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의식은 현재를 근대라 규정하며 별다른 역사의 고찰과 비판없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주입해 놓은 반공이데올로기의 토대위에 수직으로 종속된 자본주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은 주체가 아닌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역사 속에서 우리는 강대국의 내정간섭을 이겨내지 못했으며 지금의 현실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이야기로 민족분단의 책임이 강대국에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면 거의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투철한 민족적 역사의식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구한말 격변기의 갑오개혁과 더불은 신분제도의 폐지로는 봉건제도의 종말과 자주적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다. 봉건제도의 핵심인 신분제도가 외형상으로는 폐지되었다 하더라고 실질적으로 직권관료들은 관료자본을 통해 개항 이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했으며 대다수의 천민들은 개혁이전과 마찬가지로 계급이동을 하지 못했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간섭 속에서 자주적 개혁의 이상은 무너져 버리고, 지주로 대표되는 유산자들은 외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해갔던 것이다.
일제하에서는 일제의 든든한 지지세력의 확보와 일본 제국주의의 안정된 시장으로서의 공출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안정된 농업경제의 구축을 위해 지주세력을 성장시켰으며 일제라는 든든한 권력의 그늘아래 지주들은 일제를 대신하여 소작들로부터의 수탈을 했다.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속에는 항상 일제로부터, 지주로부터 수탈당하는 민중들이 대부분이었다. 몰락한 소작농들은 농촌의 잉여인구로 전전하다가 일제에 의해 한반도 북부, 만주,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인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노동자라기 보단 노예였고, 소모품이였다. 그 속에서 그들은 투쟁의식을 쌓아가며 일제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반면 지주들은 산미증식계획 아래 토지개간사업의 부담을 소작료로 부담시켰으며 공황에서의 굶주림을 소작농에게 전가시켰다. 공업화가 진행될 당시 지주들은 군수 하청공장의 경영을 자처하며 민족성과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포기했다.
해방 직후 좌익진영은 가장 시급한 과제인 일제청산,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경작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사회제반 시설을 국유화하려 하였는데 일제에 기생하여 성장해온 지주와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는 기득권층들이 해방의 열기에 밀려 좌익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정책을 수용하며 자주국가 건설과 민족자립경제 형성에 합의한 것처럼 보였으나 미군정체제 이후 우익은 지금까지 일궈온 정치적 합의를 일거에 묵살하고 일제에 이어 미군정에 기생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해 갔다. 미군정의 통치아래 민중들은 일제 때 보다 더한 수탈을 경험해야 했으며 미군정은 일제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안정된 지지세력으로써 과거 친일 지주세력을 그대로 집권세력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종전 후에 있어서도 집권한 한민당 일파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이해를 조장하며 경제, 군사원조의 튼튼한 지지기반으로 확고한 집권의 틀을 뿌리내리게 된다
멀게는 봉건시대부터 가깝게는 일제시대부터 형성된 지배와 억압의 관계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집권세력으로 불리우는 그들의 양태에서 민족주의적 노력이나 민중중심의 사고는 없고 외세라는 강력한 힘에 기생하여 기득세력을 유지한다는 권력적 속성은 지금에까지도 일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민중들이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냉전이라는 상황아래 미군정의 원조경제를 기반으로 분단을 고착시켰고 비판세력을 제거하였으며 민중들은 독재의 그늘아래 또다시 수탈당해야 했다
[인상깊은구절] 이처럼 곤혹스러운 환경은 미군 점령이 지속됨에 따라 이에 편승하여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세력의 입지가 넓어져가는 남한의 상황에서 대중의 지지도가 높았던 좌파정치세력에게는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문제를 직시하지 못할 경우 농민에게 이익이 되면서도 생산력 회복의 구체성을 담은 실현 가능한 개혁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점차 고립되어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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