때는 큼지막한
주제를 가지고 커다랗게 쓸 수도 있고, 한 과학자의 삶에 대해 소상하게 밝힐 수도 있지만, 동양, 우리나라의 과학을 얘기할 때는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것들이지만) 통상 과학이라 불리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 하고, 위대한 과학자의 삶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밝히지 못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애쓴 흔적을 인정해줘야만 하는데, 이런 노고 때문에 그나마 책이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균형을 잡을 수 있었고, 기획 의도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획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저자는 서양의 과학에
대해서, 과학의 이용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특이한 점은, 각주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린이, 청소년 대상 책은 아닌듯 싶은데 이렇게 각주를 아낀 것은 읽는 데 좀더 편하게 할 수는 있지만, 저자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그러니까
좀 덜 과학적이란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인데, 아무리 읽는 속도를 위해서이겠지만, 특히 ‘과학사’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려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많은 장이 어떤 책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런 책들이다. 로버트 템플의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까치) 주경철의 『대항해의 시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의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제임스 글릭의 『아이작 뉴턴』(승산) 오민영의 『청소년을 위한 동양과학사』(두리미디어) 로버트 B. 마르크스의
『다시 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코나투스) 데이비드 크리스천, 밥
베인의 『빅 히스토리』(해나무)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지식을 만드는 지식) 최무영의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이 책들은 저자가 그 장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더
잘 나타내주기도 하고, 각주가 거의 없는 이 책에서 더 읽을거리를 소개하고 있다. 좀 더 체계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은 있지만, 그래도 이것이 어디냐
싶다.
(2014.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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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책제목이 너무나 어렵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보스포루스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과학사를 과연 읽어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포루스란 것이 무엇이길래...사람인지 사조인지 알수 없는 이 뉘앙스.... 책 날개에서 말하고 있다.
보스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육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으로 이 해협을 통해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풍요롭개 했다고 하닌 우리도 이러한 인문학을 통해 많은 발전들을 이루어는데 그중에 과학사만 접할수 있는 것이 아닌 융합적으로 함께 접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다각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볼수 있는 책으로 구성되었다.
아시아쪽의 과거의 과학은 주로 정신적인 사상이 대두가 되어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호와 문명이라는 틀을 가지고 다양한 대약진을 보면서 이슬람의 과학부터 우리나라와 접한 중국의 과학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세종시대의 과학문화유산까지 접하면서 결코 유럽권에 비해 뒤지지 않는 과학사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유럽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어찌 활용을 해서 혁명적이 이야기를 구성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부터 지금까지의 현대과학기술을 접하는 원자의 시대부터 식민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접하면서 단순히 공식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어 발전이 되어가는 과학의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가고 있어서
어려운 공식으로 접하는것이 아닌 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이동적인 과학적 접근을 하고 있어서 색다른 과학을 보게 된다.
그냥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좀 더 세분화하면서 연계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라서 어렵지 않게 이해도를 높게 만드는 사진과 정보전달을 하고 있어서 읽어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지만
이책에서는 우리가 아시아속의 과학사를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슬람과 중국 그리고 우리 과학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만들어서 유럽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과학이야기에 다른 이면들을 볼수 있었다.
과학이란 어려운 공학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됭서 좀 더 발전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 탄생된어진 혁명과 같은 이야기란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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